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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한반도해안 요트 탐사(3)] 12동파도 절경에 넋을 놓다

월간산
  • 입력 2009.09.03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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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청도에선 즉석 음악회로 주민들과 어울려

“충성! 사인 좀 부탁 드리겠습니다.” 군산항에서 서쪽으로 66km 떨어진 전북 최서단의 섬 어청도 방파제. 야영 준비를 마치고 모여 있던 우리 쪽으로 2명의 해군이 다가와 큰 소리로 경례를 붙였다. 야심한 시각, 예고 없는 방문에 놀란 우리 앞에서 군인들은 다짜고짜 군복 윗옷을 벗더니 앉아쏴 자세로 돌아 앉아 등짝을 내밀었다.

“허 화백님 팬입니다. 셔츠에 사인을 해주시면 길이길이 간직하겠습니다.”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던 허 화백은 너털웃음과 함께 아들 같은 군인의 등에 사인을 했다. 해군들의 방문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처음엔 고참들이 오더니 나중엔 이등병들까지 불침번 근무 중인 동료의 셔츠를 들고 찾아왔다.

오천항을 떠나 어청도를 향하는 뱃길.  허영만 선장을 비롯한  크루들이 집단가출 트리오 멤버들과 <섬주민과 함께하는 작은 음악회></div>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오천항을 떠나 어청도를 향하는 뱃길. 허영만 선장을 비롯한 크루들이 집단가출 트리오 멤버들과 <섬주민과 함께하는 작은 음악회>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유쾌한 가운데 장난기가 발동한 허 화백이 사인을 해주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거 1개 사단이 다 몰려올 것 같은데 맨입으로 되겠나?”

그래서였을까? 잠시 후 부사관 한 명이 일등병과 함께 뭔가 묵직하게 들어 있는 망태를 들고 찾아왔다. 망태엔 작지만 살이 통통히 오른 놀래미, 우럭, 볼락이 가득 들어 있었다.

부사관은 준비해온 도마와 칼을 이용해 번개처럼(정말 번개였다!) 회를 떠 우리 앞에 놓아 두곤 “우리 병사들에게 사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경비정으로 돌아갔다.


키보드·해금·오카리나 3중주로 주민들 어깨 들썩들썩

군인들이 허영만 화백이 섬에 왔음을 안 것은 <집단가출 트리오>의 공연 때문이었다. 집단가출호는 한반도 외곽 영해 기점을 항해하며 항로상에 들르는 섬의 주민들과 어울리기 위해 해금, 키보드, 오카리나 등 3종의 악기로 연주하는 트리오를 갖추고 있다. 권평원(키보드), 김미숙(해금), 조은주(오카리나) 등 연주자들은 물론 집단가출호의 선원인데 그 동안 들른 섬들이 대부분 무인도여서 연주할 기회를 갖지 못하다 오늘 어청도에 입항해 처음으로 작은 즉석 음악회를 열 수 있었다.

사전 예고 없는 즉석 연주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주민의 절반이 넘는 100여 명의 관객들로 대성황을 이룬 음악회로 섬 전체가 떠들썩했으니, 군인들도 허 화백의 출현을 알고 있던 차에 자신들이 근무하는 경비정 바로 옆에서 우리가 야영 캠프를 차리자 근무 시간을 피해 줄줄이 방문했던 것이다.

여성 2인, 남성 1인으로 구성된 집단가출 트리오의 연주회는 ‘대박’이었다. ‘치키치키, 차카차카, 초코초코초~’

프로젝트 퓨전 앙상블 집단가출 트리오가 ‘날아라 슈퍼보드’를 연주하자 섬마을 초등학생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성연이, 나영이, 은이 등 어청초등학교 2학년 꼬마 여학생들이 먼저였고 곧이어 다빈이, 다준이 형제와 유진이 등 남자 아이들이 가세하자 6학년 민혁이도 끼어들었다.

