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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알프스에서 온 편지/레쇼빙하] 파트너 선택은 루트 선택만큼이나 중요하다

월간산
  • 입력 2007.04.02 17:26
  • 수정 2007.05.01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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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에서 레뷰파의 <별빛과 폭풍설>을 읽다

해가 한껏 떠오른 오전 10시, 그랑 조라스의 그림자가 몽 말레 빙하에 드리워져 있다.
해가 한껏 떠오른 오전 10시, 그랑 조라스의 그림자가 몽 말레 빙하에 드리워져 있다.

칠흑 같은 밤하늘의 영롱한 별빛과 한낮의 거센 폭풍설만큼 알피니스트의 야성을 일깨우는 요소는 드물 것이다. 고요한 밤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며 알피니스트는 생각한다. 자신이 올라와 있는 이 산정과 자연, 그리고 인간인 자기 자신에 대해. 또한 휘몰아치는 폭풍설뿐 아니라 앞으로 자신의 인생행로를 가로막고 있는 수많은 장애들을 헤쳐나갈 자신이 있냐고.
이러한 별빛과 폭풍설에 연관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가스통 레뷰파(Gaston Rebuffat·1921-1985)다. 산을 인생의 무대로 삼고 산 수많은 산악인들 중에서 레뷰파만큼 그 무대에서 멋있고 화려한 연극을 펼친 인물은 드물다. 근대 알피니즘의 전도사였다고나 할까.

책을, 산악서적을, 그것도 가스통 레뷰파의 <별빛과 폭풍설> 같은 산서를 여러 번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말인즉, 서로 다른 번역자가 같은 원서를 따로 번역한 책이 두 권인 경우, 같은 번역서를 다시 읽는 거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오른편에 드류와 에귀 베르트가 보이는 가운데, 에불르망 정상에서 하산하고 있다.
오른편에 드류와 에귀 베르트가 보이는 가운데, 에불르망 정상에서 하산하고 있다.
내가 레뷰파의 <별빛과 폭풍설>을 처음 읽은 것은 아마도 1980년대 중반, 한창 산의 세계에 빠져들던 때였다. 이 때 펼쳐든 책은 1975년에 한국산악회에서 발행한 손바닥 크기의 포켓북이었다. 다행히 이 책은 계속해서 나의 수중에 있게 되어 이곳 알프스까지 함께 하게 되었다. 휴대가 편해 몇 년 전의 산행에 한번 가져가본 적이 있다. 내가 읽은 또 다른 <별빛과 폭풍설>은 1991년에 평화출판사에서 발행한 책이다. 물론 이것은 보다 후에 출판되어 교과서 크기의 가로쓰기라 읽기가 한결 수월했다.

얼마 전이었다. 숙소에 있는 이 두 권의 책을 처음엔 페이지마다 대조해 가며 읽어볼 생각으로 도전했지만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포기했다. 문장들의 차이를 비교해볼 열정이 식었기도 하지만, 나 또한 여러 권의 산서를 번역해본 입장에서 번역의 실수를 따져보느니 그저 책을 즐겁게 읽는 게 우선이지 않겠냐는 생각이 컸다. 하여튼 이번 겨울에 큰 판형의 <별빛과 폭풍설>은 숙소에서, 작은 판형은 산에서 읽게 되었다.


