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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해외원정] 바투라2봉 세계초등

월간산
  • 입력 2008.10.08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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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에서 건져낸 희망. 서울시립대 개교 90주년 원정대, 세계 최고 미등봉 초등

히말라야와 카라코람 산맥에 남아 있는 수많은 산들 중에 아직까지 인간에게 그 정상을 허락하지 않은 가장 높은 산, 바투라2봉(7,762m)으로 우리 원정대는 향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어두운 동굴을 헤매듯 미지의 빙하와 세락, 그리고 바위벽들로 이루어진 불확실한 세계다.

더욱이 서부 카라코람에 위치한 바투라2봉은 1976년 독일대에 의해 주봉인 1봉(7,794m)이 등정된 후 78년에 일본팀은 이 서쪽에 한 봉우리를 올랐는데 정확히 그 위치를 알지 못하여 4봉(7,594m)으로 보고했으나 최근 일본산악협회에 의해 3봉(7,720m)이라고 수정 발표할 정도로 이 산군을 포함하는 독일, 영국, 일본, 스위스, 미국에서 발행된 지도는 제각기 다르다. 이와 같이 바투라 산군에 대장벽으로 선 1봉~6봉은 그 자리가 명확하지 않아 우리 원정대는 등정은 물론 이 산군을 규명하는 작업이 두 번째 목표였다.

지구상에 남아 있는 수많은 산들 중에 아직까지 인간에게 그 정상을 허락하지 않았던 가장 높은 산 바투라2봉(7,762m)으로 우리 원정대는 향했다. 등반루트는 구름에 덮인 대장벽 좌측 밑으로 개척했다.
지구상에 남아 있는 수많은 산들 중에 아직까지 인간에게 그 정상을 허락하지 않았던 가장 높은 산 바투라2봉(7,762m)으로 우리 원정대는 향했다. 등반루트는 구름에 덮인 대장벽 좌측 밑으로 개척했다.

‘山 앞에 女子란 없다. 人間만이 있을 뿐이다’

바투라2봉이 최고(最高)의 미등정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카라코람 산맥을 홀로 탐사하기 전이었다. 히말라야 동쪽 끝자락 얄룽창포 대협곡이 아우르는 안쪽 7,756m 높이의 남체바르와(Namche Barwa)가 일본팀에 의해 1990년대 초반 초등정된 이래로 우리가 오르려는 산은 지금까지 그 자리를 고고히 지키고 있다. 그 매력은 세계의 여러 등반가들을 끌어들였고 2003년 독일팀, 2005년 이탈리아팀 등 여러 번의 등반이 시도되었었다. 나는 2000년, 01, 03, 04년에 걸쳐 네 번 답사했다.

이번 원정은 서울시립대 개교 9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원정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추진되어 훈련과 준비기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특히 원정대장을 맡은 내가 봄시즌 네팔의 마칼루와 로체를 등정하고 귀국하자 출국은 20여 일밖에 남지 않았고, 우리가 등반할 남벽의 정상부 밑에는 600~700m의 수직암벽이 가로막고 있는 데다 대부분의 원정대원이 고산등반이 처음인지라 탁월한 벽등반 실력과 대원들과 잘 어울릴 인품을 가진 최석문(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을 초청하여 동행하기로 했고, 이동훈 교수, KBS 영상앨범 山의 김석준 PD를 포함, 9명으로 원정대를 꾸렸다.

7월2일, 3일간의 도보 캐러밴으로 나와 석문이가 적절한 베이스캠프를 찾기 위해 선발로 나선 후에야 두 개의 빙하 사이에 올라앉은 바토쿠시(Batokushi·4,115m) 초지대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할 수 있었다. 각양각색의 야생화가 핀 천상의 화원이었다.

8월 11일 오전 9시 25분 삼각형으 피라미드를 올라 바투라2봉 세계 초등을 이루었다. 실제 정상은 두 명이 설 수 없어 밑에서 찍었다.
8월 11일 오전 9시 25분 삼각형으 피라미드를 올라 바투라2봉 세계 초등을 이루었다. 실제 정상은 두 명이 설 수 없어 밑에서 찍었다.

