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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해외 산행] 일본 후지산

월간산
  • 입력 2009.04.28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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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후지산 바람, 히말라야 못지 않네!”
여성 고산등반가 고미영의 동계 시즌 일본 후지산 등행기

일본 최고의 명산이자 영산(靈山)인 후지산(富士山·3,776m). 원뿔 형태의 전형적 활화산의 모습을 하고 있는 후지산은 3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화산 폭발이 있었던 살아 있는 활화산이다. 일본인들에게 숭배와 외경의 대상이자 산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후지산을 찾아갔다.

김포를 출발한 지 1시간30분. 날씨가 맑아서 도쿄로 가는 비행기에서도 만년설이 덮인 후지산이 내려다보였다. 동서 35km, 남북 45km로 뻗어 있는 후지산은 하늘 위에서도 원추형의 균형 잡힌 자태를 볼 수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꿈에 후지산을 보면 그 해 소원이 이뤄진다고 믿는다. 그런데 생각처럼 후지산이 꿈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꿈에서 후지산을 보거나 도쿄 주변을 지나가다가 맑은 날 운 좋게 후지산을 보면 복권을 사는 일본인도 있다고 할 정도로 영산으로 믿고 있다. ‘후지미 프리미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이 말은 집이나 호텔, 온천 등에서 후지산이 보이는 곳은 그만큼 가격이 비싸다는 뜻이다.

가파른 바위지대를 거슬러 구합목으로 향하는 대원들. 눈보라가 몰아쳐 고생을 많이 한 구간이다.
가파른 바위지대를 거슬러 구합목으로 향하는 대원들. 눈보라가 몰아쳐 고생을 많이 한 구간이다.

하네다 공항에 내리니 다테야마 산장을 운영하고 있는 노진강 선배가 마중 나와 있었다. 옆에는 날렵하고 잘 빠진 15인승 버스가 서 있었다. 도쿄에서 100km 떨어져 있는 후지산에 가려면 도쿄의 신주쿠에서 후지산 5부 능선에 있는 가와구치코로 가는 버스를 타거나 인근까지 기차를 타면 된다.


2,300m 높이의 오합목에서 산행 시작

보기 좋은 나무들과 잘 정돈된 거리를 지나 2시간30분 가량 달리니 후지산 산행기점인 일합목(一合目) 주차장이 나타난다. 후지산은 밑에서 정상까지 10등분하여 일합목에서 구합목과 정상(십합목)으로 구분해 놓았다. ‘합목(合目)’이란 등잔에 가득 넣은 기름이 다 타 들어가 불이 꺼질 때까지의 거리라고 한다.

등산은 대개 오합목에서 출발한다. 7, 8월 산장 개장 시즌에는 오합목까지 차를 타고 와서 일출을 보는 관광객이 많으나, 두 달을 제외하고는 모든 산장이 문을 닫기 때문에 등산객을 한 명도 만날 수 없다고 한다.

1,450m의 주차장에서 사토산장이 있는 오합목(2,300m)까지는 구불구불한 길로 세 시간을 걸어야 한다. 다섯 시가 지나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금세 캄캄해지면서 가와구치코의 아름다운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환한 보름달이 가는 길을 비춰 기분이 더욱 상쾌했다.

1 팔합목에 도착하자 대원들은 장비를 재정비하고 행동식을 섭취했다. 이곳을 넘어서면서부터 설사면이 가팔라 안자일렌 상태로 산행해야 했다. / 2 해발 2,300m 고지에 위치한 오합목 사토산장. 일합목(1,450m)에서 도보로 3시간쯤 걸린다.
1 팔합목에 도착하자 대원들은 장비를 재정비하고 행동식을 섭취했다. 이곳을 넘어서면서부터 설사면이 가팔라 안자일렌 상태로 산행해야 했다. / 2 해발 2,300m 고지에 위치한 오합목 사토산장. 일합목(1,450m)에서 도보로 3시간쯤 걸린다.

산장에 도착해 맘 좋게 생긴 사토씨를 만나니 얼었던 몸이 금세 녹는 듯했다. 사또씨는 100년도 더 된 이 산장을 4대째 지켜 오고 있다고 한다. 가문의 역사를 보는 듯 오래된 나무 피켈, 아이젠, 방문객들의 사진 등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는 예약한 우리를 위해 낮에 미리 와서 난로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여유롭게 쌓여 있는 통나무에서 주인의 너그러움이 엿보였다.