겨울철에 열어두는 산장의 윈터룸

자연히 겨울이 한창인 2월 중순에 레쇼 빙하(Glacier de Leschaux)에 갈 때 작은 판형의 <별빛과 폭풍설>을 배낭에 집어넣게 되었다. 2월 중순의 설날이었다. 한국의 열혈 산악인들 또한 설날이라 하여 산으로 향하지 않을 이가 드물 터, 더구나 먼 이국의 알프스 자락에 있는 나에겐 명절일수록 더욱 산으로 향하게 된다. 고향생각을 덜 하게 되기도 하지만 산에 오르기 위해 이곳에 와있음을 새삼 자각하기 위해서다.
마침 설 연휴를 이용해 샤모니를 찾은 원대식 선배(우정산악회)와 함께 레쇼 빙하로 향했다. 몽탕베르(Montenvers) 행 산악열차는 톱니바퀴 선로 위를 구르며 천천히 고도를 높였다. 발아래 펼쳐진 낯익은 샤모니 계곡에는 구름이 잔뜩 머물러 있었다. 산악열차는 30분만에 몽탕베르 전망대에 많은 관광객들을 부려놓는다. 이곳 또한 하늘이 잔뜩 흐려 있어 건너편의 드류(Dru)뿐 아니라 주변의 웬만한 침봉들은 구름에 가려 있다.
곧 메르 데 글라스(Mer de Glace)에 내려서서 배낭을 고쳐 메고 빙하를 거슬러 오른다. 초반의 모레인 지대는 가져간 설피가 필요 없을 정도로 눈이 깊지 않다. 30분쯤 걸어 오르자 발목 이상 눈이 빠진다. 배낭에 짊어진 설피를 신을 때 눈이 내린다. 날씨가 이렇다 보니 발레 블랑쉬(Vallee Blanche)를 경유하여 메르 데 글라스를 타고 내리는 스키어들은 거의 없다. 한두 스키어들만 잔뜩 짐을 지고 빙하를 거슬러 오르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스쳐간다.

에불르망 정상에 이르는 쿨와르 하단부. 겨울철엔 그랑 조라스 북벽에 해가 전혀 닿지 않는다. / 어둠이 내리기 전 좌측의 프티 조라스와 우측의 그랑 조라스를 배경으로 레쇼 빙하를 내려온다.
에불르망 정상에 이르는 쿨와르 하단부. 겨울철엔 그랑 조라스 북벽에 해가 전혀 닿지 않는다. / 어둠이 내리기 전 좌측의 프티 조라스와 우측의 그랑 조라스를 배경으로 레쇼 빙하를 내려온다.

이윽고 레쇼 빙하가 보다 큰 메르 데 글라스에 가로막혀 형성된 모레인 지대에 이른다. 작은 모레인 언덕 몇 개를 넘어섰을 때다. 저 멀리서 두 명의 스키어가 내려오고 있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다름 아닌 필립이다. 지난 연말에 아르장티에르 빙하에 갈 때 만난 이후 시내에서 한두 번 더 마주쳐 이젠 친하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레쇼 빙하 상단에서 산악스키를 하고 내려오는 중이란다. 반갑게 악수를 나눈 후, 우리는 행운을 빌며 헤어졌다.
모레인 지대를 벗어나 접어든 레쇼 빙하의 눈은 깊었다. 설피가 없다면 레쇼 산장(Refuge de Leschaux·2,431m)에 닿을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다. 또다시 1시간 정도 빙하 위 눈밭을 걸어 오른다. 그동안 내리던 눈도 그쳤다. 이제 빙하가 그랑 조라스 북벽으로 방향을 틀기 전의 좌측 언덕에 위치한 산장 아래에 닿았다. 누군가가 노란 텐트를 쳐놓았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이런 날씨에 등반은 못할 테고 사전답사나 빙하 트레킹을 간 모양이다.

빙하 위 약 100m 지점의 바위사면에 위치한 레쇼 산장에 닿기 위해선 보통 철사다리가 있는 왼편에서 올라야 하지만, 겨울철, 특히 눈이 많을 때에는 눈사태 위험 때문에 산장 우측의 화장실쪽 작은 쿨와르로 올라야 한다. 쿨와르 하단에 설피와 스키 스틱을 벗어둔 우리는 설사면을 올라 시멘트로 새롭게 지은 화장실 아래의 바위사면으로 오른다. 바위턱에는 고정로프가 설치되어 있어 어렵지 않다. 그러나 바위턱을 넘은 다음의 가파른 사면에 설치된 쇠줄이 눈에 묻혀 있어 조심스럽다.
이윽고 산장이다. 약 5시간 걸렸다. 겨울철에 산악인들을 위해 개방해두는 윈터룸은 그랑 조라스쪽인 우측만 개방되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무도 없다. 침상 12개가 준비된 작은 공간에는 각종 식기와 산악인들이 남겨둔 식량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산장 입구의 눈을 퍼 녹이는 사이에 원대식 선배는 빗자루를 들고 우리가 털어낸 눈을 쓸어낸다.


