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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엄홍길의 명사산행] 유인촌 문화 특보

월간산
  • 입력 2011.10.20 13:39
  • 수정 2011.11.17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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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일시종주와 개방, 유연한 방식으로 이루고 싶다”

서울시를 배경으로 북악산에 선 유인촌 문화특별보좌관과 엄홍길 대장.
서울시를 배경으로 북악산에 선 유인촌 문화특별보좌관과 엄홍길 대장.

왕의 산에서 만난 사람, 전 문화부 장관이자 현재 대통령실 문화특별보좌관 유인촌(60)이다. 북악산 삼청공원에서 엄홍길(51) 대장과 유인촌 전 장관이 만났다. 초면은 아니다. 서울 성곽길 산행을 같이 했었다. 엄 대장이 기억하는 유 전 장관은 걷는 걸 워낙 좋아해 장관 시절 걷거나 자전거로 출퇴근하던 사람이다. 실제로 그는 2007년 땅끝 해남에서 서울까지 국토종단을 했으며, 일본 대학의 객원연구원으로 있던 시절 일상적인 모든 이동을 걷기로 하여 이때의 기록을 <유인촌의 거침없이 걸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유인촌씨는 문화부 장관을 그만 두고 나서 5kg 뺐다고 한다. 뭔가 목표를 세우고 해야 살을 뺄 수 있을 것 같아서 철인3종경기 통영 국제트라이애슬론 대회 출전을 목표로 세웠다. 평소 체력과 운동량이 없으면 힘든 종목이다. 그는 과거 마라톤 3개 대회에 참가, 풀코스를 완주했다고 한다.

“조·중·동 3개 메이저 대회 풀코스를 완주했어요. 하프마라톤은 많이 했고요. 어떻게 할 생각을 했냐고요? 해볼까 하다가 하게 됐어요. 지금은 철인3종경기 준비하고 있어요. 매일 한 시간 반씩 수영하고 자전거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씩 타고요. 요새 한 열흘 바빠서 못 하고 있어서 걱정이에요. 엊그제 다시 가서 수영했더니 정말 힘들더라고요.”

통영 대회는 올림픽코스를 채택하고 있어 수영 1.5km, 사이클 40km, 마라톤 10km를 3시간 30분 내에 마쳐야 한다. 그래서 유 전 장관은 “적당히 운동해서는 시간 내에 완주하기 어렵다”며 매일 4시간 이상 강훈련해 체중을 줄였다고 한다. 야인으로 있던 그는 지난 7월 문화특별보좌관으로 발탁되었다.

삼청공원에서 북악산으로 들기 전 엄 대장이 유인촌 보좌관의 산행 준비를 돕는다. 배낭 매무새를 고쳐주고 스틱을 펼쳐 정확한 사용법에 대해 알려준다. 시작부터 데크 계단이지만 대화는 멈추지 않는다. <월간산>과의 인터뷰가 신경 쓰였는지 그가 고백한다.  

“옛날에 산을 참 많이 다녔는데 언제부턴가 산을 잊어버렸어요.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삼청공원에서 북악산 성곽으로 올라서는 계단길. 유 특보는 마라톤 3번 완주와 국토종단을 했으며 철인3종경기 참가를 준비할 정도로 강한 체력의 소유자다.
삼청공원에서 북악산 성곽으로 올라서는 계단길. 유 특보는 마라톤 3번 완주와 국토종단을 했으며 철인3종경기 참가를 준비할 정도로 강한 체력의 소유자다.

생애 첫 번째 큰 모험은 동굴 탐사
그의 첫 번째 모험은 동굴탐사였다. 대학 시절 동국대 산악부 대장이었던 친구를 따라 동굴탐사에 나섰다. 1970년대 초였으니 탐사가 위험했던 시절이다. 기록 담당으로 끼어서 갔는데 태백 지역 동굴 탐사에 19박20일이 걸렸다고 한다.