베이스캠프는 기존의 팀들이 설치했던 바투라 월(Wall)의 남서쪽 발타르(Baltar) 빙하를 택하지 않고 남동쪽의 들어온 것이다. BC의 고도가 너무 낮아 정상까지 3,650m의 표고차가 난다. 대원 중 재학생들 4명이 시험 때문에 출국이 늦어진 데다 카라코룸의 등반시즌을 맞추려면 쉴 시간이 없다.

BC 도착 다음날 포터 7명을 데리고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는 얼음빙하까지 150m의 로프를 고정하여 짐을 데포하고 되돌아왔고, 3일째 되던 날 C1(5,150m)을 구축하고 C2 개척에 필요한 장비와 식량 수송도 일부 마쳤다.

남은 대원들은 BC 구축과 고소적응을 했다. 대원들에게 큰 형님이신 이동훈 교수(환경공학과)께서는 산악회 선배이자 한국폐기물학회 부회장으로,나와는 93년 트랑고타워(6,284m) 북동필라 완등, 96년 가셔브룸4봉(7,925m) 동벽 신루트 원정에 동행했었다. 예전 원정에서도 그랬듯이 형님은 이번에도 등반결과 못지않게 친환경 등반활동을 강조하셨고, 이것이 우리의 세 번째 원정 목표가 되었다. 형님의 등반기다.

‘원정으로 인해 환경을 하나도 훼손하지 않을 수는 없다. 특히 아무도 오른 적이 없는 미답봉의 초등원정은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히말라야 원정은 등반 선진국에 비해 시기적으로 반세기 정도 늦게 출발하였고 환경의식이 높아진 오늘날 원정에 의한 환경훼손의 우려와 비난의 정도도 심한 상황에 원정을 나서고 있다.

따라서 본 원정대에서는 완벽히 환경보전을 할 수는 없더라도 원정기간에 환경훼손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방법을 모색하고, 원정 종료 후 장기적으로는 환경보전에 거의 문제가 없도록 하는 조치는 물론 환경오염문제 최소화 대책을 마련했다. 이곳은 일부 야크나 양 방목을 위한 목동들 이외 이삼십 년간 원정대나 사람들이 접근한 적이 없는 곳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지역이다. 이러한 지역에 환경적인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계획을 세워 실행하고 있다.'

(왼쪽)'추위와 위험으로 나아가는 용기, 힘든 상황에서도 앞장설 수 있는 의지, 동료들을 아끼고 팀에 공헌할 수 있는 희생정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알피니스트의 마음.' C1 구간./(오른쪽)바토쿠시 빙하의 데포 포인트로 모레인 절벽을 내려서는 서정희 대원.
(왼쪽)'추위와 위험으로 나아가는 용기, 힘든 상황에서도 앞장설 수 있는 의지, 동료들을 아끼고 팀에 공헌할 수 있는 희생정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알피니스트의 마음.' C1 구간./(오른쪽)바토쿠시 빙하의 데포 포인트로 모레인 절벽을 내려서는 서정희 대원.

베이스캠프를 철수할 때까지 원정대는 화장실, 음식물 찌꺼기, 폐기물 분리수거, 고소캠프의 쓰레기 처리 등 형님의 지도에 따라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벽에 설치해놓은 고정로프는 모두 회수하지 못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앞에서 루트를 개척했다. 7월8일 위험스러운 세락을 돌파하여 C2(5,950m)를 구축하고, 15일 C3(6,650m)를 구축하기까지 대원들을 몰아붙여야 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신태문, 최석문이 지원을 맡고 박성구, 박영재, 이윤지, 서정희는 고소적응을 하며 힘겨운 짐수송을 한다. 45kg의 체중과 작은 체격의 정희 또한 15~20kg의 짐수송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정희는 이러한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처음으로 내 힘으로 올라가 보고 싶은 산이 생겼다. 나는 그 동안 산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하지 않고 살아온 것 같다. 단지, 女子라는 이유로 말이다. 山은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다. 그 차별은 우리 자신이 만들 뿐이다. 山 앞에 女子란 없다. 人間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제부터 인간 서정희로 산을 대할 것이다.’

