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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강릉 I

월간산
  • 입력 2007.06.29 08:27
  • 수정 2008.12.18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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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굴대굴 굴러가거나, 쌩쌩 달려가거나”
백두대간과 동해가 빚어낸 영동의 으뜸 고을

강릉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향(文鄕)이다. ‘강릉’이라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많다. 영동의 관문인 대관령, 관동팔경의 대표적인 누각인 경포대가 있는 아름다운 경포호,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단오제. 또 있다.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꼽히는 신사임당, 조선의 대학자 율곡 이이, 그리고 조선의 모순을 비판한 ‘홍길동전’의 명문장가 허균, 비록 요절했으나 중국에까지 필명을 떨쳤던 여류시인 허난설헌, 그리고 파도에 기찻길이 묻혀버릴 듯한 간이역 정동진….

이들을 만나기 위해 대관령(大關嶺·832m)을 넘는다. 얼마 전 터널이 뚫린 직선의 ‘새길’이 아니라 굽이돌던 예전의 ‘구길’이다. 영동고속도로가 확장되기 전인 2001년 이전까지만 해도 북적대던 옛 고속도로는 456번 지방도로로 ‘강등’되면서 이젠 적막감만 감돌고 있다. 한적해진 옛 고속도로를 지나다보면 이게 바로 길의 운명인가, 하는 상념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운명 또한 이와 다를 게 무엇이랴.

21세기 현재 풍력발전기 3대가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는 대관령은 강원도의 유서 깊은 고을인 강릉과 역사를 같이해온 백두대간의 큰 고개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영동과 영서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고개로서 영동 지방의 관문이 된다. 고갯마루 정상에서 동쪽을 보면 동해와 강릉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 나그네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혹은 슬프게 하던 그 광경이다.

강릉 토박이 노인들은 대관령을 아직도 ‘대굴령’이라 부른다. 이는 ‘너무 험해 대굴대굴 굴러 내리는 고개’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대관령 고갯길이라 하면 동쪽의 강릉 구산(丘山)역에서 반정(半程)을 거쳐 대관령 너머 서쪽의 횡계(橫溪)역까지를 말한다. 이중 현재까지도 비포장으로 온전히 남아있는 옛길은 제민원(濟民院)이 있던 현재의 대관령박물관에서부터 옛 영동고속도로(456번 지방도)와 만나는 신사임당 사친비 앞의 반정까지 5km 구간이다.

옛길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조선시대에 강릉 구산역에서 대관령을 넘자면 ‘장승거리’와 ‘굴면이’, ‘제벵이’, ‘원울이재’, ‘반젱이’, ‘윗반젱이’를 차례로 지나게 된다. 장승거리는 구산역 서낭당에서 어흘리쪽으로 가는 길가에 장승이 서있어서 얻은 지명이요, 굴면이는 대관령 정상에서 나귀나 말등에 짐을 싣고 험한 고갯길을 내려오면서 여러 번 뒹굴었으나 이곳에 오면 길이 좋아 뒹구는 것을 면한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또 제벵이는 길손들에게 숙박 등의 편의를 제공하던 제민원(濟民院))이 있던 마을인데, 옛 제민원 자리엔 현재 개인이 운영하는 민속박물관인 대관령박물관이 터를 잡고 있다. 윗굴면을 지나 만나는 야트막한 원울이재는 옛날 강릉으로 부임하거나 떠나던 고을 원님들이 이 재를 오르내리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는 곳이다.

윗반젱이라고 불리던 반정은 옛 횡계역과 구산역의 중간 지점이라는 뜻인데, 옛날엔 이곳에 주막이 있어 길손들이 쉬어가기도 했다. 또 옛길 남쪽에 솟은 제왕산(帝王山·840.7m)은 고려 말 우왕(禑王·1364-1389)이 ‘공민왕의 핏줄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성계의 주장에 몰려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왔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대관령 고갯길엔 웅장한 성은 없으나 문경새재와 견주어도 그다지 뒤지지 않을 정도의 콘텐츠가 넘친다. 그러니 시간이 허락한다면 옛길을 따라 답사를 한번쯤 경험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또한 강릉의 전설과 신화는 모두 대관령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대관령 사연을 듣다보면 시간이 짧다. 단오제와 얽힌 대관령의 신앙 이야기를 들어보자. 설·한식·단오·추석을 일컫는 한국의 4대 명절 중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하다는 음력 5월5일 단옷날을 전후하여 서낭신에게 지내는 제례가 바로 단오제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된 단오제는 강릉에 전해온다.

