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공원 정책 해부] 등산의 본질 외면하면 정책입안 무의미

[471호] 2009.01
입력 2009.01.20 09:10 | 수정 2009.01.20 09:10

관리공단·환경단체, 등산을 정상 정복의 맹목적 행위로 간주

환경부나 공단 또는 환경단체들은 등산활동이 국립공원 정상 훼손의 주요인으로 발표하고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2007년 7월 정상이나 능선을 오르는 등산객들에게 정상 입산료와 능선 통과료를 받겠다고 발표했다. 등산객들이 정상을 지나치게 선호하고 있어서 정상과 능선이 혼란스럽고 훼손이 심하다는 것이다.

2005년 11월10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제2차 국립공원 정책포럼이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국시모), 한국환경생태학회, 국립공원을사랑하는국회의원모임 등 3개 단체 공동주최로 열렸다. 포럼에서 토론자인 환경부 자연자원과장 홍정기씨는 “등산은 맹목적이다. 맹목적인 등산이 등산로를 훼손한다. 정상입산료 징수 등을 이용하여 정상등산을 통제하는 해결방안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등산로 훼손은 무작정 오르는…”

오구균 교수(국시모 초대 회장, 호남대 조경학과 교수)는 ‘국립공원 탐방로 훼손실태와 대안모색’이라는 주제발표에서 “국립공원 등산로의 85%에 해당하는 922km가 훼손되었다”라며 “등산로 훼손은 무작정 오르는 정상정복형 등산과 종주산행 때문”이라고 분석했으며 “국립공원은 전면 입산예약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1977년 9월15일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대한산악연맹대의 고상돈 대원. 고상돈 대원이 설악골에서 훈련 중 숨진 대원들의 사진들을 정상에 묻고 있다. (사진=‘서울시산악연맹 40년사’)

토론자로 나선 이수용씨(국립공원제도개선시민위원회 실무위원장, 현 우이령보존회장, 현 국시모 부회장)는 “산을 오르는 모든 행위를 등산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등산은 정상등산과 능선종주 위주로 이뤄지고 있어서 등산로훼손이 가중되고 있다”고 말했다. 토론자인 최송현 교수(경남 밀양대 조경학과)도 “등산로 훼손은 서유럽에서 발생한 정상정복 등산패턴에 기인한다. 패턴을 바꾸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7년 7월26일 만해NGO교육센터에서는 ‘국립공원 입장료 폐지, 그 후 6개월’이란 제목의 토론회가 국시모와 환경운동연합의 공동주최로 열렸다. 국시모 윤주옥 사무국장은 주제발표에서 “등산객이 정상으로 몰리고 있다. 등산객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북한산 백운대는 정상입산료를 징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1년 11월15일 국립공원제도개선시민위원회 주최로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국립공원 100대 개혁의제 워크샵에서 ‘정상정복형 등산행태를 금지해야한다’는 의제를 채택했다.

공단이 발행하는 홍보지인 계간 ‘아름다운 국립공원’을 통해서도 정상등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공단 신범환 부장(현 공단 부설 국립공원연구원장)은  “우리나라만큼 정상정복 욕구가 강한 입장객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며 정상통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단 이사장의 발언을 보자. 2002년 9월17일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이사장은 “정상등산과 종주가 오염의 원인이다. 종주산행을 막기 위해 종주코스가 짧은 공원부터 대피소를 폐쇄시켜 종주금지를 시범운영해 본 다음 지리산 등 종주코스가 긴 산으로 확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28일 부임한 현 엄홍우 이사장은 인터뷰에서  “우리나라는 등산형태가 너무 정상 지향적인 것이 문제다. 너도나도 꼭 정상을 올라가려고 한다. 산정은 좁은 곳인데 많은 사람이 몰리면 문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상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많은 이유를 무엇이라 보는 것일까? 지리학자의 발언을 들어보자. 지난해 10월23일 산림청 주최로 대한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백두대간 세미나에서 경희대 지리학과 공우석 교수는 ‘한반도 고산대와 아고산의 생태’라는 주제발표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선조들은 등산(登山)이라는 단어를 감히 사용하지 않았다. 산에 든다하여 반드시 입산(入山)이라는 말을 썼다”며 “그러나 지난 반세기 동안 빠르게 산업화, 도시화, 지역개발, 관광수요 증가 등으로 산지의 사회경제적 환경이 바뀌면서 산을 바라보는 자연을 존경의 대상으로 보는 입산이라는 전통적인 관점은 사라졌다. 대신 서유럽에서 건너온, 산을 이용?정복?착취?약탈할 대상으로 보는 그릇된 자연관이 널리 퍼졌다”고 발표했다.