'山 앞에 女子란 없다. 人間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제부터 인간 서정희로 산을 대할 것이다.' C2 세락지대.
'山 앞에 女子란 없다. 人間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제부터 인간 서정희로 산을 대할 것이다.' C2 세락지대.

32피치 등반과 5일간 작업으로 대장벽 벗어나

바투라2봉 초등을 목표로 2005년에 이어 두 번째 시도를 하려고 올해 같은 시즌에 입산 신청한 이탈리아의 시몬느 모로는 미국인 베네가스 쌍둥이 형제와 함께 팀을 보강하였고, 어느 날 갑자기 바토쿠시(6,050m) 정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발타르 빙하에 BC를 설치하였고 정상대로라면 우리의 C2에서 그들의 루트도 합류하게 된다. 후에 한국에서 온 연락에 의하면 모로 팀은 다른 산으로 대상지를 바꾸었다고 했다.

출국 전 이들의 입산신청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경쟁구도가 되었다. 그러나 행여 그들이 먼저 초등의 영광을 안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방식으로, 우리 속도로 등반할 것임을 대원들에게 주지시켰었다. 등반을 마친 지금의 생각이지만 남벽은 모로 팀이 채택한 알파인 스타일로 오르기에는 벽이 높았고 난이도 또한 높았다.

이런 어려운 초등 봉우리는 대부분 2년간의 프로젝트로 짠다. 첫해에 벽의 정찰과 등반을 절반쯤하고 다음 해에 와서 등반을 마무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나는 만약 등반이 지연되면 2학기 수업이 시작되는 재학생은 귀국시키고 남은 대원이 계속 등반한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올해 끝내고 싶었다.

(왼쪽)베이스캠프에서 장상까지 3,650m의 표고차가 나는 바투라 대장벽./ (오른쪽)'매일같이 쏟아지는 눈사태와 무너지는 세락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서 빠져나올 때마다 기도를 합니다'(박성구). C2 세락 하강.
(왼쪽)베이스캠프에서 장상까지 3,650m의 표고차가 나는 바투라 대장벽./ (오른쪽)'매일같이 쏟아지는 눈사태와 무너지는 세락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서 빠져나올 때마다 기도를 합니다'(박성구). C2 세락 하강.
히말라야의 등반 경험이 있고 정희의 선배로서 줄을 묶었던 윤지, 어려움 속에서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던 그녀 또한 땀에 전 바투라의 쓴 냄새를 맡으며 기록하고 있다.

‘선배들이 개척해 놓은 캠프지에 도착할 때, 고정로프를 이용할 때, 진정한 알피니스트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다른 모든 일들이 그러하겠지만 등반에 관해서만큼은 전적으로 마음에 대한 문제다. 이곳에 와서 그것을 확실하게 깨닫는다. 추위와 위험에 나아가는 용기, 힘든 상황에서도 앞장설 수 있는 의지, 동료들을 아끼고 팀에 공헌할 수 있는 희생정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마인드 컨트롤. 이번 등반에서 나는 이러한 것들을 배워간다면 내 인생의 가장 큰 배움을 얻는 것이 아닐까! 산에서 한없이 작고 부족한 내 자신을 본다.’

이제 C3 위로 바투라 대장벽을 뚫고 나가야 한다. 출국 전에 예상했던 벽의 각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었고 오르려는 자를 짓눌렀다. 눈이 붙어 있어 난이도는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고 판단했지만 실제는 오버행을 이루고 있다. 벽을 넘어설 가능한 루트를 태문형, 석문과 상의했지만 각기 의견이 달랐다. 장고와 망설임은 원정대장의 미덕이 아니다. 원래 예정루트인 우측 벽으로 올라 중단의 살짝 붙은 얼음과 바위 위를 좌측으로 가로질러 오르는 루트를 선택했다.