200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된 강릉단오제에서 모시는 주신(主神)은 대관령 국사서낭신과 대관령 국사여서낭신이다. 그리고 대관령 산신(山神)도 중요한 신격으로 모신다. 그렇다면 신의 정체는 무엇일까. 국사서낭신은 신라 말 굴산사(堀山寺)와 신복사(神福寺)를 창건한 범일국사(梵日國師·810-889)요, 국사여서낭은 강릉의 정(鄭)씨 집안 처녀요, 그리고 산신은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이다.

범일국사 전설은 이렇다. 때는 신라 말기, 양가집 딸이 굴산(현재의 학산)에 살고 있었다. 나이가 들도록 시집을 가지 못한 처녀는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바가지 물속에 잠겨 있는 해를 마시곤 열 달 뒤에 아기를 낳았다. 처녀의 집안에서는 지아비 없는 아기라 하여 얼음 위에다 버리니 학이 날아와 아기를 덮어 감쌌으며 산짐승들이 젖을 먹였고, 밤이 되자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이 비쳤다. 처녀의 집안에서는 아기를 도로 거두어 길렀는데, 이 아기가 바로 범일국사다.

범일은 20세에 경주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836년(흥덕왕 11)에 당나라에 가서 선종을 계승하고 847년 귀국했다. 851년 고향인 굴산사 주지로 온 후 40여 년 간 영동지역에 선불교를 퍼뜨린 범일은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파를 창시했다. 범일은 동해의 삼화사를 세우고 양양의 낙산사를 중건했으며, 강릉 신복사도 건립하면서 영동지방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열반하자 대관령의 국사서낭신으로 모셔졌다.

이번엔 국사서낭신의 짝인 국사여서낭신의 전설 한 토막. 아주 오랜 옛날 강릉에 정씨가 살고 있었다. 그에겐 나이 찬 딸이 있었는데, 하루는 꿈에 대관령 서낭신이 나타나 “내가 이 집에 장가를 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씨는 “사람이 아닌 서낭신을 사위로 삼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런 어느 날 정씨의 딸이 노랑저고리에 남치마로 곱게 단장하고 마루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와서 딸을 업고 달아났다. 딸을 잃은 정씨는 호랑이가 물어간 사실을 알고 국사서낭신을 찾아갔다. 그러나 딸은 벌써 죽어 혼은 없고 육신만 비석처럼 서있었다. 가족들이 육신만이라도 옮기려 했으나 몸이 떨어지지 않아 화공을 불러 딸의 화상을 그려 세우니 비로소 몸이 떨어졌다.

이 이야기들은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대관령 국사서낭신은 신라의 범일국사고, 국사여서낭신은 강릉에 살던 정씨의 딸이라는 유래다. 그런데, 범일국사가 대관령의 국사서낭이라는 기록은 일제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나니 그리 오래 전은 아닌 듯하다. 그 이전의 기록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강릉 출신인 교산(蛟山) 허균(許筠·1569-1618)은 대관령 산신이 김유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허균은 1603년 5월1일 대관령의 산신인 대령신(大嶺神)을 맞이하는 단오제 행사를 구경하다가 수리(首吏)에게 들은 말을 <성소부부고>에 적고 있다.