가이드 직업 통해 어른으로 성장했다고 고백

오늘은 우리 외에 산장에 아무도 없으려나. 차를 마시며 창밖을 보니 구름 사이로 날이 개고 있다. 철문을 열고 산장 밖으로 나와 보니 하루 내내 모습을 감추고 있던 그랑 조라스(Grandes Jorasses·4,208m) 북벽이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한편 레쇼 빙하 아래로 저 멀리 펼쳐져 있는 샤모니의 침봉들 너머로 저녁놀이 물들고 있다. 정다운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풍경이다. <별빛과 폭풍설>의 저자 가스통 레뷰파 또한 이런 풍경들을 수없이 지켜봤을 터.
이 때다. 빙하의 고요한 풍경에 파문을 던지듯 두 명의 알피니스트가 안자일렌을 하고서 눈밭에 줄을 그으며 내려오고 있다. 잔뜩 지친 그들의 발걸음은 느리기만 하다. 한참만에야 그들은 산장 아래 빙하에 쳐둔 자신들의 거처로 찾아들었다. 곧 어둠이 내렸다. 이로써 더는 산장에 올 사람이 없다. 둘만의 오붓한 저녁시간을 맞는다. 준비해간 음식으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나니 6시가 조금 넘었다.
둘뿐이라 그런지 가만히 있으니 실내가 꽤나 추워 일찍 침상에 든다. 맞은편 침상에 오른 원대식 선배는 지고온 침낭에 들어가고 필자는 위 침상에 있던 담요까지 끌어내려 6장이나 덮는다. 담요 6장의 무게가 어깨를 불편하게 하지만 추운 것보단 낫다.

이제부터 <별빛과 폭풍설>을 펼쳐들 시간이다. 랜턴 불을 밝히며 문고판 책을 넘긴다. 색 바랜 누런 종이에 세로쓰기의 깨알 같은 글씨들이지만 긴긴밤을 보내기에 그만인 독서다. 바로 이 레쇼 산장에서 레뷰파는 <별빛과 폭풍설>의 첫 등반대상지인 그랑 조라스 북벽 등반을 준비했다.
북벽의 워커 버트레스와 중앙 버트레스를 오르는 레뷰파의 이야기를 접하자 20대 후반에 필자 또한 올랐던 바로 그 두 루트에 대한 생생한 추억이 되살아난다. 산악인이 산서를 읽는 즐거움이다. 이렇게 그랑 조라스 북벽에 빠져 약 2시간을 보내다보니 침침해진 눈과 갈증을 달래기 위해 따뜻한 담요를 박차고 일어난다. 차 한 잔 마신 후, 육중한 산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어깨를 움츠리게 하지만 가슴은 뜨겁기만 하다. 초저녁의 짙은 구름은 빙하 아래로 포복하고 있고, 그 위로 그랑 조라스 북벽의 거대한 장벽이 위엄 있게 펼쳐져 있다.
1,200m 높이의 거벽이 1,500m 넓이로 펼쳐져 있는 그랑 조라스 북벽은 오늘날에도 그 코스의 다양성과 곤란함으로 무수한 알피니스트들을 유혹하고 있다. 지난 1세기 동안 이 시대 최고의 알피니스트들 치고 이 북벽을 거치지 않은 이는 드물 것이며, 요즘의 최고 산악인들 또한 여전히 이 북벽을 오르고 있다. 이렇듯 이 북벽은 알피니스트로 거듭나기 위한, 자신의 한계를 한 단계 올리는 시험무대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현재 약 30개 루트가 개척되어 있는 이 북벽은 아직도 개척의 여지가 많다.