통상적인 한국의 원정대 대장은 루트작업에서 선등을 거의 하지 않는다. 대원들에게 우리는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야했다. 그 첫 번째 방법은 앞에 서서 줄기차게 밀어붙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체력에도 한계가 있는 법, 너나 할 것 없이 지쳐가고 있었다. 한 달 동안 대원들이 베이스캠프에 쉰 날은 1주일도 안 된다.

루트작업을 위해 2개조로 나누었다. 태문형과 석문, 그리고 나와 성구가 한 조다. 첫 부분의 내 작업에 이어 그 다음 태문형 조가 나섰다. 태문형은 나를 등반에 입문시키고 가르친 스승이나 다름없다.

국내 빙암벽에서 그의 폭발적인 에너지 등반은 도를 넘어 어떤 때는 무대포적이라 할 정도였는데, 그런 형도 위험한 벽 앞에서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바위벽에서 확보 포인트는 대부분 하나의 피톤이나 스크류를 설치해 32피치 등반과 5일간의 작업으로 드디어 대장벽을 벗어났다. C3와 남벽의 모습.
바위벽에서 확보 포인트는 대부분 하나의 피톤이나 스크류를 설치해 32피치 등반과 5일간의 작업으로 드디어 대장벽을 벗어났다. C3와 남벽의 모습.

‘석문이는 장비를 챙겨서 다음 진로를 개척한다. 될 수 있는 한 바위지대를 이용하여 확보하면서 눈사면을 피해가며 전진하는 석문이의 모습이 대견스럽다. 마음가짐의 차이일까, 지금의 내가 너무 무력해 보인다. 나도 꽤나 과감하고 힘도 있었는데 지금의 모습은 너무 초라해 보인다.’

석문이는 2001년 파키스탄에서, 2007년 남미의 파이네 암탑에서 나와 파트너를 이룬 멋진 등반가다. 그가 반밖에 들어가지 않은 작은 피톤 하나로 확보 포인트를 만들어 놓고 기다린다 해도 나는 그를 믿는다. 며칠간 계속되는 벽에서의 개척작업으로 석문이의 입술은 부르트고 헤어져 문드러졌다.

벽에서는 다이니마 7mm 로프를 사용했다. 고정로프 마지막 지점에 도착하여 후등자가 도착할 때까지 몇 시간을 기다릴 수 없어 K2에서처럼 단독으로 로프를 지고 설치해 나아갔다. 미치지 않았다면 7,000m가 넘는 바위벽에서 이런 등반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하겠는가. 석문이는 나의 이런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린 하루를 쉬고 창호형과 성구가 다시 그 길이를 연장하고 돌아왔다. 그렇게 남벽에 조금씩 우리의 집념과 의지를 연장시켜 나갔다. 이번엔 네 명이 함께 벽으로 향했고 멀고 멀게만 느껴지던 중앙 설벽까지 창호형이 로프를 연결시켜 놓았다. 혼자서 많은 고정로프와 피톤으로 연결했던 그곳을 나는 형의 닉네임을 따서 방랑자의 트래버스(Himalayan Vagabond’s Traverse)라고 부르고 싶었다.

7,000m대의 남벽에 석문이는 조금씩 우리의 집념과 의지를 연장시켜 나갔다.
7,000m대의 남벽에 석문이는 조금씩 우리의 집념과 의지를 연장시켜 나갔다.

창호형의 그런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책임감, 의지, 열정만으로 혼자서 그곳을 등반한다는 게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또 다른 무엇이 그의 심장을 뛰게 하여 그곳으로 향해 갈 수 있게 만들었을까! 마지막 트래버스 설벽 구간을 창호형이 오르고 있다.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처럼 반 박자도 어긋남 없이 그렇게 벽과 형은 황홀히 취해가고 있었다’라고 그는 등반기에 적었다.

