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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알프스에서 온 편지] 몽말레 빙하

월간산
  • 입력 2007.07.10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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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는 예나 지금이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대상
헤크마이어의 <알프스의 3대 북벽>을 읽고

헤크마이어의 <알프스의 3대 북벽>.
헤크마이어의 <알프스의 3대 북벽>.

알프스, 그것도 ‘알프스의 3대 북벽’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린 때가 있었다. 필자의 경우에는 산을 알게 되고 만년설산을 꿈꾸며 한창 20대의 젊음을 산에 바칠 무렵이었다. 아마도 당시에는 동기들뿐 아니라 선후배들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여 필자가 처음 암벽을 배운 고향의 해골바위 암장에 이르는 길가에 삼각형이나 사각형의 볼더가 있었는데, 우리들은 이 삼각바위를 마터호른이라 부르며 언젠가는 꼭 올라보리란 결의를 다지곤 했다.

한편 20대 초반에 필자가 몸담았던 산악회 사무실 한쪽 벽면에 걸려 있던 그랑 조라스 북벽의 시원스런 풍광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쿠베르클 산장쪽에서 찍은, 그랑 조라스 북벽과 그 아래를 흘러내리는 레쇼 빙하를 함께 담은 사진이었다. 그리고 아이거 북벽은 당시 문고판으로 발행된 하인리히 하러의 <하얀 거미>를 통해 생생하게 각인되었다. 이렇듯 아이거, 마터호른, 그랑 조라스의 북벽들은 많은 신출내기 산악인들을 그저 고향의 산에만 머물도록 하지 않았다. 필자 또한 20대 중반의 학창시절에 이곳 알프스에 처음 발을 딛고 북벽들을 오르지 않았던가.

프티 조라스쪽에서 떠오른 해는 건조하고 온기가 없었다.
프티 조라스쪽에서 떠오른 해는 건조하고 온기가 없었다.

남성적인 웅대함을 갖추고서 언제든 번개를 동반한 폭풍설로 혹독한 시련을 대면하게 해주는 아이거 북벽,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면서도 앙칼스럽게 수많은 낙석으로 오르는 이들을 혼쭐내주는 마터호른 북벽, 앞의 두 가지 요소를 두루 갖추고서 병풍처럼 펼쳐진 수려한 거벽에 수많은 등반선을 품고 있는 그랑 조라스 북벽, 바로 이 알프스의 3대 북벽을 좀 더 생각하고 느껴보기 위해 안데를 헤크마이어(Anderl Heckmair·1905-?)의 <알프스의 3대 북벽>을 집어들었다. 물론 세 곳 중 한 곳인 그랑 조라스 북벽이 잘 보이는 페리아데 비박산장(Bivouac des Periades·3,441m)에서 이 책을 읽기로 했다.

이 책을 배낭에 집어넣은 또다른 이유는 헤크마이어의 자서전 <Anderl Heckmair, My Life>를 구입한 지 1년이 되도록 아직 읽지 못한 탓에 우선 <알프스의 3대 북벽>을 그랑 조라스를 바라보며 읽고 그의 전기는 그에게 평생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아이거 북벽을 바라보며 읽을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속셈도 있었다.

느지막이 짐을 꾸린다. 이젠 배낭 꾸리는 일에도 이력이 날만도 하건만 늘 무언가 빠뜨린 것 같고 쉽지가 않다. 지난번 산행 후에 제대로 정리해두지 않은 산행용 손목시계를 아무리 찾아도 없다. 할 수 없이 그냥 떠나기로 한다. 하루 이틀 시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여기며 3,800m 고지의 미디(Aig. du Midi) 전망대에 오른다.

4월 말 이제 스키시즌이 막을 내릴 단계라 발레 블랑쉬(Vallee Blanche) 설원으로 향하는 스키어들은 많지 않다. 호젓하여 좋다. 맑은 날이다. 전망대의 동쪽 난간으로 향한다. 몽블랑 산군의 파노라마가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다. 그랑 조라스 북벽은 여전히 그늘져 있으며, 왼편 저 멀리 마터호른이 자그마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서 아이거 북벽은 웬만큼 쾌청한 날이 아니고선 보이지 않아 3대 북벽을 한눈에 볼 기회는 좀체 가질 수 없다.