고문헌엔 ‘입산’이지 ‘등산’은 없다 주장

공우석 교수는 “서유럽에서 발생한 등산의 정복과 도전은 정상을 오르는 걸 의미한다. 현재의 우리나라 등산도 서유럽 등산처럼 정상정복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등산로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4부 능선 아래쪽에서만 탐방활동을 하도록 해야 한다. 정상등산은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강산씨(전 태백문화원장)는 “서양에서는 산을 정복과 도전의 대상으로 여긴 반면 우리 선조들은 산을 무서워하면서 한편 존경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런데 서구의 등산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외경의 대상이었던 산의 정상을 무조건 올라 발로 밟고 서서 야호를 외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정상정복이 아니라 정상을 바라보거나 근처에 가서 자연을 조화롭게 관망했다. 그래서 고문헌에는 망(望)ㅇㅇㅇ이란 기록은 나올지언정 등산이란 표현은 없다”고 말했다.

산악계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 지난해 11월21일 산림청이 주최, 한국등산지원센터가 주관한 건전한 등산문화 심포지엄이 열렸다. 임형칠씨(대한산악연맹 상임이사, 광주산악연맹 이사)는 ‘국내 산악문화의 패러다임’이란 주제발표에서 “우리나라의 등산과 유럽 알프스에서 시작한 등산은 개념부터 차이가 크다”며 “우리나라의 전통개념은 등산이 아닌 입산(入山)이며, 산은 도를 얻으려고 수행하는 곳(도량), 인격을 수양하는 곳이었다. 반면 알프스는 만년설과 눈사태, 낙뢰 등으로 산 자체가 두려움과 회피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서구 등산의 개념은 도전과 모험이다”고 말했다.

이상의 환경부나 공단, 그리고 환경단체, 학자, 산악계의 발표내용을 보면 대체로 ‘등산은 서구에서 건너왔으며, 정복과 도전의 개념이다. 반면 우리의 전통개념은 등산이 아닌 입산이며, 인격을 수양하는 도량이었다. 선비들이나 신라 화랑도들은 유람하며 풍류를 즐겼다’며 ‘그런데 서유럽 등산의 정상정복 개념 때문에 등산객들은 정상으로 몰려 정상이 훼손되고 있다. 그러므로 정상등산을 통제해야 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1787년 몽블랑 초등 당시 만년설을 오르는 등산 모습을 그린 그림.

위의 발표자들이 말하는 서유럽 등산의 역사를 살펴보자. 알프스의 등산은 1300년대부터 시작된다. 철학자 장 뷔리당과 시인 페트라르카가 프랑스의  몽방투(1,909m)를, 보니파스 로타리오가 로슈멜롱(3,537m)을 오른다.

1400년대에 들어 프랑스 왕의 명령으로 앙투안 드 빌과 그 일행이 몽테규(2,806m)를 1492년에 오른다. 1700년대에는 뒬릭 형제가 기후에 대한 연구를 위해 몽뷔에(3,109m)를 오르는데 도중에 비박을 한다. 1778년 그레소니의 주민들이 엔덱쿵스펠제(4,366m)를 등정, 알프스에서 4,000m급 첫 등정을 기록한다. 1779년 벨사자르 아케가 트리글라브(2,863m)를 등정한다.

1786년 스위스의 과학자 소쉬르가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4,808m)을 오르는 자에게 현상금을 주겠다고 발표한다. 그 후 26년만인 1786년 샤모니 출신의 자크발마가 몽블랑을 초등한다. 자크발마는 석영 채취 광산업자로서 순수한 등산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편이다. 이듬해 1787년 소쉬르가 몽블랑을 등정, 근대등산의 시초로 보고 있다. 만년설을 오른 당시의 등산장비는 이불, 대형 천막, 사다리, 쇠고리 달린 지팡이, 쇠징 박은 등산화, 장작 등 상상 이상으로 열악했다.

