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충북 옥천

[468호] 2008.10
입력 2008.10.23 09:41 | 수정 2008.10.21 14:49

차마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향수'의 고을

고향! 산업화시대에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난 우리는 늘 고향을 그린다. 고향쪽에 머리를 두고 죽는다는 여우(首丘初心)나, 북풍에 몸을 의지한다는 호(胡)나라 말, 남쪽 가지에 깃든다는 월(越)나라 새 이야기(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를 꺼내기 않더라도 고향은 그리움의 대상이다. 특히 온갖 곡식과 과일이 익어가는 이 가을은 누구라도 고향쪽을 향해 목을 쭈욱, 빼는 계절이 아닌가.

그리하여 충북 옥천(沃川)으로 간다. 가을날 고향을 그리는 여행지로는 옥천만한 고을도 없다. 정지용(鄭芝溶·1902-1950) 시인의 ‘향수’란 시 덕분에 옥천은 어느덧 ‘만인의 고향’이 되었기 때문이다.

둔주봉에서 내려다본 조망. 금강 물줄기와 산줄기가 만나 한반도 지형을 이뤘다. <사진=옥천군청>
①안내면 향토자료전시관 앞에 있는 청석교. 원래 군북면 증약리에 있었으나 경부선 철도공사로 인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게 되었다. ②청산 덕우리 산골의 풍경. 마을 입구에 있는 천년 묵었다는 소나무가 농촌 풍경을 소박하게 빚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배기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중략) // 하늘에는 성근 별 /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시인의 ‘향수’ 중에서

옥천의 중심을 굽이돌아 흐르는 금강. 옥천의 자연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금강 강변도로를 따라 한 바퀴 돌아봐야 한다.
평론가들은 ‘금빛 게으른 울음’이나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구절에서 시인의 천재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찬탄한다. 시인이 이 시를 발표한 게 우리 나이로 스물여섯이요, 또 1927년 당시로서는 매우 보기 드문 시적 표현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노래에서 일관되게 뿜어져 나오는 이미지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갖고 있는 정서인 고향의 이미지다.
정지용 시인의 생가를 찾아들어선 옥천 읍내. 아담한 옥천읍은 크게 두 군데로 권역이 나뉘어져 있다. 옥천역과 옥천 나들목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신가지’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옥천을 다스리던 중심지였던 ‘구읍’이다.

구읍은 전통적으로 옥천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구읍엔 유서 깊은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다. 옥천향교와 옥주사마소라는 문화유산과 일제강점기 초등교육 시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죽향초등학교 구교사가 보존되어 있다.

또 구읍 골목길엔 전통가옥이 제법 정겹게 자리 잡고 있다. 어느 골목은 소박하고, 어느 골목은 으리으리한 대궐 같은 기와집들이 들어서 있다. 그 옛날 대감이 살았다는 이런 큰 집들은 대부분 고급 한정식집이나 민박집 등으로 바뀌었으나, 그 주변을 기웃거리다보면 당시 옥천 고을을 호령하던 큰 기침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①옥천 구읍엔 으리으리한 전통 가옥이 많지만, 대부분 한정식집이나 민박집으로 바뀌었다. ②구읍의 춘추민속관을 찾은 아이가 전통 가옥을 둘러보고 있다. ③아담한 초가로 복원된 정지용 시인의 생가. 1927년 발표된 ‘향수’란 시는 우리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애송시로 꼽힌다. ④정지용 시인 생가 바로 옆에 자리한 정지용 문학관. 시인의 시문학 세계에 관해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중에서도 정지용 생가와 정지용 문학관은 옥천을 찾는 방문객들이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하는 곳이다. 방문객들은 정지용 생가를 둘러보면서 시에 등장하는 ‘실개천’을 가장 먼저 찾는다. 세월이 흐르며 시궁창이 된 실개천은 최근 보존하려는 노력 덕분에 송사리떼가 몰려다니지만, 시인이 노래한 그 실개천은 이미 아니다.

이젠 세월이 변해 시인이 살던 구읍엔 ‘넓은 벌’도 ‘얼룩백이 황소’도 ‘초라한 지붕’의 초가도 없다. 콘크리트 덮인 실개천 둑길을 걷노라면 시에서 얻은 감흥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21세기의 구읍에서 100년 전 옥천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생가에서 남쪽으로 난 사립문을 열고 나가면 도랑에 걸려있는 길쭉한 돌다리가 보인다. 시인 생가 앞의 실개천에 놓여있던 청석이다. 이 청석은 일제강점기 때엔 ‘황국신민서사’라는 글귀가 새겨진 채 신사 앞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후 실개천에 묻혀있던 것을 발굴해 생가와 문학관을 잇는 다리로 쓰고 있는 것이다.

다리를 건너면 시인의 높다란 동상 뒤로 문학관이 보인다. 문학전시실 입구엔 방문객이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정지용의 밀랍인형 소품을 마련해 놓았다. 문학전시실에서 시인의 육필원고와 향수 초간본을 구경하고, 영상 위로 흐르는 시를 보며 시낭송도 해본 뒤, 자리를 옮겨 공설운동장 근처의 관성회관으로 향한다.

관성회관 뒤편 언덕엔 정지용 시인의 대표 시라 할 수 있는 ‘향수’를 새긴 비석이 있고, 그 옆엔 시인의 흉상이 옥천 읍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고향땅을 바라보며 시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①죽향초등학교 구교사. 구읍에 있는 이 초등학교는 정지용 시인과 육영수 여사 등이 졸업한 사연 깊은 곳이다. ②옥천 이원면은 묘목으로 유명한 고을이다. 전국에서 최초로 묘목산업 특구로 지정됐다고 자랑하는 글귀가 선명하다. ③구읍에 있는 우편 취급국. 이렇듯 구읍엔 아직도 옛 읍내의 풍광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④배롱나무 붉은 꽃과 잘 어울리는 양신정. 1545년 전팽령이란 분이 낙향하여 지은 정자다. ⑤옥천 장룡산 기슭에 자리 잡은 용암사. 옥천의 유일한 보물인 쌍 삼층석탑과 어우러진 경내 풍광이 돋보인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 산꿩이 알을 품고 /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 (중략) //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정지용 시인의 ‘고향’ 중에서

1932년 발표된 ‘고향’은 정지용 시인의 대표시인 ‘향수’보다 10년쯤 뒤에 쓰였다. 이 두 편의 시는 10년이라는 세월을 두고 그리움과 상실감 사이를 오가고 있다. 외지를 떠돌다 고향으로 돌아온 시인에게 고향은 이미 옛 고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와 고향을 이야기 하며 감상에 젖었던 마음은 이즈음에서 잠시 접어두자. 정지용 시인의 고향 옥천은 삼국 시대엔 삼국이 쟁패를 겨루던 요충지였다. 이 고을에서 발굴된 고성(古城)만 해도 무려 4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옥천읍 서쪽의 관산성은 한반도의 패권을 바꾼 관산성 전투의 현장이다.

잠시 과거로 돌아가 보자. 때는 고구려·백제·신라가 한반도에서 패권을 다투던 삼국시대.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에 패하면서 개로왕이 목숨을 잃자, 어쩔 수 없이 피난길에 올라 임시 도읍을 삼았던 웅진(공주)시대의 백제는 초기엔 국운의 침체기에 들었지만, 무령왕이 즉위한 후엔 다시 중흥을 이루었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聖王·재위 523-554)은 국내적으로는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었으며, 지방통치조직과 정치체제를 개편하여 왕권을 강화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양나라,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성왕은 또 절치부심한 끝에 551년 신라 진흥왕과 힘을 합쳐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553년, 백제가 병합하려는 한강 유역을 신라의 배신으로 빼앗기자 신라 공격에 나서게 된다.

