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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화제] 청송 월드컵 빙벽대회

월간산
  • 입력 2011.02.0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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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바이! 뱅가! 감바!”청송에서 울려 퍼진 다국적 파이팅
25개 국 119명 참가…박희용·신윤선 나란히 준우승 거둬

세계 산악인 최고의 겨울 축제인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이 1월 8, 9일 청송에서 열렸다. 비유럽권역, 그것도 아시아에서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이 개최되기는 이번이 처음. 그간 아이스클라이밍 대회는 유럽 이탈리아 디오네, 스위스 사스페, 루마니아 부스테니, 러시아 키로프 등지에서만 열려 왔다. 때문에 이 대회를 유치, 개최한 한국 산악계의 감격은 남달랐다. 살을 에는 맹추위가 몰아쳤지만 주최를 맡은 대한산악연맹 관계자들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산악인들이 이틀에 걸쳐 연이어 참관하며 대회의 열기를 이어갔다.

UIAA(국제산악연맹) 공인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 대회는 매년 3~5회 시리즈로 열린다. 청송 대회는 이 월드컵 대회 시리즈의 2011년 첫 대회로서, 선수들은 청송 대회를 포함한 3~5개 대회의 순위를 종합, 랭킹 몇 위인가를 따진다.

아이스클라이밍 제왕 마르쿠스 벤들러가 안정적인 피겨4 자세로 아이스캔디 구간을
 오르고 있다. 마르쿠스가 우승, 아시아 최강자 박희용이 2위를 차지했다.
아이스클라이밍 제왕 마르쿠스 벤들러가 안정적인 피겨4 자세로 아이스캔디 구간을 오르고 있다. 마르쿠스가 우승, 아시아 최강자 박희용이 2위를 차지했다.

대회는 경북 청송군 부동면 내룡리, 여름에도 얼음이 얼어 춥기로 소문난 청송 얼음골에 세운 22m 높이의 반원형 철골 인공루트에서 열렸다. 자연상태와 최대한 흡사하게, 판대기에 물을 뿌려 인공 빙벽을 조성하고 요철을 가진 암벽 돌출부를 만들어 부착, 길이 약 20m 안팎의 경기 루트를 세팅했다. 

아이스클라이밍 대회라고 하면 얼음벽을 오르는 대회로 생각하지만, 국제적 대회인 경우 빙벽 구간은 극히 일부일 뿐이며 거의 드라이툴링 대회에 가깝다. 드라이툴링이란 빙벽등반 장비로 얼음이 없는 암벽이나 인공벽을 오르는 것을 말한다. 인공 구조물로 루트를 만들어 선수들이 오르도록 한 것이다. 이는 순수한 얼음만으로 등반루트를 만드는 데 한계가 있어 변별력을 주기 어려운 한편 날씨에 영향을 덜 받는 안정적인 경기운영과 수준 높은 루트를 임의로 만들어 선수들의 뛰어난 기량을 끌어내기 위해서다.

선수들의 세계 랭킹은 월드컵 시리즈 성적을 포인트로 합산해 매기는데 우리나라의 박희용(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과 신윤선(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 선수가 남녀부에서 각각 1~2위를 다툴 정도로 정상의 기량을 갖추었다. 대회는 난이도(LEAD)와 속도(SPEED) 부문으로 나뉘는데 우리나라에선 난이도에 치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속도경기는 아무래도 동양인의 체격으로 팔다리가 긴 서양인들과의 대결이 불리하며, 난이도 경기가 진정한 등반 실력을 겨루는 진검승부의 장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영하 14도에 살을 찢는 듯한 얼음바람이 부는 골짜기에서 25개 나라 90명의 선수들은 7일 저녁 청송군민회관에서 한국 측이 베푼 만찬과 민속공연 관람에 이어 8일 예선 경기부터 시작했다. 관심을 모은 등반루트는 이탈리아에서 온 국제 아이스클라이밍 공식 루트세터들이 국내 대회 운영진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

스위스의 펠리시타스 펠러 선수가 하단 아이스캔디 구간을 돌파, 얼음골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중단으로 넘어서고 있다.
스위스의 펠리시타스 펠러 선수가 하단 아이스캔디 구간을 돌파, 얼음골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중단으로 넘어서고 있다.

