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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알프스에서 온 편지/아르장티에르] 오직 틀림없는 진실만을'

월간산
  • 입력 2007.02.20 13:47
  • 수정 2007.02.23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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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로 바위 드러난 쿨와르에서 기도 라머의 <청춘의 샘>을 읽다

19세기 말에 이미 편안한 관광스타일의 등산은 무가치, 무의미하다며 극한등반을 추구하며 많은 단독등반을 이뤄낸 기도 라머(Guido Lammer·1862-1945)는 아마도 20세기 중반과 그 이후까지도 많은 산악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우리에게 <무상의 정복자>로 알려진 리오넬 테레이의 자서전에만 보더라도 그의 글이 군데군데 인용되어 있다.

아마도 내가 기도 라머의 <청춘의 샘>을 처음 읽은 것은 약 10년 전이 아닐까 싶다. 하여 이 책에 대한 기억이 거의 흐릿해진 상태에서 지난 여름에 우연히 다시 읽고서 결코 한두 번 읽고 말 산악서적이 아님을 느꼈었다. 그러던 참에 지난 연말, 한 해의 마지막 산행에 이 책을 배낭에 넣었다.

아직 초겨울이긴 하지만 이번 겨울은 유독 눈이 적은 편이다. 시즌 초에 개장한 스키장 슬로프가 바닥을 보이긴 처음일 정도니. 이 또한 지구온난화의 한 징후가 아닐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 설질이 좋지 않아 연말이 되도록 스키 한 번 타지 않다가 마침내 스키를 들고 나선다. 아르장티에르(Argentiere) 빙하에 가기 위해서다.

▲ 스키를 신은 채 산장으로 오르고 있는 스위스 산악인 크리스틴.
▲ 스키를 신은 채 산장으로 오르고 있는 스위스 산악인 크리스틴.

언제 보아도 시원스런 아르장티에르 빙하

샤모니를 출발한 버스는 점심을 먹고 스키장으로 향하는 많은 스키어와 보더들을 태운다. 마침 내 옆에 앉은 이는 스노보더다. 내 배낭에 꽂힌 피켈과 산악스키를 보더니 그가 먼저 입을 연다. 어디 가냐고. 하여 아르장티에르(Aig. d'Argentiere·3,902m)의 Y쿨와르를 오를 거라 답한다. 그에게 가봤는지 물으니 자신은 그저 밀리우(Milieu) 빙하로만 올라봤다고 한다. 산이 좋아 샤모니에 13년 전에 왔다는 그는 현재 일종의 청소년스포츠센터인 UCPA에서 스노보더 강사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마침 쉬는 날이라 그래도 설질이 좋다는 그랑 몽테에 간다고. 20분 후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해발 3,200m의 그랑 몽테 전망대까지 함께 오른다.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진 그는 스노보드를 타고 잽싸게 멀어져 내려간다.

▲ 그랑 몽테에서 본 아르장티에르. 정상에서 중앙으로 흐르는 게 밀리우 빙하며, Y쿨와르는 정상에서 오른편 아래로 뻗어 있고, 산장은 우측 암릉 하단에 있다.
▲ 그랑 몽테에서 본 아르장티에르. 정상에서 중앙으로 흐르는 게 밀리우 빙하며, Y쿨와르는 정상에서 오른편 아래로 뻗어 있고, 산장은 우측 암릉 하단에 있다.
화창한 날씨에 그랑 몽테에서 내려다보는 아르장티에르 빙하는 언제 보아도 시원하다. 알피니스트들의 ‘에덴의 동산’이라는 곳답게 빙하 주변으로 수많은 크고 작은 벽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바로 이 빙하의 주인답게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봉우리가 아르장티에르다. 비브람 등산화를 단단히 조여 묶고 전망대 계단을 내려선다.