“태백에 있는 수직굴 관음굴과 환선굴을 다녀왔어요. 그때는 철문 닫아놓고 이장이 잠가 뒀었는데 가서 얘기하면 몇 년도에 사람이 들어갔다가 안 나왔다, 그런 얘기 하고 그랬어요. 근데 동굴탐험대니까 정식 허가를 받아서 갔죠. 위험했죠. 환선굴도 막장을 못 보고 나왔으니까. 동굴 가지가 너무 많아서, 2~3명씩 갈라서 시간 재서 들어갔다 나와서 회의하고 다시 들어가고 그랬죠. 동굴 안에서 잠수도 하고 바위도 기어오르고 굉장히 험했던 것 같아요. 한 명이 먼저 가서 로프를 연결하면 따라 올라가고 그랬죠. 그때 기억이 지금도 많이 나요. 간신히 기어들어가기도 하고, 신기한 데가 참 많았어요.”

그는 산악인 중에 고 고미영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고미영씨가 원정을 갈 때면 가기 전 그를 찾아왔었다. 그는 “지금도 고미영이 보낸 엽서를 다 가지고 있다”며 “그때 후원 문제 도와주려고 했는데 잘 안 됐었다”고 기억했다. 고미영의 빈소에도 갔는데, 그때 엄홍길 대장을 비롯한 산악인들을 만나 국립등산학교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엄 대장은 “국립등산학교가 우리도 필요하니 만들어야겠습니다”하고 국립등산학교의 필요성을 유 특보에게 얘기했단다. 이후 유인촌 특보는 국립등산학교를 세우는 일을 추진했다고 한다. 히말라야 고봉을 오른 산악인이 많고 등산인구가 1,000만 명이 넘으니 그런 수요를 충족하려면 등산학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경기도권의 폐교에 등산학교를 세울 생각이었다. 도시의 좋은 건물보단 그런 곳이 더 자연과 어울리고 건립비용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그렇게 추진하려 했는데 회의에 가서 얘길 꺼냈더니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이미 추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는 ‘관리공단보다 잘 할 수 있는 데가 없겠다’ 싶어서 업무 효율 차원에서 관리공단에 일을 넘겼다. 엄 대장은 “관리공단에서 등산학교를 세웠지만 산악인들의 생각과는 다른, 전문적인 등산학교와는 거리가 있는 기초교육 수준의 등산학교”라고 한다. 산악인들은 유럽의 국립스키등산학교 ‘엔사’ 같은 전문적인 등산학교를 원했는데 기초적인 교육에 한정된 교육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유 특보는 장관 재직 시절, 국립등산학교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유 특보는 장관 재직 시절, 국립등산학교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나는 완전히 독립된 등산학교를 만들려고 했는데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등산학교를 추진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공단에서 몰아서 추진하는 걸로 하자고 해서 토스했죠. 지나고 보니 의미가 조금 다른 거였군요. 당시에 내가 하게 놔뒀으면 아마 기둥은 세웠을 거예요. 그쪽에서 하고 있다니까 중복될 필요 없으니 넘겼고, 잘 될 줄 알았지요.”

그는 전문적인 국립등산학교가 생기려면 엄 대장 같은 산악인들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산악인들이 뭉쳐서 주춧돌을 놓는다는 생각으로 조금씩 희생하면 가능하겠지만 처음부터 다 갖춰 놓고 하려면 시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국토종주 때는 약속 때문에 하루 55km 걷기도
북악산 말바위안내소에 도착, 입장 신청서를 작성하고 본격적으로 서울 성곽길로 든다. 1년에 며칠 없는 맑고 깨끗한 서울 하늘이다. 내리쬐는 햇살을 기분 좋게 맞으며 능선을 이어간다. 엄 대장이 유 특보의 국토종단 얘기를 꺼낸다. 

“아! 그때 고생 되게 했어요. 인터넷에 올려놓고 ‘같이 할 사람은 모여라’ 그렇게 진행을 했거든요. 그러니 밤이 되어도 다음날 올 사람들 생각하면 목적지까지 반드시 가야 되는 거예요. 하루에 55km 걸은 적도 있었지요. 해남에서 나주~광주 이쪽으로 온 게 아니고 강진으로 해서 벌교~보성으로 해서 지리산 넘어서 거창, 거기서 덕유산 넘어서 영동 이런식으로 한반도를 크게 돌아서 올라왔죠.”

그는 일본 객원연구원 시절 걸었던 경험으로 이제 우리나라 땅을 제대로 걸어보자고 결심해 종단에 나섰다. 국토종단 경험은 인생에 있어 전환점이 될 정도로 심신의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한다. 또 다른 전환이 되었던 경험은 관악산 새벽 산행이다.

