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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알프스에서 온 편지/투르빙하] ‘어차피 한 번뿐인 그의 삶은 어느 누구보다 강렬하지 않았던가’

월간산
  • 입력 2007.05.04 09:45
  • 수정 2007.05.04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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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를 활강하며 나오미의 <아내여 나는 죽으로 간다>를 생각하다

얼마 전이었다. 필자가 머물고 있는 샤모니 시립도서관에 갔을 때다. ENSA(프랑스국립등산스키학교) 옆에 위치한 이곳에 종종 들러 산악 관련 책들을 뒤적이곤 하는데, 마침 전시회가 있었다. 북극지방에 대한 문화와 생태, 극한상황에 맞서는 인간활동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사진과 동영상으로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었으며, 관련 책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단연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많은 모험가들의 활약상이었다. 요즘의 최고 모험가 마이크 혼(Mike Horn·1966~)에서부터 지난날의 최고 모험가 우에무라 나오미(1941-1984)까지 그들의 책과 함께 소개되어 있었다.

마침 나오미의 <아내여, 나는 죽으러 간다>를 지난번 한국에서 돌아올 때 구해놓고 읽지 않은 터라 불현듯 나오미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물론 아주 오래 전에 그의 또 다른 책들 <내 청춘 산에 걸고>, <안나여, 저게 코츠뷰의 불빛이다> 등을 읽어 그에 대해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터에 이 북극 전시회를 통해 작으나마 그의 발자취를 느껴보는 즐거움을 가졌다. 그린란드 사람들이 생고기를 먹고 개썰매를 끄는 장면이나 북극곰 등등 모든 장면이 우에무라 나오미와 생생하게 연관되었던 것이다.

샤모니와 나오미와의 첫 대면은 아마도 그가 25세에 몽블랑을 혼자 올랐을 때일 것이며, 그 후 동계 그랑조라스 북벽을 오를 때까지 이어졌다.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은 아마도 산악인이나 탐험가들이 첫째로 추구하는 가치일 것이다. 한편 많은 뛰어난 산악인들이, 혹은 위대한 산악인들이 훗날 자신의 모험성을 보다 확장하기 위해 즉, 수직의 세계에서 수평의 세계로 나아가며 탐험가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들을 보게 된다. 그들 중 단 한명만 꼽으라면 단연 우에무라 나오미를 택해야 할 것 같다.

바로 이 책 <아내여, 나는 죽으러 간다>는 산악인이자 탐험가였던 그의 내면을 가장 잘 접할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데날리 동계초등 후 행방불명이 되기까지 자신의 아내에게 써 보낸 그의 편지는 위대한 모험가이기 전에 한 인간이었으며, 어째서 그가 수많은 모험들을 무사히 헤쳐 나오고서도 끝내 좌절하고 말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모진 눈보라에 맞서 투르빙하를 가로지르는 산악스키어들.
모진 눈보라에 맞서 투르빙하를 가로지르는 산악스키어들.

고지엔 아직도 겨울이 남아 있다

3,000m 이상의 알파인 지대에선 여전히 매서운 겨울추위가 머물러 있던 3월 말이었다. 필자는 나오미의 책 <아내여, 나는 죽으러 간다>를 배낭에 넣고 나루미와 함께 투르(Tour)빙하로 향했다. 겐기 나루미는 연초에 이태리에서 있었던 월드컵 빙벽대회에 참가한 후 알파인 등반을 경험하기 위해 샤모니에 체류하고 있는 20대 후반의 일본 산악인이다. 앞으로 반 년 후에나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이며, 이 또한 그때 가봐야 알겠다는 나루미는 나오미의 후배가 아니랄까봐 마치 나오미가 20대에 이곳 알프스로 무작정 와 지낸 방랑의 길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만 같다. 하여 필자는 나루미와 함께 산행하며 나오미를 생각해보는 즐거움을 기대하고서 투르빙하로 갔던 것이다.

플라스틱 스키화에 침낭 등을 넣은 배낭을 짊어진 채 친구에게 빌린 자전거를 타고 약속장소에 나타난 나루미의 모습은 예전에 <내 청춘 산에 걸고>를 읽고 나오미에게서 느낀 유쾌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 선배에 그 후배’라 할까. 우리는 샤모니 남쪽 광장의 버스정류장에서 많은 스키어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아르장티에(Argentiere) 마을로 올라갔다. 그랑몽테(Grands Montets)행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서다.

(왼쪽) 이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즐겁게 투르빙하 좌측으로 내려온다. (오른쪽) 스키를 등에 지고 파송고개에 오르고 있다.
(왼쪽) 이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즐겁게 투르빙하 좌측으로 내려온다. (오른쪽) 스키를 등에 지고 파송고개에 오르고 있다.