시즌 처음 타는 스키에, 그것도 스키화가 아닌 등산화를 신고 피켈이나 아이젠 등을 한 짐 가득 짊어지고 크레바스가 있는 빙하 사이로 활강한다는 게 왠지 불안하다. 케이블카 중간역인 로낭(Lognan·1,950m)에서 걸어 아르장티에르 산장(Refuge d'Argentiere·2,771m)으로 갈 걸 그랬나 싶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게 아닌가. 판돈 없이 치는 화투판이 재미없듯 이 정도의 불안은 충분히 흥미로움으로 이어지는 법. 혹시 잘못하여 시즌 초반에 다리라도 다칠지 모른다는 걱정은 출발지점의 급경사면을 약 100m 정도 활강하니 깨끗이 지워져 버렸다. 등산화가 스키화에 비해 발목을 잡아주지 못하지만 무게 중심을 전경과 중경에만 적절히 안배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음을 간파한 셈이다.

그랑 몽테에서 내려오는 블랙 스키슬로프에서 벗어나는 지점에 두 명의 산악인이 한 짐씩 가득 짊어지고 안자일렌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 또한 아르장티에르 산장으로 가기 위해 크레바스 지대를 가로질러야 하기에 이렇게 스키를 타면서도 안자일렌을 하고 있다. 남녀 한 쌍인 이들 둘을 뒤따른다. 익히 아는 길이지만 그들을 사진기에 담으며 내려간다. 산악스키화에 제대로 된 스키를 갖춘 그들을 따라잡기가 쉽지는 않다. 적설량이 적어 다음날 등반을 위해 등산화를 신고 왔던 건데, 스키화에 비해 활강이 무척 불편하다. 급기야 설질이 불규칙한 사면에서 한바탕 나뒹굴고 만다.

온통 뒤집어 쓴 눈을 털고 빙하에 내려서니 먼저 내려온 둘이 스키에 실을 부착하고 있다.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온 남자의 이름은 오렐, 여자는 크리스틴이라며 연말 휴가로 보다 가까운 그린델발트 대신 이곳에 왔다고 한다. 이제부터 빙하를 따라 오른다. 완경사 사면을 스키를 밀듯 끌며 나아간다. 왼편으로 베르트, 드루아트, 쿠르트 등의 거벽을 배경으로 빙하를 따라 오른다. 한 30분 올라 우리는 방향을 튼다. 산장이 있는 아르장티에르 언저리로 빙하를 비스듬히 건넌다.

▲ 왼편 모레인 지대에 위치한 산장을 향해 빙하를 가로지르고 있다.
▲ 왼편 모레인 지대에 위치한 산장을 향해 빙하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제 해가 지고 있어 저녁놀이 막 물들기 시작한다. 드넓은 설원에서 맞이하는 풍경이라 더욱 멋지다. 모레인 언덕 두 개를 넘고 오르막 사면을 약 10분 올라 아르장티에르 산장에 닿았다. 2시간 걸렸다. 이미 몇몇 산악인들이 먼저 와 있다. 그들 모두 연말을 산에서 보내기 위해 와 있다. 그들 또한 산장에 들어가는 대신 발코니에서 저녁놀에 물드는 빙하 주변의 풍광을 즐긴다. 하루의 산행 후 이렇게 산장에서 맞이하는 황혼녘의 시간만큼 마음 편할 때가 있던가. 붉게 타오르는 하늘을 배경삼아 우뚝 솟은 침봉들은 그저 다음날 등반대상지일 뿐, 결코 이 순간의 평화를 방해하지는 않는다.

차츰 빙하에 어둠의 장막이 내리자 하나둘 산장으로 들어간다. 산장지기는 없다. 대신 동계에 산악인들을 위해 침상과 주방을 개방해둔다. 7,8명의 산악인들이 열심히 버너로 눈을 녹이고 있다. 쏴아 하며 내뿜는 가스버너의 불길 소리뿐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휘발유 버너, 특히 석유버너의 요란한 소리는 듣기 힘든 추억이 되어버렸다. 