‘대령신이란 바로 신라 대장군 김공 유신입니다. 공이 젊었을 때 명주(강릉)에서 공부하였는데, 산신(山神)이 검술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명주 남쪽 선지사(禪智寺)에서 칼을 주조하였는데, 90일만에 불 속에서 꺼내니 그 빛은 햇빛을 무색하게 할 만큼 번쩍거렸답니다. 공이 이것을 차고 성을 내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오곤 하였는데, 끝내 이 칼로 고구려를 쳐부수고 백제를 평정하였답니다. 그러다가 죽어서는 대령의 산신이 되었고, 지금도 신령스런 이적이 있기에 고을 사람들이 해마다 5월 초하루에 천을 길게 늘어뜨려 만든 대와 향기 나는 꽃을 갖추어 대령에서 맞아다가 명주부사(溟州府司)에 모신답니다. 그리하여 닷새 되는 날, 갖은 놀이로 신(神)을 기쁘게 해 드린답니다. 신이 기뻐하면 하루 종일 대가 쓰러지지 않아 그 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화를 내면 대가 쓰러져 그 해엔 반드시 바람과 가뭄의 피해가 있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민속학자들은 국사서낭의 ‘국사’를 범일이라는 특정인물과 관련시키지 않고, 오히려 국사당 신앙과 관련짓기도 한다. 높은 산정에 있으면서 국수당, 국시당 등으로도 불리는 국사당은 천신의 강림처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대관령이 비록 고개라 해도 강릉에서 보면 높은 산인만큼 국사당 신앙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에 대성황사는 강릉 시내에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신을 모시러 대관령에 올라간 이유는 대관령의 신은 바로 천신이고, 이는 과거 동예 땅이었던 강릉에서 행했던 제천의식인 무천(舞天)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천신은 세월이 흐르면서 주신의 성격이 변해 승(僧)과 속(俗)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결국 승은 범일 국사요, 속은 김유신이 되었으며, 호랑이로부터 신변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호환 당한 여인을 국사여서낭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강릉의 볼거리는 역시 단오제다. 단오제는 남대천 단오장에서 매년 음력 5월5일(이후 모두 음력) 단오를 전후로 하여 5일간 열린다. 옛날엔 이 단오제를 지내는 데 열흘이나 걸렸다고 한다. 이 행사엔 관속·무당·지방민 등 수백 명이 제사에 참가하였고, 영동은 물론이요, 영서에서 대관령을 넘어온 관중들이 수만 명이나 몰렸다고 한다. 길손도 어릴 적에 수백 리 밖 충청도 땅에서도 강릉단오제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다.

단오의 시작은 4월5일 시내 칠사당에서 신에게 바칠 술을 만드는 신주빚기로 시작한다. 4월15일엔 산신제와 대관령국사서낭제를 지내기 위해 대관령을 오른다. 국사서낭신이 정씨 처녀를 데려다가 혼인한 날이 바로 이 날이기 때문이다. 요즘엔 15일 이른 아침에 출발하지만, 옛날엔 14일 술시(오후 7시)에 출발했다고 한다. 당시 광대패들이 선두에 서서 무악(巫樂)을 울리는 가운데 고을의 하급관리 대표인 호장(戶長)이 앞서고, 부사·수노(首奴)·도사령 등 관속, 무격(巫覡) 수십 명이 말을 타고 갔으며, 그 뒤로는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제물을 진 채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를 걸어 올랐다.

대관령에 도착하면 맨 먼저 김유신 장군을 섬기는 산신제를 올린 다음, 대관령국사성황사 앞에서 국사서낭제를 지낸다. 국사서낭신의 신체이기도 한 신목(神木)을 베는 일은 이 날 제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신장부가 베어낸 신목을 모셔들고 산을 내려와 대관령국사성황사 앞마당에 서면 무녀가 신이 내리는 장소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부정굿을 하고, 또 신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축원굿을 한다. 간단한 굿이 끝나면 무녀가 대관령국사서낭신에게 고개 아래의 대관령국사여성황사로 가자며 인도한다. 대관령을 내려갈 때면 신명나는 무악이 울린다.