러시아 선수들 속도 부문을 싹쓸이하다
우리나라 클라이머들이 관심도가 낮은 속도 경기는 8일 하루에 예선과 결승이 모두 치러졌다. 구조물 가운데 12m의 얼음벽을 얼마나 빨리 오르는지 겨루는 것으로 16강에 오른 선수 중 11명이 러시아 선수로 러시아가 초강세를 보였다. 이들은 타 선수들이 12m벽을 20~30초 걸려 오르는 데 반해 8초 안팎에 오르는 괴력과 스피드를 보이기도 했다. 어둠이 내린 후에 시작된 남자 8강 토너먼트는 아예 8명 모두 러시아 선수였다.

속도 토너먼트 경기는 왼쪽과 오른쪽 루트에서 두 명의 선수가 올라 빙벽 끝에 있는 센서볼을 먼저 치는 사람이 이기는 경기다. 얼음이 얼고 녹기를 반복하기에 양쪽 벽의 난이도가 똑같을 수 없다. 때문에 양쪽을 각각 한 번씩 오른 다음 시간을 합산해 승자를 가렸다. 다만 승부를 판가름 짓는 센서볼이 고장나며 오작동으로 재경기를 치르는 등, 일부 선수들은 체력적으로 심한 소모전을 펼쳐야 했다. 대회 운영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바일로 쳤을 때 볼이 크게 움직이면 작동이 되는데 작게 움직이면 작동이 안 됐다”고 한다. 오작동으로 대회의 옥에 티로 꼽힌 센서는 청계천의 설비점에서 저비용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첫날 마지막 경기인 남자 속도 결승은 러시아 선수 간의 대결이었다. 바투세프 파빌 선수가 1차 시도에서 중간에 추락해 경기를 포기, 토밀로브 막심 선수가 가볍게 우승을 차지했다. 여자 속도 3위, 난이도 우승을 차지한 러시아의 마리아 톨로코니나 선수에게 러시아 선수들의 강세에 대해 비결을 묻자 “강한 정신력과 선수들의 단합력”을 꼽았다. 한 러시아 남자 선수는 “내가 사는 곳의 추위에 비하면 그렇게 추운 건 아니다”고 전하며 추위에 대한 내성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로 꼽았다.

다음날 9일은 아이스클라이밍의 세계적인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 흥미진진한 경기의 연속이었다. 경기 방식은 온사이트 리딩. 온사이트란 순 우리말로 ‘첫 눈 오름’이라고 하는데 루트를 선수들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경기 직전 몇 분 동안 보여주고 바로 등반하게 하는 방식을 말한다. 리딩은 선등이라고 하는데, 주최 측이 사전에 안전을 위해 중간 확보물로 설치해 둔 퀵도르에 줄을 통과시키며 등반하는 것을 말한다. 대회 규정대로 남자 준결승, 결승, 여자 준결승, 결승은 모두 다른 루트에서 진행됐다. 오전의 준결승이 끝난 선수들도 선수대기실 밖을 나올 수 없게 하는 한편 점심시간을 이용해 결승 루트세팅을 했다.

1. 월드컵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과 대회 천막들.
2. 속도 경기가 열린 구조물 가운데의 얼음벽. 양쪽 벽을 한 번씩 올라 시간을 합산한다. 
3. 프랑스의 스테파니 마우레이유 선수가 피겨4 자세로 몸을 끌어당겨 아이스캔디를 오르고 있다.
1. 월드컵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과 대회 천막들. 2. 속도 경기가 열린 구조물 가운데의 얼음벽. 양쪽 벽을 한 번씩 올라 시간을 합산한다. 3. 프랑스의 스테파니 마우레이유 선수가 피겨4 자세로 몸을 끌어당겨 아이스캔디를 오르고 있다.

가장 잘 설계된 루트는 결승에서 완등자가 한 명 나오는 루트라고 흔히 얘기한다. 지나치게 어려워서 완등자가 없으면 관중들의 보는 재미가 떨어지고 너무 쉬워 완등자가 많으면 승부를 결정짓기가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열린 난이도 남녀 준결승 루트는 각각 경사 90도 이상의 오버행으로 시작해 오버행으로 끝나는 어려운 코스였다. 철골구조물을 기둥 삼아 합판으로 된 나무벽을 연결했으며 홀드를 박아 선수들이 아이스바일의 날을 걸어 오를 수 있게 했다. 이번 대회의 홀드는 청송 주왕산의 바위를 가공해 만들어 ‘청송 대회’의 의미를 강조했다. 경기 루트 구조물을 만드는 데 2억 원가량이 들었다고 한다.

