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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창간 비화] “자금·인력 부족으로 폐간 위기 몇 번 넘겨”

월간산
  • 입력 2009.06.0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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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山> 창간 멤버 최선웅씨의 <월간山> 이야기
1969년 10동지의 비극 딛고 한국 최초의 산악잡지로 탄생

<등산> 창간호 표지. 사진은 조선일보사 박창희 기자가 찍었고, 모델은
1969년 설악산에서 조난사한 10동지 중 한 분인 임경식씨다. / 폐간을 모면하기 위해 27부만 찍은 제6호 표지.
<등산> 창간호 표지. 사진은 조선일보사 박창희 기자가 찍었고, 모델은 1969년 설악산에서 조난사한 10동지 중 한 분인 임경식씨다. / 폐간을 모면하기 위해 27부만 찍은 제6호 표지.

1969년 2월 17일 음력 설날 오후, 시내에 나갔다가 신문 호외를 받아들고는 그 길로 한국산악회 사무실로 달렸다. 설악산으로 떠난 훈련대가 눈사태로 조난당했다는 특보였다. 무엇보다 친구 이인정(현 대한산악연맹 회장)과 임경식 선배의 생사 여부가 애타게 기다려졌다. 설연휴라 사무실 문이 닫혀 먼저 온 회원들이 창문을 깨고 들어갔고, 소식을 듣고 쫓아온 회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다행히 인정은 무사했으나 경식 형은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구조본부가 설치되고 이튿날 아침 변완철씨를 대장으로 한 구조대 1진이 육군 헬기편으로 출발했다. 필자는 구조대 식량을 맡아 식량계획을 짰으나 연휴라 모든 상점이 철시해 식량 구입이 난감했다. 다행히 사무실 가까운 곳에 후배 강대성(칼클럽)의 집에서 하는 식품가게가 있어 문을 열게 하고 몇십만 원어치 식량을 구입했다. 필자는 김정태씨를 대장으로 한 구조대 2진에 편성돼 이튿날 밤차로 강릉으로 향했다.

10동지 조난사고 후 장남석·오영복과 창간 작업

2월 19일 아침 강릉역에 도착했으나 폭설로 길이 끊겨 오전 11시가 돼서야 공군 트럭이 지원을 나왔다. 제설차를 앞세운 트럭이 설악산 입구 물치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0시였고, 육군 동방사에서 지원 나온 트럭에 옮겨 타고 설악동에 도착한 시간은 다음날 새벽 2시가 넘어서였다. 얼마나 눈이 많이 왔던지 설악동 여관촌은 온통 눈에 파묻혀 지붕 위로 걸어다니는 상황이었다.

필자는 식량창고에서 구조대 비상식량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나 구조활동은 제2 조난을 우려해선지 별 진전이 없는 낌새였다. 이틀 뒤 어차피 산악잡지를 시작하려던 참이라 사직서를 써서 다니던 출판사로 부쳤다.

구조활동이 부진하던 차 2월 24일 새벽 한국일보 현지 보도반이 매수한 설악동 주민 3명이 눈이 안정된 틈을 타 조난현장에 도착해 조간신문에 대서특필되자 전문산악인들로 구성된 구조대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더 이상 조난자들의 생존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이 나자 2월 25일 생환자들과 함께 필자는 귀경했고, 잡지 창간을 서둘렀다. 3월 1일 인현동 전주 장남석씨 자택 건물 2층에 사무실을 열고 ‘산악문화사’ 간판을 걸었다.

산악잡지를 하게 된 동기는 당시 동국대학교 산악부원이던 오영복의 역할이 컸다. 1968년 대학 3학년이던 영복은 일본 릿교대학(立敎大學) 산악부원들과 교류하면서 국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본 산악서적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출판사에 다니며 산악잡지를 꿈꾸던 필자와도 자주 만나 산책 얘기, 잡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모래내 대장간 김수길씨와 등산장비를 개발하던 영복은 솜다리란 장비점(점주 김호준)에서 자연히 점주의 친구였던 장남석씨와 어울렸고, 사업을 구상하던 장남석씨에게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할 사업은 산악문화사업밖에 없다며 산악잡지사업을 권유했다.

마음이 동한 장남석씨는 잡지 할 사람으로 등산백과를 펴낸 손경석씨나 김정태씨를 꼽았으나 영복은 필자를 적임자라고 적극 추천한 것이다. 필자와 장남석씨가 만난 것은 그해 연말께였다. 1969년 초부터 장남석씨, 영복과 자주 만나면서 잡지사업이 구체화되어 갔다. 당시 필자는 출판사에 다니긴 했지만 기획실에서 근무했던 관계로 잡지를 편집해본 경험이 없었다. 사보를 담당하던 회사 선배를 찾아 편집 계획 짜는 법부터 배우러 다니기에 바빴다.

