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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익스트림 라이프 | 프리러너 장경호]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이 시작된다

월간산
  • 입력 2012.05.1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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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이나 표범같은 탄력적 몸매, 과감한 몸놀림 요구

지리산 쌍계사 계곡의 4월은 벚꽃으로 찬란했다. 고지대의 능선과 사면에 겨우내 쌓여 있던 눈이 두터운 남녘의 봄볕에 시나브로 녹아내리며 쌍계사가 아늑하게 들어앉은 화개골로 맑은 물을 흘려보내, 그 물은 또 다시 고이고 모여 섬진강으로 달려간다.

봄이 무르익은 화개골 너럭바위 위에서 아디다스 테렉스팀 프리러너 장경호의 몸 사위는 만개한 벚꽃만큼이나 화려하다. 징검다리를 건너듯 다리를 크게 벌려 바위 사이를 겅중겅중 뛰다가 공중제비를 도는가 하면 바위의 정수리를 타고 넘는다 싶은 순간 딱 멈춰 그 자리에서 물구나무를 선다.

프리러너의 멘토는 산양이나 고양이다. 뛰고, 날고, 구르는 프리러너는 야생동물과 같은 유연성과 탄력, 순발력을 끝없이 추구한다.
프리러너의 멘토는 산양이나 고양이다. 뛰고, 날고, 구르는 프리러너는 야생동물과 같은 유연성과 탄력, 순발력을 끝없이 추구한다.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작은 바위에서는 자진모리 휘모리로 민첩하게 허공으로 튕기듯 날아오르다가 큰 바위가 나타나면 진양조로 늦추는 그의 프리러닝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음악을 듣는 것처럼 리듬이 느껴진다.

바위, 물, 자갈, 나무 등 이 골짜기를 이루는 모든 자연 지형지물은 프리러너 장경호의 자유로운 영혼 앞에서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었다. 그가 통과하기 전 거기에 길은 본래 없었으나 그가 지나가는 모든 곳이 길이 됐다.

산양처럼 탄력 있게, 표범처럼 날렵하게

프리러닝(free running)은 1990년대 데이비드 벨이 창시한 파쿠르(pakur)로부터 시발됐으며 벨과 함께 파쿠르를 체계화시킨 동료 세바스찬 푸칸이 원조다. 파쿠르는 인간 육체의 한계 내에서 에너지를 가장 적게 사용하면서도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장애물을 극복하며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테크닉 자체에 집중하고 실용성, 효율성에 방점을 찍고 있다. 이에 반해 프리러닝은 거기에 우아함, 세련미를 더하며 퍼포먼스적인 요소를 추가해 창의적이며 심미적인 동작을 통해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것이 목표다.

프리러닝은 다시 건물이나 계단, 담 등 도시의 다양한 지형지물을 활용해 자신을 표현하는 어반 프리러닝과 바위, 개울, 수목 등 자연 장애물이 있는 산악지형을 극복하는 마운틴 프리러닝으로 나뉜다.

1 아디다스 테렉스팀의 프리러너 1세대 장경호. 우리나라의 산악지형은 나무와 돌이 많고 가파른 것이 특징. 프리러너 입장에서는 다양한 퍼포먼스를 펼칠 수 있는 천혜의 땅이기도 하다. / 2 프리러닝의 엔진과 차체는 바로 인간의 몸이다. 북한산 프리러닝에 앞서 스트레칭과 워밍업에 열중하고 있다.
1 아디다스 테렉스팀의 프리러너 1세대 장경호. 우리나라의 산악지형은 나무와 돌이 많고 가파른 것이 특징. 프리러너 입장에서는 다양한 퍼포먼스를 펼칠 수 있는 천혜의 땅이기도 하다. / 2 프리러닝의 엔진과 차체는 바로 인간의 몸이다. 북한산 프리러닝에 앞서 스트레칭과 워밍업에 열중하고 있다.

프리러닝은 육체적으로 인간보다 월등한 동물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 날개가 있어 하늘을 날 수 있는 새나 지느러미가 있어 빠르게 헤엄칠 수 있는 물고기의 움직임은 땅을 딛고 살아가는 인간이 맨몸으로 따라하는 데 명백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산양(山羊), 표범 같은 민첩하고 탄력적인 육상 네 발 짐승들의 유연하고도 탄력적인 움직임은 프리러닝 수련자들이 끝없이 닮고 싶어하는 궁극의 목표인 것이다.