유인촌 특보의 부친 유탁씨(맨 왼쪽). 1985년 <월간산> 주최 히말라야 트레킹에 참가했을 당시의 모습이다.
유인촌 특보의 부친 유탁씨(맨 왼쪽). 1985년 <월간산> 주최 히말라야 트레킹에 참가했을 당시의 모습이다.

“희한한 추억이 있어요. 1990년쯤에 김도향씨를 만났어요. 나를 보더니 기가 빠졌다는 겁니다. 안 그래도 내가 요즘 피곤하다 그랬더니 산에 가야 된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주말에 같이 산에 가자고 했더니 내일 아침부터 매일 관악산을 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정부종합청사 뒤에서 새벽 5시에 만나서 가는데, 산도 안 가다가 가니까 되게 힘들더라고요. 근데 김도향씨는 잘 올라가데요. 첫날은 꼭대기는 안 가고 약수 있는 데까지만 가고, 내일 올 때 방석, 담요, 파카, 사과 한 개, 이렇게만 가져 오라데요.”

이렇게 관악산 새벽산행을 시작한 그는 일주일 동안 김도향씨와 함께 산을 오르며 많은 걸 배웠다고 한다. 처음 일주일간은 몸만들기를 해서 체력을 기르고 다음부터는 명상의 중요성에 대해 얘길 들었다고 한다. 일주일 후부터 그는 혼자 두 달간 관악산에 다녔다. 그때 “내 체력이 변하고 체질이 완전히 변하는 걸 느꼈다”고 한다. 김도향씨는 그렇게 1년만 관악산을 다니고 다음에 북한산을 가라고 했단다.

“관악산 연주대 바위 있잖아요. 절벽 맨 끝에 올라가서 방석 깔고 담요 덮고 앉아서 명상을 했어요. 아! 정말 내가 그걸 두 달 동안 했다니까요. 10~11월 추울 때였는데 한 30분 앉았다가 오고 그랬는데 졸면 떨어지는 거니까 졸면 죽는다 하고 있다가 눈을 딱 뜨면 태양이 눈앞에 이따만 한 게 있는 거예요. 이야! 이게 양기를 받는 거구나 싶어서, 이걸 몇 년 하면 진짜 도사가 되는 거구나 싶었죠. 근데 그 방법이 좋은 게, 그렇게 피곤하던 몸이 바뀌면서 활력을 찾게 됐죠. 몸이 가벼워지고, 하여간 모든 게 좋아지더라고요.”

그렇게 두 달 산행하면서 체력을 길러 처음에는 정상까지 한 시간 반 이상 걸리던 것이 한 달쯤 지나자 한 시간이면 올라가게 되었다. 길이 훤해져서 깜깜해도 랜턴 켜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갈 정도가 됐다고 한다.

북악산 정상에 선 유인촌과 엄홍길.
북악산 정상에 선 유인촌과 엄홍길.

아버지 유탁씨는 골수 산꾼
유 보좌관은 예전부터 백두대간 일시종주를 꼭 하고 싶었다고 한다. 대간 얘기가 나오자 백두대간 국립공원 통제구역 개방 쪽으로 화제가 옮겨간다. 

“엄 대장 하나 물어봅시다. 백두대간이 다 개방되어 있나요?”

“아뇨. 일부 구간은 출입이 통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대부분 새벽에 몰래 산행하는 방법으로 통과해서 완주하죠. 사실 백두대간 완전 개방은 산꾼들의 가장 큰 바람입니다. 지금은 백두대간을 완주한 사람이면 누구나 불법을 저지른 범법자가 되고 마는 상황이거든요. 게다가 적발되면 벌금이 50만 원입니다.”

“백두대간 종주한다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당연히 다 개방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대간 종주를 하면 애국을 따로 얘기 할 것이 없어요. 우리 땅 백두대간을 직접 밟아보면 자연적으로 애국심이 솟아납니다. 마지막 진부령에서 마칠 때면 막 눈물을 흘리고 그래요. 요즘은 등산객들의 자연에 대한 의식이 과거와 달라져서 줄만 하나 쳐둬도 넘어가거나 그런 일 없고 쓰레기를 버리는 경우도 적습니다.”