십이동파도에서 상왕등도로 항해 중 별 기대 없이 선미에 묶어둔 낚싯대가 갑자기 휘청거려 릴을 감아들이자 40cm 크기의 삼치가 걸려들었다.  낚싯대를 묶어둔 이진원 크루는 그게 자신의 낚시 실력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십이동파도에서 상왕등도로 항해 중 별 기대 없이 선미에 묶어둔 낚싯대가 갑자기 휘청거려 릴을 감아들이자 40cm 크기의 삼치가 걸려들었다. 낚싯대를 묶어둔 이진원 크루는 그게 자신의 낚시 실력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방학을 맞아 군산에서 외할머니 댁에 찾아온 아이들은 허영만 선장을 둘러싸고 팔짝팔짝 뛰었다. 리듬에 정직하게 몸을 맡긴 어린이들의 신바람은 단번에 좌중으로 전파됐다. 연주가 원더걸스의 <노바디>에 이르자 쭈뼛쭈뼛 박수만 치던 김완기(42) 이장 등 어청도 주민들도 체면을 벗어던지고 춤판에 합류했다. 전북에서 가장 먼 바다에 떠 있는 섬, 어청도가 삽시간에 무도회장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공연장을 찾은 어청초등학교 김명종 교장과 방철수 선생께 <식객> 한 질을 전달하고 아이들에겐 오카리나를 선물했다.

이튿날 아침 오카리나 강습까지 해준 뒤 어청도를 떠날 때 아이들은 김미숙·조은주씨와 그 새 정이 들어 “이모, 우리랑 그냥 여기에 살면 안 돼요?”라며 매달려 눈물샘을 자극했다. 아이들의 아쉬운 시선을 뒤로하고 집단가출호는 북서풍을 받아 남진해 12시께 십이동파도에 접어들었다.


변산 채석강보다 더 멋진 12동파도 해안 절벽

12개의 섬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십이동파도는 자연환경 보존을 위한 특정도서로 지정돼 있을 만큼 경관이 빼어난 데다 물까지 맑아 서해 최고의 스쿠버다이빙 포인트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섬들은 가득 자라난 억새를 이고 초록빛으로 빛났는데 변산 채석강보다 더 멋진 해안 절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장비를 가져왔다면 해벽 등반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다.

십이동파도 섬들 사이 사이로 배를 몰며 숨이 멎을 것 같은 경치에 넋을 잃은 탓에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하고 말았다. 서둘러 항해를 재개했지만 오늘의 목적지 안마도는 아직 50km도 더 남은 거리. 긴급회의가 열렸다.

“오늘 밤 초승달이지만 별빛이 좋을 텐데……. 상왕등도에서 저녁 먹고 야간 항해로 목포까지 내리 쏘는 게 어때?”

허 선장의 낭만적인 별빛 세일링 제의에 모두 쌍수 들어 환영했다. 오후 3시, 배 뒤에 묶어 놓은 낚시에 커다란 삼치 한 마리가 걸려들어 점심 때 먹다 남긴 밥과 고추장을 비벼 회덮밥 간식을 할 수 있었다.

상왕등도는 선착장이 없어 겨울바람에 속수무책이므로 4월부터 10월 말까지만 사람이 살고 겨울엔 무인도가 되는 섬이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 상왕등도에 배를 붙였다. 10여 명이 살고 있는 작은 섬에 주민 수에 육박하는 12명의 대식구가 예고 없이 들이닥친 것이다.

주민 서앵순(64) 아주머니에게서 밥과 반찬을, 노상기(54) 이장으로부터는 장어 5kg을 구입했다. 손이 빠른 섬 아주머니 서너 분이 달려들어 30여 분 만에 식사가 마련됐고, 마침 섬 사람들도 식전이어서 마을 전체의 만찬이 벌어졌다.

젓갈을 넣어 갓 담근 배추김치와 곰삭은 달래김치, 밴댕이젓, 그리고 장어탕이 오른 저녁 밥상은 임금님도 부럽지 않았다. 이곳은 양식장이 없어 생선이건 패류건 모두 자연산. 잡은 고기는 어창에 살려 뒀다가 3~4일에 한 번 격포까지 가서 돈으로 바꾼다.

