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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파타고니아 한국 여성 등반대] 한국 여성의 힘을 남미로 뻗친다

월간산
  • 입력 2007.12.03 21:46
  • 수정 2007.12.04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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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의 힘을 남미로 뻗친다
이명희·이명선·한미선 3인조, 파이네 중앙봉과 세로토레에 출사표

파이네 중앙봉에 도전하는 여성 클라이머들. 왼쪽부터 한미선, 이명선 대원, 이명희 대장.
파이네 중앙봉에 도전하는 여성 클라이머들. 왼쪽부터 한미선, 이명선 대원, 이명희 대장.

여성 3인조 등반대가 남미 파타고니아의 대암탑 파이네와 세로토레에 도전한다. 이명희, 이명선, 한미선 세 클라이머는 내년 1월9일 출국, 파이네 중앙봉(Torres Centrale del Paine··2,800m)의 윌런스-보닝턴 루트(Ⅵ/5.10c/A1·63년 초등)와 세로토레(Cerro Torre·3,102m)의 콤프레셔 루트(A1·28피치·71년 초등) 등반을 40일 동안 펼친다.

영국의 돈 윌런스와 크리스 보닝턴이 63년 초등한 윌런스-보닝턴 루트는 지난 1월 고산거벽등산학교 강사인 김창호-최석문 조가 한국 초등을 달성했고, 세로토레 콤프레셔 루트는 2002년 정승권등산학교팀이 한국 초등을 기록한 바 있다.

남미 파타고니아 산군에 속하는 두 암봉 중 파이네는 칠레 파이네 국립공원에 솟아 있고, 세로토레는 아르헨티나 지역에 있다. 난이도도 문제지만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일기변화가 극심해 등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시즌도 있는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

올 들어 첫 추위가 몰아닥친 11월18일 하드프리 등반의 메카 간현암은 날씨에 아랑곳없이 많은 클라이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대부분 올해의 암벽등반을 마무리짓는 ‘쫑바위’였다. 오후 들어 100명 안팎으로 불어난 클라이머 대부분 가벼우면서도 흥겨운 분위기였지만, 이명희씨(李明姬·33·타이탄·노스페이스)와 한미선씨(韓美善·34·한산악회)는 이들과 달리 표정이 무겁고 진지했다. 출국을 한 달여 남겨놓은 시점에서 마무리 단계 훈련이기 때문이다.

“파타고니아의 1월 날씨가 이 정도는 될 거야. 어떤 루트로 갈까?”

“아무 데나 가지 뭐. 선등은 가위바위보로 정할까?”

좌측 벽으로 등반로를 잡은 뒤 한미선씨가 선등에 나섰다. 손끝이 아릴 정도로 차가운 날씨에도 한씨는 물뱀이 수면 가르듯 유연한 동작으로 수직벽을 한 발 한 발 올라 30여 분만에 세 피치를 끝내고 상단벽에 올라섰다. 이명희씨는 빙벽화를 신었다. 파이네 중앙봉은 선등은 암벽화를 신고 빠른 속도로 등반하고, 후등자는 대개 빙벽화를 신은 채 주마링으로 올라서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 날 간현암에서 적응훈련을 하는 것이다.

파타고니아 파이네 남봉, 중앙봉, 북봉(왼쪽서부터). 여성 3인조가 등반할 윌런스-보닝턴루트는 북봉과의 안부에서 우측 라인을 따른다. / 오랜 실내인공암벽 트레이닝을 통해 5.13b급 클라이머로 등극한 한미선 대원. / 앳된 외모와 달리 ‘독종’으로 소문난 이명희 대장.
파타고니아 파이네 남봉, 중앙봉, 북봉(왼쪽서부터). 여성 3인조가 등반할 윌런스-보닝턴루트는 북봉과의 안부에서 우측 라인을 따른다. / 오랜 실내인공암벽 트레이닝을 통해 5.13b급 클라이머로 등극한 한미선 대원. / 앳된 외모와 달리 ‘독종’으로 소문난 이명희 대장.

속도 내기 위해 선등은 암벽화로, 후등은 빙벽화로

여성 3인조팀은 파이네 중앙봉 등반을 당일에 끝낼 계획이다. 그러려면 최고의 기량과 체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세 클라이머 모두 바위꾼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5.12~5.13급 수준이다. 대장 이명희씨는 암빙벽등반뿐 아니라 인공등반에서도 탁월한 기량을 지녔다. 익스트림라이더 주최 빅월등반대회를 2004년 이후 4년간 연거푸 우승함으로써 국내 여성 최고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빙벽 기량 또한 뛰어나 지난 시즌 선수권대회 우승, 노스페이스배 4위, 주왕산대회 3위의 성적으로 2007 빙벽등반경기 코리안시리즈에서 종합 3위의 자리에 올랐다. 15년 넘는 등반 경력에도 불구하고 요즘도 바위 하면 자다가도 벌떡 깨어나고 얼음 하면 창고로 뛰어가 피켈을 꺼내들 정도다.