페리아데 비박산장과 주변 산들에 황혼이 깃들고 있다.
페리아데 비박산장과 주변 산들에 황혼이 깃들고 있다.
곧 스키를 들고 미디 북동설릉을 내려간다. 몇몇 스키어들 뒤로 그랑 조라스 북벽과 오늘밤 묵을 페리아데 비박산장이 위치한 침봉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스키를 신고 발레 블랑쉬 설원을 가로지른다. 이윽고 몽블랑 뒤 타퀼 동벽 아래를 경유해 제앙(Geant) 빙하에 들어선다. 제앙(Dent du Geant·4,013m)쪽으로 큰 원을 그리며 우회해야 페리아데 빙하 하단부의 좀 더 높은 지점에 다다를 수 있다. 발레 블랑쉬를 경유해 곧바로 르켕 산장(Refuge du Requin·2,516m)쪽으로 진입하면 오르막을 좀 더 올라야 한다. 몇몇 스키어들을 지나치며 크레바스 지대 사면을 타고 내린다. 마침 뒤따르는 이는 프랑스국립등산스키학교(ENSA) 교수로 있는 잰 세바스찬이다. 이 지역에선 꽤나 알려진 이로서 2년 전 스위스의 모바장 빙장에서 만난 적이 있다. 손님 하나와 신나게 스키를 타고 내리는 그를 뒤로 하고 배낭을 내린다.
페리아데 빙하 아래쪽으로 접근하고 있는 엔사 교수 잰 세바스찬.
페리아데 빙하 아래쪽으로 접근하고 있는 엔사 교수 잰 세바스찬.

여기서부터 스키에 스킨을 달고 올라야 한다. 올라갈 드넓은 사면을 살피니 아무도 없다. 빙하 상단의 세락이 무너져 그 잔해들이 주변 곳곳에 흩어져있다. 신설이 내린 지 1주일 이상 되어 별 걱정 없이 스키를 끌고 오르기 시작한다.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진땀을 흘리며 세락의 위험지대에서 벗어나서야 한숨을 내쉰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한낮의 설원 위라 덥다. 재킷을 벗어 배낭에 달고 오른다. 이 드넓은 사면에서 혼자임이 즐겁다.

브레쉬 퓌주(Breche Puiseux·3,432m)의 쿨와르가 시작되는 지점이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심해진다. 곳곳에 크레바스들 또한 숨을 죽이고 숨어있다. 스키의 장점을 살려 웬만한 넓이의 히든 크레바스나 스노 브리지는 그냥 지나친다. 이윽고 쿨와르 하단부에 이른다. 2시간 이상 걸어 오른 것 같다. 배낭을 벗어 쉬면서 스키 스킨을 떼고 스키를 배낭에 매단다. 이어 아이젠을 신고 피켈을 들고 오른다. 한데 한낮의 열기에 설사면이 허벅지 이상 빠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최대한 스키를 신고 올라보는 건데 하는 뒤늦은 후회를 해본다.

쿨와르 하단의 작은 얼음턱까지 약 50m 구간은 수영하듯 허우적거린다. 겨우 얼음턱에 올라서서 본격적인 쿨와르 등반이 시작되자 더는 발이 빠지지 않는다. 경사가 약 50도인 350m 높이의 쿨와르를 오르고 또 오른다. 다행히 위에서 떨어지는 낙석이나 눈덩이는 없다. 쉴 때마다 뒤로 고개를 돌린다. 차츰 고도를 높이자 몽블랑이 고개를 내민다.

메르데 빙하 하단부에 생겨난 에메랄드빛 빙하호. 저 멀리 오른쪽 당 뒤 제앙 아래로 올라가 왼편 그랑 조라스 아래의 레쇼 빙하로 내려왔다.
메르데 빙하 하단부에 생겨난 에메랄드빛 빙하호. 저 멀리 오른쪽 당 뒤 제앙 아래로 올라가 왼편 그랑 조라스 아래의 레쇼 빙하로 내려왔다.

