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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원정 보고] 에베레스트 남서벽

월간산
  • 입력 2009.06.24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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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0일 오후 3시(한국 시각 오후 6시15분), 마침내 박영석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가 남서벽 신루트를 통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2007년 봄과 2008년 가을에 이어 세 번째 도전. 박영석 대장과 진재창 부대장, 신동민·강기석·이형모 5명의 대원과 7명의 셰르파가 남서벽 등반을 위해 나섰다. 적은 수의 대원이지만 모두 지난 가을 함께 등반을 했고, 박영석 대장과 나는 세 번째 등반이다.

남서벽을 뒤로하고. 왼쪽부터 이형모 대원, 박영석 대장, 강기석 대원, 진재창 부대장, 신동민 대원.
남서벽을 뒤로하고. 왼쪽부터 이형모 대원, 박영석 대장, 강기석 대원, 진재창 부대장, 신동민 대원.

가뭄으로 얼음 없어 확보에 어려움 겪어

원정대는 4월 15일 라마제를 지내고 18일부터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했다. 동계 시즌 동안 가뭄과 강풍에 시달린 남서벽에는 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바위가 드러나 있었다. 20일부터 시작된 남서벽 루트 작업에 여러 어려움이 나타났다. 눈과 얼음이 없어 확보의 어려움(스노바와 스크루의 사용이 어려움)이 있었고 낙석 위험 속에서 힘겹게 전진해 이틀 만에 C3(7,350m)까지 루트 작업을 마쳤지만 강풍이 계속 되어 캠프 설치가 지연됐다.

24일. 박영석 대장과 진재창 부대장, 두 명의 셰르파가 힘겹게 캠프로 진출해 바위지대를 깎아 3시간 가량 작업 끝에 겨우 C3를 구축한 후 800m의 로프 설치 작업을 마치고 내려왔다. 그 뒤 27일 강기석 대원과 셰르파들이 C4까지의 루트 작업을 마치고 7,800m 지점에 C4를 구축했다.

정상 바로 아래 세컨드 스텝 바위지대를 등반 중인 대원들.
정상 바로 아래 세컨드 스텝 바위지대를 등반 중인 대원들.

C3와 C4는 눈이 부족해 바위를 깎고 하켄과 로프로 고정시켜야 했고, C3의 텐트가 낙석에 맞아 구멍이 나는 등 불안하기는 했지만 우리의 의지로 묶은 이 캠프들은 등반이 끝날 때까지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었다.

바통을 이어 받은 신동민 대원과 나는 C5 구축을 위해 28일 C4로 진출, 29일 루트 작업을 나갔지만 나는 컨디션 난조로 8,050m에서 되돌아서야 했다. 하지만 신동민 대원과 2명의 셰르파가 지난 가을 최종 진출 지점에서 200m 정도 더 진출해 고도 8,350m 지점의 양호한 캠프 사이트까지 루트를 개척했다.

C4로 등반 중인 강기석 대원.
C4로 등반 중인 강기석 대원.

이곳은 1982년 러시아 등반대가 남서벽을 통해 등반한 루트와 만나는 지점으로, 등반대가 사용한 산소통과 텐트 잔해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박영석 대장의 주도면밀한 지휘하에 대원과 대원의 바통 터치, 셰르파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마침내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코리안 신루트를 개척한 것이다.

이제 신루트 개척의 의의를 높이고 그 동안 함께 한 대원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는 남서벽을 넘어 서릉을 지나 정상에 올라서는 일만 남아 있었다. 서릉 등반은 1979년 유고팀의 초등, 1982년 남서벽을 통한 서릉 등반에 성공한 러시아팀 이후 전무했다. 유고팀은 하산 도중 정상에 오른 대원 모두가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고 이후 많은 등반대의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던 악명 높은 능선이다. 그래도 우리는 험난한 남서벽에 오른 후 그 마의 서릉을 돌파해야만 한다.

해발 7,800m대의 벽상에 튀어나온 능선마루 위에 아슬아슬하게 설치된 C4.
해발 7,800m대의 벽상에 튀어나온 능선마루 위에 아슬아슬하게 설치된 C4.

4월 30일. 모두 BC로 하산해 달콤한 휴식을 취하며 정상 공격 의지를 다졌다. 원정대장인 구자준 대장(LIG손해보험 회장)이 BC에 찾아와 격려해주고, 엿새 뒤인 5월 6일 계획대로 1차 정상 공격을 위해 BC를 출발했지만 기상 악화로 인해 실패했다.

BC로 돌아온 원정대는 한국 기상청의 도움으로 날씨 정보를 받고, 다른 사이트의 날씨 정보와 타 원정대의 정상 공격 사례를 바탕으로 5월 19일을 정상 공격일로 정하고 사뭇 지루한 휴식에 들어갔다.