이명희 대장은 등반에 입문한 지 1년만에 알프스 3대 북벽을 완등했을 만큼 타고난 클라이머로 통하는 최석문씨(崔錫汶·32)와 부부 클라이머로도 이름나 있다. 98년 산에서 인연 맺은 두 사람은 여러 해 동안 함께 등반해오다 2001년 카체브랑사·혼보로·무스툼·시카리 등 카라코룸과 힌두라지의 4개봉을 86일간에 걸쳐 등반하는 사이 연인 사이로 발전, 그 해 12월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 삼아 전국암장순례를 나섰을 만큼 골수 바위꾼들이다.

이번 원정 역시 남편 역할이 컸다. 지난해 알프스 등반 중 우연히 만난 선배 전병구씨(어센트산악회·안나푸르나 대표)에게서 파타고니아 등반을 적극 권유받았던 그녀는 올 초 우연찮은 기회에 파이네 등반에 참가한 남편을 보곤 용기를 얻어 이번 원정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최석문씨는 이 날 운전기사와 보모를 자청하고 동행했다. 이명희씨 부부는 아들 보건(5)을, 한미선씨는 딸 유빈(6)을 데리고 왔다. 아이들은 추위를 피해 개울 건너 민박집에 머물고 있지만 등반 중에도 수시로 눈길을 주면서 아이들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였다. 바위에서는 강인한 클라이머지만, 어린 아이들에게만큼은 따뜻한 엄마일 수밖에 없다.

5.13급 클라이머답게 처음 오르는 루트에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한미선씨는 올해로 10년차 클라이머다. 그녀는 워킹산행을 함께 할 사람을 찾기 위해 인터넷에 글을 올린 게 인연이 돼 암빙벽등반 전문산악회인 록파티산악회에 입회해 바위를 배우기 시작, 98년에는 회원 가운데 특히 등반을 좋아하는 이들끼리 한산악회를 창립하고, 등반에 매진해왔다. ‘한’은 ‘크고 넓고 하나’라는 뜻에서 한미선씨가 지은 이름이다.

남편 신성훈씨(39)가 인터넷에 글을 올린 뒤 처음으로 연락해온 록파티 회원이었고, 바위의 정이 사랑으로 승화되어 2000년부터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다. 신혼여행을 호주의 블루마운틴 암장에서 보내고, 2003년에는 돌도 안 된 딸아이를 시어머니께 맡겨놓고 남편과 함께 요세미티 원정에 나섰을 정도로 부부 모두 등반광이다.

아이들과 어울릴 때는 사랑 넘치는 엄마의 모습이지만 바위에만 붙으면 강인한 클라이머로 돌변한다. 맨오른쪽은 최석문씨. / 간현암 등반중 루트에 대해 의논하는 이명희 대장과 한미선 대원.
아이들과 어울릴 때는 사랑 넘치는 엄마의 모습이지만 바위에만 붙으면 강인한 클라이머로 돌변한다. 맨오른쪽은 최석문씨. / 간현암 등반중 루트에 대해 의논하는 이명희 대장과 한미선 대원.

산악인 남편들도 속셈 있어 보낸다? 

선운산의 고난도 루트 진달래 탈출(5.13b)을 국내 스포츠클라이밍 1인자인 김자인에 이어 두 번째로 완등한 한미선씨는 하드프리뿐 아니라 다양하면서도 여러 피치가 연속되는 자연암벽에서도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고 있다. 2007 빙벽등반경기 코리안시리즈에서 종합 8위의 성적을 올린 한씨는 5년째 인공암장에서 훈련을 쌓고 있을 만큼 등반 마니아다. 딸아이 육아 때문에 남편과 하루씩 번갈아 가면서 인공암장을 찾고 있다는 한미선씨는 직장인 법무법인 태평양에 휴직계를 내고 이번 원정에 참가한다.

이 날 남부권 하드프리의 메카인 선운산에서 등반하느라 훈련에 참가하지 못한 이명선씨(李明先·40·골수회·노스페이스) 역시 잘 알려진 여성 클라이머다. 2001년 바인타브락 산군 트레킹, 2005년 아이거 북벽·몽블랑과 이란의 다마반드 등정, 2006년 그랑드조라스 북벽·마터호른 북벽으로 이어지는 해외등반경력을 지닌 그녀 역시 5.12급 수준에 2007년 빙벽등반경기 코리안시리즈 종합 9위의 등반력을 가지고 있다. 후배 두 사람에 비해 등반력이나 체격조건이 조금 뒤지기는 하지만, 넉넉한 성품으로 후배들을 이끌 것으로 예상된다.