마침내 브레쉬 퓌주 고개에 올라선다. 고개 너머 펼쳐진 몽말레(Mt. Malet) 빙하와 그랑 조라스 북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페리아데 비박산장은 북쪽으로 이어진 바위능선을 따라 약 50m 오르면 있다. 조심해서 바위능선을 따른다. 스키를 맨 배낭이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로 균형을 잡으며 칼날능선을 지난다.

한 구간을 지나면서 오른손으로 멀리 있는 큰 홀드를 잡았을 때다. 오른발을 옮기려는 순간, 딛고 있던 눈이 꺼지는 바람에 오른쪽 가슴이 그대로 바위에 부딪친다. 격한 통증이 느껴지지만 오른손을 놓을 순 없다. 급히 몸을 끌어올려 안전한 지점에 이르러서야 한숨을 크게 내쉰다. 갈비뼈가 심하게 아프지만 설마 부러졌겠냐며 걸음을 계속해 바위능선 꼭대기에 오른다. 바로 이 꼭대기에 마치 큰 새가 둥지를 튼 듯 나무로 지은 3인용 비상대피소인 페리아데 비박산장이 위치해 있다.
 

그랑 조라스의 또다른 전망대 페리아데 비박산장
에귀 뒤 미디쪽에서 본 그랑 조라스와 페리아데 비박산장이 있는 침봉들.
에귀 뒤 미디쪽에서 본 그랑 조라스와 페리아데 비박산장이 있는 침봉들.

배낭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본다. 사방에 펼쳐진 풍경이 시원스럽다. 무엇보다 그랑 조라스 북벽을 또 다른 각도에서 대면할 수 있어 좋다. 흔히 우리들은 레쇼 산장이나 쿠베르클 산장쪽에서 찍은 그랑 조라스 북벽의 모습에 익숙해 있다. 특히 이곳서 보는 북벽의 워커 스퍼나 크로 스퍼는 각각 하나의 거대한 바위능선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아 있어 배낭을 풀고 담요며 식기류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는 비박산장의 실내에 눕는다. 욱신거리는 가슴을 반드시 누인 채 서쪽으로 트인 희뿌연 창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알프스의 3대 북벽>을 비춰 읽는다.

헤크마이어에게 그랑 조라스 북벽은 아이거에 비해 인연이 없는 듯하다. 그는 1931년 처음 이곳을 찾았지만 나쁜 날씨와 같은 뮌헨 출신 친구 둘의 추락사로 단념하게 된다. 이들은 토니 슈미트와 프란츠 슈미트 형제가 마터호른 북벽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자극을 받아 조라스 북벽에 붙었지만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헤크마이어는 거의 매년 이곳을 찾다시피 하지만 기회가 오지 않는다. 특히 1935년엔 반드시 그랑 조라스 북벽을 오를 열정에 온몸을 던지지만 암벽훈련을 하다 뛰어내린다는 게 잘못하여 발뒤꿈치를 다쳐 깁스를 하고 뮌헨으로 돌아가야 했다. 침울한 기분으로 고향에 돌아간 그에겐 1년 전에 레쇼 산장에서 함께 머물며 그랑 조라스 북벽을 노렸던 친구들 페터스와 마이어에 의해 북벽이 등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들이 오른 루트는 중앙측릉, 즉 크로 스퍼였다. 이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더욱 풀이 죽은 헤크마이어에게 남은 것은 이제 아이거 북벽뿐이었던 것이다.

산행 출발지였던 에귀 뒤 미디쪽에 저녁놀이 한창이다.
산행 출발지였던 에귀 뒤 미디쪽에 저녁놀이 한창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가. 얼핏 창틈으로 스며드는 빛의 질감이 다르게 느껴졌다. 벌떡 일어난다. 가슴팍이 화끈거린다. 카메라를 챙겨 밖으로 나온다. 한두 시간 전에 구름이 몰려와 저녁경치는 별로일 거라는 예상을 뒤집으며 멋진 저녁놀이 펼쳐지고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구름 위로 몽블랑 산군의 침봉들이 솟아 있는 가운데, 붉고 노란 색의 연한 구름들이 서녘 하늘에 마구 흩뿌려져 있다. 고생하며 이 추운 비박산장에 와 있는 것에 대한 보상이 되고 남는다. 이제 알프스의 밤이 도래할 차례다. 찬바람에 어깨를 움츠리며 비박산장에 기어든다. 얼른 버너를 켜 눈을 녹여 저녁을 먹는다.

