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해안 요트 탐사(1)

[477호] 2009.07
입력 2009.07.14 10:33 | 수정 2009.07.14 10:33

충격적으로 아름다운 굴업도를 만나다
9명 일행, '집단가출호' 타고 2,000km 해안 일주 개시

 “여기는 해경 ○호선, 북위 ○○○, 동경 ○○○에서 서남서 방향 7노트로 운항 중인 선박, 응답바랍니다.”좌표값, 진행방향, 속도 모두 일치한다. 저들이 응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우리였다.

굴업도 남쪽 3~4마일 해상에 뾰족히 솟아오른 3개의 바위 선단여. 작은 한려수도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덕적군도에 속하는 여러 섬들 중 하나로 굴업도 해변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는 이곳을 그냥 지나칠순 없었다. 선단여의 절경에 취한 우리는 내친 김에 좀 더 남하해 백아도, 울도까지 둘러봤다.
항해 중 VHF 교신이란 진지해야 한다. 더구나 교신 상대가 해상의 치안을 담당하는 해경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을 터. 하지만 무전기 마이크에 대고 우리 배의 이름을 얘기하는 순간, 무전기 건너편의 교신 상대가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배 이름은 ‘집단가출호’였다.

40피트급 세일링 요트 ‘집단가출호’는 6월 5일 낮 12시, 경기도 화성 전곡항의 비좁은 수로를 빠져나와 첫 번째 목적지 굴업도를 향해 돛을 올렸다. 앞으로 1년간 백두대간을 구간 종주하듯 한반도 연근해를 12구간으로 나눠 돌아 국토의 막내 독도까지 가는 긴 여정의 첫걸음이다. 한 달에 한 번, 매월 첫째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사흘간 항해로 대한민국 영해의 외곽 섬들을 섭렵하고 내년 이맘때 독도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한 달에 한 번, 금~일 대한민국 영해 외곽 섬 섭렵키로

가출 2일째. ‘낚시계의 타짜’. 무인도인 선갑도에서 첫 미끼로 여지없이 놀래미를 낚아 올렸다.
수호지에서 양산박의 산채 식구들이 급시우(及時雨) 송강을 구심점으로 의기투합했듯, 집단가출호의 크루(CREW)들은 만화가 허영만 화백을 중심으로 모였다. 크루들의 직업은 다채롭다. 나무집 짓는 목수, 고층빌딩 유리창닦이, 보험사 영업사원, 고무공장 사장, 건설현장 작업반장, 치과의사……. 허 화백과 국내외 산에서 만난 인연으로 연령을 떠난 우정을 쌓아가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집단가출호는 ‘집에서 가출하는 각오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항해’라는 뜻에서 허영만 화백이 붙인 이름이다. 집단가출호 승무원들은 자연히 가출집단이 된다.

배는 초여름 산들바람을 안고 바람의 속도로 서진했다. 7노트로 불던 바람은 입파도 부근 항로를 횡단할 때 5노트로 떨어졌고 선속도 따라서 줄었다. 승봉도 부근 두 번째 항로를 또 다시 거북이걸음으로 횡단하자 해경이 무슨 일인가 싶어 교신을 청해온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탄 것은 바람으로 가는 돛단배. 바람 없는 날, 우리 배는 당연히 느렸다. 느린 속도는 2,000km가 넘는 머나먼 바닷길을 가야 할 집단가출호의 극복할 수 없는 한계였고, 또한 양보할 수 없는 낭만이었다.

미약하나마 10분 간격으로 강약을 보이던 바람이 입파도 북쪽을 돌아 말육도가 보일 때쯤 거의 사그라들어 바다는 유리판처럼 고요해졌다. 이작도 남쪽, 모래로 이뤄진 수심 얕은 천퇴를 피해 승봉도 부근부터 항로를 남쪽으로 꺾었다.

약한 바람을 그러모으려 안간힘을 쓰느라 모두들 바쁜 탓에 밥 지을 여력이 없어 오후 3시에야 라면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어, 저거 봐라. 물속에 뭐가 있다.”

덕적군도 남쪽 해역에 접어들 무렵 틸러(요트의 방향타)를 잡고 있던 허 선장이 뭔가를 발견했다. 선장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 상괭이 서너 마리가 배와 30m쯤 간격을 유지한 채 따라오고 있었다.

가출 3일째. 풍도의 자갈 해변에 상륙한 일행이 벌겋게 녹슨 채 해안에 뒹구는 대형 닻 옆에서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김성선, 필자, 송영복, 허영만 선장.
돌고래의 친척인 상괭이는 수줍음을 많이 탄다. 돌고래와는 달리 배를 따라오는 경우가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르는 것은 아마도 우리 배가 바람으로만 달리는 요트인지라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상괭이들은 선갑도와 문갑도 사이를 통과할 때까지 쫓아오다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바다에선 빤히 보이는 곳도 무척 멀다. 굴업도가 보이기 시작한 뒤 2시간 가까이 지난 오후 8시, 굴업도 선착장 앞 앵커에 배를 묶고 상륙했다. 선창엔 굴업리 서인수 이장이 트럭을 몰고 홀로 마중 나와 있었다.