보온병에 넣어온 뜨거운 물이 넉넉하여 버너를 켜지 않고도 준비해간 저녁을 충분히 먹는다. 이제 이곳 생활에 익숙해져 빵에 치즈를 꽂은 샌드위치만으로도 족하다. 찬 기온에 굳어진 저녁을 먹으며 함께 산장에 온 오렐, 크리스틴과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 중 내가 내일 오를 코스가 아주 경치가 좋기에 함께 가지 않겠냐고 하니 그들은 그저 빙하 위로 산악스키를 탈 예정이라 한다. 그들이 오르는 모습을 사진기에 담고 싶어 은근히 함께 가길 원했지만 오히려 호젓한 산행이 더 좋지 않냐며 더 이상 권하지 않는다.

신토불이 식습관 권한 기도 라머

산장으로 올 때 찍은 사진을 보내주겠다며 오렐의 이메일 주소를 받아들고 침상으로 향했다. 알피니스트를 위해 2개의 침실이 개방되어 있는데, 오렐과 같은 방에 짐을 푼다. 이제 초저녁인 저녁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 가져간 <청춘의 샘>을 펼쳐들 수밖에-.

담요를 3장이나 뒤집어쓰고 랜턴을 비추며 페이지를 넘긴다. 거의 한 세기 전의 산악인이었던 기도 라머. 오스트리아 태생의 그가 올랐던 산들은 이곳 몽블랑 산군과는 꽤나 멀리 떨어진 지역에 위치해 있다. 쉽게 가볼 수 없는 그가 올랐던 산들 중 눈에 익은 산이 보인다.

사진까지 실려 있는 그로스 글로크너(Gross Glockner·3,798m)이다. 8년 전 필자가 올랐던 산이다. 이후 계속해서 페이지들을 넘기다보니 어느덧 저녁 8시가 되었다. 산서를 읽으며 지친 시신경의 피로도 풀 겸 찬 실내공기에 갈증이나 그동안 체온으로 데워진 담요를 박차고 나왔다. 주방에는 머리까지 담요를 두른 몇몇이 차를 마시고 있고, 오렐과 크리스틴은 이제 막 저녁을 먹은 듯 식기를 정리하고 있다.

눈을 뜨기 위해 삽을 들고 나오니 별들이 총총하다. 겨울날씨치곤 춥지 않지만 어깨를 움츠리게 하여 곧장 한 코펠 가득 눈을 퍼 들어온다. 가스버너의 화력을 최대한 높인다. 2시간 이상 주방에 있던 이들은 하나둘 침실로 향한다. 담요를 뒤집어쓴 채 끝까지 남은 이들은 영국인 남녀다. 그들은 나에게 어디 오를 것이냐고 묻고서 지난해에 아르장티에르 정상부에서 두 명이 죽었으니 조심하라고 한다.

어느 정도 녹은 물을 깨끗한 코펠에 옮겨 끓인다. 눈 녹인 물이라 이렇게 끓여도 약간의 찌꺼기가 남는다. 여기에 홍차를 우려내어 마신다. 조금 전까지 있던 두 영국인도 침실로 가 주방은 조용하다. 또다시 <청춘의 샘>을 펼쳐든다. 태양열로 충전하는 실내전등은 너무 침침하다. 5년 전 가을에 이곳에 와 소설책을 읽을 땐 꽤나 밝았었는데, 그 후 한 번도 형광등을 갈지 않았는지 잔뜩 때가 묻어 있다. 또한 약 10분마다 버튼을 눌러줘야 점등이 되기에 흐릿한 형광등을 포기하고 헤드랜턴에만 의지한다. 

이미 읽은 내용이지만 또다시 라머에 빠져든다. 등반에 대한 그의 순수한 사상이나 열정 외에도 이 책을 몇 번이나 읽어도 싫지 않을 요소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등산에 테일러 시스템과 같은 과학적인 사고를 접목시킨, 무려 한 세기나 앞선 산악인의 생각들이 오늘날에도 전혀 그르지 않게 여겨진다.

한 예로 산악인의 식생활에 대해 그는 신토불이식을 권한다. 그리고 제철 과일과 자연식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비교적 장수한 기도 라머처럼 평생 산을 즐기기 위해선 너무나 편한 오늘날의 가공식품은 배제하는 게 바람직하겠다. 필자가 이곳에 오는 젊은 산악인들에게 한 번씩 당부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인체 소화기관의 연비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 또한 라머의 생각과 연관이 있다고 여겨진다.

