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등산업계 首將에게 듣는다] 장재순 써미트 배낭 사장

월간산
  • 입력 2007.08.15 09:0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계 최초로 8,000급 16개봉 오른 최고 품질 배낭”

토종 국산 브랜드인 써미트(Summit) 배낭은 우리 등산업계에선 다윗 같은 존재다.
자본, 회사 규모 등이 메이저급 상사들에 비해 초가집 수준이지만 다윗처럼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현재 배낭에 관한 한 국내 최고 수준의 브랜드 파워를 보이고 있다.

요즈음 국내엔 세계 유명브랜드 배낭이 거의 모두 수입되고 있다.
한편, 국산품 애용에 기대던 시대는 일찌감치 끝났다.
외제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용도는 국산과 거의 같아진 반면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의 등산용품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는 여전히 높다.
이러한 시장상황이나 한국인들의 소비 행태로 보아 써미트의 선전은 일종의 이변이다.
 
“큰 욕심 부리지 않고 배낭 단일 품목에 집중한 것이, 요새 하는 말로 선택과 집중에서 성공한 것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장재순(張載淳ㆍ54) 사장은 말한다.

“몇 년 전에 잠시 의류쪽에 눈을 돌렸다가 어마 뜨거워라 하고 손을 뗐지요. 배낭마저 잃게 될 것 같았어요.
모델 하나마다 정성들여 살펴 제품을 내는 게 몸에 밴 저로선 사이즈별로 대량 생산해야 하는 의류가 체질에 맞지도 않았구요.”

단일 품목으로 외제와 맞먹는 경쟁력을 보이고 있는 국산 브랜드는 현재 써미트 배낭이 거의 유일하다.
종합상사 제품이라 해도 외제와의 경쟁에서 제대로 견디고 있는 한국 브랜드는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더더욱 써미트의 존재는 돋보인다.


엄홍길 8,000m급 거봉 등정 때마다 써미트 애용

엄홍길과 더불어 가장 많은 거봉들을 오른 데날리 익스페디션. 국내 종주파들에게도 인기다.
엄홍길과 더불어 가장 많은 거봉들을 오른 데날리 익스페디션. 국내 종주파들에게도 인기다.

써미트의 25년 역사를 보면, 비록 단일 품목일망정 써미트는 가능한 한 시장 원칙에 따라 움직여온 덕분에 지금과 같은 브랜드 가치를 누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장 사장은 산악 스타를 통해 효과적인 홍보 효과를 얻는 데 성공했다. ‘김지미가 쓰는 화장품이라야 영등포 공단 아가씨들도 사서 쓴다’는 소비심리의 기본을 그는 장터에서 본능으로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타를 모델로 동원할 자금력이 없던 그는 스타들이 쓸 수밖에 없는 제품을 만들어 그들에게 그냥 제공했다.
바로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등 한국의 8,000m급 거봉 완등자를 비롯한 여러 고산등반가가 그들이다.

화장품 아닌 배낭은, 특히 고산등반에서는 그 기능이 어떠한가에 따라 목숨이 좌우될 수도 있는 중요한 장비다.
예를 들어, 배낭 지퍼 이빨이 너무 작은 것을 써서 눈이 묻어 얼며 잘 여닫기지 않는다면, 혹은 젖은 장갑을 갈아 끼어야 하는데 배낭 저 밑에 깔려 있어 꺼내기 어렵다면 곧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 있다.

고산등반가들은 중량을 줄이는 데에도 고심을 거듭한다. ‘양말 한 켤레를, 혹은 초컬릿 한 조각을 더 넣어갈까 말까로 밤잠을 설쳤다’는 류의 등반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장 사장은 이러한 중량, 구조, 기능 등이 고산등반에 최대한 적합한 배낭을 만들어 엄홍길, 박영석 등에게 그냥 써보라고 주었다.

“엄홍길이 쓸 배낭 만들 때는 특히 배낭 등판 길이와 멜빵 구조에 신경 썼어요. 서구인에 비해서 체격이 비교적 작은 편인 한국인에게 유럽이나 미국 제품들은 등판이 너무 길었어요. 특히 홍길이는 신장이 168cm로 작은 편이라, 유럽 브랜드 배낭은 엉덩이 아래로 축 처져 영 불편해 했죠. 그래서 등판 길이를 좀 줄이면서, 또한 멜빵 길이를 등 길이에 맞게 조절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엄홍길은 그의 원정 주 후원업체가 어디든 8,000m급 거봉 등반 때마다 거의 모두 써미트 배낭을 자청해 썼다.

그러나 주변 평가를 빌면, 장 사장은 그렇게 용의주도한 사람이 아니다. 장 사장이 엄홍길용 배낭을 만든 최초 동기는 무엇보다 같은 거봉산악회 후배였기 때문이다. 장 사장과 엄홍길은 80년 거봉산악회를 함께 창립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다. “오로지 엄홍길의 성공적 고산등반을 위해 만들었고, 그것을 홍길이가 썼을 뿐”이라고 장 사장은 말한다. 그 배낭은 그러나 산악인들간에 크게 알려지며 여러 사람이 너도나도 찾는 배낭이 되었다.