상왕등도 방파제 통발더미 위에서 해풍과 8월의 햇살에 말라가는 갯장어를 들여다보며 허선장과 선원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다. 상왕등도는 양식장이 없어 모든 것이 자연산이다.
상왕등도 방파제 통발더미 위에서 해풍과 8월의 햇살에 말라가는 갯장어를 들여다보며 허선장과 선원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다. 상왕등도는 양식장이 없어 모든 것이 자연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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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을 보기 위해 찾은 상왕등도 남서쪽 해안.  티셔츠 유니폼의 스트라이프 무늬가 마치 죄수복을 연상케해 저마다 빠삐용이 된 기분이었다.
일몰을 보기 위해 찾은 상왕등도 남서쪽 해안. 티셔츠 유니폼의 스트라이프 무늬가 마치 죄수복을 연상케해 저마다 빠삐용이 된 기분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상왕등도에 단 두 명뿐인 해녀가 잡은 자연산 전복 2kg를 구입해 초장을 곁들이자 그 맛에 모두 비몽사몽이다. 게다가 주민 노병업씨가 먼 곳에서 온 손님들에게 돈을 받고 팔기만 해서는 체면이 안 선다며 가져온 삶은 문어를 참기름 소금에 찍어 먹는 맛은 극상의 식도락을 안겨줬다. 음식만화 <식객>을 연재 중인 허 화백은 음식들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밤 10시30분, 자고 내일 떠나라는 주민들의 걱정 섞인 따뜻한 권유를 힘겹게 뿌리치고 상왕등도를 떠나 암흑의 밤바다로 나아갔다. 서앵순 아주머니는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닷가에서 손을 흔들었다.

밤이 되자 바람이 강해져 배는 남쪽으로 순항했다. 날이 맑아 별빛 찬란한 밤하늘에 별똥이 비 오듯 떨어지는 가운데 취침조와 항해조 두 팀으로 나눠 본격적인 야간 세일링에 돌입했다.

야간 항해로 자정을 넘겨 8월 16일. 허영만 선장의 61번째 생일이다. 밤 안개 속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안마도 등대를 지날 무렵 선상에서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허 선장은 “이 밤, 이 바다 위에서 생일을 맞다니 행복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라며 감격스러워했다.

‘머드가 피부에 그렇게 좋다며?  우리도 피부에 신경을 좀 써보자구’ 사진 담당 이정식 크루가 얼마 전 보령 머드 축제에 갔다가 가져온 머드는 땡볕 항해로 피부가 까맣게 그을린 크루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왼쪽부터 김상덕, 이진원, 임대식, 그리고 필자.
‘머드가 피부에 그렇게 좋다며? 우리도 피부에 신경을 좀 써보자구’ 사진 담당 이정식 크루가 얼마 전 보령 머드 축제에 갔다가 가져온 머드는 땡볕 항해로 피부가 까맣게 그을린 크루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왼쪽부터 김상덕, 이진원, 임대식, 그리고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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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청도 서쪽을 돌아 항구를 향하는 집단가출호. 서해의 섬들은 서풍에 의해 서쪽해안이 대부분 깎아지른 절벽이다.
어청도 서쪽을 돌아 항구를 향하는 집단가출호. 서해의 섬들은 서풍에 의해 서쪽해안이 대부분 깎아지른 절벽이다.

어느덧 중천에 뜬 초승달 덕분에 갑판에서는 헤드랜턴 없이도 항해에 필요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벽에 안개가 끼기 시작해 취침 후 교대한 항해조는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어둠 속에서 바다 곳곳에 지뢰처럼 깔려 있는 어구를 피하기 위해 선수 부분에 2명의 크루를 배치했고 레이더를 가동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하늘엔 별이 총총하고 암흑의 수평선은 안개 속에서 가물거렸다. 우리 배는 시속 6노트로 빠르게 남진했다.

임자도 등대가 보일 무렵에야 동이 터 올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항로가 섬들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진 목포 해역에 진입했을 땐 해가 높이 떠올랐다. 높이 솟은 태양은 몹시도 뜨거워 이제 집단가출호가 뜨거운 남도의 초입에 진입했음을 상기시켰다.

이번 3차 항해의 최종 목적지인 목포항 삼학도 마리나에 접안한 것은 낮 12시. 상왕등도를 떠난 지 13시간30분 만이었다.<계속>


/ 글 송철웅 익스트림스포츠 칼럼니스트 blog.naver.com/timbersmith
  사진 이정식 아웃도어 포토그래퍼 photo9.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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