밤 12시가 조금 넘어 침상으로 향했지만 깨어보니 새벽 3시밖에 되지 않았다. 건너편 침상에 누운 오렐과 크리스틴은 꼼짝도 않고 있다. 저들은 몇 시에 일어나려나 생각하면서 담요를 한 장 더 덮는다. 넉 장의 담요가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1시간쯤 누워 있다가 발이 시려 일어난다. 어깨 위로 잔뜩 담요를 끌어당겼으니 발이 밖으로 나올 수밖에. 빈 침상에 남는 것은 담요뿐이기에 두 개를 더 가져와 발쪽에 하나, 어께에 하나씩 더 덮는다. 총 여섯 장의 담요를 포개 덮었으니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래도 추운 것보다는 낫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설핏 잠이 든다. 언뜻 눈을 떠 시계를 보니 5시 반이다. 그동안 데워진 담요의 유혹이 컸지만 잽싸게 담요를 걷어찬다. 서둘러 담요를 접어놓고 주방으로 나온다. 눈을 녹여 차를 만들며 산행을 준비한다. 간단히 빵 하나를 먹고 차를 마신 후 산장을 나선다. 새벽 6시가 조금 넘었다. 밖은 아직 어둠에 싸여 있다.눈이 부셔도 고글 꺼내 쓸 여유가 없다

랜턴을 밝히며 모레인 언덕을 오른다. 눈이 적어 온통 돌이 드러나 있다. 아이젠이 돌을 긁는 소리뿐이다. 오르막이 불편하다. 그래도 적막한 이 시간이 싫지 않다. 오히려 이런 시간을 갖기 위해 혼자 오지 않았던가. 차츰 오를수록 눈이 많아지지만 설사면에 발이 빠져 힘겹다. 8년 전에 올랐던 Y쿨와르, 그 때는 사면이 단단히 얼어 쉽게 접근했던 기억에 지금은 왜 이리 힘들지 라는 생각뿐이다.

2시간 가까이 올랐을 즈음, 해가 뜨기 시작한다. 마침내 아르장티에르 빙하가 서서히 잠에서 깨어난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침봉들 위로 아침놀이 물들기 시작한다. 멋지다. 8년 전에는 눈보라로 하나도 즐길 수 없었던 경치다. 열심히 카메라에 담으며 계속해서 발걸음을 위로 옮긴다. 2시간 반이나 걸려 마침내 Y쿨와르 초입이다.

▲ 여명에 깨어나고 있는 아르장티에르 빙하의 거벽들. 왼편부터 쿠르트, 드루아트, 베르트 등.
▲ 여명에 깨어나고 있는 아르장티에르 빙하의 거벽들. 왼편부터 쿠르트, 드루아트, 베르트 등.

보온병의 물 한 잔을 마시며 등반을 준비한다. 워킹 스틱을 접어 넣고 양손에 피켈을 든다. 출발이다. 크레바스가 있는 설계부분을 조심스럽게 지나 10m 정도 드러난 바위를 오른다. 눈이 적어 그만큼 많이 드러난 바위구간이 잔뜩 신경 쓰인다. 예전에는 이렇게 어렵지 않았는데 라며 드라이툴링을 하듯 피켈로 바위를 할퀴며 오른다. 이후 완사면의 설사면이 펼쳐져 있다. 난이도는 없지만 러셀하며 오르려니 힘겹다. 태양은 차츰 떠오르지만 아직 쿨와르에는 닿지 않았다.

이윽고 중단부인 Y쿨와르 갈림길이다. 예전에는 왼편으로 간 기억이 있어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직상하기로 한다. 한데 오를수록 도중에 바위구간이 많이 드러나 있다. 여간 신경 쓰이지 않는다. 한번이라도 미끄러지면 끝장이다. 차츰 태양이 쿨와르에 닿아 눈이 부시지만 배낭을 벗어 고글을 쓸 여유가 없다.