섬 사람의 밥상에선 갯내와 흙내가 섞여났다. 들기름 발라 구운 돌김, 물텀벙 찌개, 소박하게 무쳐낸 취나물과 달래장아찌를 갓 지어낸 뜨거운 쌀밥에 척척 얹어 두 그릇씩 비워냈다. 손 큰 안주인이 양푼 가득 내어온 박하지 게장도 깡그리 먹어치웠다.

썰물이 빠진 저 끝까지도 깨끗한 모래사장 펼쳐진 굴업도

8가구 20여 명. 굴업리는 국내 리(里) 중 가장 작은 규모다. 이장댁 코 앞에 있는 큰마을 백사장에 비박장비를 풀었을 때 달이 떠올랐다. 소주잔을 기울이던 허 선장이 어깨를 툭 치며 말한다.

“좋다. 그치?”

말이 필요없었다. 저녁 바람에 잔물결이 일어 달빛이 바다 가득 부서졌다. 달에 취해 있을 때 이장님이 아귀를 해풍에 반건조시킨 뒤 떡을 찌듯 쪄낸 물텀벙 백숙을 안주로 내왔는데 그것은 육지에서 경험한 적 없는 놀랄 만한 맛이었다.

달이 떠 있는 가운데 선갑도 모래사장에서 저녁 식사 중인 크루들. 해안에 밀려온 통나무로 모닥불을 피웠다.

달, 바다, 곡차. 모든 것이 완벽했으나 로맨티스트 허 화백은 한 가지를 더 원했다.

“이장님, 저 가로등 끌 수 없을까요?”

이장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제가 끄고 가지요.”

잠시 후 해안을 따라 켜져 있던 가로등이 꺼졌고 바다는 온전히 달빛으로 빛났다. 달은 새벽에 개머리 너머로 저물었다.

햇살이 눈부셔 일어나 보니 허 선장이 보이지 않았다.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 날아간 듯 빈 침낭만 남아 있다. 모래밭에 발자국이 개머리 쪽으로 길게 나 있어 족적을 쫓아 시선을 돌리니 허 화백은 어느새 저 멀리 구릉 꼭대기에 서 있었다. 선착장 쪽에 묘박 중이던 배를 우리가 비박했던 큰마을 해변 앞바다로 옮겨둔 뒤 대원들은 찬란한 해변을 산책했다.

아침 햇살 속에 드러난 굴업도는 충격적으로 아름다웠다. 곱디고운 모래가 드넓게 깔린 백사장은 썰물이 빠진 저 끝까지 모래였다. 절묘하게 풍화된 바위와 모래로 이뤄진 구릉엔 소사나무가 원시림을 이루고 있었고 개머리 중턱부터 남쪽 사면으로 억새밭이 장쾌하게 펼쳐졌다.

이른 아침 굴업도 해안에서 망원 렌즈로 당겨 촬영한 선단여와 묘박 중인 집단가출호. 먼 곳은 옅고, 가까운 곳은 짙어 한 폭의 동양화 같은 풍경이다.
섬의 서쪽은 가파른 해안 절벽이 발치에서 흰 파도를 일으키며 씩씩하게 솟았고, 백사장에서 데워진 서말(thermal)을 탄 해동청 한 마리가 아침거리를 찾아 드높이 솟구쳤다.

섬은 오래 시달려왔다. 핵폐기장으로 결정됐으나 지질조사 결과 부적합하다 해서 살아났다가 이번엔 한 대기업이 골프장을 만들겠다고 해서 숨을 죽이고 있다.

골프장 논란 이후 육지 사람들의 발걸음이 늘었고 사람들은 섬을 이룬 구릉의 능선과 골짜기에 오솔길을 냈다. 섬의 북쪽에서 남쪽까지 이어진 능선길은 이 섬이 처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무심히 빛났다.

마을회관 기능까지 하고 있는 이장댁에 <식객> 단행본 한 세트를 선물하고 굴업도를 떠난 것은 오전 11시.

울도 쪽으로 남하해 선단여를 두 바퀴 돌았다. 다음 비박지인 선갑도로 가는 항로에선 멀어지지만 선단여 부근 아름다운 바위섬들의 유혹을 뿌리치긴 어려웠다.

공포스러웠던, 굶주린 모기떼 습격

한때 낚시깨나 즐겼다는 허 선장에게 저녁 찬거리 조달 과제가 안겨졌다. 수심계에는 어군탐지기 기능도 있어서 낚시하기 좋은 곳을 찾아 무인도인 선갑도를 북쪽으로 돌아 작은 백사장 앞에서 닻을 내렸다.