루트 곳곳에는 트라이앵글이라는 삼각형 모양의 볼록 튀어나온 구조물과 ‘아이스캔디’라 부르는 길쭉한 캔디 형상의 통나무에 얼음을 입힌 구조물을 배치, 변화를 주었다. 선수들에게는 장애물이지만 보는 이들에겐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구간이다. 이런 구간을 지나기 위해선 ‘피겨4’라는 손과 발을 꼬는 동작을 취해야 하는데, 뛰어난 힘과 유연성 없이는 불가능한 동작이어서 보는 재미를 배가시켰다. 피겨4는 자세를 취한 형상이 4자 같다고 해서 생긴 용어다.

예선 경기 결과 남자 19명, 여자 18명이 준결승에 올라 기량을 겨뤘다. 세계적인 수준의 선수들답게 뛰어난 기술과 체력으로 오름짓의 날개를 폈다. 선수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관중들은 즐거워하고 추락할 땐 아쉬워했다. 관중들 중에서도 클라이머들은 “역시 세계적인 기량이다”는 반응이었고 이런 경기를 처음 보는 청송주민들은 “어떻게사람이 저렇게 오를 수 있냐”며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이번 경기에는 빙벽등반 경험이 없는 몽골 선수들이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등반 장비를 빌려 등반을 시도하는 열정을 보였다. 그러나 참가 선수 중 일부가 이탈, 행방이 묘연해져 대회 관계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국내에서 열린 경기답게 가장 큰 환호성을 끌어낸 건 우리나라 선수들이었다. 남녀 최강자인 박희용, 신윤선은 몸이 굳어 보일 정도로 신중한 경기 운영을 했다. 사소한 실수도 하지 않겠다는 듯 두 선수는 평소 기량에 비해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등반을 이어가, 박희용은 결승 진출 8명 중 4위, 신윤선은 5위를 기록했다. 세계랭킹 1위 벤들러 마르쿠스는 예선 2위, 준결승 1위라는 안정된 성적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박희용 선수가 아이스바일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벽을 오르고 있다./ 이탈리아의 안젤리카 레이너 선수가 준결승에서 마지막 홀드를 바일로 찍어 오른다. 완등하며 1위로 결승에 진출했으나 퀵도르를 지나치는 실수를 범해 실격했다.
박희용 선수가 아이스바일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벽을 오르고 있다./ 이탈리아의 안젤리카 레이너 선수가 준결승에서 마지막 홀드를 바일로 찍어 오른다. 완등하며 1위로 결승에 진출했으나 퀵도르를 지나치는 실수를 범해 실격했다.

아시아의 다크호스 정운화·정원조 대약진
오후에 열린 결승전은 강추위를 녹이는 불꽃 대결의 장이었다. 결승전에는 1,000여 명 관중이 몰려 선수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호흡을 같이했다. 결승전에서 돋보인 것은 박희용과 신윤선 두 최강자 외에 한국선수들의 대약진이었다.

특히 월드컵 처녀출전인 정원조(서울산악구조대) 선수는 유럽선수 못지않은 긴 팔 다리를 쭉쭉 뻗어 날렵하게 올랐다. 상단 오버행 구조물에서 옆면으로 넘어서는 홀드를 놓쳐 추락했으나 세계적인 수준의 기량이라 해도 모자람 없어 한국의 아이스클라이밍 선수층이 두터움을 유럽 선수들과 UIAA 관계자들에게 심어주었다. 정원조 선수는 “결승까지 온 것이 개인적으로 영광이다”며 “힘이 남아 있었는데 균형을 놓쳐 추락한 것이 아쉽다”고 소감을 밝혔다.

여자 난이도에선 지난해 유럽 사스페에서 열린 월드컵대회에 참가 준우승의 성적을 내며 아시아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정운화(외설악적십자구조대) 선수의 기량이 꽃을 피웠다. 정 선수는 가벼운 몸과 근성 있는 끈끈한 등반력으로 퀵도르 14개를 통과, 우승에 근접한 성적을 남겼다. 정운화 선수는 “결승전에서 진을 다 빼고 떨어져 여한이 없는 경기를 했다”며 “할 수 있다고 계속 자기 암시를 하면서 올랐다”고 소감을 전했다.