박영석 원정대가 세차례의 도전 끝에 신루트 등반에 성공한 에베레스트 남서벽 전경.
박영석 원정대가 세차례의 도전 끝에 신루트 등반에 성공한 에베레스트 남서벽 전경.

정상 공격 멤버는 박영석 대장과 우직하게 등반을 받쳐주는 진재창 부대장, 위로 오를수록 괴력을 발휘하는 신동민 대원, 등반에 대한 의지와 철학이 남다른 강기석 대원과 상게프리 셰르파로 정해졌다. 박 대장은 루트 개척 때 다리 부상을 당했지만 불굴의 투지로 등반에 임하고 있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나는 BC에 남아 지원조의 임무를 맡았다.

낙석이 퍼부어도 정상 향한 이들의 의지 못 꺾어

17일, 대원들은 남서벽으로 향했다. 캠프가 좁기 때문에 신동민·강기석 대원과 상게프리 셰르파는 C2(6,500m)에서 C4로 바로 이동하고 박영석 대장과 진재창 부대장은 C3로 이동했다. 그 사이 두 명의 셰르파는 C5(8,350m)로 짐을 수송하고 C2에는 두 명의 셰르파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대기하고 있었다.

짐 수송에 문제가 있어 계획을 수정해 20일로 정상 공격일을 고쳐 잡은 뒤 18일 신동민 대원과 셰르파가 C5를 구축하고 C3에 있던 박 대장과 진 부대장은 C4로 진출해 강기석 대원과 합류했다.

해발 8,350m 지점에서 발견한 1982년 러시아 등반대의 산소통과 캠프 흔적.
해발 8,350m 지점에서 발견한 1982년 러시아 등반대의 산소통과 캠프 흔적.

19일 C5에 있던 신동민 대원은 셰르파와 함께 서릉상에 250m 정도 루트를 개척하고 셰르파는 컨디션 난조로 하산했다. 이때 C4에 있던 대원들은 C5로 이동하며 데포해둔 산소와 로프 등을 운반했다. 정상 공격을 위해서 모두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오후 5시, 정상 공격대원 4명이 C5에 모였다. 생각보다 서릉은 험하고 길다. 바위도 불안해 낙석도 빈번하다. 하지만 정상을 향한 이들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아~, 베이스, 베이스.”

해발 8,600m대의 퍼스트 스텝을 지나 등반 중인 대원들. 박영석 대장 뒤로 진재창 부대장이 등반 중이다.
해발 8,600m대의 퍼스트 스텝을 지나 등반 중인 대원들. 박영석 대장 뒤로 진재창 부대장이 등반 중이다.

밤 12시49분, 정상으로 출발한다는 무전이 날아왔다. 네 명의 대원이 쏟아내는 열정이 가슴을 휘감아왔다. 신동민 대원이 전날 설치한 로프를 따라 조심스레 올랐다. 총 10개의 산소통과 500m 로프와 의지. 이것이 그들이 휴대한 모든 장비였다.

공격대원들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다 보니 움직임이 더딜 수밖에 없고 낙석 때문에 움직임이 여의치 않았다. 여명이 밝아올 무렵 옐로 밴드가 끝나는 8,600m 지점의 퍼스트 스텝에 도달했다.

C5에서 출발해 정상공격 중인 대원들이 해발 8,500m대의 옐로 밴드 지역을 지나고 있다.
C5에서 출발해 정상공격 중인 대원들이 해발 8,500m대의 옐로 밴드 지역을 지나고 있다.

새벽 3시50분, 아직 시간은 충분하지만 로프도 부족하고 벽이 너무 가팔라 왼쪽으로 우회해 조심스레 이동했다. 신동민 대원이 선등으로 나아가고 박 대장이 뒤에서 받쳐줬다.

고군분투 끝에 퍼스트 스텝을 넘어서니 아침 8시30분. 몸은 지쳤지만 몸을 비추는 햇살에, 서로를 바라보는 따스한 눈빛에 힘을 냈다. 서릉은 생각보다 멀고 험했다. 8,700m의 세컨드 스텝에 도착하니 로프도 바닥이 났다. 할 수 없이 안자일렌으로 오르다 보니 속도가 더 나지 않았다. 이미 시간은 12시를 넘겼다.

정상에 오른 대원들. 왼쪽부터 강기석 대원, 박영석 대장, 진재창 부대장. 촬영 신동민 대원. 산악인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룽다가 정상을 장식하고 있다.
정상에 오른 대원들. 왼쪽부터 강기석 대원, 박영석 대장, 진재창 부대장. 촬영 신동민 대원. 산악인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룽다가 정상을 장식하고 있다.