데워진 몸의 열기를 잃지 않기 위해 문을 닫고 바닥에 깔린 담요를 챙긴다. 먼지투성이의 담요일망정 추위를 위해선 덮어야 한다. 그리고 창가에 있는 타다 남은 양초 두 자루에 불을 붙이니 좁은 공간에 온기가 도는 듯하다. 이제 읽다만 <알프스의 3대 북벽>을 펼쳐든다. 물론 촛불로는 빛이 약해 가져간 헤드랜턴을 켜 읽는다.

이제 헤크마이어의 무대는 이곳 그랑 조라스에서 아이거로 넘어간다. 깁스를 한 채 침울하게 있던 헤크마이어에게 귀가 솔깃한 뉴스가 날아든다. 또 다른 뮌헨 출신의 막스 세들마이어와 칼 메링거가 아이거 북벽에 붙은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4일간 힘겹게 제3설원까지 오르고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이때부터 헤크마이어의 관심은 오직 아이거 북벽에 집중되어 자료를 모으고 답사까지 하게 된다.

헤크마이어가 샤모니를 찾은 첫 해에 오른 그랑 샤르모 북벽. 몽탕베르는 오른편 아래 언덕에 위치해 있다.
헤크마이어가 샤모니를 찾은 첫 해에 오른 그랑 샤르모 북벽. 몽탕베르는 오른편 아래 언덕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1936년 헤크마이어는 자신이 아이거 북벽을 시도하기에는 아직 부족함을 느낀다. 당연히 그해 여름에 북벽에서 발생한 참극(힌터슈토이셔와 토니 일행 4명의 비극적 종말)에 영향을 받았음이다. 다음해 여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아이거 북벽을 찾은 헤크마이어는 6주일이나 기회를 노렸지만 이번에도 날씨 운이 없었다. 그의 이야기가 막 재미있으려던 참에 침침해진 눈도 쉬고 소변도 볼 겸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조심스럽게 발을 딛고 하늘을 본다. 별들의 물결 아래에 밤의 어두움보다 더 검은 거대한 형체가 우뚝 서 있었다. 바로 그랑 조라스 북벽이었다.
 국적 불문하고 산악인들을 친구로 만드는 산
늦은 오후 햇살을 받고 있는 그랑 조라스 북벽의 측면. 워커 스퍼가 거대한 능선임을 보여준다.
늦은 오후 햇살을 받고 있는 그랑 조라스 북벽의 측면. 워커 스퍼가 거대한 능선임을 보여준다.

어깨를 움츠리며 비박산장에 들어온다. 시계가 없기에 시간을 가늠할 순 없다. 그리고 이제 막 헤크마이어가 아이거 북벽에 붙으려는 마당에 잠자리에 들 순 없다. 또다시 <알프스의 3대 북벽>을 펼쳐든다. 20대 중반이던 학창시절, 필자 또한 올라보았던 바로 그 아이거 북벽의 초등루트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혀졌다. 17년이란 세월이 지났건만 그들 헤크마이어와 푀르크, 하러와 카스파레크가 고군분투하며 오른 한 구간 한 구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별빛 쏟아지는 산정의 비박산장에서 읽는 산서의 즐거움이다.

모진 난관을 헤치며 북벽에 오르는 대목까지 페이지를 넘긴 후, 이제는 눈을 붙여야 하지 않을까 싶어 랜턴을 끄고 3장의 담요를 어깨 위로 끌어 덮는다. 창가에 켜둔 양초는 거의 다 타고 있었다. 그냥 둔 채 눈을 감는다. 얼마나 잤던가. 그 사이에 양초는 꺼졌으며, 문을 열어보니 아직도 칠흑의 밤이다. 다시 담요 속으로 몸을 파고든다. 하지만 초저녁에 비해 기온이 많이 내려가 특히 무릎이 시리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알프스의 3대 북벽>을 마저 읽는다.

3명이 묵을 수 있는 페리아데 비박산장 너머로 당 뒤 제앙과 몽말레(왼편)가 보인다.
3명이 묵을 수 있는 페리아데 비박산장 너머로 당 뒤 제앙과 몽말레(왼편)가 보인다.