한 시간쯤 지나 현지 가이드인 시마다씨가 도착했다. 공학박사이면서도 산이 좋아 산악가이드를 생업으로 하고 있는 그를 보니 진정한 산악인의 모습이 보여 친근하게 느껴졌다. KBS 1TV 영상앨범 ‘산’의 김석원 감독이 일행에게 처음 만난 것처럼 반갑게 인사했다. 모두 배우가 된 것처럼 충실하게 맡은 바 역할을 잘 해주었다.

세 번째로 오케이 사인을 받은 후, 노진강 선배가 무겁게 들고 온 삼겹살과 조창권 선배가 준비한 돗수 센 음료(?)로 후지산의 첫날밤이 강하지만 요란하지 않게 저물어 갔다. 지인들과 함께 하는 산행은 늘 행복하다. 더욱이 국내 산행이 아니고 해외 산행이어서 즐거움이 충만하다.

밤 10시에 소등을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옆방에 침상이 있었지만 썰렁해서 펼쳤던 상만 치우고 다 함께 누웠다.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가 자장가로 들리면서 깊은 수렁에 빠지듯 편안해졌다.


산행 중 미끄러지면 오합목까지 곧장 추락

새벽 4시, 밥과 된장국을 가볍게 먹고 출발준비를 서둘렀다. 후지산에서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은 한 달에 4, 5일 정도에 불과하다. 고산지대인 데다가 태평양에서 부는 바람을 그대로 받기 때문에 비가 자주 오고 운무가 수시로 낀다.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강풍을 동반한 운무가 생겨 길을 잃어 고생하는 등산객이 가끔 있다고 한다.

아이젠을 차고 얼어붙은 눈 위를 걷는 소리가 참으로 경쾌했다. 다행히 바람이 세지 않고 보름달은 여전히 우리의 갈 길을 비쳐 주고 있었다. 오합목에서의 출발은 걷기 좋은 오솔길이다. 40분쯤 지나 육합목에 도착했다. 후지산에는 곳곳에 산장이 있는데 등산로에 있는 휴게소는 후지산에 오르는 등산인들이 반드시 통과하도록 휴게소 바로 옆으로 길이 나 있다. 화장실은 모두 유료이며, 높이 올라갈수록 비싸진다. 지금은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 무료다. 화산지대라 샘물도 계곡도 없는 데다 비가 와도 물이 고이지 않기 때문에 산장들은 빗물을 받아서 사용한다.

육합목에서 황량한 길을 한 시간쯤 올라 칠합목 산장에 도착했다. 칠합목부터는 경사가 있기 때문에 화산재나 낙석, 눈사태로부터 등산객을 보호하기 위해 목책을 설치해 놓았다. 일본인들의 꼼꼼한 안전대책을 엿볼 수 있었다.

후지산의 일출은 바다나 산에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구름 사이에서 뜬다. 장엄한 광경이 압권이다. 그래서 여름에는 일출을 보려고 오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팔합목부터는 운해가 발아래 깔리기 시작한다. 경사가 더욱 심해 너덜지대로 올라가야 한다. 눈이 제법 쌓여 있어 낙석은 없지만 넘어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걸었다. 지그재그로 걸으면서 호흡을 조절했다. 2,300m 높이의 오합목에서 3,776m 높이의 정상까지 한 번에 오르면 고소적응이 안 된 일반인은 고소증세를 겪게 되며 피로가 가중돼 하산 중 추락사고로 이어진다. 이곳에서도 대부분의 사고는 추락으로 인한 사고라고 한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기 때문에 추락이라도 하면 오합목까지 순식간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 일행은 촬영을 위해 안자일렌으로 줄을 묶고 오르기 시작했다. 각자 오르면 편하련만 줄을 묶고 가니 내 맘대로 갈 수 없었다. 앞사람한테 끌려갈 수밖에. 두 사람이 지쳐 하산했다. 촬영팀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행이 전부 올라가면 시청자들은 동계 후지산을 쉽게 생각할 텐테, 포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준비를 단단히 해야 오를 수 있는 산이라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전개될 테니까.