엄 대장의 얘기에 공감한 유 특보는 “자연의식이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다고 본다”며 “얼마든지 운영의 묘를 통해서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유연한 방식으로 백두대간 개방에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것이다. 유인촌 보좌관은 “백두대간을 왜 다 못 가는지 직접 가보면 이유가 찾아지지 않겠냐”며 “부분별 개방을 통해 시간제한이나 인원제한을 둬서 길을 여는 쪽으로 추진하면 좋겠다”고 뜻을 밝혔다. 덧붙여 그는 “백두대간 종주를 꼭 하고 싶다”며 “구간종주보다 일시종주가 목표를 세워 추진하기도 좋고 나한테 맞을 것 같다”고 대간 완주에 대한 의지를 얘기했다. 그가 대간을 가고자 하는 건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서다. 

그의 부친 유탁 옹은 “칠순에 칠순잔치를 안 하시고 히말라야를 다녀오신 분”이라고 한다. 그의 부친은 설봉(雪峰)이란 호를 쓸 정도로 산을 좋아했다. 1970년대에 <월간산>에 기고도 많이 했다고 한다. 1980년대부터의 기록을 살피자 1985년 본지 주최 제1회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기사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친 유탁씨는 당시에도 유럽 알프스와 일본 북알프스와 후지산을 여러 번 다녀왔으며, 광복 전에는 금강산, 묘향산, 구월산, 수양산, 백두산을 다녀올 정도로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화양구곡이 있는 괴산의 도명산을 무척 좋아해 이 지역에 대한 글을 본지에 많이 기고했었다. 당시 트레킹단에서도 66세로 가장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던 그는 3,000~4.000m 고소에서도 왕성한 식욕을 보이며 잘 적응했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서울의 경치를 살핀다. 유인촌 전 장관은 백두대간 일시종주를 꼭 하고 싶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서울의 경치를 살핀다. 유인촌 전 장관은 백두대간 일시종주를 꼭 하고 싶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 “워낙 자유인이셔서 배낭 메고 나가면 며칠씩 있다 오셨다”며 “일흔넷에 돌아가셨으니 너무 일찍 가신 셈”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백악산(북악산) 표지석이 있는 정상에서 서울의 빌딩 숲에 시선을 둔다. 유 전 장관은 사대문 안은 계획적으로 건축제한을 해서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모습을 지켰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아쉬워한다. 차량도 통행 시간을 조절해서 사대문 안은 보행자 우선의 쾌적한 환경을 꾸몄으면 하는 게 그의 생각이다. 산성을 따라 내려서며 근황을 묻는다.

“요즘은 문화부가 하는 일에 대해서 보완을 해줘야 하고, 공식적으로 잘 해결이 안 되는 것들에 대한 도움을 주는 데 힘을 쓰고 있어요. 어떤 때는 국민들의 이쪽저쪽 얘기를 대통령에게 전달해야 하고요. 그런 역할을 많이 해야죠. 그렇게 해서 맺힌 데가 있으면 풀어야 하고요.”

그는 역대 최장수 문화부 장관이었다. 비결에 대해 묻자 “초기 내각이라 많이 힘들었다”며 “그래도 진정성을 가지고 해서 그런 것 아니겠냐”고 밝혔다. 그는 문화부 장관 시절 발로 많이 뛰었다고 회고한다. 

“저는 어떤 주의냐 하면 정책을 만든다는 게 어디서 책 보고 만드는 게 아니고 현장 속에서 나오는 거라고 봐요.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나고 얘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봐요. 그런 정책은 실패를 안 해요. 장관 시절에 많이 돌아다녔죠. 그래서 국립등산학교 만들자는 얘기도 나왔고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국립현대미술관처럼 역대 정부에서 해결이 안 됐던 큰 덩어리들이 해결됐죠. 쫓아다니면서 해결해야 되는 것들이 많았어요. 한글박물관 이런 건 겉으로 보면 돈 되는 건 아니지만 문화부가 나서서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문화부는 결과를 손에 쥐기는 어렵죠.”

1·21사태 때 총 맞은 소나무 앞에서 얘기를 나눈다.
1·21사태 때 총 맞은 소나무 앞에서 얘기를 나눈다.

문화부 장관 시절 아쉬웠던 부분에 대해서 물었다.