헤크마이어가 그랑 조라스를 처음 대면하고서 20년이 지난 1951년에 마침내 오르는 이야기다. 2차 세계대전 이후라 예전처럼 자유롭게 이곳에 올 수 없었던 헤크마이어를 초청한 이들은 리오넬 테레이와 루이 라슈날이었다. 이들은 아이거 북벽을 두 번째로 오른 샤모니의 산악인들이 아니던가. 이들은 헤크마이어가 동료와 함께 악천후를 뚫고 워커 스퍼를 등반하는 동안에도 혹 자신들의 친구가 잘못되지 않을까 싶어 구조대를 결성하는 등 각별한 우정을 보인다. 이렇듯 예나 지금이나 산은 국적을 불문하고 산악인들을 친구로 만들어주고 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밖을 살피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 많던 별들이 사라진 아침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너무 맑아 오히려 아침풍경은 별로다. 프티 조라스 너머로 햇살의 기운이 뻗친다. 이윽고 빛을 발하며 솟아오른 태양은 건조했다. 햇살은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했지만 찬 아침공기를 데우기에는 부족했다.

브레쉬 피쥐 고개에서 내려다본 쿨와르. 저 멀리 몽블랑이 보인다.
브레쉬 피쥐 고개에서 내려다본 쿨와르. 저 멀리 몽블랑이 보인다.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고 짐을 꾸린다. 대충 산장 안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와 배낭에 스키를 매단다. 하룻밤 동안 정든 비박산장을 뒤로 하며 바위능선을 내려와 브레쉬 퓌주 고개에서 몽말레 빙하까지 약 100m를 클라이밍 다운을 한다. 곧 스키를 신고 빙하를 가르며 내려온다. 대체로 빙하 좌측을 따르는데, 그랑 조라스 북벽을 좀 더 잘 보며 내려오기 위해 최대한 크레바스 지대에 접해 활강한다. 가파른 몽말레 빙하를 내려올수록 정면으로 대면하게 되는 그랑 조라스 북벽은 측면에서 볼 때보다 더욱 거대하고 가파르게 보인다.

이제 레쇼 빙하에 접어들어 북벽 아래쪽으로 큰 원을 그리며 미끄러져 내린다. 빙하 우측 바위사면에 위치한 레쇼 산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멀리서 보아 그런지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계속해서 스키를 타고 내린다. 이어 레쇼 빙하가 메르데 빙하에 가로막혀 생긴 모레인 지대에 이르러 바위에 앉아 쉰다. 아직 시간이 일러 발레 블랑쉬에서 내려오는 스키어들은 보이지 않는다. 또다시 발길을 떼니 몽탕베르(Montenver) 언덕이 눈에 들어온다. 드넓은 빙하에 봄기운에 녹아 생긴 빙하호가 에메랄드빛으로 빛나고 있다. 좀 더 내려오니 헤크마이어가 샤모니를 처음 찾았던 1931년에 오른 그랑 샤르모 북벽이 보인다.

몽말레 빙하 개념도
몽말레 빙하 개념도

곧 몽탕베르에 올라 산악열차에 몸을 싣는다. 덜컹거리는 객차의 나무의자에 앉아 지난 하룻밤 동안 독파한 <알프스의 3대 북벽>을 떠올려본다. 마지막으로 회상되는 부분이 있다. 알프스나 히말라야 어디에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한 역자의 말이다.

‘세계 등반사에 이름을 남긴 기라성 같은 알피니스트들 즉, 세계가 낳은 위대한 등산가나 한 시기를 풍미한 알피니스트들은 결코 하루아침에 히말라야에서 그 명성을 얻은 것이 아니다. 이미 그들은 알프스에서 식견과 기량을 갈고 닦아 거기서 쌓은 업적으로 얻은 당연한 영예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우리 한국산악계의 동향을 보면 히말라야만이 알피니스트의 궁극 목표요, 알피니즘의 전부인 것처럼 온갖 귀중한 재력과 정력을 쏟아붇는 경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우리 산악계의 보다 나은 발전을 위해선 알피니즘의 발전단계에서 커다란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알프스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을 것이다.

/ 허긍열 한국산악회 대구지부 회원·www.goalp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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