이명선씨는 그동안 후배들과 설악산, 북한산, 도봉산에서 암벽등반을 하고, 이중화를 신은 채 묵직한 배낭을 메고 하중훈련을 하는 등 훈련에 참가해오면서 체력보강과 기술향상을 위해 개인적으로 달리기와 인공암장 훈련을 해왔다.

한 차례 등반을 끝내고 개울 건너 민박집으로 돌아와 라면으로 점심을 때운 뒤 곧바로 간현암으로 자리를 옮겼다. 태양이 중천에 떠올랐는데도 기온은 올라갈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떨어진 듯했다. 바위 밑에서 동행의 등반을 지켜보는 산악인들 가운데 아예 침낭 속에 들어가 있는 이도 보일 정도로 날씨가 차가웠다. 그런데도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맑은 개울의 수면은 햇살이 부딪치자마자 튀어나오며 오전보다 더욱 반짝인다. 
등반에 앞서 아이들과 얘기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이 원정 나가면 아이들은 누가 보는지 궁금해하자 최선문씨가 “저요” 하며 손을 든다. 한미선씨 역시 딸아이를 돌보는 일은 남편 몫이다. 이명희씨는 “아이들이 크면서 부부가 함께 원정 나가기는 힘들 것 같다”며, “그런데 남편에게 맡겨놓았다 돌아와서 보면 애 얼굴이 핼쑥해 있다”며 남편을 힐끔 쳐다보고, 한미선씨 역시 이명희씨의 말에 동의한다.

“명희나 저나 ‘환자’예요. 산 중독이죠. 남편들이라고 다른 줄 아세요. 마찬가지예요, 왜 저희들을 보내주는 줄 아세요. 다 속셈이 있어요. 내년에 어딘가 갈 생각에 이번에 적극 후원하는 거라니까요(웃음).”

이번 원정에 앞서 세 사람은 서너 피치씩 돌아가면서 앞장서기로 약속을 했다. 세 사람 모두 등반 욕심이 많다 보니 서로 앞장서겠다고 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명희씨는 칠레의 파이네 중앙봉에 대한 정보는 늘 함께 지내는 남편이 세세히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 없으리라 자신하고 있으나 세로토레는 최근 정보를 구하지 못한 상태인 데다 벽 밑에까지 어프로치가 까다롭고 짐 수송에 애로사항이 많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언젠가는 한국 여성이 낸 초등루트 생길 것”

또한 남편 팀은 2인 1조로 당일에 끝냈으나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뒤지는 여성들 3명이 등반하기에 당일에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에 동벽으로 접근하기 앞서 한 차례 비박도 염두에 두고 있다. 물론 최대한 무게를 줄인다는 생각에 로프도 가장 가는 로프를 가져가고, 비박도 우모복에 바람막이 정도로 끝낼 계획이다.

이번에는 이명희씨의 선등이다. 따라서 이씨가 암벽화를 신고, 한명선씨는 빙벽화를 신는다. 이명희 대장은 이번 원정에 대해 여성 산악인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목표는 아니라고강조한다. 이 대장은 다음 목표는 트랑고타워라고 슬쩍 운을 띄운 뒤 “그것도 마지막 목표는 아니다. 언젠가 한국 여성들의 초등 기록을 남기겠다”고 야심 찬 꿈을 밝혔다.

“파키스탄 4개봉 원정 때는 고소와 낙석, 비박 등 국내 산에서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무척 고생했어요. 그 경험 덕분에 타퀼 삼각북벽, 드류, 에귀디미디, 그랑조라스 북벽을 등반한 알프스 원정 때는 수월했어요. 이번에는 또 달라요. 낙석과 고소는 없지만 대신 난이도가 훨씬 높죠. 자유등반도 해야 하니까요. 이렇게 여러 대상지를 고루 경험하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등반을 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요.”

이 대장은 “좋은 선배와 친구 셋이서 나서는 원정이니만큼 즐겁고 기억에 남는 원정이 되리라 믿는다”며, ““여자들끼리 가기 때문에 어려우리라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오히려 더 편안할 것 같고, 서로 ‘내가 주인’이라는 입장에서 더욱 열심히 등반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명희 대장은 “파이네 가자는 얘기를 제일 먼저 꺼낸 데다 스폰서 구하는 일을 도맡아 하다보니 우물우물 대장을 맡게 되었다”며, “경제적으로 많은 부담을 가지고 시작했으나 노스페이스와 IT업체인 유니퀘스트에서 적극 후원해주는 바람에 가벼운 마음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고 두 업체에 대한 고마움을 나타냈다.

오후 4시가 다가오면서 기온은 더욱 떨어지고 바람까지 불어댔다. 간현은 한겨울을 맞고 있었다. 그런데도 세 번째 등반을 마치고 하강한 이명희 대장과 한미선씨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거라며 다시 바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 글 한필석 차장대우
사진 허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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