모두 선장의 낚시에 기대를 걸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만일 못 잡으면 밥과 김치밖에 먹을 게 없는 상황. 하지만 갯지렁이를 미끼로 쓴 허 화백은 기대를 져 버리지 않고 팔뚝만한 놀래미 세 마리를 꿰어 올렸고 저녁 반찬 걱정에서 해방된 식사 당번 크루들은 고기가 걸려들 때마다 환호했다.

해질녁 어선 한 척이 어구를 펼치며 우리 배 쪽으로 접근했다. 낯선 배의 출현으로 잔뜩 긴장한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배를 바짝 붙이더니 다짜고짜 노란색 바구니를 내밀었다.

바구니엔 아귀와 갑오징어가 들어 있었다. 거칠게 표현된 바다 사나이들의 우정. 우리도 답례로 아껴뒀던 고량주 한 병을 저쪽 배로 건넸다.

어선은 우리 배로부터 20m 거리에 묘박했다. 굴업도 물텀벙 백숙 맛을 못 잊은 크루들이 아귀를 손질해 요트의 선미에 주둥이를 꿰어 매달았다.

낚시로 잡은 놀래미는 섬에 상륙해 찌개로 요리했다. 식사 준비가 끝나 기대에 차 국물을 떠 먹어본 순간 모두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국물이 쓰다!”

쓸개를 빼내지 않고 끓인 탓이다.

‘놀래미 쓸개탕’은 이날 밤 집단가출호 멤버들이 겪은 혹독한 시련의 전조였다. 해가 떨어지자 모기떼의 습격이 시작된 것이다. 바다 모기는 매서워서 주삿바늘 같은 주둥이로 얇은 셔츠쯤은 쉽게 뚫었다.

한반도 연근해 일주 세일링 제1차 항해에 참가한 집단가출호 크루들. 왼쪽부터 이진원, 김성선, 홍선표, 송철웅, 송영복, 허영만, 김상덕, 이정식.
견문발검(見蚊拔劍)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이날 밤엔 굶주린 모기떼에 시달려 검이 아니라 대포라도 있다면 쏘고 싶었다. 모기는 이 무인도 생태계 최상위의 포식자였고 우린 속수무책으로 피를 빨렸다. 특히 침낭에 들어가 숨을 쉬기 위해 내민 얼굴이 모기의 무자비한 공격 목표가 됐다. 그 와중에도 “이 동네 모기들은 오늘 우리가 안 왔으면 대체 뭘 먹고 살았을까”라는 유머가 나왔지만 모기와의 전쟁은 심각했다.

새벽에 또 다른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조류에 밀린 어선과 우리 배의 닻줄이 엉켜 충돌 위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서둘러 고무보트를 타고 배로 접근해 1시간여의 작업 끝에 서로 엉킨 닻줄을 풀고 배를 안전하게 묘박했다. 이날 밤 우리 중 잠을 제대로 잔 사람은 몇 없었다.

안개 속에 이슬비까지 내리는 아침, 풍도로 떠나는 길은 피곤했다. 밤새 모기에 시달리느라 잠을 설친 멤버의 일부는 항해 중 꾸벅꾸벅 졸았다. 다음 항해부터는 모기에 대한 대책을 최우선 순위로 마련하자는 데 이견이 없었다.

12시, 낚시 온 사람들로 붐비는 풍도에 상륙해 점심식사를 했다. 아침에 걷어온 꽃게 몇 마리로 끓인 탕은 맑고 낭랑했다. 민박집 주인은 놀래미 새끼를 소금에 절여 말린 뒤 연탄불에 구운 것을 내왔는데 법성포 굴비에 버금갈 만큼 일품이었다. 전교생이 6명인 풍도초등학교 숙직 교사에게 학생들이 볼 책을 선물한 뒤 다시 길을 떠났다.

어구가 지뢰처럼 깔린 바다엔 해무마저 짙게 드리워져 거대 선박들이 교차하는 ‘바다 위의 고속도로’인 항로를 횡단할 땐 초긴장 상태였다. 선박들의 낮고 둔중한 무적에 화들짝 놀라 우리도 일정 간격으로 무적을 불어댔다. VHF 무전기에서는 시계 200m가 채 안 되는 안개 속에서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는 상선들의 긴박한 교신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오후 4시. 안개가 걷힌 가운데 낯익은 제부도의 빨간 등대와 누에섬의 파란 등대가 보였고, 사흘 전 떠났던 전곡항이 펼쳐졌다.

입항 마무리 작업을 마친 뒤 우리는 악수를 나누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 텁수룩한 수염……. 무엇보다도 모기에 물려 얼굴이 퉁퉁 부은 모습이 가관이었다.

우리의 첫 번째 집단가출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다음 가출은 7월 3일부터 5일까지 격렬비열도와 파수도를 거치는 바닷길로 이어진다.<계속>


/ 글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blog.naver.com/timbersmith
  사진 이정식 아웃도어 포토그래퍼 photo9.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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