우리는 3,200m 고지의 그랑몽테까지 오르지 않고 중간역인 로낭(Lognan·1,950m)에 내렸다. 예의 많은 스키어들이 봄 스킹을 즐기고 있었다. 스키바닥에 스킨을 부착한 우리는 곧장 스키장 좌측의 아르장티에빙하쪽으로 나있는 슬로프를 따라 걸었다. 가벼운 차림으로 신나게 슬로프를 타고 내리는 스키어들은 한 짐 가득 짊어지고 뻘뻘 땀 흘리며 걸어 오르는 두 동양인들이 재미있는지 어떤 이들은 손을 흔들기까지 한다.

약 1시간만에 우리는 쏜살같이 내리달리는 스키어들과 충돌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아르장티에빙하 어귀에 닿았다. 한동안 빙하 우측을 따라 오르고서 크레바스가 드문, 경사가 거의 없는 빙하 중앙을 가로질렀다. 찬 바람이 빙하를 따라 매섭게 휘몰아쳐 땀에 전 몸이 떨려올 정도다. 곧 빙하를 가로지른 우리는 파송고개(Col du Passon·3,028m)까지 긴 오르막에 접어들었다. 서로 아무런 말없이 걷고 또 걸을 뿐이다.

한데 도중에 바위지대에 설치된 안테나 구조물이 보였다. 이에 나루미가 입을 연다. 저것은 눈이나 바람, 습도와 기온 등을 측정하는 기계로서 일본회사의 제품이며 극지방에서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즉 눈이 많은 일본의 북해도 산간지방의 도로를 관리하는 일에 바로 그 기계를 많이 사용한다고.

근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파송고개로 오른다. 마침 서너 명의 산악스키어들이 고개 아래서 쉬고 있다. 곧 그들은 스키를 배낭에 짊어지고 아이젠을 차고 피켈을 들고 고개 정상으로 이어진 쿨와르를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또한 잠시 쉬며 새롭게 장비를 꾸린다. 앞선 이들은 안전벨트에 서로 자일로 묶었지만 우리는 그냥 간다.

어렵지 않게 파송고개에 올라선 우리를 맞는 것은 바람뿐이다. 세찬 바람 탓인지 먼저 오른 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르투르(Le Tour·1,453m) 마을로 내려갔거나 투르고개(Col du Tour·3,282m)를 지나 스위스의 트리앙(Trient)빙하로 갔을 것이다.

산장에서 바라보는 알프스의 저녁놀은 평화롭기까지 하다.
산장에서 바라보는 알프스의 저녁놀은 평화롭기까지 하다.
파송 고갯마루에서 알베르 프레미에 산장(Albert Premier Refuge·2,702m)까지는 줄곧 내리막이다. 스키화를 조여 신고 스키에 몸을 얹는다. 스키를 타기에는 배낭이 다소 무겁지만 어렵지 않게 빙하 위를 미끄러져 내린다. 나루미 또한 잘 따라온다. 희뿌연 구름 사이를 헤쳐 투르빙하를 북으로 가로지르니 산장이 보인다. 빙하에서 모레인 언덕에 위치한 산장까지 약 100m의 설사면을 올라야 한다. 아이젠을 신지 않아 힘차게 킥스텝을 하며 오른다.

이윽고 산장이다. 아무도 없다. 두 개의 산장 건물 중 산악인을 위해 겨울에 개방해두는 윈터룸은 아래쪽의 작은 나무산장이다. 물론 시멘트로 지은 위쪽 건물은 단단히 잠겨 있다. 산장 안 마룻바닥은 마치 낡은 시골 초등학교 교실처럼 삐거덕거리는 나무 바닥에 덩그러니 나무탁자 하나만 놓여 있다.
투르고개 아래의 설사면을 오르고 있다.
투르고개 아래의 설사면을 오르고 있다.

탁자에 배낭을 풀어놓고 스키화를 벗어 스키실과 함께 말리며 버너에 눈을 녹여 차를 끓여 마시니 그나마 산장에 훈기가 돈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해가 지기까지는 두어 시간 남았다. 배낭 헤드에 넣어온 나오미의 <아내여, 나는 죽으러 간다>를 펼쳐드니 나루미가 반긴다. 자신 또한 이 책뿐만 아니라 나오미의 다른 두 책도 읽었다고 한다. 그는 나오미야말로 많은 일본인들이 영웅시하는 인물로서, 아직도 그와 견줄 만한 산악인이자 탐험가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책 속에 있는 하세가와가 알프스 3대 북벽을 겨울에 혼자 오른 바로 그인지 물었다. 그렇다고 말한 나루미는, 또한 나오미가 활동했던 메이지대학 산악부에 현재 서너 명만 활동할 정도로 나오미나 하세가와가 활동할 당시와는 달리 요즘 일본 젊은이들은 힘든 활동을 싫어한다고 했다. 이런 현상이 비단 일본에만 한하랴. 또한 자신은 한동안 스포츠클라이밍에 전념하다가 이제 알파인등반에 끌려 이렇게 와 있는데, 이제 20대 후반인 자신은 더 늦기 전에 마음을 잡아야 하지 않겠냐고 넋두리를 했다.

