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트레킹 | 중국 전구장성] 2,000년의 고요와 더불어 옛 만리장성을 걷다

입력 2012.05.23 00:34

한껏 당긴 활 모양 능선의 절경&옛 모습 그대로의 산성벽 길

만리를 끊임없이 이어간 만리장성중에서 ‘최고의 경관을 보이는 구간’으로 꼽히는 전구장성. 중앙부 저 뒤의 높은 산봉에 성루가 뵌다.

자전거 행렬이 물결처럼 흐르던 그때가 언제였던가. 중국 베이징(北京)은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도도한 강물 같던 자전거 행렬은 간 곳 없고, 그 자리를 크고 작은 차량들이 꽉 채우고 있었다. 서로 빨리 가려고 머리를 들이미는 통에 차량 무리는 자연스레 흐르지 못하고 꼼짝없이 정체되기 일쑤였다. 자금성을 중심 삼아 나이테 모양으로 개설했다는 순환도로가 사뭇 여섯 가닥이나 됨에도 출근시간대의 베이징 시내 도로는 정체를 반복했다. 3일의 청명 연휴를 맞아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행락객들이 크게 늘어난 탓도 있다고 길 안내자로 나선 서명 이사는 말했다.

우리는 베이징 북방의 전구장성을 찾아 나선 길이다. 그간의 만리장성 구경은 팔달령이나 산해관을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말끔히 다듬어지고 복원되어 옛 장성의 정취를 맛보기 어렵다. 정제된 관광지의 분위기에 식상한 고적 마니아들이 만리장성의 여러 다른 곳을 찾기 시작했고, 그중 유난히 각광받기 시작한 곳이 전구만리장성이다. 중국 방방곡곡의 명산루트 개발에 정열을 쏟아온 산악투어의 양걸석 사장은 “등잔 밑이 어두웠다”며 이곳 전구장성 길을 소개했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동쪽 랴오닝성(요녕성) 산해관에서 서쪽 간쑤성(감숙성)의 가욕관까지 약 5,000km에 걸쳐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거리 단위인 리는 0.4km이지만 중국의 리, 즉 화리(華里) 1리는 0.5km이니 곧 만 리가 된다는 것이다. 산해관~가욕관 간의 도상 거리는 2,700㎞이며, 그 사이의 갈래 성들까지 모두 합쳤을 때의 길이가 5,000km라고 한다. 그러나 조사 방법이나 범위 등 학설이나 학자에 따라 6,000km에서 8,000km까지도 장성의 길이는 여러 가지로 달라진다.

산릉을 따라 이어지는 전구장성. 570여 년 전 명나라 때 대대적으로 재축조한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만리장성은 기원전 214년 진시황이 북의 흉노를 몰아내고 동서로 길게 쌓은 것이 시초라 한다. 이미 2,000년도 더 된 옛적의 일이니 그때의 것이 지금껏 남아 있기 어렵다. 현존하는 장성의 대부분은 570년쯤 전인 명나라 때 대대적으로 재축성한 것이라 한다. 이 만리장성은 구간에 따라 산해관(山海), 가욕관(嘉), 팔달령(八), 모전욕장성(慕田城), 금산령장성(金山城), 사마대장성(司台城)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이 중 전구장성에 대해 베이징 시관광국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젠커우창청(箭城,jian kou chang chang,전구장성) : 화이러우현(柔, 회유현)의 보하이진(渤海, 발해진) 내 전주촨촌(珍珠泉村, 진주천촌) 서북부에 위치해 있는 젠커우장성은 명나라 시대 만리장성의 험준한 구간으로 가장 유명하며, 각종 장성 화첩상에서 최고의 경관을 보이는 구간으로서 장성 촬영의 최고 인기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장성 대부분이 험준한 봉우리들 상에 축조돼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으며, 장성을 거닐다보면 기복의 변화가 심한 것을 느낄 수 있다.’

윤곽선이 당긴 활 모양이라는 데서 명칭 유래 
전구(箭)라는 말에서 전은 곧 ‘활’이며 구는 ‘당긴다’는 뜻이니, 곧 전구장성이란 활을 당긴 모양새와 흡사하다는 데서 붙인 명칭이다. 장성의 북쪽 어느 마을길에서 내려 비포장 농로를 10여 분 가다가 양걸석 사장은 저 앞의 산릉을 가리켰다. 별다른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바로 저기가 전구장성임을 알 수 있었다. 팽팽히 활시위를 당긴 형상의 암갈색 산릉이 앞에 펼쳐졌다.

1 나무 사다리를 타고 전구장성벽 위로 오르는 일행. 현지주민이 사다리를 걸쳐놓고 통과세를 받고 있다. 2 잡목이 자라고 무너진 성벽돌이 깔린 옛 성벽 위를 따라 걷는 사람들.