옛날엔 대관령국사서낭신을 모시고 아흔아홉 굽이 험준한 대관령을 걸어서 내려왔는데, 소나무 횃불을 들고 윗반쟁이, 아랫반쟁이, 제민원, 굴면이를 지나 구산까지 이어진 구불구불 대관령을 걸어 내려가는 횃불의 장사진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요즘은 대관령성황사에서 자동차로 신목을 봉송하다 대관령 중간쯤에서부터 옛길로 구산 서낭당까지 내려가는 과정만 재현하고 있다. 이때 산유가(山遊歌)를 부르는데, 이를 ‘영산홍’이라고도 한다.

꽃밭일레 꽃밭일레 / 사월 보름날 꽃 바칠래 / 어얼싸 지화자자 영산홍
명산일레 명산일레 / 대관령이 명산일레 / 지화자자 영산홍
영산홍 녹음 바람 / 청들백들 배 걸렸네 / 지화자자 영산홍
일년에 한번밖에 / 못 만나는 우리 연분 / 지화자자 영산홍
보고파라 가고 지고 / 어서 바삐 가자스라 / 지화자자 영산홍
국태민안 시화연풍 / 서낭님께 비나이다 / 지화자자 영산홍
산호원피 야도자절 / 서낭님께 비나이다 / 지화자자 영산홍

대관령을 다 내려가면 국사서낭신인 범일국사의 고향인 학산 마을에 들러 탄생설화가 전해오는 석천과 학바위를 돌아본다. 학바위 근처 허름한 민가 옆엔 범일국사의 사리탑이라는 굴산사지 부도(보물 제85호)가 있다.

또 굴산사지 남쪽 언덕 벌판에 세워져 있는 당간지주(보물 제86호)는 산세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도 웅대해 절로 경외감이 든다.

돌을 다듬으면서 생긴 정 자국이 천 년의 세월을 지난 지금도 선명하다. 전문가들은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새롭게 떠오르는 힘찬 기운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한다.

이어 학산 마을을 나온 단오제 패거리는 강릉시내 일원을 순례하고는 홍제동에 있는 여성황사로 가서 봉안제(奉安祭)를 올린다. 이때부터 위패와 신목은 본격적으로 단오굿이 시작되는 5월3일까지 여기에 모신다.

이윽고 5월3일 오후 6시에 영신제(迎神祭)를 올리면서 7일까지 꼬박 닷새 동안 치러지는 강릉단오제의 막이 본격적으로 오르게 된다.

단오제 5일 동안 매일 저녁 늦도록 계속되는 단오굿은 단오제의 꽃이다. 기돗발 잘 받는 세습무당이 의례를 진행하는 강릉단오굿은 부정굿과 대관령서낭굿으로 시작하는데, 단오제 기간에 펼쳐지는 단오굿은 대략 19석에 30여 거리나 된다. 이 단오굿과 함께 관노가면극, 농악, 그네뛰기, 씨름 등 각종 민속놀이가 단오장 곳곳에서 벌어진다.

단오굿과 더불어 단오제의 핵심으로 꼽히는 관노가면극은 관아의 노비들에 의해 행해진 우리나라 유일의 무언극이다. 내용은 단순하여 양반과 각시의 사랑, 그 사랑을 방해하는 세력과의 갈등이 내용인데, 봉산탈춤·양주별산대·고성오광대 등 다른 탈놀음과 달리 아직 굿에서 독립하지 못하고 제의의 한 부분으로 공연되고 있다. 어쨌든 단오굿이 갇혀있던 슬픈 영혼들을 위로하는 한판 살풀이라면, 관노가면극은 최하층이었던 노비들의 맺힌 설움을 풀어내는 놀이판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대관령을 넘으면서 단오제의 동선을 따르다보면 어느덧 강릉 시내 한 복판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강릉 시내에서 길은 언제나 갈림길이다. 조선시대에도 그랬고, 요즘도 마찬가지다. 강릉의 동쪽은 바다에 막혀있으니 대관령을 넘은 자는 어쨌든 남으로든 북으로든 선택을 해야 한다. 북에는 경포대와 주문진항, 그리고 소금강계곡이 있다. 남쪽엔 정동진이 있고. 어디로 먼저 갈까, 하는 갈등도 잠시, 대부분의 옛 나그네들이 그러했듯이 길손은 경포대로 향한다.