서서히 벽에 적응한 석문의 선등은 보고만 있어도 신바람이 난다. 성구가 말없이 뒤에서 로프를 지고 따라오다가 “형 저도 가고 싶어요”라고 허공에 대고 외친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또 어떤 어려움과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지 나도 알지 못한다. 호되게 호통치고는 내려보냈다. 성구의 첫 고산등반은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함축되어 있다.

‘어머님. 이곳에 온 지도 한 달 열흘이 지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눈사태와 무너지는 세락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서 빠져나올 때마다 기도합니다. 어머님의 얼굴을 다시 보게 해 달라고….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이 거대한 산군을 찾아다니고 헤매면서 무엇을 얻으려고 이토록 갈구하는지를. 원정을 떠난다고 할 때 저의 뺨을 때리시며 말리시던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등정자 이름 밝히지 말아달라'

바위벽에서 확보포인트는 대부분 하나의 피톤이나 스크류를 설치하며 32피치 등반과 5일간의 작업으로 드디어 대장벽을 벗어났다. 드디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파른 설면에 닿았다. 우린 하이파이브를 했으며 그냥 웃어댔다. 내일은 정상에 갈 수 있으리라. 아래의 중단에 이미 태문형과 영재가 우리가 하루 쉴 텐트를 설치했을 것이다. 8월2일이었다.

(위)'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처럼 반 박자도 어긋남 없이 그렇게 벽과 홍홀히 취해가고 있었다.'/ (아래)이번 시즌 우리 원정대와 같은 봉우리에 입산신청하였고 바토쿠시(6,050m) 정상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이탈리아 시몬느 모로 팀의 텐트와 대원.
(위)'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처럼 반 박자도 어긋남 없이 그렇게 벽과 홍홀히 취해가고 있었다.'/ (아래)이번 시즌 우리 원정대와 같은 봉우리에 입산신청하였고 바토쿠시(6,050m) 정상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이탈리아 시몬느 모로 팀의 텐트와 대원.

돌아온 비박 텐트는 바위 위에 덮인 만년빙을 깎아 만들었으나 반쯤 허공에 매달려 개인확보를 별도로 해야했다. 각자 아이스스크류 하나씩을 더 박고 안전벨트를 차고 휴식에 들어갔다. 밤새 눈이 내린다. 쏟아져 내리는 분설눈사태에 우리 둘은 두려움을 친구 삼아 텐트와 설면 사이의 눈을 헬멧으로 퍼내며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지긋한 새벽이 밝았고 정상이 아닌 하산을 결정했다. 다음은 석문의 기록이다.

‘3일간 휴식을 하며 정상이란 목표를 향해 마음을 정리하며 대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8월7일 C1으로 떠났다. 높은 기온으로 그동안 많이 내린 눈도 거의 녹아 힘들지 않게 캠프로 이동할 수 있었다. 또한 텐트를 접어놓고 내려와 쉽게 복구할 수 있었는데 침낭이 하나밖에 없어 같이 덮고 그 위에 매트리스 덮고 잠을 잤다.

예상 등정일의 불안정한 일기예보로 다음날은 C3까지 진출했고 다른 대원들도 일정을 하루 앞당겨 운행했다. 묻힌 텐트로 고생했던 저번 운행의 교훈으로 장비를 세락에 매달아 놓고 내려갔는데 이번엔 장비가 너무 높이 달려 있었다.

8월9일 새벽 다시 남벽으로 향한다. 방랑자의 트래버스를 지나 암벽구간의 마지막 픽스로프 지점에 도착했고 먼저 도착한 형은 텐트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2m 가까이 눈을 쌓아 올리는 힘든 작업을 마치고서야 C4(7,250m)를 설치할 수 있었다. 형은 200m 6mm 로프 한 동을 더 가지고 혼자서 로프를 고정시키고 텐트로 돌아왔다.