홋카이도에서 4년제 대학을 나왔지만 전공이 인문학이라 일자리 잡기가 쉽지 않은 마당에 계속해서 산에 다닐지 아닐지는 이번 여름까지 유럽에 있어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필자 또한 20대 후반에 그 같은 고민들을 숱하게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하여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말한 마디 하지 못하고서 그저 웃음만 지어 보인다.

그런 경험쯤은 얼마든 하고 남을 시간이 있다는 것

창틈으로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이미 읽었던 <아내여, 나는 죽으러 간다>를 펼쳐든다. 나오미가 결혼 전에 히말라야에서 아내에게 부친 그림엽서가 인쇄되어 있는 것을 나루미에게 보여준다. 그림 옆의 글씨가 너무 작아 읽지 못해 아쉬워한 나루미는 나오미가 늘 원정을 떠나 그가 아내와 실제로 함께 보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을 거라며 탐험가에게 원만한 가정생활은 쉽지 않을 거라며 만일 나오미처럼 등산이나 탐험에 전념할거라면 결혼은 재고해볼 참이란다.

이제 태양이 잠들 시간인 저녁 7시 반이 되어 우리는 산장 밖으로 나왔다. 해는 서산인 에귀루즈(Aig. Rouges) 산군 뒤로 기울며 멋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산장에서 맞이하는 알프스의 저녁놀은 늘 편하게 다가온다. 어깨를 움츠리며 산장에 들어온 우리는 간단히 저녁을 챙겨 먹는다. 식후 찬 공기만 가득한 실내에 더는 있지 못하고 침실로 와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누워 나오미의 책을 펼쳐드는데, 나루미는 도끼로 나무를 패고 주방에 있는 화덕에 불을 지핀다고 분주하다.

이 지역의 몇몇 산장엔 불을 피울 수 있게 나무까지 준비해두지만 날이 뭉텅할 뿐더러 몇 번 내려치면 자루가 빠지는 손도끼로 어렵게 나무를 쪼개어 화덕에 불을 피우기란 결코 쉽지 않음을 경험한 필자로선 그의 노력이 헛된 것임을 짐작하고서도 그가 저녁시간을 심심치 않게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방관하며 나오미의 책을 읽는다.

1시간쯤 페이지를 넘겼을까. 하필 랜턴의 건전지가 다 되어 나루미의 것으로 바꿀 때까지도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또 1시간쯤 지났을 때 나루미가 침실로 들어왔다. 투덜거리는 투로 그는 다음에 산장에 올 땐 불 피우는 기술을 꼭 배워와야겠다며 자신이 지고 온 침낭 위에 담요를 서너 장 덮고 눕는다. 메케한 연기에 눈물을 흘리며 두어 시간 불을 지피려 고생한 그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젊음이 좋지 않은가. 그런 경험쯤은 얼마든 하고 남을 시간이 있다는 게.

그의 기분을 달래기 위해 말을 건다. 사포로가 고향인 그는 5살 때부터 스키를 탔으며 요즘도 종종 산악스키를 하러 다니는데, 등산은 19세에 시작했다고 한다. 앞으로 어떤 등반을 더 해야할지 확신이 없지만 알파인 등반을 좀 더 하고 싶다고 한 그의 목소리는 곧 잠잠해졌다. 눈이 피곤해진 필자 또한 몇 페이지 더 넘기지 못하고 그만 랜턴을 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사랑을 하면서도 아마도 산 때문에 이별을 경험한 필자에게 수많은 모험에 든든한 후원자인 아내가 있었던 나오미가 부러우면서도 불나방처럼 늘 모험을 추구한, 스타 모험가로서 너무 과욕을 부린 것은 아닌가 하여 마음이 무거웠다.