아마도 여기가 우리네 산골 어디쯤이었다면 수리가 날개를 활짝 편 형상이라 해서 수리봉이라거나 학봉 같은 이름을 얻었기 십상이다. 그러나 여기는 전쟁이 벌어졌던 산성이다. 새의 날개보다는 활 같은 병기를 연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활의 가운데 부분에 해당하는, 산릉에서 가장 야트막한 곳을 향해 우리뿐만 아니라 중국인 관광객들도 줄지어 올랐다. 휴일 전구장성을 찾는 현지인들의 수도 만만찮았다. 중국인들과 우리 한국인들, 그리고 간간이 유럽인들도 뒤섞이어 전구장성의 깔딱고개를 향해 올랐다.

오르막에 다다라 갈지자로 몇 번 꺾지 않아 산성벽 아래에 다다랐다. 이렇듯 접근이 쉬우니 옛적 전쟁이 벌어졌을 때엔 이 부분이 가장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안부에서부터 양쪽으로 급격히 치달아 오른 성벽 위로 일단 올라야 하는데, 가장 야트막한 곳에 현지 주민인 듯한 사람이 든든히 나무 사다리를 걸쳐놓고 이용료를 받고 있다. 1인당 3위안은 너무 비싸다며 서 이사가 흥정을 붙여보지만 그는 막무가내다. 이 사다리를 걸쳐둔 곳 이외엔 성벽이 너무 높아 아무도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나무 사다리를 타고 성벽 위에 섰다. 양쪽으로 하얗게 뼈를 드러낸 듯, 대장성이 6~7m 폭의 기나긴 띠로 산릉을 이어가고 있다. 능선이 정점을 이룬 산봉마다엔 크고 작은 성루가 섰다. 필시 주위를 감시하던 망루이거나 아니면 병졸을 지휘하던 장대(將臺)로 역할하던 곳이었을 것이다. 벽의 높이는 우리가 올라온 북쪽이 남쪽보다 한결 높았다. 서 이사가 말했다.

“성벽에서 대개 높은 쪽이 바깥쪽이라고 보면 됩니다. 애초 만리장성은 북쪽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그의 말을 듣고 좌우를 살피니 북쪽으로는 성벽에 붙어 오르는 적을 향해 화살을 쏘거나 창을 던지기 위해 돌출해 쌓은 치성(雉城)도 몇 보였다. 그러나, 장성은 동쪽과 서쪽 산릉 위로 끝 없이 하얀 선을 이어가고 있었다. 저 기나긴 만 리의 장성을 물 샐 틈 없이 방어한다는 것이 가능했을까. 어디 한 군데가 뚫리면 순식간에 적은 등 뒤에서부터도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러자, 서 이사가 또한 설명한다.

1 전구장성 성루 내부. 홍예벽돌로 하나하나 정성들여 쌓았을 건축물이건만 거의 방치된 채다. 2 전구장성벽 안의 계단길. 폭이 5~8미터 되는 성체 위에 여장을 양쪽으로 각각 한 줄씩 쌓았다.

“그렇지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만리장성은 오로지 방어벽이었다기보다는 경계선의 의미를 가진 울타리, 즉 영역 표시의 의미도 컸다고 봅니다.”

이 성벽이 이어간 산 능선 안쪽은 우리 영토이니 더 이상 넘어오지 말라는 선언적 의미도 컸을 것이란 해석이다. 가장 대표적인 장성 관광지인 산해관의 경우 북쪽을 관외, 베이징이 있는 남쪽을 관내라 불렀던 것도 실질적인 영역을 그렇게 그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실로 만리장성은 중원과 변방을 가르는 경계선이자 관내의 농경문화, 관외 곧 변방의 유목문화 지역을 가르는 문화적 경계선의 역할도 했다.

베이징의 봄은 위도가 서울보다 사뭇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서울보다 빠른 것 같다. 서울은 쌀쌀했는데 여기는 해발 600m가 넘는데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베이징은 서쪽 태항산맥과 동쪽 연산산맥이 만나 이룬 깔때기 같은 지형 아래쪽에 자리 잡았어요. 남사면의 우묵한 곳이어서 여름엔 섭씨 40도까지 올라간답니다.”

570년 세월에도 옛 모습 거의 그대로
우리는 재킷을 벗어 배낭에 넣고 양 사장이 인도하는 대로 서쪽으로 성벽을 걸었다. 군데군데 허물어져가고 있기는 했지만 근대이후 한 번도 유지보수를 하지 않았다는 성벽치고는 놀라울 만큼 상태가 멀쩡했다. 성벽은 크게 두 가지 재료를 썼다. 자연석을 큼직하게 다듬은 것은 성벽의 하부, 즉 성체(城體)에 주로 썼고 벽돌처럼 구운 것으로는 여장(女墻·성가퀴·성벽 상부의 야트막한 담장)을 두 줄로 쌓는 데 썼다. 하얀 회 같은 것을 모르타르 삼아 성벽을 쌓았는데, 횟가루와 찹쌀가루를 섞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점착도가 시멘트 모르타르 못지않아, 500년 넘는 세월이 지난 뒤임에도 성벽은 굳건했다. 

1 허물어진 산성벽 위를 걷는 트레커들. 2 조망 좋은 성루 위에 올라 환호하고 있는 트레커들. 3 허물어져가고 있는 전구장성의 성루.