C4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산들과 불안정한 감정들로 혼돈되는 나를 본다. 베이스캠프에 새벽 2시쯤 깨워 달라고 무전교신을 하고 잠을 자려하지만 내일 등반의 긴장감 때문일까 잠이 오질 않는다. 설사면에 눈사태가 나지 않을까, 날씨가 나빠지지 않겠지, 추위로 손발에 동상이 걸리지 않아야 하는데, 그리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 또 여러 생각과 생각들이 얽히는 밤이었다.

베이스캠프에서 무전이 왔고 일어나 보니 눈이 내리고 텐트 위로 분설눈사태가 날아간다. 시간을 기다려 보지만 날씨는 바뀌지 않는다. 우린 많은 식량은 없어도 인내심과 물을 녹일 가스는 충분히 가져 왔기 때문에 4~5일은 버틸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만 형은 시간이 모자라면 베이스캠프를 철수하고 두세 명이 남아서 등반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고 한다.

바투라2봉(7,762m) 초등정 루트 개념도 (실제 정상은 앞의 삼각 피라미드 암봉 뒤쪽에 있어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바투라2봉(7,762m) 초등정 루트 개념도 (실제 정상은 앞의 삼각 피라미드 암봉 뒤쪽에 있어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8월11일 새벽 베이스캠프로부터 무전이 왔고 텐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영하 27℃의 냉기가 손끝과 발가락을 헤집고 들어온다. 손가락을 손바닥으로 감싸보지만 체온이 잘 전달되지 않아 팔을 아래로 털어도 마찬가지다. 언제 쏟아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설벽을 형이 노련하게 오르고 있다. 무릎 이상 빠지는 눈 상태에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내가 앞으로 나가 러셀을 하고 싶었지만 내 느린 두 다리는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많은 걸음을 내주지 않는다.

그러기를 4시간30분이 지나고 태양이 비추고 있는 정상 피라미드 아래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지막 50m의 무너져 내리는 설릉을 형이 마무리 지으며 정상에 섰다. 8월11일 오전 9시25분이다. 정상에서 동훈이형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등정자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단지 두 명의 대원이 정상에 올랐다라고만.’

정상의 대가로 15kg의 체중을 바투라에 바쳤다. 저 아래로 발타르 빙하가 구름 사이로 순간 나타났다 사라진다. 2004년 바투라 탐사의 마지막 계곡 발타르 빙하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권총으로 현지인 두 명을 쏘아 죽이고 달아난 세 명의 살인범들이 빙하 옆 텐트로 돌아오던 나에게 총을 쏘며 달려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목숨을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찍은 바투라 필름은 두고 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도망쳤고 그리고 살아났다. 현재 그들 세 명은 길기트의 감옥에 19년형을 살고 있다. 그때 찍은 사진 몇 장으로 나는 이 원정대를 꾸렸다. 정상에서 내려와 후출사표(後出師表)와 같은 이 글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8년간 가슴에 품어온 꿈 이루자 새로운 정상 보여

‘저에게는 8년간 가슴 속에 품어 온 꿈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 꿈은 누군가 ‘그건 불가능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수록 심장은 더 뛰었고 자신의 꿈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서울시립대학교 개교 90주년 파키스탄 바투라2봉 세계초등정 원정대가 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그 정상에 올라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2008년 8월11일, 현지시각 오전 9시25분, 두 차례에 걸친 시도 끝에 2명의 대원 손에 든 깃발은 영하 27도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힘차게 펄럭였습니다.

山은 산악인에게 도전의 대상이지 정복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또 山은 자비롭지만도, 나약한 자에게 동정을 베풀지도 않았습니다. 원정대는 해발고도 7,762m 바투라2봉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이상범 총장님을 비롯, 일만 명의 서울시립대인, 총동창회, 삼화회, 산악회, 그리고 원정대에 대원을 보내주신 가족들, 협찬사 등 모든 분들의 사랑과 열정, 도전정신이 7,762m 바투라2봉 정상보다 높았기 때문입니다.


/ 글·사진 김창호 서울시립대OB·LS네트웍스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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