①옥천읍 서쪽에 솟은 삼성산. 정상에 있는 삼성산성 주변이 바로 관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②올 봄, 관산성 아래의 국궁장에서 열린 백제 성왕 추모제. <사진=옥천군청> ③백제 성왕이 포로로 잡혀 목숨을 잃은 관산성 전투의 현장인 구천. 주민들은 이 일대를 ‘구진베루’라고 부른다.
554년, 백제와 신라의 운명을 건 관산성 전투가 시작되었다. 관산성이 양군의 결전장이 된 까닭은 이 지역이 신라가 새로 점령한 한강 하류 지역을 연결시켜주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백제군은 가야와 왜국으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신라를 공격했다. 즉 관산성 전투는 4개국이 맞붙은 국제전이었다.

첫 전투에서 백제연합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백제연합군은 전투에서 승리한 후 다시 왜국에 원군의 증파를 요청했다. 이참에 확실히 승기를 잡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백제의 편이 아니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조 기록을 보자. ‘32년(554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동시대 같은 사건을 기록한 신라의 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다. ‘진흥왕 15년(554년) 가을 7월, 백제 왕 명농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에 쳐들어왔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아 싸웠으나 불리하자,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군사를 데리고 달려왔다.

교전하게 되자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좌평 4명과 사졸 29,600명을 베었으며,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여기서 백제와 연합했던 가량은 대가야, 아라가야 등을 말한다. 금관가야는 관산성 전투 22년 전인 532년에 이미 신라에 멸망했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셋째 아들이며,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인 김유신의 조부다.

그렇다면 영명하기로 소문나고,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성왕이 위험을 무릅쓰고 관산성으로 간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도 겨우 기병 50명만 데리고. 백제의 망명자들이 주축이 되어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서기는 당시 전투 상황을 자세히 적고 있다. 흠명(欽明) 15년조의 기록이다.

‘명왕(성왕)은, 아들 여창이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행군하고 침식을 거르는 일이 잦아 이를 걱정하여 스스로 가서 위로하려 했다. 신라는 명왕이 친히 온다는 말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 길을 끊고 쳐 격파하였다. 이에 고도(苦都)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청컨대 왕의 머리를 베게 해주십시오’ 하니 명왕이 대답하기를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맡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고도가 말하기를 ‘우리 국법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도 마땅히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말하기를 ‘과인은 매양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목을 늘여 베임을 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인 후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일서(一書)에 말하기를, 신라는 명왕의 머리를 수습하여 두고, 예로써 나머지 뼈를 백제에 보냈다. 신라왕이 명왕의 머리를 북청(北廳)의 계단 밑에 묻었다. 이 북청을 도당(都堂)이라고도 한다.’ 

성왕이 이렇게 처참하게 전사하면서 백제군은 전의를 상실해 관산성 전투에서 참패했고, 아들 여창은 단기필마로 겨우 전장에서 도망쳐 살아나왔다. 여창은 패전의 책임과 참수당한 부왕에 대한 애도 때문에 스님이 되려 했지만, 신하들의 권유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가 바로 위덕왕(威德王)이다.  위덕왕은 관산성 전투 이후 혼란에 빠졌던 백제의 민심을 추스르고 다시 국력을 모아 나간다.

하지만, 신라의 극적인 역전승으로 끝난 관산성 전투는 한반도의 세력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삼국 중에서 한반도 남동쪽에 치우쳐 있어 가장 뒤쳐져 있던 신라가 최후의 승자가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

신라는 관산성 전투 이후 국력이 급격히 약해진 대가야를 562년(진흥왕 23)에 이르러서 병합하면서 가야연맹의 모든 영토를 손에 넣게 된다. 결국 신라는 경남 일대의 비옥한 토지는 물론이요, 발달된 가야의 철기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 경제력이 급상승하게 된다.

또 당시 선진 지역인 중국대륙과 연결되는 요충지 당항성(경기도 화성시 남양만)도 쌓았고, 진흥왕은 함경도까지 북진하여 그곳에 순수비도 세웠다. 이후 고구려와 백제에게 협공을 받으면서도 한강 유역을 빼앗기지 않은 신라는 100여 년 뒤 당나라와의 연합으로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①'투망어업'이라 쓰인 조끼를 입고 투망질을 하는 옥천 주민. 만약 투망어업 허가를 받지 않고 투망을 던지면 수백만 원의 벌금을 문다. ②놀림낚시 채비를 한 강태공이 은어 낚시에 열중하고 있다. 몇 년 전 옥천군에서 대청호에 은어 치어를 방류한 뒤부터 금강과 보청천에 은어떼가 몰리고 있다. ③강가에 대놓은 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④금강변 마을인 동이면 청마리의 제신탑. 삼한시대부터 존재했다는 이 탑은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기원하던 신당 유적이다.


지금 삼성산(304m) 서쪽을 적시고 북서쪽으로 흘러가는 서화천 일대가 비극의 현장인 구천(狗川)이다. 옥천 읍내 4번 국도와 37번 국도가 만나는 삼양 사거리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금산 방면으로 2km 정도 가면 서화천에 걸린 나지막한 다리가 보이고, 그 다리 건너편 물가에 바위벼랑이 보인다.

이 일대가 백제 성왕이 신라의 복병에게 사로잡힌 구천이라고 전해진다. 주민들은 이 일대를 ‘구진베루’라고 부르는데, 이 둘레엔 진터벌, 말무덤, 군전리 등 옛 전장터임을 알려주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하지만, 당시 관산성의 위치가 학술적으로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많은 학자들은 관산성을 옥천 서쪽의 삼성산성과 그 주위에 이어진 용봉·마성산·장용산 등의 방어시설을 통틀어 부르던 이름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엔 ‘삼성산은 군의 서쪽 5리에 위치해 있고 고성의 터가 남아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대동여지도에도 삼성산 위치에 고성이 있었음을 표시하고 있다. 관산성의 중심을 이루는 삼성산은 높이 300m 정도의 나지막한 산이다. 그러나 망대 위에서 동쪽을 내려다보면 옥천 읍내와 그 너머로 굽돌아 흐르는 금강 물줄기가 펼쳐진다.

삼성산은 덩치로 보면 관산성 전투의 현장으로서는 협소하다. 전쟁사 전문가들은 당시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전사자 수가 무려 29,600명이라는 사서의 기록을 근거로 신라의 병력은 적게 잡아도 연합군과 비슷했거나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신라와 백제연합군의 병력을 합치면 최소 6만 명 이상이 이 부근에서 혈전을 벌였던 것이다.

안남면 도농리에 위치한 중봉 조헌 선생의 묘소.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서 칠백의병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렇지만 요즘엔 향토사를 하는 이와 동행하지 않으면 보통 사람들은 그 흔적을 되짚기 어렵다. 이정표는 물론이요, 흔한 추모비도 하나 없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성왕의 죽음은 안타까움만 더한 채 이렇게 묻혀있었다. 그렇지만 얼마 전부터 이를 아쉬워한 옥천 주민들은 성왕을 위해 관산성 근처의 국궁장에서 국궁대회를 열고 있다. 또 지난 봄엔 국궁장에서 성왕 추모제도 지냈다.

옥천문화원에 알아보니 이 행사는 문화원이 아닌 백제사에 관심이 많은 개인들이 십시일반으로 경비를 모아 치른 것이라 한다. 옥천군이나 옥천문화원에도 예산이 책정되어 있지 않아 내년 행사가 열릴지도 알 수 없는 일이라 덧붙였다. 아직 패자인 성왕을 위로할 준비가 덜 된 것일까.

성왕은 비록 패자이긴 해도 백제를 부흥 시킨 인물이다. 또 관산성 전투는 상승하던 국운도 순간의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라의 배신에선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하는 표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연을 적은 ‘백제 성왕 사절지’라는 비석 하나 세우는 게 뭐 어렵겠는가. 옥천군의 관심을 기대한다.