일제시대 인수봉, 만장봉, 금강산 등 한국에서의 암벽등반 활동이 기재된 영국산악회 회보 ‘THE ALPINE JOURNAL’ 표지. 우리나라 문헌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조까지 인수봉 등반기록을 아쉽게도 찾을 수 없다.

알프스의 등산은 일본을 거쳐 일제시대에 우리나라로 들어온다. 1857년 설립된 영국산악회는 회보 알파인저널을 1864년 창간했는데(사진), 금강산, 인수봉, 선인봉 등 한국에서의 암벽등반 활동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주한 영국대사관 영사이던 영국인 아처의 1929년 인수봉 등반기도 실려 있다. 변기태씨는 아처 이전 삼국시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 수많은 인수봉 등반이 있었을 테지만 아직까지 기록상 초등자를 아처로 인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히말라야 등산사를 보자. 1962년 경희대 다울라기리2봉(7,751m), 1970년 한국산악회 추렌히말, 1971년 대한산악연맹 로체샤르, 1971년 전국합동대 마나슬루(8,163m), 1972년 마나슬루, 1975년 한국산악회 안나푸르나(8,091m), 1976년 전국합동대 마나슬루가 등정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조난과 추락으로 대원들이 희생하기도 했다. 그러다 1977년 대한산악연맹이 에베레스트(8,848m)를 오른다.


‘높이가 있기에 산을 오른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무모한 행위로 보일지도 모를 고산등산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자. 히말라야 고산등반은 자연에 대해 무관심한가? 이에 대해 김영도씨(1977년 한국 에베레스트 등반대장, 전 대한산악연맹 회장)는 “등반대원들은 변화무쌍한 자연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한편에선 자연에 대해 매력을 가진 게 등반대다”라며 “등반대원들은 자연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들이지 자연에 무관심한 대원은 등반대에 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산등반은 무작정 정상을 지향하는가? 이에 대해 김영도씨는 “물론 정상이 목표다. 인간은 정상을 탐험하고픈 호기심이 있고, 등반대만 그런 게 아니라 일반인도 그렇다. 뒷동산처럼 낮은 곳이었다면 가지 않을 것이다. 높이가 있기 때문에 오른다. 그렇다고 전부가 정상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정상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코스로 오르기도 하며, 산 중턱이나 산 입구에서 자연을 즐기기도 한다. 개인의 취향과 개성에 따라 방법을 선택한다.”

고산등반에서 도전이란 무엇인가? 김영도씨는 “250년의 역사를 가진 세계의 본격적인 등반 역사와 과정을 보면 어려움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인생과 생명을 걸고 오르는 정신이 나오기도 한다. 인간은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심성이 있다. 어려움을 일부러 선택한 것”이라며 “정복이나 도전이란 표현은 등반과정이 그만큼 어렵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지 실제 정복하여 누르고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선조들의 등산활동은 어떠했는가? 학자나 환경단체는 ‘고문헌에는 우리 선조들은 등산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입산(入山)이라 불렀다. 즉 산을 존경의 대상으로 여겨 산을 오른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등산활동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태백의 김강산씨는 “조선시대의 입산이란 속세를 떠나 중이 되거나 도를 닦기 위해 산에 들어가는 걸 말한다. 등산과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변기태씨도 “우리 선조들이 말한 입산이란 속세를 등진다는 뜻으로만 쓰였다”고 말한다.

고문헌의 글 제목만을 본다면 대부분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 徐命膺), 유삼각산록(遊三角山錄, 吳再挺), 유북한기(遊北漢記, 李瀷), 유백운대기(遊白雲臺記, 朴文鎬), 유도봉기(遊道峯記, 洪直弼), 유수락산기(遊水落山記, 李喜朝), 유칠보산기(遊七寶山記, 林亨秀) 등 유람 기록이다.