맨몸으로 아파트 4층까지 기어오른 초등학교 5학년생

20여 년 전 여름, 부산 동래구 명륜동의 한 골목.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초등학교 5학년 장경호는 난데없는 비명소리에 화들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비명을 지른 사람은 60대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곳은 5층짜리 아파트의 4층 창문으로, 거기엔 5~6세쯤 되어 보이는 남자 꼬마아이가 난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할머니가 손자를 집에 두고 잠깐 동네 가게에 다녀오는 사이 아이가 베란다 창문 난간을 넘었다가 힘이 빠져 오도가도 못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참나무를 발로 차고 뒤돌기를 하고 있는 장경호.  프리러닝은 영혼의 자유로움을 육체로 표현하는 것이다.
참나무를 발로 차고 뒤돌기를 하고 있는 장경호. 프리러닝은 영혼의 자유로움을 육체로 표현하는 것이다.

일이 꼬이려 했는지 설상가상 할머니는 열쇠를 집안에 둔 채 문을 잠그고 나왔다. 집안으로 들어가 꼬마를 구할 방법도 없는 것이다. 도움을 청할 어른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봤으나 한낮의 아파트 단지 골목은 이 절망적 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텅 빈 채, 마치 물속처럼 무심하고 고요했다.

상식적으로 이 상황에서 초등학교 5학년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지만 다급한 할머니는 손자를 살려달라며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았다. 4층 철제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려 곧 떨어질 것 같은 꼬마… 뭔가 해야만 했으나 ‘뭘? 어떻게?’ 울부짖는 할머니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듯한 아득함을 느꼈다.

잠시 뒤 장경호는 ‘초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파트 벽면에 설치된 빗물 배수관을 붙잡고 암벽등반의 레이백(lay back) 자세로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는 여느 초등학생처럼 클라이밍을 해본 적은 고사하고 구경조차 못 해봤다.

마침내 난간에 매달린 꼬마와 수평으로 눈을 맞출 수 있는 4층 높이에 도달한 그에게 진짜 초능력이 필요한 크럭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빗물 배수관과 창문 턱 사이의 거리가 꽤 있었던 것이다. 배수관을 잡은 손을 놓고 창문턱을 잡아야 위기에 빠진 꼬마에게 접근할 수 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기어오르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한 점프를 해야 했다.

너럭바위 꼭대기로 달려오른 뒤 물구나무 서기. 실용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파쿠르의 경우 이런 동작이 불필요하다고 보지만 퍼포먼스를 중시하는 프리러닝에서는 이런 장면이 곧잘 연출된다.
너럭바위 꼭대기로 달려오른 뒤 물구나무 서기. 실용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파쿠르의 경우 이런 동작이 불필요하다고 보지만 퍼포먼스를 중시하는 프리러닝에서는 이런 장면이 곧잘 연출된다.

아파트 4층 높이는 인간이 가장 두려움을 느낀다는 11m 어름. 뛰었다가 만에 하나 창문턱을 잡지 못하게 된다면 감당 못 할 상황이 올 것이었다.

“할 수 있다, 혹은 할 수 없다, 그런 생각도 없었어요. 사실 대체 내가 어떤 생각으로 거길 기어 올라갔는지, 어떻게 배수관에서 창틀 턱까지 몸을 날려 점프했는지 전혀 생각도 안 나고 이해도 안 돼요.”

결국 장경호는 몸을 날려 창틀 턱을 붙잡고 베란다를 기어올라 백척간두의 끝에서 위태롭던 꼬마를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부산 명륜동에서의 이 사건은 어린 장경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나를 그 위까지 끌어올린 힘이 무엇일까 궁금했어요.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을 해내고 나니 어린 마음에 나에게 뭔가 남과 다른 초능력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1 바위 경사면을 달려 내려오다 나무를 회전축 삼아 90도 방향 틀기. 프리러닝은 어쩌면 중력이 있는 3차원의 세계, 즉 지구에서 가장 즐기기 쉬운 스포츠일 것이다. / 2 프리러너가 가장 빛나는 것은 공중에 머무르는 순간. 볼트(뛰어넘기) 후 2m 가까운 허공을 날며 착지할 곳을 바라보는 장경호의 눈매가 매의 그것을 닯았다.
1 바위 경사면을 달려 내려오다 나무를 회전축 삼아 90도 방향 틀기. 프리러닝은 어쩌면 중력이 있는 3차원의 세계, 즉 지구에서 가장 즐기기 쉬운 스포츠일 것이다. / 2 프리러너가 가장 빛나는 것은 공중에 머무르는 순간. 볼트(뛰어넘기) 후 2m 가까운 허공을 날며 착지할 곳을 바라보는 장경호의 눈매가 매의 그것을 닯았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장경호는 운동을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경남 고성에서 소싯적 아마추어 복서로 꽤 이름을 날렸다는 아버지는 운동을 하겠다는 아들에게 복싱을 권했지만 운동에 대한 장경호의 호기심은 그를 복싱 한 종목에만 묶어두기엔 너무 강력했다.