중봉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인 이지당. <사진=옥천군청>
자, 살벌한 전투 이야기에 마음이 무거워졌다면 금강으로 가보자. 정지용 시인이 복권되기 전인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옥천은 그다지 내세울 것 없는 고을이었으나 그나마 금강 덕에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는 그래서 큰 인기를 끌었다.

서울서 내려가다 보면 꼭 쉬어야할 지점에 있기도 했지만, 금강 덕분에 당시만 해도 전국에서 가장 풍치 좋은 휴게소로 꼽혔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옥천’이라고 하면 어딜까,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금강휴게소’라 하면 아, 그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북 장수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충북 영동의 양산팔경을 지나 옥천을 관통하며 굽이돌아 대청호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옥천의 9개 읍면 가운데 2/3인 이원·동이·청성·안남·안내·군북의 6개면을 적시고 흐르는 금강은 옥천 자연의 상징이다.

그래서 옥천 여정에서 금강 드라이브는 필수다. 고당리엔 ‘높은벌’이 있고, 합금리엔 정겨운 강마을이 오순도순 펼쳐지고, 청마리엔 삼한시대의 제신탑·솟대·장승이 남아있다. 또 비포장을 지나 지수리에 이르면 독락정(獨樂亭)이라는 정자가 반기고, 그 뒤로 솟은 둔주봉(384m) 정상으로 발품을 팔면 한반도 지형도 감상할 수 있다.

군북면 석호리 대청호 자락에 세워져 있는 청풍정. 이곳엔 구한말의 개혁가 김옥균과 그를 사모했던 기생 명월에 대한 애절한 사연이 전한다.
만약 금강변을 둘러보지 않는다면 비록 구읍에서 정지용 시인을 만났다 해도 옥천의 절반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길손은 이번 여정에서 금강변에 승용차를 세워놓고 밤을 꼬박 지새웠다. 추석을 앞둔 달은 제법 살이 올랐고, 강으로 쏟아지는 달빛은 그야말로 교교했다. 다리 위에선 밤낚시 나온 가족이 견짓대를 들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고, 강 건너 바위틈에선 사내 하나가 다슬기를 잡느라 랜턴을 들고 강물을 뒤지고 있었다.

투망을 들고 나온 사내는 첫 투망질에 은어 몇 마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이건 잡고기요” 하면서 강에다 도로 휙 던져버렸다. 그는 쏘가리를 노린다고 했다. 원래 전국의 어느 강이든지 투망은 불법이다. 걸리면 벌금도 수백만 원에 이른다. 이 옥천 고을에선 투망어업 허가를 받은 사람들만이 투망질을 할 수 있다. 그들은 관광객들의 착오를 막기 위해 항상 ‘투망어업’이라 쓰인 조끼를 입고 투망을 던진다.

투망허가 조끼를 입지 않은 사내는 자신의 불법이 찔리는지, 길손에게 괜히 투망을 하면 벌금이 얼만데 자신은 근처가 고향이라 괜찮다는 둥, 그럴 바엔 아예 투망을 만들지 말라는 둥 이런저런 이야기를 실없이 풀어놓았다. 외롭게 객지생활을 하는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시간이 흘러 달이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했는데도 사내는 쏘가리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달이 밝으면 고기가 안 나오지요.” 그러고 보니 다리 위에서 견짓대 낚싯줄을 풀었다 감았다 하던 이들의 살림망도 거의 비어있었다. 사내는 달이 너무 밝다며 또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냥 산책만 즐기는 길손에겐 이 달빛이 좋았다. 내일모레가 추석이라 해도 아직 푸른 기운이 남아있는 산기슭의 나무이파리들은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고, 강물은 화려한 황금비늘을 두르고 있었다.

새벽 무렵.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물안개. 새벽이 가까워오며 피어오른 물안개는 서서히 달빛도, 산도, 강도 모두 감추었다. “제기랄!” 여명이 밝았을 때 사내는 투망에 묻은 물안개를 툭툭 털어 자신의 트럭 뒤에다 내던지듯 실었다. 떠나려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밤새 달빛을 받으며 도란거린 사이 아닌가. 재미 좀 봤냐고 물었다. 사내는 대답 대신 빈 살림망을 가리켰다. 사내의 푸념 같은 엔진 소리가 물결 따라 흘러가자 강변은 다시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짙은 물안개 때문에 둔주봉에서의 한반도 조망은 포기하고, 중봉(衆峰) 조헌(趙憲·1544-1592) 선생 묘소로 향한다. 조헌 선생은 바로 임진왜란 때 영남의 곽재우·정인홍, 호남의 고경명·김천일 등과 함께 충청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분이다. 조선 선조 때의 문신·학자·의병장이었던 조헌 선생은 보은현감에 재직할 때엔 당시 충청도에서 치민제일의 목민관의 모범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듬치재에서 바라본 안내면 조망. 이 고을은 조헌 선생이 임진왜란 전에 은거하던 인연이 있다.
선생은 토정 이지함, 우계 성혼, 율곡 이이에게 수학하였으며, 특히 이이의 제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가치실용에 중점을 둔 스승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고, 율곡의 학덕을 기리고 배운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후율(後栗)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분에 대해 풀어가려면 먼저 지부상소(持斧上疏) 이야기를 해야 한다. 지부상소란 ‘제 의견이 옳지 않으면 이 도끼로 저의 목을 쳐주십시오’ 하는 뜻으로 도끼를 지니고 올리는 상소를 말한다. 절대 권력인 왕에게 목숨 걸고 바른 말을 하겠다는 의지인데, 조선시대에 지부상소를 올린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중봉 조헌 선생과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 선생이다.

조헌 선생은 임진왜란이 터지기 1년 전인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자 궁궐 앞에서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며 지부상소를 올렸다. 최익현 선생은 1876년 도끼를 메고 궁궐 앞에서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지부소(持斧疏)를 올렸고, 1905년엔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한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리며 도끼로 뜻을 표현했다.

①조선 선조 때의 문신·학자·의병장이었던 조헌 선생의 영정. ②매년 표충사에 진행되는 중봉 조헌 선생 추모제. ③조헌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안내면 도이리의 후율당. 조헌 선생은 율곡 이이의 학문을 잇는다 하여 자신의 호를 후율(後栗)이라 하였다.
옥천엔 중봉 조헌 선생의 발자취가 선명하다. 군북면 이백리 이지당(二止堂)은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이요, 안내면 도이리의 후율당(後栗堂)은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답양리 가산사는 선생의 영정과 영규 대사의 위패를 봉안한 절집인데, 지금은 위패만 모셔져 있다. 또 안남면엔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리고 매년 가을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는 중봉충렬제를 옥천문화원이 주관하여 지낸다. 선생의 고향은 경기도 김포. 그런데 어찌하여 옥천에 선생의 유적이 즐비한 것일까.

조헌 선생과 옥천의 인연은 임진왜란이 터지기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84년(선조 17) 보은 현감으로 있던 선생은 당시 반대세력의 모함에 의해 파직 당하는데, 이때 은둔생활을 한 곳이 바로 옥천군 안읍 밤티(栗峙)의 산골이다. 이후 조헌 선생은 이곳에서 지방 선비들과 지내면서 문하생을 두고 학문을 강론(講論)하며 지냈다.

선생은 1년 반이 지난 후 다시 관직에 나갔으나 당시 조정은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선생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이곳에 내려오게 된다. 선생은 생애 마지막 7~8년을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강학에 정진하는 데 힘썼다. 그러다 이곳에서 임진왜란의 발발 소식을 접한다.