“일할 때는 강하게 추진하지 않으면 일이 잘 안 돼요.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기득권들이 있어서 뭘 바꾸는 게 참 안 돼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 뜻대로 하기 시작하면 뭘 새로 하는 게 굉장히 힘들어져요. 문화라는 게 포괄적이잖아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고 사람들 삶의 모습이기 때문에 바꾸는 것도 어렵고 큰 틀로 만들어져야 하니까. 큰 거만 생각하면 작은 게 또 안 되니까 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된다고 봐요. 그런 시간이 더 필요했으면 하죠. 현장도 더 많이 다녀야 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야 되고.”

유 전 장관은 솔직한 화법을 구사하는 걸로 유명하다. 워낙 솔직한 탓에 구설수에도 많이 올랐던 것에 대해 엄 대장이 얘길 꺼냈다. 

“그렇죠. 나는 꾸며지는 게 없으니까. 어떻게 보면 순진한 거죠. 정치인 스타일은 아닌 거죠. 제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얘기를 하는 편이예요.”

이명박 정부 이후에도 정치에 관여할 뜻이 있는지 물었다.

“지금은 보좌역이니까 앞에 나서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대통령 임기가 1년 반 남았으니까 남은 임기를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보좌해야죠. 어차피 이 정부가 끝날 때까지는 제 역할에 맞도록 최선을 다해야죠. 근데 뭘 해도 실패라고 얘기하니까 어렵죠.”

전원 일기는 드라마라기보다 생활이었다
그는 전원일기 김 회장(최불암)의 둘째 아들 용식으로 오랫동안 TV드라마에 출연했다. 워낙 오래 연기한 탓에 “드라마라기보다 생활이었다”며 출연진도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했다고 한다. 연기 철학에 대해 물었다. 

1, 2 가벼운 산행 후 식사를 하고 엄 대장이 유 특보에게 8,000m 16개 봉우리 등정 사진이 담긴 타올을 선물했다.
1, 2 가벼운 산행 후 식사를 하고 엄 대장이 유 특보에게 8,000m 16개 봉우리 등정 사진이 담긴 타올을 선물했다.

“연기는 가짜로 꾸며놓은 얘기를 가지고 하지만 배우는 가짜로 하는 게 아니거든요. 실제로 배우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건 거짓말로 만들어진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찾는 거예요. 근데 우리 실제 생활은 진짜로 살아야 되는 생활인데 거짓말로 사는 게 많잖아요. 그래서 배우가 굉장히 중요해요. 그게 너무 오락적인 흥행, 또는 상업적이고 재미 위주의 연기가 되면 지금 얘기한 이런 게 의미가 없어져요. 그래서 배우들이 정말 연기를 할 때는 거짓말로 쓰인 극본 속에서 진짜 얘기를 하는 그런 연기를 해야 돼요. 요즘은 재미위주로 포장되서 그런 걸 찾기 어렵죠.”

그는 연극에 대해 애착이 많다. 처음 시작한 것이 연극이었고 연극의 ‘남지 않음’이 좋다고 한다.

“영상은 남는 것이고 연극은 없어지는 거잖아요. 나는 그걸 좋아해요. 남기는 것보다는 없어지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조선시대 광대는 무덤이 없어요. 그냥 한때 왔다 공중에 흩어지고 마는 거죠.”

연기자로의 복귀는 “한참 있어야 될 것”이라고 운을 뗐다. 임기 중에는 역할에 충실해야 하고, 임기가 끝나도 바로 드라마를 찍거나 상업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봉사만 할 생각이라 한다. 만약 다시 하게 된다면 “많이 늙어서 할 생각”이라 한다. 

이제는 연기자보다 정치인, 전 문화부 장관으로 이미지가 굳어진 그에게 장관직을 하고 난 소회를 물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정치는 신념을 가지고 하는 거더라고요. 신념이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해요. 그게 옳든 그르든 자기 신념을 가지고 하는 거잖아요. 산을 오르는 것도 확실한 자기 신념을 가지고 하는 거고요. 정치도 산행처럼 그런 확신이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상처 입고 여러 사람이 힘들어져요.”

현역에서 물러난 등반대장과 장관에서 물러난 보좌관이 하산한다. 왕의 산, 북악산을 내려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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