 

경포대가 있는 경포호(鏡浦湖)는 동해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태양, 붉게 타오르는 석양, 달밤의 호수 풍광,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백사장 등으로 이름 높은 호수다. 그래서 예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아름다움을 예찬한 곳으로서 호수가 거울처럼 맑다고 하여 경호(鏡湖) 혹은 군자호(君子湖)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옛날엔 호수 둘레가 무려 20리에 달했으나 오늘날엔 호수로 토사가 흘러들면서 면적이 줄어들어 10리(4.35km)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잘 나갈 땐 호수 주위에 무려 12개의 정자가 있었으나 현재엔 경포대(鏡浦臺), 금란정(金蘭亭), 방해정(放海亭), 해운정(海雲亭)만 남아있다.
 

강릉 시내에서 경포호쪽으로 가다보면 자연스레 오죽헌~선교장~해운정~경포대를 거치게 된다. 먼저 오죽헌(烏竹軒·보물 제165호)이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가 태어난 오죽헌은 주변으로 검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율곡이 탄생한 몽룡실(夢龍室)은 조선 초기의 건축물로 유명하다. 율곡의 어릴 적 이름은 용꿈을 꾸고 태어났다 해서 현룡(見龍)이었는데, 여기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한다.

‘메밀꽃 필 무렵’ 배경지로 잘 알려진 평창의 봉평에 전하는 ‘판관대 지명전설’을 들어보자. 율곡 이이의 부친이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재직하던 중 여가를 이용해 강릉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주막에서 하룻밤을 쉬게 되었다.

그런데 용꿈을 꾼 주모가 잠자리를 같이할 것을 애걸복걸했으나 뿌리치고, 강릉에 도착해 역시 용꿈을 꾼 신사임당과 오랜만에 잠자리를 같이해 율곡을 잉태했다고 한다.

오죽헌에선 검은 대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는 운치도 좋다. 눈길 끄는 나무들도 많다. 몽룡실 앞마당의 배롱나무와 뒤꼍 왼쪽의 매화나무는 모두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나무로서 신사임당과 율곡을 지켜봤을 것이다. 이중에서 매화나무는 3월에 꽃을 피우는 홍매(紅梅)로서 흔히 ‘율곡매’라고 불린다. 길손이 들렀던 5월 초순에는 꽃은 지고 제법 속이 들어찬 매실들이 가득 열려 있었다. 지난밤에 불었던 거센 바닷바람에 떨어졌을까. 마당에 떨어진 매실 하나 주워 깨무니 시큼한 맛에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인다.

자신이 태어난 외갓집 덕에 율곡은 강릉과 인연이 깊었다. 그 흔적은 백두대간의 큰 산인 오대산(1,563m) 동쪽 기슭에 있는 소금강계곡에도 남아 있다. 오대산 줄기인 황병산을 주봉으로 우측은 노인봉, 좌측은 매봉이 자리한 소금강은 학이 날개를 편 듯한 형국이라 해서 청학산(靑鶴山)이라고도 불린다. 소금강이란 이름은 이곳에서 잠시 머물던 이이가 ‘청학산기’에서 빼어난 산세가 마치 금강산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고 한 데서 유래했다. 금강사 앞 영춘대에는 율곡이 직접 썼다는 ‘小金剛’이란 글씨도 새겨져 있다고 한다.

오죽헌에서 멀지 않은 선교장(船橋莊·중요민속자료 제5호)은 조선 후기 영동 지역 상류층의 주거 생활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선교장은 ‘배다릿집’이라는 뜻인데, 이는 경포호의 물이 이곳까지 차 있을 때 배가 드나들던 옛 지명인 ‘배다리마을’에서 유래한 것이다. 안채, 그리고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 별채인 동별당이 있는데,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가운데 ‘친척들과 더불어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즐긴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예전엔 경포호의 일부였을 듯한 선교장 연못엔 1816년 건립한 활래정(活來亭)이 있다. 활래정은 주자의 ‘관서유감’이라는 시에서 ‘맑은 물은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에서 얻은 것이다.
 