이미 왜침을 예견하고 있었던 조헌 선생은 급히 청주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실패했다. 선생은 다시 옥천으로 내려와 의병 모집에 나섰다. 옥천은 선생이 은거하며 인연을 맺은 곳이라 문하생과 지인들이 많아서 이들의 도움으로 옥천에서 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조헌 선생이 의병을 모집할 때 쓴 격문이다.

‘귀신과 사람이 다 같이 증오하는 것은 도적이라. 화살이 이 원수들에게 함께하여 그들의 고향 땅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리라. 뜻을 굳게 먹는다면 귀신이 감동하고 백성들이 따라나서며, 일을 이루려고만 한다면 천지만물도 도우리라.’(조헌 선생의 ‘의병이여 일어나라! 왜적을 쳐부수자!’ 중에서)

5월에 거병한 선생은 보은 수리치재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8월1일엔 마침내 의승장 영규 대사와 청주성을 수복함으로써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의주로 북상하기 전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의병대가 흩어지자 남은 700명을 이끌고 영규와 함께 8월18일 금산 공격을 강행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왜군들도 큰 타격을 입고 퇴각함으로써 당시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렇듯 옥천은 선생의 고향은 아니지만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을 논하고 마음을 닦은 곳이자, 목숨을 걸고 구국의 의지를 세운 곳이다. 또 초기 의병 모집처이자 선생의 뼈를 묻은 고을이다. 넓진 않아도 잘 가꿔진 선생의 묘소를 지키는 소나무는 선생의 강직했던 기상처럼 오늘도 푸르다.

이번 옥천 여정의 마지막은 청산(靑山)이다. 청산은 지금은 면 단위로 격하되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어엿이 독립되어 있는 하나의 행정구역이었다. 금강을 제외하면 옥천의 가장 큰 젖줄은 바로 금북정맥에서 발원해 보은을 적시고 흘러내려온 보청천(報靑川)이다.

청산면민의 노래라 할 수 있는 청산예찬가 가사를 보면 ‘우뚝 솟은 도덕봉’, ‘보청천 맑은 물’, ‘기름진 넓은 들’ 등 모두다 청산의 순박한 자연을 예찬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4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동학횃불 밝히고 독립만세 외쳤던 / 정의로운 인물들이 자자손손 이어내려 / 민족혼이 깃든 곳 서로 믿고 도우며 / 한마음 한뜻으로 청산에서 살리라’

①청산 한곡리 문바위골은 동학교도 최초의 방포령이 내려진 곳이다. 오른쪽 소나무 아래의 문바위엔 당시 주동자들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②청산면 소재지의 버스터미널 주변 풍경. 지금은 한적하고 자그마한 면이지만, 구한말 동학농민운동 당시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3만 명의 동학교도들로 인해 ‘새서울’로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다. 청산은 동학교도 최초의 방포령(싸움을 시작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곳이며, 3만여 동학교도가 집결하여 보은의 관군과 일본군을 향해 돌진했던 역사적 사건의 고을이기도 했다. 청산면 소재지 남쪽의 19번 국도 판수리에서 널찍한 평야 펼쳐진 논길을 따라 4km 정도 들어가면 한곡리가 나오는데, 이 마을 가장 위쪽에 있는 문바위가 바로 동학혁명유적지다. 문바위는 마을 위쪽의 큰 바위 여러 개가 서로 기대있어 마치 문(門)과 같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1893년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1827-1898)은 이곳에서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이른바 교조신원운동을 벌인다. 또 1894년 9월18일 재방포령을 내린 곳으로 전면적인 동학농민전쟁의 시발점이 됐다.

문바위엔 주동자인 박희근(朴晦根) 김정섭(金定燮) 박맹호(朴孟浩) 김영규(金永圭) 김재섭(金在燮) 박창근(朴昌根) 신필우(申弼雨) 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결연한 투쟁의지의 표현이다. 또한 당시 동학교도들은 청산을 ‘새서울’, 문바위골을 ‘작은 장안’이라고 부를 정도로 청산 주변은 전국에서 몰려든 동학교도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나 집회가 열리기 전 관군들의 공격으로 문바위 마을은 불바다가 되었고,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교도들은 보은으로 피신하여 그 후 보은에서 집회를 열었다. 지금도 마을엔 최시형 가족이 살던 옛집과 타다 남은 밤나무 등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또 최시형의 아들 최봉주의 묘가 있다 하며, 묘 건너편 언덕과 밭 가운데엔 당시 동학교도들이 훈련하기 위해 쌓아놓았다는 작은 돌탑들이 여러 군데 남아 있다. 이런 사연 덕에 문바위 마을의 한곡리는 물론이요, 청산 고을엔 동학교도의 후손들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이들은 쉬쉬하고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문바위 위쪽 저수지에서 내려다보면 문바위 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길손은 평화로운 마을을 내려다보며 어릴 적 외할머니에게 배운 노래를 나지막이 불러봤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길손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준 외할머니의 고향은 바로 문바위 마을과 이웃한 덕우리다.

문바위골을 떠날 즈음, 마침 추석이라 차례를 지내러 고향을 찾은 사람들이 논두렁 밭두렁을 거닐며 가을빛을 즐기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길손도 그들을 따라 천천히 논두렁을 걸었다. 그때 길손의 귓전에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박인수와 이동원이 함께 불렀던 정지용 시인의 ‘향수’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옥천, 어떤곳인가

옥천군(沃川郡)은 충청북도 남부에 있는 고장이다. 옥천의 남쪽은 영동군, 북쪽은 보은군과 접하고, 동쪽은 경상북도 상주시, 서쪽은 대전광역시와 충청남도 금산군과 접한다. 즉 옥천군은 충청남도·충청북도·경상북도 3개 도의 도계를 형성하고 있다.

옥천은 지세를 살펴보면 금강 분지와 남동부의 구릉성 산지로 되어 있다. 옥천은 동쪽에는 천금산(千金山·465m)·팔음산(八音山·762m), 서쪽에는 환산(環山·581m)·마성산(馬城山·497m), 남쪽에는 월이산(月伊山·551m), 북쪽에는 금적산(金積山·652m) 등이 솟아 있다. 또한 보청천(報靑川)이 군 중앙에서 금강에 합류하며, 이외에도 금강은 연주천(蓮舟川)·서화천(西華川) 등을 합류하면서 대전으로 흘러간다.

삼한시대에는 마한땅이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로서 교대로 점령하던 격전지였다. 신라 초기에는 고시산군(古尸山郡)이라고 했다가 관성군(管城郡)으로 바뀌었고, 고려 때에는 경산부(京山府:경북 성주군)에 예속됐다가 현이 됐다.

1182년(고려 명종 12)에 일시 폐현되기도 했으나, 1313년(충선왕 5) 주로 승격되어 옥주(沃州)라 하고, 경산부 소속인 이원현·안읍현·양산현의 3개 현을 병합했다. 1413년(조선 태종 13)에는 옥천으로 개칭됐고 관할도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변경됐다.

1895년(고종 32)에는 군이 됐으며, 1914년에는 신라 때 굴산현·기산으로 불리던 청산군을 병합하고, 학산면·용화면·양산면이 영동군으로 편입됐다. 현재 행정기관은 옥천읍 군북·이원·동이·안남·안내·청산·청성면의 1읍 8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면적 중 임야가 65.3%이며 경지면적이 20%에 이른다. 금강 주변과 대도시인 대전광역시를 끼고 있어 그린벨트, 수질보전특별대책지역 등의 개발규제구역이 군 전체 면적의 86.5%를 차지한다.

금강 서안의 옥천분지와 남동부의 구릉지를 중심으로 주로 쌀·보리·콩·감자·고추·면화 등이 생산되고, 양잠과 목축업이 성하다. 소·돼지·닭 등도 사육된다. 특산물은 포도·사과·배 등이며 수출전략작목은 감식초·버섯종균·영지차 등이다.