직원과 배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 사장. “이 소형 배낭 나르시서스는 디자인이나 기능이 너무 앞서 나가서 팔리지 않고 있는 제품 중 하나”라고 한다.
직원과 배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 사장. “이 소형 배낭 나르시서스는 디자인이나 기능이 너무 앞서 나가서 팔리지 않고 있는 제품 중 하나”라고 한다.
“박영석도 노스페이스 전속이 되기 이전까지 여섯 개봉을 저희 써미트 배낭을 메고 오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왕용도 세 개인가 우리 배낭을 멨고요. 그 외에도 뭐, 많아요. 93년 광주전남연맹팀 박헌재 대원이 에베레스트 등정할 때 멘 배낭은 산악박물관에 소장돼 있지요, 아마.”

단점 발견되자 즉시 리콜, 소비자 신뢰 높여

써미트 배낭 중 8,000m급 거봉 최다 등정 배낭은 2000년부터 출시한 데날리 익스페디션(58리터)이다. 엄홍길과만 8개나 올랐다.

써미트 배낭을 멘 채로 히말라야 고봉을 바라보고 선 엄홍길씨 사진으로 만든 써미트 광고.
써미트 배낭을 멘 채로 히말라야 고봉을 바라보고 선 엄홍길씨 사진으로 만든 써미트 광고.

“어택형 배낭은 깊이 넣은 물품을 꺼내려면 헤드를 우선 열고 위의 조임끈도 푼 다음 손을 넣어서 뒤지거나, 위쪽 물건을 먼저 꺼내야 하잖아요. 데날리 익스페디션은 배낭 뒤쪽을 거북이등 모양으로 여닫을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서 배낭 하단부를 쉽게 이용할 수 있게 했어요. 헤드도 탈부착이 가능하게 해서 필요하면 배낭 안에 집어넣을 수도 있게 했고, 등판 길이조절도 가능하게 했고. 그러면서도 배낭 무게는 2kg 이하로 줄였지요.”

엄홍길과 절친했던 바스크팀도 이 배낭을 좋아했고, 사상 여섯 번째 80천미터 14거봉 완등자인 후아니토의 경우 마칼루와 로체를 이 배낭을 메고 올랐다. 이 배낭은 그후 한국 산악인들 간에 아예 고산등정용으로 자리매김되어 수많은 원정팀들이 이 데날리 익스페디션을 사 가져갔다. 현재 부산산악연맹의 K2 원정대도 이 배낭을 쓰고 있다고 한다. 

이 배낭의 편리함은 국내 종주파 산꾼들에게도 그대로 어필해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90년대에 대히트한 소형 배낭 ST908 이후 써미트 배낭 중 가장 많이 판매된 배낭으로, 현재에도 한 달에 100개 이상 팔리고 있다고 한다.

8,000m급 고봉 정상에 오른 배낭들을 앞에 두고 앉은 장재순 사장. 단일 브랜드 배낭이 8,000m급 16개 거봉을 모두 올라간 기록을 기네스북에 올릴 것이라 한다.
8,000m급 고봉 정상에 오른 배낭들을 앞에 두고 앉은 장재순 사장. 단일 브랜드 배낭이 8,000m급 16개 거봉을 모두 올라간 기록을 기네스북에 올릴 것이라 한다.

엄홍길이 이번 로체샤르 등정시에 썼던 써미트 버터플라이(58리터)는 데날리 익스페디션을 한 단계 진화시킨 제품이라고 장 사장이 자랑했던 배낭이다. 이 배낭은 등판 프레임을 기존 것보다 한결 가벼우면서도 강한 소재로 썼다.
그 결과 58리터 배낭으로는 엄청나게 가벼운 수준인 1,850g으로 무게를 경량화하는 데 성공한 제품이다.

그러나 장 사장은 엄홍길이 귀국한 즉시 이 배낭을 모조리 리콜했다. 통풍성을 높이기 위해 멜빵에 쓴 얇은 천의 봉제선 부분이 튿어지는 현상이 등반 도중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자동차라면 몰라도 배낭 리콜은 국내에선 아마도 처음이 아닌가 싶다. 판매에 최적기임에도 리콜을 강행한 이유에 대해 장 사장은 “그렇찮아도 국산 배낭이라면 색안경들을 끼고 보는데, 그냥 둘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자부심으로 그는 배낭을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한다.

“우리 써미트 배낭은 단일 브랜드로선 아마 세계 최초로 8,000m급 16개봉을 모두 오른 배낭일 겁니다. 이 기록을 기네스북에 올릴 작정이예요. 거봉을 올라간 총 횟수를 따지면 25회가 넘는데, 이 기록도 아마 최고일 겁니다.”

장 사장은 신제품이 나오면 반드시 직접 그 배낭을 메고 가까운 남한산성의 4시간 코스를 걸어본다. 그후 꾼들을 통한 필드테스트를 통해 단점 개선을 반복한다. 써미트의 히트작들에는 이러한 오랜 노하우가 그대로 집약돼 있다.