경포호 서쪽 언덕 위에 다소곳이 자리 잡은 경포대는 조선의 문장가인 송강 정철(鄭徹)의 매우 서정적인 기행문인 관동별곡으로 알 수 있듯 관동팔경의 하나로 이름을 날리며 시인묵객들에게 크나큰 사랑을 받아온 곳이다.

당시 풍류객들은 달이 뜨는 밤이면 이 경포대에서 달을 보며 즐겼다. 하늘에 떠있는 달, 출렁이는 호수 물결에 춤추는 달, 파도에 반사되어 어른거리는 달, 정자에서 벗과 나누어 마시는 술잔 속의 달, 벗의 눈동자에 깃든 달…. 이렇게 모두 다섯 개나 된다. 이렇듯 예술과 문화적인 전통이 넘치는 경포호는 강릉 사람들에겐 참 보배 같은 존재다. 그들은 이른 아침 호수 주변을 걷거나 달리면서 자연스레 역사와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호수 남쪽의 쭉쭉 뻗은 아름드리 해송 숲엔 조선시대에 중국에까지 필명을 드날렸던 천재 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의 생가가 남아 있다(허균이 태어난 곳은 사천진리 애일당 愛日堂 옛터다). 난설헌은 허균의 누이로서 이름은 초희(楚姬)고, 난설헌은 호다. 그녀는 8세에 상량문을 지어 신동이라는 칭송을 받고, 동생의 문장을 고쳐줄 정도로 출중한 솜씨를 지녔으나 14세에 결혼해 두 딸을 잃고 시름에 찬 세월을 보내다 27세에 요절했다. ‘감옥으로부터 사색’의 작가 신영복 선생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에 있는 그녀의 무덤을 다녀와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랑했던 오라버니의 유배와 죽음, 그리고 존경했던 스승 이달(李達)의 좌절, 동시대의 불행한 여성에 대하여 키워온 그녀의 연민과 애정, 남편의 방탕과 학대, 그리고 연이은 어린 남매의 죽음. 스물일곱의 짧은 삶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육중한 것이었습니다. 사임당의 고아한 화조도(花鳥圖)에서는 단 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던 봉건적 질곡의 흔적이 난설헌의 차가운 시비(詩碑)에는 곳곳에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여행객들에겐 속초의 대포항, 양양의 물치항에 견줄 수 있는 주문진(注文津) 어시장에서 오징어회 한 쌈 들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온 길을 되짚어 간 다음 강릉 시내를 벗어나 해안도로를 달린다. 안인진에 있는 강릉통일공원에서 우리 해군의 퇴역함정인 전북함과 1996년 9월18일 침투한 북한 무장 잠수함을 둘러보고 등명낙가사에 들러 위장병과 피부병에 좋다는 약수 한 모금 마시면 드디어 정동진.

인생은 새옹지마라 했던가. 정말 사람의 일이 앞으로 어찌될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허나 어디 삶만 그러하겠는가. 길도 그렇고 마을도 마찬가지리라. 강릉으로 오는 길에 대관령에서 이런 상념에 잠기기도 했지만 정동진이란 바닷가 마을도 그러하다. 하지만 여긴 스산함이 아니라 화려함이다.

광화문에서 정확히 동쪽에 있다는 바닷가 작은 어촌 정동진(正東津). 여관도, 찻집도 없이 파돗소리에 묻혀있던 어촌에 있는 정동진역은 그리움이 파도처럼 무시로 밀려드는 자그마한 간이역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이 있다는 이 역은 1962년에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주변의 탄광에서 생산되는 석탄을 수송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으로 탄광들이 폐쇄되고 주변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자 1996년 여객취급을 중지하고 역도 문을 닫고 말았다.  예전에 강릉 가는 기차를 타고 이곳을 지날 때면 새벽의 까만 어둠 속에서 하얗게 달려드는 파도가 기차 바퀴를 적실 듯 가까이서 부서지던 추억도 새롭다.