거의 쉬지 않고 3시간을 오른 후에야 정상부 능선에 닿았다. 이미 정오가 지난 시각이다. 마침 배낭을 벗어 쉴 만한 장소가 나왔다. 새벽에 빵 한 조각만 먹고 출발한 터라 허기진 배를 채운다. 아직 갈 길이 멀어 발걸음을 재촉한다. 남동능선에 올라서니 마터호른쪽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훨씬 너머로는 약 100년 전에 기도 라머가 활동한 오스트리아쪽 산군이 자리 잡고 있을 터.

▲ 커니스가 형성되어 있는 아르장티에르 정상. 저 멀리 베르너 산군과 발리스 산군이 보인다.
▲ 커니스가 형성되어 있는 아르장티에르 정상. 저 멀리 베르너 산군과 발리스 산군이 보인다.

20분 후 마침내 정상이다. 생각보다 힘들게 오른 셈이다. 배낭을 벗어놓고 주변을 둘러본다. 이제는 몽블랑이나 그랑 조라스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반대편 저 멀리 융프라우가 있는 베르너 산군과 마터호른이 있는 발리스 산군이 자그마하게 눈에 들어온다.

커니스가 형성된 정상부 설릉을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하산은 밀리우 빙하로 잡는다. 정상부의 약 300m 설사면이 만만치 않다. 곳곳에 강빙이 드러나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프런트포인팅 자세로 클라이밍다운을 하니 꽤나 시간이 걸린다. 이윽고 빙하 중단부의 완사면이다. 다리에 힘도 풀려 글리세이딩을 하는데, 몇 십m쯤 속도를 내며 미끄러지다가 혹 있을지 모를 크레바스의 두려움에 피켈로 제동을 건다. 하지만 이미 가속이 붙은 터라 몸은 멈춰지지 않는다. 거의 100m 이상 굴러 내린 후에나 멈췄다. 온 전신에 눈을 뒤집어쓴 꼴이 말이 아니다. 털썩 주저앉아 우선 얼굴에 묻은 찬 눈부터 털고 닦는다.

아직 마음을 놓을 때가 아니다. 하단부의 크레바스 지대를 무사히 통과해야만 한다. 바짝 긴장하며 또다시 1시간 정도 걸어 내린 후에야 아르장티에르 산장이 보이는 언덕이다. 힘겹게 산장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넘었다. 마침 오렐과 그의 여자친구도 아르장티에르 빙하 상단으로 산악스키를 하고 돌아오고 있다.

하루 내내 작은 보온병의 물만으로는 부족해 목이 탔지만 눈을 녹여 마실 여유도 없이 사물함에 두었던 <청춘의 샘>이나 식기류 등을 챙긴다. 책의 두께가 얇아 하룻밤 사이에 다 읽을 요량으로 가져왔지만 2/3밖에 읽지 못했다. 샤모니에 내려가 마저 읽기로 하고 춥고 무거운 담요 아래에서 하룻밤 더 지새기 싫어 어둠이 막 내리기 시작하는 아르장티에르 빙하를 스키로 급히 내려온다. 표고차 1,500m를 쉬지 않고 내려와 버스정류장에 이르니 이미 어둑어둑하다.

샤모니의 숙소로 돌아오자 탈수증에 시달려 밤새 물을 들이키며 못다 읽은 <청춘의 샘>을 뒤적인다. 뇌리에 새겨지는 라머의 글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에필로그에서 등반의 기록과 진실에 대해 말한다. '필자는 과장이나 가식이 없이 순수하게, 그리고 자기 나름의 독자성을 갖되 통속적 대중적인 인기를 구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알피니스트들은 얄팍한 잔재주를 부려 속임수를 쓸 수는 없으며, 내용과 형식에서 오직 틀림없는 진실만을 표현해야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에게도 낯이 뜨거워지고 고개가 숙여지는 따끔한 일침이다.

허긍열 한국산악회 대구지부 회원·www.goalp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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