광업은 토상흑연·사금·철 등이 채굴되고, 제조업은 갈포벽지·제사·가발·잎담배재건조업 등이 이루어진다. 또한 전통적 농업지대였던 옥천군의 공업화를 주도하고 있는 적하리의 동이농공단지에는 20여 업체가 입주해 있다.

상업활동은 옥천의 상설시장과 5일장, 청산·이원의 5일장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나, 대전과 인접해 있어 대전에 많이 의존한다. 교통은 경부선·경부고속철도,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충주∼남원, 보은∼금산, 대전∼대구 간의 국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를 이루고 있다.

정지용 문학관 

옥천읍 하계리 정지용 생가 바로 옆에 있는 정지용 문학관은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이며 우리의 언어를 천재적인 감각으로 시적 형상화하고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정지용(鄭芝溶·1902-1950) 시인의 일생과 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다.

문학전시실 입구엔 방문객이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정지용의 밀랍인형 소품을 마련해놓았다. 문학전시실은 테마별로 정지용의 문학을 접할 수 있도록 지용연보, 지용의 삶과 문학, 지용문학지도, 시ㆍ산문집 초간본 전시 등 다양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또 다양한 멀티미디어 기법을 활용해 관람객이 즐기는 문학체험은 ‘손으로 느끼는 시’, ‘영상시화’, ‘향수영상’, ‘시어검색’, ‘시낭송 체험실’ 등은 정지용 시인의 시문학 세계를 눈과 귀,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이외에 정지용 시인의 삶과 문학, 인간미 등을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으로 상영하는 ‘영상실’, 그리고 강좌·토론·세미나 등 활동공간인 문학교실이 마련되어 있다.

관람시간은 09;00~18:00. 매주 월요일·1월1일·설날·추석 휴관. 관람료·주차료 없음. 문학관 전화 043-730-3588 www.jiyong.or.kr

육영수 생가지
 
옥천읍 교동리 육영수 생가지(도기념물 제123호)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陸英修·1925-1974) 여사가 태어난 장소다. 이 집은 1600년대 김 정승 이후 송 정승과 민 정승이 거주해 삼정승의 집이라 불리던 가옥을 육영수 여사의 부친인 육종관씨가 민 정승의 자손 민 대감에게서 1920년 매입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상류계급의 전형적인 양식의 건축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현재 복원공사를 하는 중이다.

죽향초등학교 구교사 
 
옥천읍 문정리 죽향초등학교 안에 있는 구교사(등록문화재 제57호)는 목조 단층의 3개 교실을 갖춘 구조로 1936년에 지었다. 외부 벽체는 비가 스며들지 않도록 수평으로 길게 가로로 댄 목재비늘판벽으로 마감한 편복도형 교사건물로 옛 교사의 흔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비늘 모양으로 판자의 끝을 포개어 올린 목재판벽으로 마감하고, 채광의 극대화를 위해 교실의 양측면에 유리창을 많이 넣었다. 이곳에서 시인 정지용, 고 육영수 여사 등이 교육을 받았다. 구교사 오른쪽 꿈나무동산엔 정지용 시비와 고 육영수 여사의 휘호가 놓여있다.

농심테마공원

농심(農心)테마공원은 옥천군 농업인의 요람인 옥천읍 매화리 옥천군농업기술센터 안에 조성되어 있다. 옥천포도 시설재배사부터 원예작물원, 화훼작물원, 사과, 배, 복숭아 등의 실험용 노지 과수원을 비롯해 필각정이 있는 테마공원을 중심으로 연못을 조성해 여름이면 연꽃 만발한 연꽃동산까지 편히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장승, 돌탑, 솟대, 단지, 초정, 물레방아, 연자방아, 디딜방아 등 옛날 농촌생활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이외에도 조롱박길(330㎡), 수생식물 재배지(5,000㎡), 동산조경(8,930㎡), 원예치료실(330㎡) 등이 갖춰져 있다.

개방시간 평일 09:00~16:00 / 토·일요일 개별 자유견학. 전화 043-733-5959, 731-4911

관산성 백제 성왕 사절지
 
군서면 월전리 관산성(管山城)은 삼국시대의 성으로, 554년(신라 진흥왕 15) 백제와 신라의 관산성 싸움에서 백제는 크게 패배해 성왕(聖王)은 전사했다. 관산성 아래 북서쪽 서화천 주변 구천(궂은벼루)은 백제 성왕 사절지(死節地)로 전해져오고 있다.

현재 이곳엔 이정표나 추모비 등이 없다. 관산성은 이정표는 없고, 옥천읍 양수리에서 삼성산 이정표를 따라 올라가야 한다. 정상까지는 40분 정도 걸린다.

옥천 용암사
 
옥천읍 남쪽 장룡산(656m) 기슭에 있는 용암사(龍岩寺)는 552년(신라 진흥왕 13) 의신(義信)이 세운 사찰이다.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용암사라고 이름지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용바위가 파괴되어 현재는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옥천 용암사 쌍삼층석탑
 
용암사 대웅전 앞이 아니라 경내가 한눈에 조망되는 북쪽 낮은 봉우리에 세워져 있는 쌍삼층석탑(보물 제1338호)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성행했던 산천비보(山川裨補) 사상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모양의 석탑 2기는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자연암반 위에 건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층 기단을 갖추고 있다. 동탑은 4.3m, 서탑은 4.1m.

 


용암사 마애불

용암사 마애불(도유형문화재 제17호)은 암벽을 파고 그 안에 불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붉은 바위색이 인상적이다. 전설에 의하면 마의태자를 추모했던 신라 도공의 후손이 염불하는 태자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미륵불을 조각했다고 한다.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전한다.

발을 좌우로 벌리고 연꽃대좌 위에 서 있으며, 가늘고 긴 눈, 작은 입, 가는 코 등이 묘사된 얼굴에는 파격적인 미소에도 불구하고 신체와 옷의 도식화된 모습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용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용암사 대웅전 안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도유형문화재 제193호)과 5종의 탱화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 이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불상은 이전의 연혁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80년 불상을 열어 보았을 때 속에서 ‘순치 8년 신묘년(효종 2년=1651)’에 만든 다라니경이 발견됐다. 이로 인해 이 불상이 1651년에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졌다. 다라니경에 인쇄된 내용으로 보아 경상도 문경의 오정사에서 만들어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 한다.

금강 어름치

어름치는 잉어과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고유종으로 한강·임진강·금강의 중상류에 분포한다. 몸길이는 20∼30cm이며, 몸 표면에 검은 점이 7∼8줄로 가로 놓여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천 중상류의 물이 맑고 자갈이 있는 곳에서 서식하며, 물속에 사는 곤충이나 갑각류, 작은 동물 등을 먹고 산다.

예전에는 한강에만 서식하는 종으로 알려져 왔으나 1972년 금강의 중·상류에서도 서식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어름치가 한강과 금강에서 서식한다는 것은 두 강이 과거에 연결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금강은 한반도 고유종인 어름치가 살 수 있는 남쪽 한계선이 되므로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해 천연기념물 제238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옥천 이지당

군북면 이백리의 이지당(二止堂·도유형문화재 제42호)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중봉 조헌(1544-1592)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이다. 처음에는 각신 마을 앞에 있어서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고 했다. 그 후 우암 송시열(1607-1689)이 고장의 영재를 모아 교육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송시열은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라는 뜻을 지닌 ‘고산앙지(高山仰止), 경행행지(景行行止)’ 문구의 끝자인 지(止)를 따서 ‘이지당’이라 서당의 이름을 고치고 현판을 써서 걸었다. 대청에는 조헌이 직접 쓴 ‘각신서당’의 현판을 비롯해 ‘이지당기’, ‘이지당강학조약’ 등이 남아있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01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옥천향교

옥천읍 교동리의 옥천향교(沃川鄕校·도유형문화재 제97호)는 1398년에 처음 지은 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었으며, 1961년 이후 몇 차례 복원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도문화재자료 제214호)·명륜당·동재·서재·내삼문·외삼문·고직사 등이다. 유안·청금록·선안·교안 등 조선 후기 옥천지역의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다.