써미트가 그간 출시한 배낭 모델은 줄잡아 500종 가까이 된다. 그중 최초의 대히트작은 90년의 ST908이다. 그 무렵 국립공원 내 취사ㆍ야영 금지제가 시행되면서 당일산행이 유행하기 시작, 써미트의 20리터 소형 배낭 ST908은 불티나게 팔렸다.

“공장장 부인이 직공 몇 사람을 데리고 일년 내내 이 배낭만 만들었어요. 몇 년간 계속 그랬지요. 제가 말띠여서 말 머리 문양을 새겨넣은 이 배낭은 아마도 국내에서 시판된 배낭 모델 중 가장 많이 팔린 배낭일 겁니다.”

킨카조는 외국 유명 브랜드가 모방하기도

그후 티어드롭형 모델 킨카조 35리터, 40리터, U자형 프레임을 거꾸로 끼운 방식의 티어드롭형 45리터 배낭 하이랜드, 배낭 등쪽에 아이젠 주머니를 별도 부착한 40리터 배낭 아이스팩터 등은 독자모델이자 지금껏 꾸준히 팔리고 있는 스테디셀러다. 92년 출시한 킨카조는 외국 브랜드에서 모방품을 만들어낼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90년대 중반까지 배낭 시장만큼은 거의 써미트의 독무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팀버라인, 솔트렉, 레이백 등 새로운 브랜드의 국산 배낭들이 나오고 유명 외국 브랜드 배낭들이 수입되면서 써미트의 매출은 다소 줄어든 상태다. 무엇보다 지방 거래처 매장들이 유명 브랜드의 대리점으로 바뀌며 타격을 입었다. 때문에 장 사장은 “요즈음 긴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유명 브랜드 제품도 중국에서 제조, 싼 가격에 유입되고 있어요. 그들과 경쟁하려면 일단 품질에는 자신이 있으니까 디자인에서도 앞서가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디자인에 특히 더 신경을 써서 고급 브랜드화할 예정입니다.”

금강산 구룡빙폭을 오르고 있는 장재순 사장. 그는 고교시절부터 암벽등반을 했던 산꾼이다.
금강산 구룡빙폭을 오르고 있는 장재순 사장. 그는 고교시절부터 암벽등반을 했던 산꾼이다.

그는 91년 냈던 ST917을 떠올린다. 이 배낭은 당시로선 유럽 유명 브랜드 배낭과 거의 맞먹는 가격인 17만 원에 팔았으나 큰 인기를 끌었다. 디자인부터 재단, 봉제까지 정성들여 만든 한편 광고를 통해 널리 알린 덕이다.

다 같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라도 남에게 알리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다.
장 사장은 써미트 배낭이 가진 특장점을 등산전문지 광고를 통해 알리는 데에도 특히 주력했다. ST917의 경우, ‘이 배낭 하나를 만들기 위해 20개 시제품을 제작했습니다’라는 헤드라인의 잡지 광고를 내며 배낭 자체가 산꾼들 사이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외 그는 폭스바겐 자동차의 광고 시리즈에서 따온 ‘작은 것을 생각하십시오’라는 헤드라인 아래 작은 멜빵 고리만 하나 달랑 보여주고 이 멜빵 고리의 각도가 배낭에 무겁게 짐을 넣어도 밀리지 않는 구조임을 알린다거나 하는, 배낭의 각 부위에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가를 널리 알리는 일련의 광고를 연속해 게재했다.
그 광고 시리즈가 특히 주효했던 것으로 그는 돌이킨다. 결국 장 사장은 한국 소비자에게 가장 적합한 제품을 만들어 효율적으로 홍보한다는 시장의 기본에 충실했던 셈이다.

장 사장은 한영고 재학 시절부터 등산을 시작, 고교 동창들과 YCS(Young Climbers Society)라는 클럽을 만들어 인수봉 암벽을 숱하게 올랐다. 서울산악조난구조대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한 지도 오래다.

그는 고교 졸업 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가업인 가구업을 버리고 80년부터 재봉틀 두 대로 군자동 단칸방에서 배낭업을 시작했다. 83년부터 동진레저 배낭을 하청생산해주는 틈틈이 써미트라는 상표로 제품을 내기 시작해 90년대 초 여러 모델이 히트하며 써미트 제품만 내기에 이르렀다. “손가락 지문이 닳을 정도로 열심히 배낭을 만들었다”고 그는 돌이킨다.

그는 산꾼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장비업자다운 등반 경력을 쌓기 위해 등반에도 열중, 92년 38세 때 북미 최고봉 매킨리를 등정하기도 했다. 93년엔 엄홍길과 함께 원정을 나가 8,000m급 거봉 중 하나인 시샤팡마 등정을 노렸으나 제3캠프(7,300m)에서 되돌아선 적도 있다. 하산 중 그는 크레바스에 빠졌으나 허리가 모서리에 걸쳐지며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제가 이렇게 운도 있고, 뭣보다 인덕이 있어요. 이제 재도약을 시작했으니 지켜봐 주십시오. 국산장비 중 배낭만큼은 세계적으로 신뢰받는 브랜드가 하나 나올 겁니다.”


/ 글 안중국 차장 / 사진 허재성 기자

저작권자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