사무실을 열고부터 잡지 창간을 위한 진용이 짜졌다. 발행인은 장남석, 편집인은 필자, 사진부장을 맡기로 했던 임경식 선배가 불귀의 객이 되는 바람에 베트남전에 갔다가 아사히 펜탁스 카메라를 마련한 이인정씨가 정식 직원은 아니었지만 취재기자로, 칼클럽의 유경이 선배가 광고를 담당하게 되었다. 필자와 발행인 사이의 약정은 동업관계로 발행인은 자금을 대고 필자는 편집인으로 편집·제작을 책임지기로 했다. 월급은 두 사람 공히 월 2만 원을 받고, 이익이 발생하면 발행인 7, 필자 3의 비율로 배분하기로 했다. 당시 필자의 나이 스물 여섯이었고, 발행인의 나이 스물 넷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천둥벌거숭이나 다름없었다.


이은상 회장 “제호 山보다 등산이 더 낫다”

당초 잡지 제호는 ‘山’으로 정했으나 3월 22일 한국산악회 이은상 회장께 표지 제자를 부탁하러 갔다가 ‘山’보다는 ‘등산’이 낫지 않느냐는 권유에 제호가 ‘등산’으로 바뀌고 말았다. 같은 시기 사진작가인 김초영씨와 성우 출신 이우형씨가 산악잡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창간 멤버로 합류했던 한덕정 선배가 이미 창간 준비를 하고 있는 필자에게 잡지를 같이 하지 않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문공부에 정기간행물 등록인가가 나온 것은 5월 6일이었고 등록번호는 ‘라-1158’이었다. 그런데 김초영씨가 추진하는 <山水>의 등록번호도 같은 날 나왔다. ‘山水’의 등록번호는 ‘라-1157’로 <등산>보다 <山水>가 먼저였다. 

불철주야 편집을 서둘러 <등산>은 5월호를 창간호로 내놓았으나 <山水>는 광고를 맡기로 했던 김초영씨가 도중에 손을 떼는 바람에 이우형씨가 떠맡게 되어 6월호를 창간호로 내놓아 <등산>이 우리나라 사상 최초의 산악잡지가 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창간호는 거의 필자 혼자 감당했으나 6월 들어 편집사원 두 사람이 보충되었다. 당시 잡지 인쇄는 활자 조판에 의한 활판인쇄였는데 인쇄 직전 판을 앉히는 과정에서 한 페이지가 빠진 것을 알았다. 임기응변으로 한 페이지였던 산악단체 축하광고를 두 페이지로 분리해 빠진 페이지를 메웠다. 

쉴 틈도 없이 2호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으나 웬일인지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은 낌새가 느껴졌다. 당시에는 거액인 150만 원이라는 돈으로 시작했다고 알았는데 벌써 바닥이 났다니 어이가 없었다. 당시 창간호 3000부 인쇄비가 15만 원이었으니까 그 돈이면 5~6개월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여곡절 끝에 6월호와 7월호가 합본으로 출간되었다.

8월호를 준비하는 도중 발행인이 돌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때 장남석씨의 형인 장무웅씨가 군복무를 마치고 집에 와 있었던 참인데 아무래도 뭔가 사단이 난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장무웅씨는 서울농대 출신으로 서울농대 산악부 OB 진교춘씨와 동기여서 얘기가 통했다. 

그간의 경과를 파악한 장무웅씨는 동생이 벌여 놓은 일을 뒷수습하기로 하고, 장남석씨의 책상을 정리하던 중 수십만 원어치 술값 영수증이 나오는 것을 보고 자금이 고갈된 이유를 알았다. 전말은 일본을 오가며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가 금고에 보관 중이던 돈을 장남석씨가 사업을 한다고 꺼내 쓴 것이었다. 당시 장남석씨 집에는 노모 한 분만 계셨다.

8월 1일부터 장무웅씨가 사장 대리로 나서면서 8월호와 9월호, 10월호까지 발행했다. 발행부수도 2000부로 줄였으나 운영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자금이 계속 투입돼야 했다. 당시 광고라 봤자 남대문시장의 소규모 군용장비점이 고작이어서 광고 수입을 기대하기란 애초에 무리였다. 자금난이 가중되자 장무웅씨도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고 판단한 필자는 이은상 회장을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렸다. 노산 선생은 어렵게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산악잡지가 폐간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며 어떻게든 살려 보자고 했다. 내막은 자세히 모르지만 이은상 회장의 막내 동생인 이신상씨가 운영을 맡게 되고, 필자의 주선으로 12월 10일 장남석씨와 오정방(이신상씨의 사위로 한산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있었음)씨 사이에 잡지 판권 양도양수 계약을 체결하고, 12월 23일 문공부에 정기간행물 등록 변경 신청서를 제출했다.

