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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한반도 해안 요트 탐사(5)] 목포 떠난 지 17시간30분 만에 제주 도두항 골인

월간산
  • 입력 2009.11.3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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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30명인 마라도까지 가서 ‘마라도 자장면’ 맛봐

“제주도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 맞긴 맞나?

제자리걸음인 것 같은데?”

선실에서 새우잠을 자다 갑판으로 나온 허영만 선장이 부스스한 얼굴로 남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목포항을 떠난 지 10시간 만인 오후 2시경 추자도 서쪽 해상을 지날 때 머리에 흰 구름을 쓴 한라산을 육안으로 확인한 뒤 근무 교대로 2시간 남짓 쪽잠을 자고 일어났지만 제주도는 여전히 신기루처럼 아스라이 멀었기 때문이다.

요트를 움직이는 바람은 공짜 에너지다. 그러나 공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돈 대신 고도의 집중력과 긴장을 지불해야만 한다. 제네이커 세일로 쿼터런을 하는 크루들의 표정에서 긴장이 읽힌다.
요트를 움직이는 바람은 공짜 에너지다. 그러나 공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돈 대신 고도의 집중력과 긴장을 지불해야만 한다. 제네이커 세일로 쿼터런을 하는 크루들의 표정에서 긴장이 읽힌다.

눈 쌓인 겨울 산을 등반할 때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봉우리인데도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경우가 있다. 지형상 원근감이 없어 생기는 착시현상이다. 수평의 바다는 산보다 훨씬 더 원근을 가늠하기 어려워 빤히 내다보이는 제주도는 몇 시간째 그 자리인 것처럼 보였다.

제네이커 세일을 편 집단가출호는 부드러운 북서풍을 타고 쿼터런(뒤쪽 45도 방향에서 불어오는 순풍을 이용해 항해하는 것)으로 항진했다. 바람에 따라 지그재그로 범주하는 우리와 달리 대불대학교의 등대1호와 등대2호는 제주도를 향해 곧장 기주(엔진으로 달리는 것)해 저물녘엔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물에 묶어 놓은 원시적인 트롤링 낚시에 삼치와 방어가 심심찮게 걸려들어 그때마다 즉석 생선회 파티가 열렸다. 삼치는 회로 먹고 남아 소금을 뿌려 말렸다.

황홀한 노을이 장렬하게 불탄 뒤 바다엔 어둠이 드리워졌다. 1~2마일 간격으로 우리 뒤를 좇던 이루리호는 동쪽으로 흐르는 저녁 밀물의 조류를 타기 위해 노을 저편 서쪽으로 멀어져갔다.

밤이 되자 바람은 10노트를 웃돌았고 너울도 커졌다. 크루들은 헤드랜턴이 장착된 헬멧을 착용, 야간 항해 준비에 돌입했다.

이번 항해는 신종인플루엔자 탓에 무산된 목포~제주 요트 레이스(10월 9~11일)를 아쉬워한 요트 동호인들이 함께 해 집단가출호 외에 세 척(등대1호, 등대2호, 이루리호)의 요트가 동참, 앞서거니 뒤서거니 제주도를 향했다.

약속된 목표 항구는 제주항 서쪽에 있는 도두항. 제주도가 가까워질수록 눈부신 집어등을 밝힌 갈치잡이 어선들이 불야성을 이뤄 바다가 어지러웠다.

한 발 앞서 제주에 근접한 등대2호가 제주항 부근에서 헤매고 있다는 무전 연락을 보내왔다. 5초 간격으로 백색 등을 깜빡이는 도두항 등대가 보여야 하지만 육상의 불빛과 갈치배의 집어등이 혼재하는 해안에서 도두항 등대를 찾는 것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와도 같았다.

이럴 땐 감(感)은 버리고 기계를 믿는 편이 낫다. 우린 눈에 보이는 모든 정보를 무시하고 오로지 GPS와 나침반에 의존해 거친 바다를 헤쳐 갔다. 심지어 제주공항의 관제탑조차 구별하기 어려운 가운데 이착륙하는 여객기의 비콘이 눈으로 보이는 것 중 유일하게 도두항 위치를 찾는 단서를 제공했다.

낚싯배 어부들, 친절하게도 참돔 몇 마리 선물

목포를 떠난 지 17시간30분 만인 오후 9시30분, 마침내 도두항에 골인. 항구에는 환영 나온 제주도 요트협회 관계자들과 동국대 OB 산악회 이종량 형을 비롯해 강성규 한라산 산악구조대장, 그리고 얼마 전 낙향한 김형우(동국대 OB, 전 영원무역 산악지원팀 차장)씨까지 정다운 얼굴들이 보였다.

마라도 상륙조가 고무보트로 가져온 자장면을 들고 감격해 마지 않는 집단가출호 선원들. 막상 자장면 맛은 소문에 비해 실망스러웠다.
마라도 상륙조가 고무보트로 가져온 자장면을 들고 감격해 마지 않는 집단가출호 선원들. 막상 자장면 맛은 소문에 비해 실망스러웠다.

