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충북 옥천

      입력 : 2008.10.23 09:41 | 수정 : 2008.10.21 14:49 [468호] 2008.10

      차마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향수'의 고을

      이번 옥천 여정의 마지막은 청산(靑山)이다. 청산은 지금은 면 단위로 격하되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어엿이 독립되어 있는 하나의 행정구역이었다. 금강을 제외하면 옥천의 가장 큰 젖줄은 바로 금북정맥에서 발원해 보은을 적시고 흘러내려온 보청천(報靑川)이다.

      청산면민의 노래라 할 수 있는 청산예찬가 가사를 보면 ‘우뚝 솟은 도덕봉’, ‘보청천 맑은 물’, ‘기름진 넓은 들’ 등 모두다 청산의 순박한 자연을 예찬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4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동학횃불 밝히고 독립만세 외쳤던 / 정의로운 인물들이 자자손손 이어내려 / 민족혼이 깃든 곳 서로 믿고 도우며 / 한마음 한뜻으로 청산에서 살리라’

      ①청산 한곡리 문바위골은 동학교도 최초의 방포령이 내려진 곳이다. 오른쪽 소나무 아래의 문바위엔 당시 주동자들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②청산면 소재지의 버스터미널 주변 풍경. 지금은 한적하고 자그마한 면이지만, 구한말 동학농민운동 당시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3만 명의 동학교도들로 인해 ‘새서울’로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다. 청산은 동학교도 최초의 방포령(싸움을 시작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곳이며, 3만여 동학교도가 집결하여 보은의 관군과 일본군을 향해 돌진했던 역사적 사건의 고을이기도 했다. 청산면 소재지 남쪽의 19번 국도 판수리에서 널찍한 평야 펼쳐진 논길을 따라 4km 정도 들어가면 한곡리가 나오는데, 이 마을 가장 위쪽에 있는 문바위가 바로 동학혁명유적지다. 문바위는 마을 위쪽의 큰 바위 여러 개가 서로 기대있어 마치 문(門)과 같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1893년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1827-1898)은 이곳에서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이른바 교조신원운동을 벌인다. 또 1894년 9월18일 재방포령을 내린 곳으로 전면적인 동학농민전쟁의 시발점이 됐다.

      문바위엔 주동자인 박희근(朴晦根) 김정섭(金定燮) 박맹호(朴孟浩) 김영규(金永圭) 김재섭(金在燮) 박창근(朴昌根) 신필우(申弼雨) 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결연한 투쟁의지의 표현이다. 또한 당시 동학교도들은 청산을 ‘새서울’, 문바위골을 ‘작은 장안’이라고 부를 정도로 청산 주변은 전국에서 몰려든 동학교도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나 집회가 열리기 전 관군들의 공격으로 문바위 마을은 불바다가 되었고,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교도들은 보은으로 피신하여 그 후 보은에서 집회를 열었다. 지금도 마을엔 최시형 가족이 살던 옛집과 타다 남은 밤나무 등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또 최시형의 아들 최봉주의 묘가 있다 하며, 묘 건너편 언덕과 밭 가운데엔 당시 동학교도들이 훈련하기 위해 쌓아놓았다는 작은 돌탑들이 여러 군데 남아 있다. 이런 사연 덕에 문바위 마을의 한곡리는 물론이요, 청산 고을엔 동학교도의 후손들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이들은 쉬쉬하고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문바위 위쪽 저수지에서 내려다보면 문바위 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길손은 평화로운 마을을 내려다보며 어릴 적 외할머니에게 배운 노래를 나지막이 불러봤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길손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준 외할머니의 고향은 바로 문바위 마을과 이웃한 덕우리다.

      문바위골을 떠날 즈음, 마침 추석이라 차례를 지내러 고향을 찾은 사람들이 논두렁 밭두렁을 거닐며 가을빛을 즐기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길손도 그들을 따라 천천히 논두렁을 걸었다. 그때 길손의 귓전에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박인수와 이동원이 함께 불렀던 정지용 시인의 ‘향수’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