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동계 백두산에 처음 오른 일본인들 이야기

      입력 : 2010.03.26 10:03 | 수정 : 2010.03.26 10:03 [485호] 2010.03

      교토대팀, 1월 7일 정상 올라 만세삼창 후 일장기 게양
      근대 이전 40종, 근대 이후 98종 등 무려 138종 문헌 사전 검토

      등반의 이모저모 
      교토대 ‘보고서’는 부록편에서 크게 5가지 기록을 덧붙이고 있다. 첫째 ‘회계보고’, 둘째 ‘장비품목 목록’, 셋째 ‘식량품목 목록’, 넷째 ‘의료용품 목록’, 다섯째 보고서를 쓰기 위한 ‘참고문헌 목록’이 그것이다. 본 보고서보다도 오히려 흥미로운 1935년 당시 등반대의 일상생활 및 등반의 즐거움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우선 원정의 예산으로는 총 1만693원(圓)이 준비되었다. 원정에 참여한 대원들이 3,936원을 부담하였는데, 그 중에는 AACK측이 1,900원, 상대적으로 재정능력이 풍부한 아사히신문사 측에서 불과 2명의 기자가 참가했음에도 2,036원을 부담하였다.

      백두산 정상 중국 측에 있던 종덕사라는 라마교 사찰. 1945년경 철거되었다고 한다.

      기부 받은 금액은 예산의 60% 정도에 해당하는 6,053원에 달했다. 이왕가(李王家) 하사금이 200원, AACK 회원이 595원, 일반기부 3,158원, 아사히신문사 2,000원 등이었다. 기타 영화회 및 사진 전람회 등을 통한 수익이 일부 발생하였다.

      한편 비용 측면에서는 총 1만333원이 실제로 지출되었다. 장비에 소요된 비용이 4,893원으로 가장 많았고, 식량 833원, 여비 1,406원, 숙박비 594원, 인부비 598원, 운반운송비 513원, 혜산진수비대 등에 경비비보조 400원, 통신인쇄비 174원 등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미 당시에도 등산보험에 가입하여 288원을 지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장비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크기의 텐트가 총 9점 사용되었고 침낭 및 방수포 역시 용도별로 몇 가지 종류가 준비되었다. 주목할 것은 무선전신전화송수신기가 3세트 사용되었다는 점인데, 백두산 원정은 이후 히말라야 원정을 대비한 사전 준비였기에 무선전화의 능숙한 활용 연습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기압계·한란계·습도계·풍속계 등의 관측장비들도 다수 포함되었고, 실제로 베이스캠프에서 측정한 매일의 기온변화표 등도 보고서에 상세히 수록되었다.

      베이스캠프에서 찍은 기념 사진. 교토대원정대는 총 18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사진 속에는 17명의 모습이 담겨 있다. 보고서에 실린 총 40장의 사진 중 얼굴이 확인 가능한 유일한 사진이기도 하다. 당시 가장 어린 대학 1학년생이라 해도 1916년생은 되었을 것이다. 지금 살아 있다면 94세이니 아무리 일본이 장수국가라 해도 이 사진 속 사람들은 모두 흙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식량품목을 들여다보면, 1930년대 등반대의 예상보다 풍족한 생활에 놀라게 된다. 쌀은 물론 교토 유명 제과점의  밀크빵이 무려 2300개나 준비되었고, 카레·토마토 케첩·각종 주스·버터·치즈·햄·소시지·양갱·건포도 등 현대의 어지간한 등산·캠핑에서도 빠뜨리기 쉬운  각종 기호품이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다. 심지어 차와 관련해서도 커피·코코아·홍차·녹차·분말 우유 등 가지각색의 음료들이 제공되었다.

      의약품 역시 내복약, 외용약, 주사약, 의료용 기구, 생리학 실험용구 등이 풀세트로 준비되었는데, 등반대원 중에 의학박사 및 의대생이 있었기에 의료부문의 전문성 역시 높은 수준이었다. 원정대의 淺井東一 박사는 이 보고서에서 ‘의학적 방면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게재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부록은 이 원정을 준비하고 보고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참고한 서적을 소개하는 ‘문헌’ 목록이다. 근대 이전 40종, 근대 이후 98종, 총 138종의 문헌이 검토되었는다. 이 중에는 중국측의 사서(史書)는 물론 한국인들도 이름만 들었지 한번도 읽어본 적은 없는 <세종실록(世宗實錄)>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 <지봉유설(芝峯類說)>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1930년대 이후 5년간의 저술에만 국한해도 석주명(石宙明)의 <백두산지방산접류채집기(白頭山地方産蝶類採集記)>(1934) 등 무려 27종이 참고문헌으로 소개돼 있고, 원정대 참가자들 역시 원정 직후 자신의 관심분야에서 각각 한 편 정도의 논문을 남기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원정대원이 일장기를 치켜들고 있다. 백두산 동계초등이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줄조차 몰랐다는 것도 안쓰럽다.