아이스바일을 홀드에 정확하게 걸고 강한 근력으로 아이스캔디를 돌파하는 신윤선 선수. 간발의 차이로 준우승했다. / 우크라이나의 발렌틴 시파빈 선수가 바일을 입에 물고 퀵도르에 로프를 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아이스바일을 홀드에 정확하게 걸고 강한 근력으로 아이스캔디를 돌파하는 신윤선 선수. 간발의 차이로 준우승했다. / 우크라이나의 발렌틴 시파빈 선수가 바일을 입에 물고 퀵도르에 로프를 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관심을 모은 신윤선 선수는 준결승 때와 달리 부담을 털어낸 가볍고 자유로운 오름짓을 펼쳤다. 중간에 추락 위기가 있었지만 강한 근력으로 극복하고 제한시간 1분을 남긴 상황에서 완료지점에 가까운 마지막 아이스캔디에 진입했다. 완등도 가능한 시간이었지만 팔에 힘이 빠진 듯 퀵도르를 연결하지 못하고 애를 먹다 시간 초과로 경기를 마쳤다. 경기 후 신윤선 선수는 “마지막에 팔엔 힘이 있었는데 손가락이 얼어서 로프를 걸 수가 없었다”며 “칼바람이 지나는 얼음골이라 경기가 힘들었다”고 밝혔다.

한편으론 “완등할 수 있었는데 손가락이 얼어서 당황해서 완등을 놓친 게 아쉽다”고 했다. 경기가 끝난 후 청송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대회의 스폰서이자 신 선수의 후원 브랜드 노스페이스의 성기학 대표(골드윈코리아)는 “우리 선수의 등반을 지켜보는 내내 조마조마했다”며 “최선을 다해 잘한 경기였다”고 신 선수의 경기에 대해 만족스러워했다.

여자부 우승은 준결승에서 완등하며 결승에 올라와 신윤선보다 퀵도르 하나를 더 건 러시아의 마리아 톨로코니나 선수에게 돌아갔다. 마리아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마지막 완등 직전에 팔에 힘이 다 빠졌다”며 “추워서 손에 감각이 없어 힘들었다”고 얘기했다.

결승전 마지막 퀵도르를 걸고 주먹을 쥐어 관중들의 박수에 화답하는 박희용 선수. 시간 초과로 완등에는 실패했다.
결승전 마지막 퀵도르를 걸고 주먹을 쥐어 관중들의 박수에 화답하는 박희용 선수. 시간 초과로 완등에는 실패했다.

박희용과 마르쿠스, 최강 대 최강의 대결
남자부에선 수준 높은 박빙의 승부가 이어져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 관중들과 대회 관계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결선 성적표만 놓고 보면 다섯 명의 선수가 18개의 퀵도르를 통과해 비슷했던 것 같지만 마지막 홀드 개수에서 차이를 보였다. 예상대로 한국의 자존심 박희용과 세계최강 마르쿠스 벤들러의 대결이 된 것이다. 박희용은 굳은 듯했던 준결승과 달리 과감한 몸짓이었다. 다른 선수들의 무브와 다른 묵직한 무게감과 안정감이 실려 있었다. 뛰어난 균형감각으로 아이스캔디 구간을 쉽게 통과, 중단 철골구조물로 진입 빠르게 돌파하는 듯했으나 퀵도르를 거는 데 애를 먹으며 보는 이들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했다.

박희용은 두 번째 아이스캔디를 강력한 근력과 안정적인 피겨4 자세로 통과, 최종 오버행 벽에 다가섰다. 마지막 구간은 왕의 문양처럼 황금색 다이아몬드 구조물 네 개가 X자로 뻗어 있어 보기엔 예쁘지만 막상 이곳을 오르는 선수들은 천장에 가까운 오버행을 튀어나온 구조물을 극복해 가며 지나야 하는 고난의 지점이었다. 여기쯤 왔을 땐 힘을 대부분 쓴 뒤라 평소 훈련량과 정신력이 완등의 열쇠였다.

침착하게 이곳 왕의 문양에 진입한 박희용은 강력한 근력으로 오버행을 극복하고 마지막 홀드에 바일을 걸었다. 그러나 단 몇 초를 남겨두고 시간 종료 이내 마지막 퀵도르에 로프를 거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경기후 박희용은 “날씨가 너무 추워 손이 얼어서 등반하는 데 굉장히 힘들었다”며 “추락 위기를 관중들의 응원으로 극복해서 올랐다”고 밝혔다. 한편 “몇 초 차이로 완등 처리가 안 돼 너무 아쉽다”며 “생각보다 어려웠던 최고의 난이도였다”고 등반소감을 전했다.