복싱을 넘어 유도, 킥복싱, 종합격투기 등을 차례로 거쳐 고교시절엔 비보잉까지 영역을 확대하기에 이른다. 서브웨이브레이커스 등 부산 교대역을 베이스캠프 삼아 열정적인 비보이로 활동하던 그는 2004년 독일 배틀 오브 더 이어(Battle of the year)를 시작으로 국제무대로 진출해 미국 비보이 호다운(ho-down), 프리스타일 세션 등에서 우승하며 세계 비보잉계의 한류 바람을 견인한다. 전통적 개념의 춤과는 달리 곡예적 동작이 요구되는 비보이 댄스는 유도, 태권도 등을 통해 관절의 한계와 가동 범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장경호에게 딱 맞는 분야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술을 하건, 비보잉 댄스를 하건 그의 몸 속 어딘가에서는 주체하지 못할 열정이 항상 들끓고 있었다. 그것은 초등학교 시절 아파트 난간에 매달린 꼬마를 구해낸 후 생겨난 것으로 뛰어내리고, 달리고, 건너뛰는 동작에 관한 강박과도 같은 호기심이었다.

1등반은 모든 익스트림 스포츠의 원조이다. 도움닫기로 에너지를 축적한 장경호가 바위를 뛰어오르고 있다. 마운틴 프리러닝은 상당부분 암벽등반 능력을 요구한다. 물론 그 동작은 일반 암벽등반보다 훨씬 짧고 순간적이다. / 2 바위 경사면을 달리다가 뛰어내리는 장경호. / 3 프리러닝 중 급격한 커브에서는 자동차가 드리프트를 하는 듯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 4 지리산 쌍계사계곡의 낡은 현수교. 금속 케이블을 도약대 삼아 날아올랐다.
1등반은 모든 익스트림 스포츠의 원조이다. 도움닫기로 에너지를 축적한 장경호가 바위를 뛰어오르고 있다. 마운틴 프리러닝은 상당부분 암벽등반 능력을 요구한다. 물론 그 동작은 일반 암벽등반보다 훨씬 짧고 순간적이다. / 2 바위 경사면을 달리다가 뛰어내리는 장경호. / 3 프리러닝 중 급격한 커브에서는 자동차가 드리프트를 하는 듯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 4 지리산 쌍계사계곡의 낡은 현수교. 금속 케이블을 도약대 삼아 날아올랐다.

지면에서 물처럼 흐르는 동작이 궁극의 목표

보잉에 심취해 있던 그에게 프리러닝의 세계가 열린 것은 2003년. 우연한 기회에 세바스찬 푸칸의 프리러닝 영상작품 ‘점프 런던’을 접하게 된 것이다.

“영상을 보는 순간 충격과 함께 뜨거운 동질감을 느꼈어요. 나처럼 저런 데 미친 녀석이 또 있구나….”

충격을 받은 것은 막연히 과감한 동작을 즐기기만 하던 자신과 달리 푸칸은 기량도 물론 뛰어났지만 이 운동에 대해 체계를 쌓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뭐랄까…. 점프 런던을 본 뒤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죠. 나도 더 수준 높은 단계에 이르러 진정한 프리러너가 되고 싶다는 구체적 생각을 갖게 된 계기가 됐어요.”

한국에는 프리러닝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에 파쿠르와 프리러닝이 중요한 모티브로 다뤄진 뤽 베송 감독의 영화 ‘야마카시’, ‘제13구역’은 장경호에게 영상 교재가 됐다. 프리러너로서 모든 곳에 가상의 동선을 그려보며 공간을 재해석한 뒤 실제로 뛰거나 달려보는 즐거움이 장경호의 화두이며 삶의 의미가 된 것이다.

물론 겁도 난다. 그러나 극복될지 여부를 알 수 없는 장애물 앞에 맨 몸으로 섰을 때 갈등하는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서는 프리러닝은 단순한 운동이나 퍼포먼스가 아니라 일종의 도(道)가 됐다.

장경호는 그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프리러닝의 최고 경지를 춤을 추듯 부드럽게, 사람이 지면에서 물처럼 흐르게 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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