52쪽짜리 11·12월 합본호 27부 겨우 찍어

당시 해결해야 할 급한 문제는 11월호와 12월호의 발간이었다. 당시 월간지는 1년에 두 번 이상 결호가 생기면 정기간행물 규정에 의해 등록이 취소되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부랴부랴 있던 원고를 모아 52쪽짜리 11·12월 합본호 27부를 찍어 문공부 출판과에 납본해 등록 취소를 모면했다. 그러나 독자들에게는 <등산> 제6호는 영원한 결호가 되고 말았다. 한편 이우형 씨가 펴내던 <山水>도 7월호와 8월호를 내고, 9월호와 10월호가 합본되더니 더 이상 발간되지 않았다. 결국 연말에 가서 문공부로부터 잡지 등록이 취소되고 말았다.

1 10동지 조난사고가 났고 <월간山></div>이 창간된 해인 1969년 2월 폭설에 뒤덮인 설악동 여관촌의 모습. 서 있는 사람이 필자다. 2 <등산> 창간호 기획 메모. 제호가 애초엔 ‘山’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등산> 창간호 편집 계획서.
1 10동지 조난사고가 났고 <월간山>이 창간된 해인 1969년 2월 폭설에 뒤덮인 설악동 여관촌의 모습. 서 있는 사람이 필자다. 2 <등산> 창간호 기획 메모. 제호가 애초엔 ‘山’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등산> 창간호 편집 계획서.

발행인이 바뀌면서 1970년도 1월호와 2월호를 펴냈으나 편집기획에서부터 발행인 측과 의견이 맞지 않아 트러블이 생기기 시작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광고였다. 영화잡지를 했던 발행인은 <등산>지를 오락잡지로 여겼는지 편집부로 넘어오는 광고가 영화관, 목공소, 한의원 광고에서부터 심지어 성병약 광고까지 있었다. 이런 광고를 산악잡지에 어떻게 싣냐고 하면 산에 다니는 사람은 그런데 가지 않느냐는 것이 답변이었다. 하기야 광고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등산>지에만큼은 그러한 광고를 싣고 싶지 않았다. 3월 초 사무실을 중구 충무로5가 삼영빌딩으로 이전했으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필자와 후배 이순용이 사표를 내고 말았다.

이때 등장한 사람이 독자만화를 보냈던 박영래씨다. 편집자들이 그만두자 오정방씨가 광명인쇄 개발부에 근무하고 있던 박영래씨를 영입한 것이다. 장양씨란 편집장이 들어오면서 3월호, 4월호, 5월호가 발간되었으나 기획력과 전문성이 결여된 편집진으로 내용이 부실해지자 6월 발행인 측의 요구로 합의가 이뤄져 필자가 다시 복귀하게 되었다. 장양 편집장 밑에서 6·7월호 합본과 8월호를 내고 필자가 편집장을 맡으면서 9월호를 펴냈다. 이 때 박영래씨의 만화 <악돌이>가 첫 회로 실렸다. 

9월호를 내놓고 나자 또 다시 자금난에 봉착했다. 잡지는 다시 이은상 회장이 관여하던 신우회(信友會)에서 운영을 맡게 되었다. 당시 신우회는 정계·재계·언론계를 망라하는 실력자들의 모임으로 방일영 조선일보사 회장을 비롯해 신직수 검찰총장, 안경렬씨, 김영관 해군제독, 박광석씨 등이 멤버였다. 당시 필자가 작성해 신우회에 제출한 편집부 현황에 잡지의 실패 요인으로 자금 사정이 원활치 못한 점, 광고 수주가 활발치 못한 점, 편집 인력의 부족, 자료 빈곤, 취재활동 부진 등으로 발행 시기를 제대로 못 맞추고 수시로 합본이 발간되는 것을 꼽았다. 

새로 짠 진용은 해군제독 출신 김영관씨가 발행인, 조선일보 문화부장을 지낸 이일동씨가 주간, 필자가 편집장을 맡아 10·11월호를 합본으로 발간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12월호를 편집하면서부터 편집 방향을 놓고 이일동 주간과 의견이 상충되기 시작했다. 산을 잘 모르던 이 주간으로서는 평소 잘 아는 문인·화가들을 필진으로 끌어드렸으니 전문산악지를 표방하던 필자와 부닥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결국 12월호를 내놓고 제도권에 적응하지 못한 필자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1971년 11월 초대 발행인 장남석씨는 <등산> 창간호를 품에 간직한 채 북한산 인수봉 정상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지금부터 40년 전 우리나라 산악운동 발전의 초기나 다름없던 시절, 20대 중반의 애송이들이 감히 산악잡지를 한다고 덤벼들었다가 이태를 넘기지 못하고 의지를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싹은 이제 40년의 거목으로 ‘지령 476호’를 자랑하게 되었다. 창간호 목차를 펼치면 스타트 하켄을 박는 그림이 배경에 깔려 있다. 진정한 산악운동을 지향하는 반려자로 스타트 하켄을 박는 초심을 저버리지 않는 ‘山’이 되길 바랄 뿐이다.


/ 글 최선웅 한국산악회 부회장·매핑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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