오스트리아의 벤들러는 랭킹 1위이자 유럽에서 향후 5년 이상은 그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 명실상부한 최강자다. 지난해 그의 연승행진을 유일하게 깨고 우승한 이가 박희용이다. 남자 결선 8명의 선수 중 7명의 등반이 끝난 뒤 1위는 역시 박희용, 남은 클라이머는 마르쿠스였다. 그의 등반에서 우승자가 판가름 나는 상황이었다. 마르쿠스는 키가 180cm는 훌쩍 넘어보였고 군살 없는 날렵한 몸에 긴 팔다리가 보기에도 등반을 위한 체격이었다. 금발에 갈색 옷을 위 아래로 맞춰 입은 것이 눈에 띄었다.

마르쿠스의 몸놀림은 이름값을 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여느 선수들과 홀드를 이용하는 몸짓이 미세하지만 달랐다. 자기만의 완벽하고 우아한, 그러면서도 루트를 완숙하게 읽어내는 노련함이 배어 있었다. 루트 중상단으로 넘어갈수록 탄력을 받나 싶었으나 두 번째 아이스캔디에서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철골 구조물에 묶여 있던 캔디가 빙글 돌면서 벤들러가 균형을 잃어 더 이상 오르질 못하고 등반시도를 여러 번 반복하고 있었다. 한번 등반이 꼬이자 당황해 자충수를 두고 있었다.

악전고투 끝에 난코스였던 아이스캔디를 돌파, 힘이 떨어질 법도 했으나 무쇠체력으로 다시 부드럽게 제왕의 문양으로 뛰어들었다. 그도 힘이 떨어진 듯 네 개의 황금색 다이아몬드 구조물 속에서 오름 속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팔에 펌핑이 난 듯 연신 팔을 털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르쿠스는 끝내 노련하게 벽을 거슬러 올라 마지막 홀드를 바일로 찍었으나 박희용과 마찬가지로 완등을 뜻하는 퀵도르 로프 통과를 하지 못해 그와 동률을 이뤘다. 그러나 준결승 성적에서 앞서 2011년 월드컵 첫 대회이자 비유럽에서 최초로 열린 청송 대회의 초대 우승자가 됐다. 우승자 마르쿠스 벤들러의 말을 들어보자.

 “행복하다. 완등을 놓친 게 안타깝지만 우승했다는 소릴 들었을 때 행복했다. 두 번째 아이스캔디에서 실수한 게 아깝다. 초반에는 예상대로 갔는데 중간에 생각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났다.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올랐다. 루트는 퍼펙트했다. 결승전 난이도로는 최고였다.”  

결국 난이도 경기에서 한국의 박희용과 신윤선은 모두 아깝게 2위를 차지했다.
비유럽에서 처음 열린 대회였기에 대한산악연맹과 UIAA, 청송군, 후원사인 노스페이스 관계자들 모두 신경을 많이 쓴 대회였다. 전반적으로 첫 대회로서는 성공적이라는 평가다. 외국의 참가 선수들은 대체로 주최 측의 운영에 극찬을 했다. 유럽의 대회는 선수들이 자비로 참가하는 반면 한국 대회에선 공항 픽업을 포함한 모든 국내 교통을 제공하고 5박6일간 숙식을 제공했다. 한편 남녀 속도 및 난이도 경기 우승 상금은 우리 돈으로 520만 원이 넘는 3,500유로로서, 아이스월드컵 대회 사상 최고 액수다.

안드레이 페착 심판위원장은 “청송 월드컵이 향후 계속 되리라 본다”고 기대를 섞어 말했다. 노스페이스 성기학 회장은 이러한 기대에 화답하듯 “향후 4년간 청송 월드컵 대회를 후원하겠다”고 밝혀, 청송 대회는 UIAA와 대산련, 청송군, 노스페이스의 지원 속에 매년 한국의 겨울을 이색 열기 속으로 몰아갈 것으로 보인다.