달이 없어 그랑 조라스 북벽은 더욱 검고 크게 보였으며, 그 위로 점점이 박혀 있는 별들은 다투듯 빛을 발하고 있었다. 놓치기 싫은 밤의 아름다움이다. 카메라를 두 대나 가져왔건만 삼각대를 준비하지 않아 그저 뇌리에 박아두는 것으로 만족한다. 레뷰파 또한 이런 아름다움을 수없이 대면했을 터. 한밤중에 산장 밖으로 나와 다음날의 등반을 위해 구름의 흐름과 바람의 세기, 대기의 온도 등을 확인하며 밤의 정적을 즐겼을 그를 생각한다. 

레쇼 산장 아래의 설사면을 오르는 원대식 선배. 뒤로 레쇼 빙하와 저멀리 샤모니 침봉들이 펼쳐져 있다. / 에불르망 정상부 바위지대를 조심스럽게 내려가고 있다. / 레쇼 산장. 겨울철에 개방해두는 윈터룸은 오른쪽.
레쇼 산장 아래의 설사면을 오르는 원대식 선배. 뒤로 레쇼 빙하와 저멀리 샤모니 침봉들이 펼쳐져 있다. / 에불르망 정상부 바위지대를 조심스럽게 내려가고 있다. / 레쇼 산장. 겨울철에 개방해두는 윈터룸은 오른쪽.
알프스 최고의 가이드 중 한 명이었던 가스통 레뷰파는 가이드라는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러워했다. 이 지구상에서 그래도 덜 오염된 알파인 청정지역에서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이라며. 젊은 혈기만으로 알프스 침봉들을 오르던 청년시절, 그는 가이드라는 직업을 통해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비박으로 산의 신비와 하늘의 무한한 깊이를’

많은 위대한 산악인들과 마찬가지로 레뷰파 또한, 아니 모든 산악인들처럼 어려움 즉, 곤란함과 위험을 구분하고자 했다. 그도 어려움은 좋아했지만 위험은 싫어했다. 최고의 가이드들도 낙석이나 눈사태, 또는 벼락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일이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그저 침상에만 있어야 하는가. 위험은 피하고 곤란은 극복하자는 말을 새삼 되새김질한다.
겨울밤 공기에 차가워진 몸을 움츠리며 산장에 들어온 필자는 곧바로 여섯 장의 담요 밑으로 파고들었다. 기껏 저녁 9시밖에 되지 않아 또다시 <별빛과 폭풍설>을 펼쳐든다. 이제는 스위스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피츠 바딜레 북벽 등반이야기다. 필자 또한 가보고 싶은 곳이지만 아직 기회가 닿지 않았다. 이어 드류 등반으로 페이지가 넘어가자 시간은 자정이 다 되어갔으며 스르르 눈이 감겼다.
2박3일 일정이었기에 급할 게 없던 우리는 아침 7시나 되어서야 일어났다. 쾌청한 날씨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산장을 나선 우리는 조심스럽게 빙하에 내려선다. 설피를 찾아 신고 빙하를 거슬러 오른다. 우리의 등반대상지인 에불르망(Aig. de Eboulement·3,599m)에 접근하기 위해 한동안 그랑 조라스 북벽쪽으로 오르다가 좌측의 프티 조라스(Petites Jorasses·3,650m) 아래로 방향을 튼다. 겨울 찬 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걷는다. 차츰 가팔라지는 설사면을 올라 근 3시간만에 에불르망 아래에 이른다.