그러나 그 무렵 SBS에서 모래시계가 방영된 이후 갑자기 인기를 얻기 시작해 1997년 다시 문을 열게 된다. 당시 온 나라를 눈물바다로 몰아넣으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수배를 피해 외딴 어촌에 내려와 숨어있던 혜린(고현정)이 경찰에 쫓기며 초조하게 열차를 기다리던 기차역. 그가 뒤쫓아온 경찰관에게 체포되던 바로 그 ‘소나무 한 그루 서있는 겨울바다 기찻길’의 슬프면서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진 곳이 바로 정동진역이었던 것이다.

적막하던 정동진역은 이렇듯 모래시계로 ‘기차여행의 신데렐라’로 극적인 회생을 했고, 이후는 상전벽해였다. 이곳 일출을 보려 몰려드는 여행객을 위한 숙박시설과 식당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고, 이정표도 변변치 않아 헤매기 일쑤이던 게 언제였나 싶게 고속도로 나들목부터 친절하게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기찻길은 백사장과 바싹 붙어 있다. 여행객들이 기차를 기다릴 때 쓰는 긴 의자는 기찻길쪽이 아니라 바다쪽을 바라보고 놓여 있다. 여기에 가만히 앉아 파란 바다를 바라보는 맛은 정말 일품. 때맞춰 기차까지 지나가니 비록 초조하게 열차를 기다리는 그 여인이 없다 해도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정말 그럴 듯하다.

물론 바다로 내려서는 계단이 있으니 신발 벗어들고 부드러운 백사장을 거닐며 새하얀 파도를 마음껏 희롱해보자. 연인들이라면 해안을 거닐면서 사랑을 속삭이는 것은 자유지만 자신들 뒤쪽 언덕의 긴 의자엔 언제나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앉아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다. 대부분 사랑을 쌓아가는 연인들이지만, 아이들 손을 잡은 가족들뿐만 아니라 늙수그레한 노부부의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정동진역 주변엔 보고 즐길 거리가 아주 많다. 그중에서 남쪽으로 500m 정도 내려가면 모래시계공원이 있다. 1999년 새로운 천년을 기념하기 위해 드라마의 제목에서 힌트를 얻어 조성한 이 모래시계공원은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모래의 부피에 의해 시간의 경과를 재는 장치인 모래시계를 테마로 했다. 모래시계는 지름 8.06m, 폭 3.20m, 무게 40톤, 모래무게만 무려 8톤에 이른다. 이는 세계 최대의 규모라 하는데, 모래가 모두 아래로 떨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꼭 1년. 매년 1월1일 0시에 반 바퀴 돌려 위와 아래를 바꿔 새롭게 시작한다. 그리고 그 날 새벽에 맞이하는 일출 때문일까. 어느새 훌쩍 커버린 정동진은 경포대 일출의 명성도 넘보고 있는 것이다.
 

강릉의 마무리는 해안도로인 헌화로 드라이브다. 도로 바로 옆에 동해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이 길은 파도 크게 칠 때면 파도가 길까지 튀어 오른다. 그렇다면 수로부인에게 절벽의 철쭉꽃을 꺾어주곤 헌화가를 불렀다는 소 몰던 노인은 어디 있는 것일까, 기웃거리는데 파도가 들이닥친다. 이젠 강릉을 떠날 시간이라 말하는 것만 같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또 달려드는 파도. 어쩔거나. 떠나야지. 그런데 어디로 넘어간담. 빠른 길이야 옥계 나들목에서 동해고속도로에 올라타 대관령터널을 지나는 것일 테지만, 지금은 백두대간과 동해 바닷가에 송홧가루 풀풀 날리는 봄날인데.

옥계에서 백복령을 넘을까. 아니면 구산에서 닭목재나 삽당령을 넘을까. 어쨌든 백두대간 그 너머는 정선 고을이다. 그렇다면 그 산골서 애잔한 아라리 한 가락 한번 들어볼까, 고민하는 사이 다시 파도가 달려든다. 지금 강릉을 떠나지 않으면 영영 못 떠나게 될지 모른다며.

/ 글·사진 민병준 sanmin@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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