옥주 사마소

사마소(司馬所)는 조선시대 지방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이다. 옥천읍 상계리의 옥주 사마소(도유형문화재 제157호)는 옥천 지방에 속한 사마소로 1654년에 세워졌다. 내부에는 관성사마안(管城司馬案), 향약계안(鄕約契案), 옥천군향약계규약(沃川郡鄕約契規約) 등 조선시대 문인들의 면모를 알려주는 여러 편의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청산향교

청산면 교평리에 있는 청산향교(靑山鄕校·도유형문화재 제98호)는 조선 태조(재위 1392-1398) 때 지은 후 효종(재위 1649-1659) 때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고 1966년에 수리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과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이다. 소장된 책들은 모두 흩어지고 잃어버려 거의 없다. 매년 봄가을로 지방 유림들이 향사(享祀)하고 있다.

중봉 조헌 묘역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인 중봉 조헌(1544-1592)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청주성을 수복했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의 방해로 해산당해 불과 7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했고, 그곳에서 고바야가와의 왜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했다. 선생의 유해는 옥천군 도리동에 안장했다가 1636년(인조 14) 안남면 도농리 현재의 위치로 이장했다.

현재 묘역에는 묘비 2기가 있는데 하나는 우암 송시열이 이곳으로 이장할 당시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묘소 입구의 신도비는 1649년(인조 27)에 세운 것으로 선생의 생애와 최후 격전지였던 금산싸움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다. 좌의정 김상헌이 글을 짓고, 이조판서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옥천 후율당

안내면 도이리의 후율당(後栗堂·도기념물 제13호)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헌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1588년(선조 21) 조헌이 보은현감을 사임하고 옥천에 내려와 살 때 율곡 이이를 사모해 그의 뒤를 잇는다 해 자신의 호를 ‘후율(後栗)’이라 하고, 용촌 밤티에 당(堂)을 지어 후율당(後栗堂)이라 했다 한다.

솟을대문과 돌로 쌓은 담장이 둘러져 있고, 뜰에는 금산전투에서 그를 대신해 죽으려 했던 그의 아들 조완기의 효자각이 서 있다. 이곳에는 1621년(광해군 3) 판각한 항의신편 125매와 유림시판(儒林詩板) 10매, 선조가 내렸다는 조서 1매를 보관하고 있다.

가산사

안내면 답양리 산기슭에 있는 가산사(佳山寺)는 임진왜란 때 기허 영규 대사와 중봉 조헌 선생이 이곳에서 승군과 의병을 일으켜 훈련했던 호국도장이다. 영규 대사와 조헌 선생은 힘을 합해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전투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순절했다. 이에 가산사에서는 영정각을 짓고 영규 대사와 조헌 선생의 영정을 봉안했는데, 영정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훼손했다 하고, 지금은 위패만 모셔져 있다.

충의공 김문기 유허비

이원면 백지리 충의공 김문기 유허비(도기념물 제44호)는 사육신의 한 명인 백촌 김문기(1399-1456)의 출생지에 세운 비석이다. 김문기는 문과에 급제했고, 함길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의 거사에 가담하다 붙잡혀 고문에도 굴하지 않다가 순절했다.

1730년(영조 7) 그의 9대손 정구의 상소로 관직을 돌려받았으며, 충의라는 시호를 받았다. 현재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는 비는 1804년(순조 4)에 세운 것으로, 1846년(헌종 12)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송우암유허비

이원면 용방리 송우암유허비(도기념물 제45호)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을 기리고 있다. 송시열은 외가인 옥천 구룡 마을에서 출생한 조선의 대유학자다. 유허비는 현재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로 직사각형 비몸을 올리고 지붕 모양의 머릿돌을 갖췄다.

앞면에는 ‘우암송선생유허’라는 글씨를 해서체로 새겨 놓았고, 뒷면에는 ‘숭정후삼술이월일’이라 새겨 건립연대를 밝히고 있다. 비는 조선 정조가 재위하던 1776∼1800년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창주서원 묘정비

묘정비(廟庭碑)는 서원을 건립하게 된 동기와 그 서원에서 모시는 인물을 찬양하는 내용 등을 기록해 서원 앞에 세우는 비석이다. 이원면 이원리의 창주서원 묘정비(도기념물 제105호)는 옛 창주서원 자리에 서있다.

1579년(조선 선조 12) 노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려는 유림들에 의해 창건된 고룡서원(古龍書院)이 1682년(숙종 8) 창주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으나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됐다.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김수증이 글씨를 썼다.

옥천 두암리 삼층석탑

이원면 이원리 두암 마을의 민가 옆에 자리하고 있는 두암리 삼층석탑(도유형문화재 제120호)은 기단을 2층으로 쌓고,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린 석탑이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본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2층 기단, 3층 탑신이라는 통일신라의 기본양식을 따르면서도, 아래층 기단이나 지붕돌 등에서 그 전형을 벗어나 있어 고려시대 전기에 세운 탑으로 보인다.

옥천 청석교

내면 장계리에 있는 청석교(靑石橋·도유형문화재 제121호)는 신라 문무왕 때인 660년경에 만든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다리의 구조는 양쪽 개울가를 돌로 쌓고 개울 바닥에 널찍한 돌을 깐 다음 사각형 돌기둥을 2개씩 세워 그 위에 넓고 긴 널돌을 얹어 길바닥을 만들었다. 높이 1.75m, 너비 2.2m, 길이 9.83m.

원래 군북면 증약리 경부선 철도 자리에 있었으나 철도공사로 인해 증약 마을 입구로 옮겼으며, 그 후 수해로 인해 2001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이 다리가 있던 증약 마을은 찰방역이 있었던 곳으로 왕래가 빈번했다.

옥천 지석묘

동이면 석탄리의 옥천 지석묘(도유형문화재 제10호)는 탁자식 고인돌로, 4면에 널돌을 세우고 그 위로 길고 평평한 덮개돌을 얹은 모습이었는데, 현재는 앞뒷면 널돌은 사라지고 양쪽면에만 널돌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은 갈돌대, 돌쩌귀, 돌칼, 돌화살촉, 그물추, 구멍쪼으개, 여성을 나타낸 얼굴조각, 토기 등이다. 주로 식생활에 관련된 유물이 많아 묻힌 사람은 여자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옥천 석탄리 입석
 
동이면 석탄리의 입석(도유형문화재 제156호)은 마을 사람들이 ‘할머니’라 부르고 있으며, 재앙을 막고 풍농·평안을 지켜주는 수호신 구실을 하고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길쭉한 자연석 돌을 세워놓은 모습으로 가운데 부분이 볼록하게 나와 있다.

가운데 부분에는 90cm 정도 되는 원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는 임신한 여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다산을 바라는 마음에서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근처 고인돌 주변에서 무늬가 성긴 빗살무늬토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옥천 양신정

동이면 금암리에 있는 양신정(養神亭·도기념물 제29호)은 1545년(조선 인종1) 전팽령(全彭齡)이 낙향해 지은 것이다. 이후 몇 차례 고쳐 지었다.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목조 와즙 팔작집인 지금의 정자는 1828년(순조 28)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 정자를 처음 지을 때의 사정을 기록한 양신정기(養神亭記)가 전한다.