이튿날, 제주시 요트협회에서 베푼 조찬 모임 후 제주도 세일러 강종욱씨의 30피트급 크루저 한 대까지 가세해 총 다섯 척의 배가 출전한 가운데 도두항~탑동 구간 친선 레이스가 벌어졌다. 18호 태풍 멜로르가 일본에서 소멸한 뒤 빈 자리를 채운 고기압의 영향으로 날씨가 화창했고 풍속은 10노트 안팎. 제주관광대 김기윤(대한요트협회 이사) 교수가 심판을 맡아 열린 레이스는 허영만 화백이 키를 잡은 우리 집단가출호의 승리로 끝났다.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테스트할 절호의 기회여서 내심 기대가 컸던 목포~제주 레이스 취소의 아쉬움에, 비록 친선 레이스이지만 집단가출호는 허 선장의 지휘 아래 정규 레이싱과 똑같이 일사불란한 경기를 펼쳤다. 우승 상품은 한치 한 상자였다.

레이스를 즐기느라 오후 3시가 지나서야 도두항을 떠날 수 있었다. 다음 목적지인 화순항까지는 약 40마일. 도두항을 빠져나오자 1.5m쯤 되는 파고로 바다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도두항~탑동 구간 수역에서 열린 레이스에서 10노트의 속도로 혼신의 힘을 다해 세일링 중인 집단가출호. 바람에 기울어진 선체와 팽팽한 돛이 속도를 짐작케 한다.
도두항~탑동 구간 수역에서 열린 레이스에서 10노트의 속도로 혼신의 힘을 다해 세일링 중인 집단가출호. 바람에 기울어진 선체와 팽팽한 돛이 속도를 짐작케 한다.

제주도 해안을 왼쪽에 두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애월을 지나고 비양도를 지날 때 해는 또 다시 바다로 잠겼다. 비양도 부근에서 만난 낚싯배 한 척이 친절하게도 참돔 몇 마리를 선물로 던져 줘 우리도 과일로 보답했다.

해안도로로 차를 몰고 우릴 따라온 이종량 형이 한림 부근의 해변에서 우릴 위해 불꽃을 쏘아 올리는 것이 보였다. 바다는 비교적 거칠었지만 해안이 지척에 보인다는 사실이 안도감을 줬다.

와일드 자이빙(뒤바람에 의해 돛대가 갑자기 돌아가는 것)은 배가 너울의 위에서 아래로 움직일 때를 노렸다. 와일드 자이빙이 일어나면 자칫 바람의 속도로 돌아가는 금속 붐에 맞아 마치 야구 방망이에 맞은 타구처럼 어둡고 차가운 바다로 나가떨어질 수도 있다.

바다에 있으면 뭍이 그리워지는 법. 항해가 끝난 뒤 표선 쪽에 있는 백약이오름 트레킹에 나선 집단가출호 대원들이 흙냄새를 흠뻑 맡으며 억새 우거진 제주의 가을을 만끽하고 있다.
바다에 있으면 뭍이 그리워지는 법. 항해가 끝난 뒤 표선 쪽에 있는 백약이오름 트레킹에 나선 집단가출호 대원들이 흙냄새를 흠뻑 맡으며 억새 우거진 제주의 가을을 만끽하고 있다.

배는 일렁이는 너울 속에서 9노트로 수면을 갈라나가 밤 9시에 화순항으로 입항했다. 화순항은 대한민국 최남단의 섬 마라도의 턱 밑에 있는 어항. 가파도가 코앞이고, 10마일 남짓 떨어진 마라도도 훤히 바라다보인다.

아침 일찍 서둘러 마라도를 향했다. 관광객을 실은 유람선이 도착하기 전, 호젓한 마라도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파초등학교 마라분교엔 전교생이 둘뿐이라고 한다. 혜빈이, 수진이 둘 다 2학년. 마라도 남서쪽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그림 같은 마라분교는 휴일을 맞아 교사도 출타해 텅 비어 있었다.

마라도초등학교 교정에서 바라본 제주도. 집단가출호가 섬을 시계반대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는 가운데 이른 아침 해무 속에 제주 해안의 마을들이 깨어나고 있다.
마라도초등학교 교정에서 바라본 제주도. 집단가출호가 섬을 시계반대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는 가운데 이른 아침 해무 속에 제주 해안의 마을들이 깨어나고 있다.

마중 나온 혜빈이에게 허영만 선장의 사인이 적힌 <식객> 한 질을 선물하고 혜빈이네 옆집인 자장면집에서 마라도 관광객이면 누구나 먹는다는 마라도 자장면을 먹었다.

마라도는 10여 년 전 모 이동통신사가 ‘자장면 시키신 분’이라는 카피를 활용한 CF의 배경이 된 이후 자장면으로 유명해져, 상주 주민이 30여 명에 불과한 작은 섬에서 지금은 네 개의 자장면집이 성업 중이다.

도두항에서 화순항으로 향하는 야간항해 중 만난 갈치잡이 어선. 갈치는 집어등을 대낮처럼 밝히고 낚시로 잡는다. 뱃전에 길게 드리워진 것들이 낚싯대다.
도두항에서 화순항으로 향하는 야간항해 중 만난 갈치잡이 어선. 갈치는 집어등을 대낮처럼 밝히고 낚시로 잡는다. 뱃전에 길게 드리워진 것들이 낚싯대다.

6월에 시작한 항해는 어느덧 누적거리 1000km를 넘어 집단가출호는 국토 최남단의 섬 마라도까지 진출했다. 다가올 겨울은 섬이 많고 따뜻한 남해에서 보낸 뒤 내년 2월경부터 독도를 향해 동해를 북상하게 된다.<계속>


/ 글 송철웅 익스트림스포츠 칼럼니스트 blog.naver.com/timbersmith
  사진 이정식 아웃도어 포토그래퍼 photo9.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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