한양대 국문과 정민 교수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산수유기(山水遊記)는 13세기 진정국사(1206~127?)가 쓴 유사불산기(遊四佛山記)다. 남아 있는 기록물은 금강산기가 200편 이상이며, 청량산은 40편, 지리산은 50편이 넘는다”고 말한다.


등산기인 고문헌도 분명히 있다

‘등금강비로봉4망술회4수(登金剛毘盧峯四望述懷四首)’라 기록된 유정원 선생(1703-1761)의 문집. 변기태씨는 ‘비로봉 정상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며 시 4수를 지었다’로 해석했다.

적지 않은 문헌들이건만 문헌내용에는 ‘등산(登山)’이란 용어가 없다는 것을 근거로 우리 선조들이 등산을 하지 않고 자연과 친화되어 시를 짓고 노닐며 풍류를 즐기며 유람한 걸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에 대해 변기태씨(전 한국산악회 이사)는 이렇게 반론한다. “등백운대, 등청량산 등의 기록내용을 유의해야 한다. 여기서 ‘등(登)’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등백운대(登白雲臺)는 동사와 목적어가 이룬 하나의 문장이다. 백운대를 올랐다는 의미다”라고 해석했다. 유정원 선생(1703~1761) 문집(1863년 간행)의 ‘등금강비로봉4망술회4수(登金剛毘盧峯四望述懷四首)’는 비로봉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며 시 4수를 지었다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사진).

많지는 않지만 제목에 등(登)이 붙어있는 고문헌에는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峯記, 林薰), 등북한산성(登北漢山城, 安昌載), 등소요산일기(登逍遙山日記, 安昌載), 등연적봉기(등登硯滴峯記, 蔡濟恭), 등양산기(登兩山記, 金允植), 등냉산기(登冷山記, 蘆景任) 등이 있다.

또한 변기태씨는 “당시는 한양을 출발, 산 입구까지 접근하는 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금강산에 관한 기록을 보면 유람이라기보다 대체로 등산기다. 한양을 출발하여 금강산을 올랐다가 돌아오는 데 걸린 기일을 보면 평균 약 40여 일이다”고 말했다. “기간이 짧았다고 볼 수 없다. 지금의 해외고산등반처럼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등산 복장이나 이불 등의 장비가 열악한 점을 고려하면 비바람 등 기후나 날씨에 대한 적응계획, 식량계획, 숙박계획, 일정계획 등을 세우고 출발하는 게 간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양반이 노비를 데리고 사찰에서 숙박했을지언정 유람 수준을 훨씬 넘어 전문등산가의 수준이라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라산에 관한 등산기록은 조선 순조 때의 시인인 임제(林齊·1549-1587),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낸 김상헌(金尙憲·1570-1652),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김치(金緻·1577-1625), 제주목사를 지낸 이형상(李衡祥·1653-1733), 조선 후기의 유학자요 애국지사인 최익현(崔益鉉·1833-1906) 등의 글이 있다. 산록에 다다르는 과정, 백록담 등정과정, 변화무쌍한 날씨, 그리고 영실 또는 관음사 등에서 숙박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을 보면 한라산 등산기록이지 유람기라 보기 힘들다. 제1횡단로가 뚫리고 현대식 등산장비를 갖춘 1960, 70년대까지만 해도 한라산 등산에는 보통 2박3일 또는 1박2일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조선시대에 한라산을 오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산행이었을 것이다.

등산을 맹목적인 정상지향 행위로 치부하며 국립공원에서는 등산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본다면 우리 선조들 중에는 맹목적인 분들도 더러 계셨던 것 같다. 그런데 국립공원 탐방이랍시고 산자락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은 무얼 얻으려고 그러고 있는 것인가? 떡도 밥도 나오지 않는데 말이다. ‘정상과 능선을 살리기 위해’ 산자락에 새로이 탐방로를 내고는 생태탐방로(없던 길 새로 뚫은 것이다)라는 그럴 듯한 이름을 붙이고 있는데, 이런 이중적인 자연훼손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 국립공원의 실태다.


/ 이장오 아름다운산하(전 국립공원시민연대) 사무국장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