에베레스트에서 사고 당한 네 대원의 사진 정상에 묻어

BC에 있던 나는 걱정이 되는 마음을 억누르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12시39분, 이제 1시간 반 정도면 정상에 설 거라는 무전 이후 소식이 없었다. 더 이상 늦어지면 안 되는데, 정상을 덮은 가스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어느 순간 바위 지대가 끝나고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눈이 나타났다. 저 멀리 오색 룽다가 펄럭였다. 정상이다. 신동민 대원을 선두로 강기석 대원, 진 부대장, 박 대장이 정상에 올랐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현지 시각 오후 3시였다.

지난 1993년과 2007년 남서벽 등반 중 사고로 숨진 고 안진섭·남원우·오희준·이현조 대원의 사진을 정상에 묻는 박영석 대장.
지난 1993년과 2007년 남서벽 등반 중 사고로 숨진 고 안진섭·남원우·오희준·이현조 대원의 사진을 정상에 묻는 박영석 대장.

박영석 대장은 품에 깊이 간직해온 1993년, 2007년 남서벽 등반 중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대원들의 사진을 꺼냈다. 고 안진섭·남원우·오희준·이현조 네 명의 대원이 박 대장을 비롯한 네 명과 함께 했기에 마의 남서벽과 서릉을 지나 정상에 오른 것이 아닐까. 박영석 대장은 그저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BC에 있던 나 역시 정상에 올라선 기분이었다. 이렇게 멋진 원정대와 함께 한다는 것에, 그들의 의지와 열정에…….

남서벽. 그 험난한 길에 오르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한 대원들이 이들을 지켜주고 있었다. 오후 3시35분, 하산을 시작한 대원들은 오후 7시55시 남동릉에 무사히 도착했고, 21일 C2로 내려선 뒤 22일 BC로 무사히 안착했다.


/ 글 이형모 대원
  사진 원정대

미니 인터뷰

“진짜 우리 길로 세계 최고봉 올랐습니다”

세 번째 도전에서 남서벽 신루트 한 푼 박영석 대장
“8,000m급 14개 거봉에 코리안 루트 낼 터”

박영석(朴英碩·46·노스페이스 이사·동국대 OB) 대장은 히말라야 8,000m 14개 거봉 완등· 3극점 도보탐험·7대륙 최고봉 완등으로 이어지는 산악 그랜드슬램을 세계 최초로 이뤄낸 산악인이지만 에베레스트 남서벽만큼은 녹록하지 않았다.

박 대장은 1991년 남서벽에 처음 도전했다. 그 원정에서 그는 보닝턴 루트로 등반하던 중 150여m나 추락, 광대뼈가 함몰되는 등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1993년 재도전했다. 그 등반에서 남원우 대원이 남서벽 단독등반 중 불귀의 객이 됐고, 안진섭 대원은 남동릉 루트로 함께 정상에 올라선 뒤 하산길에 추락사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정상에서 태극기를 휘날리고 있는 박영석 대장.
정상에서 태극기를 휘날리고 있는 박영석 대장.

이후 14개 거봉 완등 레이스와 3극점 도보탐험에 주력해오던 박 대장은 산악 그랜드슬램을 마치자마자 2007년 남서벽 신루트 등반에 도전했다. 불운은 또 이어졌다. 한지붕 아래서 5, 6년씩 함께 살아온 오희준·이현조 대원이 정상공격을 앞두고 C4에서 취침 중 눈사태 사고를 당하고 만 것. 그 사고로 충격을 받은 박영석 대장은 산을 떠날 생각까지 했으나 마음을 추슬러 지난해 가을 재도전했다. 그러나 이때 역시 막판에 제트기류가 형성되는 바람에 등반을 접어야 했다.

따라서 이번 성공은 세 번째 도전 끝에 이뤄낸 남서벽 신루트 등반이자 다섯 번째 도전 끝에 남서벽을 통한 세계 최고봉 등정이다. 또한 이로써 박영석 대장은 에베레스트에서 1993년 무산소 등정, 2006년 티베트 쪽에서 네팔 쪽으로 넘어오는 횡단등반, 그리고 남서벽 신루트로 이어지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5월 21일 6시경(현지 시각 오후 2시45분) 사우스콜 캠프(7,950m)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C2(6,500m)로 내려오자마자 전화를 받은 박영석 대장의 목소리는 무척 지쳐 있었다. 여느 고산 같으면 마지막 캠프에서 하루면 베이스캠프로 내려서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특히 20일 0시49분 C5(8,350m)를 출발해 악명 높은 서릉을 돌파하며 오후 3시 정상에 올라서기까지 14시간이 넘는 긴 등반과 탈진으로 사우스콜을 거쳐 하산하는 사이 몸 안의 모든 에너지가 빠져나간 듯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또 다른 도전 계획을 밝혔다.

“드디어 해냈어요. 우리 길로 남서벽을 올랐어요. 이제 14개 거봉에 모두 우리 길을 낼 겁니다. 세계 어느 산악인들에게 자랑해도 될 만큼 멋진 코리안 루트를 말입니다.” <한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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