      뒷이야기
      교토대학팀이 백두산을 등정할 무렵,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인들도 비록 여름철이기는 하나 여러 차례에 걸쳐 백두산에 올랐다. 그 중 춘원 이광수가 1936년 ‘계명’이라는 잡지에 남긴 기고문의 다음과 같은 대목은 필자의 마음에 깊고 쓸쓸한 울림을 남겼다. 그것이 오늘 이 작은 글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에 백두산만한 명산도 없지만, 백두산만큼 매몰된 명산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 주인인 조선인에게 가장 심하게 백두산이 대접받지 못함이 가장 애닯습니다. 백두산이란 이름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또 백두산이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산인 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한 걸음 나아가 백두산의 국토적 성질, 민족적 관계, 자연 및 인문상 실제적 사정에 대하여 묻는다면 우리가 가진 지식이 너무 작고 부족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알아야 할 까닭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알고자 하는 노력도 있을 까닭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두산을 우리가 이렇게 알아야 옳으며, 또 이렇게 알아도 그만이리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이광수‘계명’1936) 심혜숙(1997)<백두산>8p.

      <白頭山, 京都帝國大學白頭山遠征報告書>(1935)는 33×36cm의 지도를 삽입하여 원정대의 이동경로 및 노영지(露營地)를 기록하고 있다(붉은 선이 이동경로). 우측 하단 惠山鎭(12.25)에서 虛項嶺 중계캠프(12.29), 베이스캠프(1.3), 제1캠프(1.4), 제2캠프(1.6), 백두산 정상(1.7) 순으로 단계적으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축적 1/75,000, 대일본제국 육지측량부 발행)
      교토제국대학 백두산 원정대의 주요 멤버

      今西錦司(이마니시 킨지, 1902~1992) : 생물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로서 일본 영장류 연구의 창시자. 1936년 교토제국대학 이학부 강사. 1938년 내몽고학술조사대 참여. 1955년 교토대학 카라코람 힌두쿠시 학술탐험대 대장. 50세에 히말라야 줄루봉, 61세에 킬리만자로 등정. 1956년 일본 원숭이센터 설립, 1961~64년 제1~3차 아프리카 유인원학술조사대 대장. 1967년 교토대학 영장류연구소 설립. 1970년대 기후대학, 교토대학 명예교수. 1985년 일본 1,500산 등정 달성. 1992년 사망. 1994년 講談社 「今西錦司 全集」(전14권) 발간

      西堀榮三郞(니시보리 에이자부로, 1903~1989) : 교토부 출생. 15세 때 학교 선배인 이마니시와 청엽회(靑葉會)를 결성하여 등산활동을 시작했으며, 니시보리는 후에 이마니시의 여동생과 결혼. 1922년 아인슈타인 박사 부부가 일본 교토·나라를 방문했을 때 3일간 안내(영어 능통). 1927년 「설산찬가(雪山讚歌)」작사. 1936년 동경전기(현재의 도시바) 입사. 1939년 미국에 유학하여 남극탐험 준비. 1944년 진공관 ‘소라’ 발명. 1952년 전후(戰後) 일본인 최초로 혼자 네팔에 입국하여 마나슬루 등반허가를 얻어냄으로써 1956년 일본 등반대의 세계 초등 견인. 1956년 교토대학 이학부 교수 취임. 1957~58년 제1차 남극지역관측대 월동대장. 1958년 일본 원자력 연구소 이사. 1973년 칸첸중가 서봉(얄룽캉·8,505m) 세계초등 원정대 대장. 1980년 에베레스트 북동릉·북벽 등정대 총대장. 1989년 사망.

      藤木九三(후지키 쿠조우, 1887~1970) : 교토부 출생. 와세다 대학 영문
      학과 중퇴. 1909년 도쿄 매일신문사 입사. 1915년 아사히 신문사로 이직. 1924년 일본 최초로 암벽 등반을 목적으로 설립된 RCC(Rock Climbing Club) 창설 주도.  1929년 최초의 암벽등반 이론서 「岩登り術」간행. 1930년 몽블랑 및 마터호른 등정. 1935년 백두산 동계초등 이전 이미 10여 권의 등반 전문서적 저술. 1959년 일본 산악회 고문


       / 글 안병기 산림청 사무관 co2down@korea.kr
         사진 교토대 <백두산동계등반 보고서>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