대한산악연맹과 경북산악연맹, 청송군 관계자들은 국내에서의 첫 월드컵 대회임에도 빠르고 빈틈없는 진행으로 UIAA 관계자와 관중, 선수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경기 진행과 세계적인 등반능력, 루트 세팅, 관중 참여 등 모든 것이 착착 맞아 돌아가는 박진감 넘치는 아이스클라이밍 대결의 장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회장을 거의 떠나지 않고 지켰던 대산련 이인정 회장은 “작은 실수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원활하고 효율적인 대회 진행으로 유럽의 클라이머들을 감탄케 했다”며 “해가 거듭될수록 더욱 훌륭한 대회로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1.대회 관계자들. 왼쪽부터 정상욱 노스페이스 상무, 한동수 청송군수, 김재봉 대산련 전무, 아드레이 페착 심판위원장, 배경미 UIAA 아시아 대표, 성기학 골드윈코리아 회장, 이인정 대산련 회장, 파벨 샤발린 아이스클라이밍 위원장.
2. 여자 난이도 시상식. 왼쪽부터 신윤선, 마리아 톨로코니나, 루시 호르조바, 정운화 선수.
3. 22m 높이의 반원형 철골구조물로 만든 경기장.
1.대회 관계자들. 왼쪽부터 정상욱 노스페이스 상무, 한동수 청송군수, 김재봉 대산련 전무, 아드레이 페착 심판위원장, 배경미 UIAA 아시아 대표, 성기학 골드윈코리아 회장, 이인정 대산련 회장, 파벨 샤발린 아이스클라이밍 위원장. 2. 여자 난이도 시상식. 왼쪽부터 신윤선, 마리아 톨로코니나, 루시 호르조바, 정운화 선수. 3. 22m 높이의 반원형 철골구조물로 만든 경기장.

난이도 결승 경기 결과
순위    남자부                                           여자부
  1     마르쿠스 벤들러(오스트리아)    마리아 톨로코니나(러시아)
  2     박희용(한국)                          신윤선(한국)
  3     막심 토밀로브(러시아)            루시 호르조바(체코)
  4     발렌틴 쉬파빈(우크라이나)        정운화(한국)
  5     알렉세이 덴진(러시아)             안나 갈야모바(러시아)
  6     마누엘 알레그레 코르도바(스페인) 스테파니 마우레이유(프랑스)
  7     정원조(한국)                          안젤리카 레이너(이탈리아)
  8     미츠구 요시다(일본)                펠리시타스 펠러(스위스)

속도 경기 결과
순위    남자부                            여자부
  1    막심 토밀로브(러시아)       이리나 바가에바(러시아)
  2    파벨 바투세프브(러시아)    나탈랴 쿠리코바(러시아)
  3    막심 바라소브(러시아)       마리아 톨로코니나(러시아)

UIAA 안드레이 페착 심판위원장 & 정호진 대산련 부회장

“굉장히 높은 수준의 대회였다”

안드레이 페착은 이번 대회 심판위원장으로 대회 운영을 총책임진 사람이다. 정호진 대산련 부회장은 UIAA 아이스클라이밍 위원으로서 이번 대회 유치에 남다른 공을 들였고, 국제산악연맹과 대산련 간의 가교 역할을 했다. 정 부회장은 “아시아 최초로 열린 대회라 UIAA에서도 기대가 크다”며 “기대에 걸맞은 대회를 치를 수 있어 다행”이라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유럽에서 온 이들은 “이렇게 대회를 조직적으로 잘 치를 줄은 몰랐다”며 경기장 시설, 관중 호응, 매스컴 반응, 경기 운영이 첫대회로는 모범적인 대회로 평가한다고 했다. 또 아시아 국가에서 참가를 많이 해서 동계올림픽에서 아이스클라이밍이 정식 종목으로 올라설 수 있는 새로운 발판을 마련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페착 심판위원장은 청송 대회를 한마디로 “굉장히 높은 수준의 대회였다”고 평했다. 주최 측의 적극적인 협조 속에 모든 사람들이 대회가 성공리에 치러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이 그 원동력이라 평가했다. 한편 대회운영의 사소한 실수는 어떤 대회에서나 다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월드컵 사람  ▶  노스페이스 성기학 회장

저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번 청송 월드컵대회는 여러 산악인들의 선입견이 깨진 자리였다. 선수가 아닌, 노스페이스 성기학(63) 회장에 대한 선입견이다. 성회장은 대회 개회식부터 결승까지 3일간 빠짐없이 모습을 나타냈을 뿐 아니라 마지막 결승전이 시작되면서부터는 끝날 때까지 내내 관중석을 지켰다. 특히 노스페이스 소속의 박희용이나 신윤선이 등반할 때는 VIP실을 나가 찬바람이 몰아치는 빙벽 바로 앞에서 바라보며 응원했다. 이런 뜻밖의 모습으로 성회장은 산악인 일반의, ‘그저 노스페이스 브랜드 홍보 차원에서 산악인들을 후원하고 있을 것’이란 삐딱한 선입관을 깼다.