우리가 오를 쿨와르 아래의 눈무더기에 설피를 벗어두고 등반장비를 챙겨 오른다. 한껏 떠오른 태양이 프티 조라스 위로 솟아올라 우리가 오르는 쿨와르에 닿는다. 춥지 않아 다행이다. 경사 약 50도의 빙설사면을 확보 없이 오른다. 꾸준히 뒤따르는 원대식 선배 뒤로 레쇼 빙하와 그랑 조라스 북벽의 웅장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산장에서와는 또 다른 위용이다.
쿨와르 중단에 접어들자 배낭에서 자일을 꺼내 함께 묶고 오른다. 이윽고 상단부 바위지대에 이른다. 암각에 슬링으로 확보하며 몇 피치 오르니 정상 능선이다. 꽤나 고도를 높였기에 그랑 조라스 너머로 몽블랑까지 보인다. 능선을 돌아 믹스지대를 한 피치 오르니 마침내 정상이다. 오후 2시가 조금 넘었다. 사방이 트인 멋진 장관이 펼쳐져 있다. 알프스를 처음 찾은 원 선배는 더 큰 찬사를 보낸다.
반 시간 정도 산정에서 한가한 시간을 즐긴 우리는 하산길에 접어든다. 올랐던 쿨와르를 클라이밍다운 한다. 태양은 여전히 우리를 비추고 있다. 설피를 놓아둔 지점까지 무사히 내려오자 해는 우리와 작별을 고하듯 몽 말레(Mont Mallet) 빙하 침봉들 뒤로 숨어버린다. 곧 빙하에 어둠이 내릴 시간이기에 급히 산장으로 향한다. 이 추운 겨울에 비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레뷰파는 ‘산장에서 바로 출발하여 좋은 날씨에만 등반하고 한 번도 비박해보지 않은 사람은 산의 아름다움은 감상할 수 있을지 모르나 산의 신비와 밤의 어둠, 그리고 위로 바라보이는 하늘의 무한한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비박을 찬양하지 않았던가. 

어두워져서야 레쇼 산장에 도착한 우리는 눈이 둥그레졌다. 전날과는 달리 많은 산악인들로 좁은 윈터룸이 만원이었다. 통로의 장비선반에서 겨우 차와 라면을 끓일 정도다. 매트 12장이 모자라 나는 프티 조라스를 오를 프랑스 산악인과 매트 하나에 함께 눕는다. 다음날 등반을 위해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필자는 못다 읽은 <별빛과 폭풍설>을 펼쳐든다.
페이지는 마터호른 북벽부터 시작하여 치마 그란데 디 라바레도와 아이거 북벽으로 이어진다. 필자 또한 학창시절에 올랐던 아이거 북벽의 흥미진지한 이야기를 끝으로 책을 덮으니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다. 에불르망 등반으로 하루 내내 움직여 몸은 피곤했지만 <별빛과 폭풍설>의 감흥 때문인지 좀체 잠이 오지 않는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1시간쯤 더 지난 새벽 2시가 되자 옆 침상에 누운 이들이 하나둘씩 일어난다. 그들이 차를 끓여 아침을 먹고 장비를 꾸리는 분주한 소리에 잠은 달아나버렸다.  

자연히 자일의 정과 파트너의 중요성을 강조한 레뷰파를 회상할 수밖에. 그는 말했다. “함께 등반하는 사람은 산을 오르면서 유쾌하고 또 고통스런 순간들을 같이 맛보고, 잊을 수 없는 많은 순간들을 함께 경험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동반자의 선택은 등반의 선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자일파트너와 나누는 진솔한 인간관계의 즐거움은 등산을 통해 우리가 얻는 가장 큰 소득이 아닐까. 과연 나에게 진정한 자일파트너는 몇이던가.
한편 안나푸르나 초등 원정에 참가한 이후 레뷰파는 알프스를 벗어나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산 세계를 누구보다 충실히 살다간 레뷰파를 생각하면서 이제 이 알프스가 좁게 느껴진다느니, 또 다른 대륙의 멋진 산군으로 옮겨가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필자의 생각이 그저 투정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진정한 산은 다른 어디에 있다기보다는 바로 이곳에, 그리고 자신의 가슴속에 있음을. 이렇게 레뷰파의 <별빛과 폭풍설>은 우리들 가슴에 별빛처럼 영롱하게 폭풍설처럼 매섭게 산의 의미를 되새겨준다.

허긍열 한국산악회 대구지부 회원·www.goalp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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