옥천 청마리 제신탑
 
동이면 청마리에 있는 제신탑(祭神塔·도민속자료 제1호)은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기원하던 곳으로, 제신당 또는 탑신제당(塔身祭堂)이라고도 불리는 신당 유적이다. 막돌을 둥글게 쌓아올린 탑·장승·솟대·산신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돌을 쌓아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로, 꼭대기에 긴 돌 하나가 솟아 있다. 그 옆의 솟대는 약 5m의 높이로, 긴 장대 끝에 나무로 깎은 새의 모습을 얹어 두었다. 장승은 통나무에 사람의 모습을 먹으로 그렸다.

산신당은 뒷산 소나무를 신이 깃든 나무로 여겨 모시고 있다.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탑~솟대~장승의 순으로 제사를 올리며, 제사가 끝나면 농악대가 굿을 해 마을의 풍년과 편안함을 빈다.

독락정

안남면 연주리 금강변 언덕에 자리 잡은 독락정(獨樂亭·도문화재자료 제23호)은 1607년(조선 선조 40) 절충장군 중추부사의 벼슬을 지낸 주몽득이 세운 정자다. 주변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많은 선비들이 모여 지내던 정자의 구실을 하다가, 후대에 와서 유생들의 학문연구 장소로 이용됐다.

건물 정면에는 당시 군수였던 심후의 ‘독락정’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마루에는 송근수의 율시기문을 비롯해 10여 점의 기문액자가 걸려 있다.


덕양서당

안남면 도덕리 덕양서당(德陽書堂·도문화재자료 제24호)은 조선 인조(재위 1623-1649) 때 인평대군의 사부를 지낸 유식(1586-1650)이 세운 서당이다. 유식은 시조 유검필의 24대손으로 학력이 높았고 대학자였다. 덕양서원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충과 효를 가르쳤으며, 고종 32년(1895) 수리했다.

장계관광지 

안내면 장계리 대청호반을 끼고 있는 장계관광지는 1986년 대청호의 자연경관을 이용해 조성한 국민관광지다. 향토전시관·놀이시설·사계절썰매장·물놀이장·인공폭포·연못·분수대 등의 위락시설을 비롯해 야외취사장·휴게소·원두막·상가·식당·주차장 등 각종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기본 입장료 어른 1,0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 500원.

향토사료전시관 
 
안내면 장계리 장계국민관광지 내에 있는 향토자료전시관은 옥천 지역에서 발굴한 유물을 전시·보존한 전시관이다. 부조유물, 탑신제당, 물레방아 등 전시물이 1,500여 점 전시되어있다. 역사유물 전시실인 1층엔 선사시대 유물을 비롯해 그릇·기와·고문서·목판 등이, 생활과 민속 전시실인 2층엔 의식주, 농업, 민속과 신앙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개관시간 09:30~17:30(동절기 16:30), 매주 월요일 휴관. 주차와 관람은 무료.

장룡산 자연휴양림

옥천읍 남서쪽 군서면 장룡산 자연휴양림은 장룡산의 금천계곡을 끼고 있는 휴양지다. 장룡산은 계곡과 능선에 왕관바위, 포옹바위, 병풍바위 등 기암괴석이 많아 인근의 서대산에 뒤지지 않는 산세를 지니고 있다. 장룡산 휴양림 지구를 관통하는 코스로 가벼운 산행을 즐길 수도 있다. 또 휴양림 안팎으론 포도밭 과수원도 있어 시골 할머니댁에 놀러온 듯한 편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휴양림이다.

자연휴양림의 시설들은 금천계곡을 끼고 나뉘어져있다. 관리소·산막·어린이놀이터 등 대부분의 시설은 동쪽 자락에 포근하게 안겨있고, 서쪽엔 야영장·체육시설·산림욕장 등이 자리하고 있다.

시설이용료는 숲속의 집(산막) 43㎡(5동) 60,000원, 49㎡(2동) 70,000원, 66㎡(2동) 120,000원. 주차료 승용차 2,000원. 입장료 없음. 전화 043-730-3474 www.cbhuyang.go.kr/jangyongsan

지용제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이며 우리의 언어를 천재적인 감각으로 시적 형상화하고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정지용(鄭芝溶·1902-1950) 시인의 시문학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문학축제행사다.

1988년 첫 행사를 개최한 이래 매년 5월에 사흘간 옥천의 지용생가, 정지용문학관, 문화예술회관 등에서 열린다. 지용제는 지용문학상, 지용신인문학상, 지용청소년문학상, 전국지용백일장, 지용문학포럼, 가족시낭송회 등 다양한 문학 행사가 펼쳐진다.

또 공연·이벤트 행사로는 향수음악회, 무대공연작품, 학생사생대회, 생가방문행사, 불꽃놀이, 전시행사로는 전국향수사진공모전, 향수동호회 회원전, 지용회전, 시화전, 옥천군 공예품전시회, 수석전시회 등 볼거리도 제공한다. 이외에도 문학관광열차 운행, 지용사이버퀴즈행사, 가훈써주기, 판화찍기 등의 특별체험 행사도 펼쳐진다.

옥천문화원 043-733-5588, 옥천군청 문화관광과 043-730-3081~3

중봉충렬제

임진왜란 당시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운 중봉 조헌 선생의 구국충정의 넋을 기리는 행사로서, 매년 전군민의 한마당 축제가 되고 있다. 매년 9월 안남면 표충사, 관성회관, 야외공연장, 청소년수련관 등에서 사흘간 펼쳐진다.

첫날 중봉 묘소 추모제향을 시작으로 학술제와 공연 등이 마련되고, 백제 성왕이 전사한 곳으로 알려진 관산성(管山城) 자락의 국궁장에서 성왕기 전국궁도대회도 열린다.
이외에도 중봉의 유적지를 좇아가는 순례행사, 학술강연, 금강마라톤대회, 영규대사 추모제향, 탈춤공연, 시내 일원에서는 가장 행렬과 횃불·촛불행렬이 열린다. 올해엔 9월26일(금)부터 28일(일)까지 사흘간 펼쳐진다. 전화 옥천문화원 043-733-5588


길에서 만난 별미

올갱이국


옥천은 금강의 다슬기가 유명한데, 옥천 지방에서는 다슬기를 올갱이라 부른다. 올갱이는 맑은 물에서 건져온 것이라야 제대로 된 국물맛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옥천의 식당들은 금강에서 잡은 것만을 주로 사용한다. 올갱이국은 올갱이 특유의 향과 구수한 된장, 그리고 부재료로 쓰이는 나물의 향이 하나로 어우러져 맛을 낸다.

올갱이국은 술 먹고 난 뒤 해장에 좋고, 소화를 촉진시키는 작용이 있어 부담없이 찾을 수 있다. 또한 올갱이 무침은 술안주로도 인기가 높은데 올갱이 알맹이만을 양념과 나물들에 무쳐낸다. 올갱이국을 파는 식당은 대부분 올갱이무침도 차린다.

옥천군청 부근에 있는 금강올갱이(043-731-4880), 별미식당(043-731-4423) 등이 유명하다. 올갱이국밥 6,000원, 올갱이무침(대) 30,000원.

올갱이국은 금강에서 직접 잡거나 옥천장에서 구입해 끓여먹을 수도 있다. 올갱이국을 끓이려면 올갱이를 깨끗한 물에 하루나 이틀 정도 담가서 잔모래를 빼낸 뒤 끓는 물에 20분 정도 익힌다. 그리고 올갱이는 건져내 바늘 등으로 알맹이를 빼고, 푸르스름한 국물엔 된장을 듬뿍 풀고 고추장·마늘 다진 것으로 양념을 한다. 여기에 적당하게 부추·아욱·시금치 등을 듬뿍 썰어 넣고 한소끔 더 끓인다. 나물이 어느 정도 익으면 알맹이를 넣어 잠시 더 끓이면 맛있는 올갱이국이 된다.