그의 아내의 말처럼, 동계 에베레스트와 남극 원정에서 연이어 실패한 자신을 용서치 못한 결과, 동계 매킨리 원정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했음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나오미처럼 누구도 해내지 못한 큰 모험을 이루고픈 열정은 아니더라도 늘 산과 함께 하고픈 욕심에 언제 그와 같은 운명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잠자리가 편할 리 없었다. 밖에선 눈보라를 동반한 강풍이 나무산장에 부딪쳐 한 바퀴 휘감으며 지나가곤 했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어둡고 무거운 꿈의 세계에 빠져든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시계를 보니 아침 6시다. 여전히 바람이 기승을 부린다. 소변도 볼 겸 산장 밖으로 나오니 어두운 밤하늘에 눈보라가 맹렬하게 몰아친다. 쫓기듯 침상으로 돌아와 언 몸을 녹이며 게으름을 피운다. 6시 반이 지나고 또 10분이 더 흘렀다. 어쨌든 일어나야 된다는 생각에 침낭에서 나오니 나루미도 일어나 담요를 갠다. 수통의 물이 꽁꽁 얼 정도로 찬 실내에서 몸을 털며 우선 눈을 녹여 차를 끓여 마신다. 그리고 필자가 준비한 소시지와 빵을 먹는다. 한데 나루미는 양이 부족한지 자신이 준비한 파스타도 끓여 먹을 정도로 왕성한 식욕을 보인다.

실내를 깨끗이 치우고 산장을 나서니 아침 8시 전이다. 날이 밝아왔지만 강풍에 휘날리는 눈보라가 사정없이 뺨을 때린다. 그래도 한 걸음씩 발걸음을 밀어 올린다. 이 드넓은 투르빙하에 우리 둘만이 이 모진 상황에 맞서고 있다는 생각이 즐겁다. 우리가 넘어갈 투르고개는 한참 더 가야 하지만, 빙하 위로 오를수록 강풍에 실려 오는 가루눈은 더욱 세차게 뺨을 후려갈긴다. 2시간이 지나 고개 아래에 도착한 우리는 바람을 피해 잠시 쉬고서 다시 약 30분만에 고개에 올라선다. 바람은 더욱 세차다. 강풍에 실려 오는 가루눈이 얼굴을 맹타하지만 나루미는 드디어 스위스 알프스에 발을 디뎠다며 좋아한다.

투르 마을을 발아래에 두고 우리는 즐겁게 미끄러져 내렸다.
투르 마을을 발아래에 두고 우리는 즐겁게 미끄러져 내렸다.
투르 마을 발아래에 두고 활강하는 기분

고개에서 트리앙빙하 상부를 동남쪽으로 이동해 블랑고개(Col Blanc·4,305m)에 오른다. 다시 프랑스의 투르 빙하로 돌아오기 위해서다. 날씨만 좋다면 투르봉에 다녀올 예정이었지만 곧바로 블랑고개에서 스킹 다운을 하기로 한다. 아이젠을 신고 배낭에 스키를 매단 채 조심해서 바위지대를 내려온다.

이제 시간은 12시가 조금 넘었다. 간식을 먹고 바로 이 투르빙하의 최고점에서 르투르 마을까지 표고 약 2,000m를 타고 내릴 준비를 한다. 짙은 구름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빙하 위를 좌측으로 횡단하며 줄곧 내려온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언뜻 눈에 들어오는 게 있어 유심히 보니 파송고개쪽에서 빙하를 거슬러 오르는 일단의 산악스키어들이 모진 눈보라에 맞서 오르고 있다. 이들은 투르고개를 지나 트리앙산장으로 가고 있었다. 멀리서나마 손을 흔들며 행운을 빈 우리는 계속해서 스키를 타고 내린다. 어릴 적부터 스키를 탔다는 나루미의 활강실력은 수준급이었다. 불규칙한 설질에 넘어질 듯하면서도 용케 자세를 잡으며 활강하는 그를 사진기에 담으며 필자 또한 즐겁게 투르빙하를 타고 내린다.

거의 1,000m 이상 고도를 낮추니 차츰 눈보라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덩달아 지난 밤의 심란했던 기분도 풀린다. 나오미의 아내가 후기에 밝힌, 나오미의 편지를 공개하면서 이번만은 그녀 자신의 고집대로 하기로 했다는 언급이 유쾌하게까지 여겨진다. 나오미가 모험이라는 수렁의 주변을 맴돌다 불나방처럼 자멸했을지라도 어차피 한 번뿐인 그의 삶은 어느 누구보다 강렬하지 않았던가. 아니 그는 불나방이 아니라 조나단 리빙스턴이었다. 보다 높고 넓은 세계를 지향하고 한계를 초월하고픈 우리 인간본성을 나오미는 충실히 따랐던 셈이다.

좀 더 내려오자 따뜻한 태양이 우리를 반긴다. 우리는 즐겁게 투르 마을의 버스정류장까지 줄곧 스키를 타고 내린다. 이렇게 1박2일간 투르빙하에서 나루미와 함께 한 시간은 나오미의 책들을 읽을 때만큼이나 즐거웠다.

/ 허긍열 한국산악회 대구지부 회원·www.goalp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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