현재 노스페이스 소속 클라이머는 무려 27명에 이른다. 아마도 국내에선 가장 많은 산악인을 후원하는 브랜드일 것이다. 성 회장은 진정 자사 소속의 클라이머들을 사랑하고 아끼고 있음을 스스럼없이 밝힌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 얼마나 대견해요. 1등을 하건 2등을 하건, 우리 선수가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워요.”

성 회장은 서울대 상대 무역학과 시절 산악부 활동을 했다. 설악산 서북릉종주, 겨울 지리산 종주 등의 경험을 회고하는 성 회장의 표정은 그 순간 청년처럼 상기된다. 그때 품었던 산꾼으로서의 꿈을 젊은 노스페이스 클라이머들에게 투영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노스페이스 홍보 효과도 보겠지요. 하지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보지는 않아요. 그보다는….”

하다가 성 회장은 남자부의 강력한 우승 후보자 박희용의 등반이 시작되자 말을 끊고는 얼른 쌍안경을 들었다.  ‘나는 저 젊은이들의 정신을 사랑합니다. 저들을 늘 가까이서 본 사람이라면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라고, 성 회장은 그 모습으로 대신 말하고 있었다. <安>
 

남자부 우승자 마르쿠스 벤들러(26) 1문1답

“세계 1위를 지켜내겠다는 마음가짐이 등반능력의 비결”

○주요 등반경력은?
“11세에 등반을 시작했다. 15세까지는 암벽등반을 주로 했고 8c급을 등반했다. 16세에 처음 빙벽을 시작했고 다음해에 빙벽대회에 출전했으며 놀랍게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7등을 했다. 이때부터 빙벽에 몰두했다.”

○자신만의 훈련방법은?
“없다. 시간 날 때마다 등반하는 게 훈련이다. 여름엔 인공암벽을 설치하는 일을 하고 자주 바위를 찾는다. 가을엔 드라이 툴링을 한다. 얼음이 얼면 빙벽등반을 한다. 더 자세한 건 비밀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등반은?
“등반 파트너이자 친구였던 하랄 베르거가 죽는 걸 봤을 때다. ‘얼음 가죽’이라는 오버행 빙벽을 오르고 있었는데 엄청난 천장이 무너졌다. 무너질 거라 상상하기 힘든 벽이 무너지며 친구는 그 아래 깔렸다. 당대 최고의 등반가가 사라지는 순간이었고 그 슬픔은 몇 년이 흘러도 남아 있다.”

○세계랭킹 1위를 지키는 비결은?
“1위를 지켜낸다는 정신적인 동기부여다. 강한 동기가 있으니 열심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수들이 점점 쫓아오고 있다. 동기를 잃으면 언제든지 1위 자리를 뺏길 수 있다. 굉장히 많은 훈련을 했고 숱한 등반 경험과 마음가짐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약점은?
“항상 내 자신에게 100%의 실력발휘를 기대하고 있다. 그 기대와 자신감이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조금이라도 등반이 막히면 심리적으로 부담을 느낀다.”

○암벽과 빙벽 어느 것이 더 좋은가?
“비교할 수 없다. 둘 다 즐긴다. 다만 대회 때문에 아이스클라이밍에 더 많은 준비를 한다.”

○거벽등반이나 히말라야 알파인등반에도 관심 있는가?
“지금은 26세다. 아직 클라이밍이 더 재밌다. 언젠가는 하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런 도전을 하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체력도 좋고 마음도 단련시켜서 더 강해져야 한다.”

○유럽에서 열린 대회에 비해 한국 대회가 어땠나?
“월드컵이지 유럽컵이 아니다. 아이스클라이밍은 더 세계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극단적인 비교는 무리다. 등반 루트는 완벽했고 모든 여건이 좋았다. 아시아에서 더 많은 선수들이 참가했으면 좋겠다.”


 / 글 신준범 기자 사진 염동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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