청산 생선국수

옥천지방 향토음식인 청산면의 생선국수는 민물고기를 뼈째 푹 우려낸 국물에 소면을 넣고 삶아서 차리는 음식이다. 다른 지방의 어탕국수와 비슷하지만, 물고기의 육질을 살린다는 데 청산 생선국수의 특징이 있다. 생선국수는 민물고기의 향이 맛을 좌우한다. 또 구수한 맛이 있고, 단백질·칼슘·지방·비타민이 풍부해 성장기 어린이나 노약자에게도 좋다.

청산의 생선국수는 보통 보청천이나 금강에서 잡아 올린 민물고기를 중불에서 4~5시간 정도 푹 곤 다음,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면 채에 조심스레 걸러 가시를 발라낸다. 국물에 고추장을 풀어 간을 하고 소면을 넣어 삶은 다음, 파·애호박·깻잎·미나리·풋고추 등 제철에 나오는 부재료를 썰어 넣어 한소끔 더 끓여 내면 맛있는 생선국수가 된다.

청산면 소재지인 지전리엔 식당마다 나름대로 솜씨를 자랑하는 선광집(043-732-8404), 금강집(043-732-8083), 청양식당(043-732-8163) 등이 있다. 생선국수 5,000원, 메기빠가생선국수 6,000원, 도리뱅뱅이 10,000~15,000원.

일정별 길라잡이

●옥천읍권
  옥천읍을 중심으로 한 군서·군북면이 이 권역에 속한다. 옥천읍에서도 구읍엔 정지용 생가와 정지용문학관, 육영수 생가, 죽향초등학교 구교사, 옥천향교, 옥주사마소 등의 볼거리가 몰려 있다. 남서쪽의 장룡산 용암사엔 옥천 유일의 보물인 쌍삼층석탑이 있다. 또 군북면의 이지당, 군서면의 관산성 성왕 사절지, 장룡산 자연휴양림 등도 이 권역에 넣을 수 있다.
●이원·동이권  옥천 지역의 금강 상류 지역에 속한다. 송시열유허비, 김문기유허비, 두암리 삼층석탑 등이 있다. 동이면의 금강유원지도 이 권역에 속한다.
●청산·청성권  보청천 물줄기 주변과 금강 중류 지역에 속한다. 합금리 금강변엔 낚시 포인트와 다슬기 잡을 곳이 많다. 보청천 상류의 청산엔 청산향교, 동학혁명 유적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안남·안내권  옥천 북부 지역이면서 옥천 지역 금강 하류이면서 대청호 상류 지역에 속한다. 금강 유역의 장계국민관광지엔 향토사료전시관도 있다. 이외에도 한반도 조망하기 좋은 둔주봉을 비롯해 독락정, 덕양서당 등이 있다. 의병장 조헌 묘소와 사당, 조헌과 영규 대사 위패를 모신 가산사도 이 권역에 속한다.



일정짜기


●당일  옥천은 교통이 편리해 전국 웬만한 지역에선 2~3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으므로 당일로도 웬만큼 즐길 수 있다. 처음 방문할 때의 추천 일정은 다음과 같다. 옥천 나들목~정지용 생가~식사(올갱이국)~금강유원지~강변 드라이브~청마리 제신탑~독락정~조헌 묘소~향토사료전시관~옥천 나들목

●1박2일  옥천을 넉넉히 즐길 수 있는 일정이다. 당일 추천 일정에 용암사, 이지당, 성왕 사절지, 송시열·김문기 유허, 둔주봉(왕복 2~3시간), 가산사, 동학혁명유적지 등을 곁들일 수 있다. 숙박은 금강변의 민박집을 이용하는 게 여러 모로 편하다.

●2박3일  이 정도면 옥천을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강마을과 호수마을 구경이나 금강에서의 낚시도 곁들일 수 있다.

교통

●자가운전

수도권  경부고속도로→옥천 나들목<서울에서 2시간30분 소요>
영남권  경부고속도로→옥천 나들목<부산 2시간30분, 대구 1시간30분 소요>
호남권  호남고속도로→서대전 분기점→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비룡 분기점→경부고속도로→옥천 나들목<광주 2시간, 전주 1시간 소요>
충청권  대전→경부고속도로→옥천 나들목<30분 소요>
강원권  춘천→중앙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중부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옥천 나들목<3시간 소요>

●고속·시외버스

서울→옥천  동서울터미널(ARS 446-8000)에서 매일 2시간 간격(10:00~18:00) 운행. 2시간 소요, 요금 13,800원.
인천→옥천  인천종합터미널(032-430-7114)에서 매일 2회(11:50, 19:50) 운행. 2시간30분 소요, 요금 10,500원.
대전→옥천  동부공용터미널(ARS 042-624-4451)에서 매일 14회(07:00~19:40) 운행. 1시간20분 소요, 요금 5,000원 / 대전역 앞 대한통운 길 건너에서 640번 시내버스 수시 운행.
청주→옥천  여객터미널(ARS 043-234-6543)에서 매일 19회(06:40~22:10) 운행. 1시간 소요, 요금 3,800원.
*옥천 공용터미널 043-731-5108, 733-2263

●열차

서울역→옥천역
  무궁화호 열차가 매일 14회(06:15~21:33) 운행. 2시간20분 소요, 요금 11,500원.
*코레일 전화 1544-7788, 1588-7788
*옥천역 043-733-7788

●현지교통

옥천→청산  공용터미널에서 시외버스 매일 14회(07:40~20:10) 운행. 40분 소요, 3,100원 / 군내버스는 매일 10회(06:20~18:40) 운행.
옥천→안남  공용터미널에서 매일 15회(06:30~20:00) 운행.
*옥천 군내버스 전화 033-734-9680 

숙식(지역번호 043)

●옥천읍권  읍내에 옥천관광호텔(731-2435)을 비롯해 모텔급 숙박업소와 식당이 많다. 구읍에 있는 전통 가옥인 춘추민속관(733-4007)은 한식을 차리고 민박도 친다. 단체 손님도 숙박이 가능하다. 이외에도 마당넓은집(733-6350), 원조구읍할매묵집(732-1853) 등 맛집이 많다.

군북면엔 마노하우스(732-8889), 둥그나무집(732-2300), 서낭당가든(732-5128), 수정가든(732-0232), 소정리엔 장자마을(733-7472), 국원리 큰엄마네집(733-3736) 등이 있다. 금천계곡엔 장룡산 자연휴양림(730-3474)을 비롯해 녹색관광센터(017-401-5993), 서장민박(731-4988), 시내농원(019-418-0615), 올연농원(732-6733), 통나무민박(731-7801), 하얀집(733-7376) 등이 있다.

●이원·동이권  이원면에 스위트모텔(731-2990), 호수파크(733-9632), 초원파크(733-9600) 등 모텔급 숙박업소가 있다. 금강유원지 주변에 황쏘가리(733-6606), 대청팔호가든(731-0013), 동이면 적하리엔 금강나루터식당(732-3642), 토박이식당(732-3786) 등 숙식할 곳이 많다.

●안남·안내권  안내면에 숲속파크(733-3906), 뿌리깊은나무(731-0567), 배바우손두부(732-2137) 등 숙식할 곳이 흩어져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청산·청성권  금강 드라이브길에 지나게 되는 청성면 합금리 강가에 고려민박(011-460-5911), 금강민박(733-9877), 대나무집민박(732-5988), 도림민박(010-9577-5338), 엘도라도민박(010-3422-3999), 여울목민박(731-6677), 청마민박(732-8878) 등이 숙식할 곳이 여럿 있다.

청산면 소재지엔 숙박시설은 많지 않지만, 선광집(732-8404), 금강집(732-8083) 등 생선국수를 차리는 식당은 여럿 있다.
*옥천군청 문화관광과 043-730-3081~3


/글·사진 민병준 sanmin@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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