1 야마나카코(山中湖)에서 바라본 후지산. 전형적인 원뿔형태의 산세를 지니고 있다. / 2 오합목을 출발한 지 8시간 만인 오후 1시경 올라선 후지산 정상. 현지 가이드는 오후 1시면 어김없이 운무가 몰려와 정상을 덮기 때문에 서둘러 하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 야마나카코(山中湖)에서 바라본 후지산. 전형적인 원뿔형태의 산세를 지니고 있다. / 2 오합목을 출발한 지 8시간 만인 오후 1시경 올라선 후지산 정상. 현지 가이드는 오후 1시면 어김없이 운무가 몰려와 정상을 덮기 때문에 서둘러 하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곳에는 일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우체국이 있다. 요금은 450엔(약 6,800원)으로 비싼 편이지만 후지산 소인이 찍힌 편지를 받으면 기분이 좋을 것 같다.

본팔합목(팔합목과 구합목 사이)이 가까워질수록 용암이 식어 굳은 형태의 커다란 바위 덩어리들이 조용히 눈을 이고 앉아 있다. 바람이 점점 거세졌다. 계속 오르막길이라서 쉴 때마다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엊저녁 멋진 야경을 자랑하던 도시가 낮에 보니 곳곳에 호수를 품고 있었다. 후지 5호라고 불리는 다섯 개의 호수는 후지산의 분화에 의해 생겨나 화산활동으로 흘러든 용암이 계곡을 막아 형성된 것으로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깨끗한 수질을 자랑한다. 신기했다. 저리 큰 호수를 어찌 만들었을까. 진실로 티끌 모아 태산이다.

오르다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맛, 저 아래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후지산은 원추형이라 계곡이나 위성봉이 없어서 지나온 길이 다 보인다. 내가 지나온 길은 평탄한 곳도 있고, 너덜지대도 있고, 암벽도 있다. 인생이란 이런 것인가?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좋은 일이 생기기 마련이듯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니 어느 새 정상이었다.

1 후지산 정상 표석에서 기념촬영한 대원들. 왼쪽부터 필자, 박호성, 가이드 시마다씨. / 2 팔합목과 구합목 사이의 설사면. 아이젠을 착용한 대원들이 피켈을 이용해 지그재그로 오르고 있다.
1 후지산 정상 표석에서 기념촬영한 대원들. 왼쪽부터 필자, 박호성, 가이드 시마다씨. / 2 팔합목과 구합목 사이의 설사면. 아이젠을 착용한 대원들이 피켈을 이용해 지그재그로 오르고 있다.

정상에 서면 그 동안의 고생을 모두 잊게 된다. 그저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얻는 뿌듯함이 있을 뿐이다. 여러 번 경험해 보지만 위를 보고 오를 때는 순간 순간이 힘들지만 기대와 설렘이 대부분이다. 참아낼 수 있을 만큼의 두려움도 늘 함께 하지만.


정상에서 “대한민국 아자! 아자! 아자!” 외쳐

후지산 정상에는 두 개의 정상석이 있다. 산장 근처에 정상석이 있으나 분화구가 있는 곳이 실질적인 정상이다. 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분화구는 깊이가 200~250m의 깎아지른 절벽이라 내려갈 수가 없다. 일본 알프스의 장대한 산줄기가 보이는 정상에는 최대 탐지거리 600km의 레이더를 갖춘 기상관측소가 있어 안방에서도 매일 정상의 온도를 알 수 있다.

정상에서는 버티고 서 있기 힘들 만큼 강풍이 불어댔다. 체감온도는 영하 30℃가 넘는 듯했다. 20분 후 신현한 PD가 도착하자마자 얼음 바닥에 앉아 간식을 먹었다. 빨리 촬영을 끝내고 내려가고 싶은데 그는 얼어붙은 영양갱을 먹고 있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의 코끝이 금세 하얘졌다. 빨리 발라클라바를 쓰라고 소리 질렀다. 춥지만 단 한 번에 촬영을 끝내려면 웃어야 한다. 태극기를 흔들며 주먹을 불끈 쥐고 “대한민국 아자! 아자! 아자!”. 외국 산행이 처음이라며 겸손해 하던 박호성씨가 카메라를 들이대니 아나운서 같았다.

멀게만 느껴지던 후지산과 운무 사이로 아련히 내려다보이는 가와구치코 시내가 어느새 나와 가까운 벗이 되어 있었다. 신이 살아 있는 성스러운 산으로 오래전부터 영봉으로 숭배해온 산. 70여 개의 후지산 기생화산들이 주변에 병풍처럼 둘러 서 있다. 뿌듯한 삶의 행복을 만끽했다.


/ 글 고미영 코오롱스포츠 챌린지팀
  사진 고사모 원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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