이 기나긴 장성을 쌓고 또 그것을 유지보수하는 데도 엄청난 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명나라는 징집한 이들이 아예 산성 아래에 마을을 이루고 살도록 했다. 만리장성 양쪽 골짜기 곳곳에 지금껏 집성촌들이 여럿 형성돼 있는 이유다.

전체적으로 보아 산세가 가파르고 험하기는 외려 베이징 쪽, 그러니까 남쪽이 더했다. 하긴, 산이 오로지 북쪽만 험할 리는 없는 것이다.

산성벽이 없다 해도 이곳 전구장성 일대는 빼어난 산세만으로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리고, 옛 사람들이 산성을 쌓아두지 않았다면 이곳 전구장성 일대의 산릉을 탐승하는 것 자체부터가 적잖은 모험이었을 것이다. 산릉은 곳곳이 그만큼 가팔랐고, 그 산릉을 따라 쌓은 산성벽의 어떤 구간은 그야말로 코가 닿을 것처럼 급경사다.

몸을 숨기고 밖으로 활을 쏠 수 있게끔 요철을 준 성벽은 오랜 세월과 더불어 군데군데 허물어지기도 하며 이윽고 정형에서 벗어나 자연과 닮은 자연스런 굴곡을 보인다. 걷다가 성가퀴에 기대어 쉬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태어지며 봄날의 전구장성은 절박했던 전장의 기운을 완벽히 거두어낸다. 그것은 이제 전쟁과 갈등의 유물이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룬 조형물로 존재할 뿐이다.

홍예문의 형식으로 통로를 연결한 성루 속을 지난다. 천장이나 벽체가 일부 허물어져 바닥에 여러 모양의 성돌이 어지러이 널려 있다. 부서진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500여 년 전 그때 얼마나 야무지게 구웠던지 여전히 멀쩡하여 다시 집을 짓는 데에 써도 되겠다 싶다.

전제(天梯), 곧 하늘다리라 이름한 구간을 오르는 취재팀. 종종 사고가 나는 곳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성루를 빠져 나오자 문득 고요가 감돈다. 일행은 저만치 앞서간 뒤이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고요 속에 잠기자 옛 장성이 무어라 말을 걸어온다. 그 뜻은 쉽사리 알길 없다. 저 유럽인 부부는 무슨 속삭임엔가 이끌렸던 것일까. 남들은 그냥 지나쳐 갔던 성루 뒤의 높은 망루에 올라 미동도 없이 먼 산릉을 바라보고 있다.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어렸을 이 기나긴 장성의 570년 세월에서 실제로 전투가 벌어졌던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고 한다.

연한 갈색의 수목 무리 가운데를 따라 늘어선 암갈색이거나 연회색인 산성벽은 자연스레 자연의 일부처럼 어울렸다. 이제 신록이 돋으면 장성의 선은 돋을새김으로 선명히 드러날 것이다.

급경사 하늘사다리에서는 극도로 조심해야
가파른 내리막을 성벽의 덮개를 잡으며 조심스레 내려간다. 허물어진 계단 밑의 단층을 보니 잡석과 진흙이 번갈아 한 겹씩 깔렸다. 계단의 아래까지 이렇게 정성들여 쌓았기에 장구한 세월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성벽 왼쪽, 그러니까 베이징 쪽으로 널찍한 공터를 이룬 숲지대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푼다. 양 사장은 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이 지는 곳으로 시간상이나 거리상으로 딱 점심자리로 안성맞춤이라며 자랑스러워한다. 그는 손님들을 제대로 모시기 위해 숱하게 이곳을 답사했던 것이다.

하산지점인 서책자마을에서 만난 중국인 촌로.

성벽을 가로질러 또한 높직하게 벽을 쌓아둔 곳도 있다. 아마도 이 위쪽은 만약의 경우 최후의 저항을 위해 만든 보루였을 것이다. 낮게 허물어진 곳 사이로 올라서는 데도 성돌을 예닐곱 개 겹쳐 쌓아둔 위태로운 발디딤을 디뎌야 한다. 여자들은 손을 잡아주어서도 어렵게 힘들게 올랐다.

이윽고 코가 닿을 듯 가파르다는 그 계단길 구간에 다다랐다. 천제(天梯), 곧 하늘사다리라 부르는 곳이다. 가파른 경사에 축성하다 보니 단의 높이에 비해 폭은 발 하나도 제대로 올려놓기 어려울 만큼 좁다. 베이징을 출발하며 서 이사가 “어떤 데는 70~80도는 된다”고 했을 때 내심 피식 비웃었는데, 사실이었다. 우회로를 따르지 않고 그 가파른 구간에 직접 붙었던 이들은 여지없이 두 손을 동원하고도 공포스런 등행을 해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여기서는 사고도 적잖이 나고 있다. 베이징 적십자사의 ‘2010 중국 아웃도어 사고 보고’에 의하면 2010년 한 해 동안 베이징에서 안전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이 바로 이곳 전구장성이다. ‘베이징 주변지역 전체 사고 26건 중 6건을 차지, 가장 조심해야 할 곳으로 드러났다’고 밝히고 있다.

급경사 계단 구간을 지난 뒤 또 하나의 허물어져 가는 커다란 진지를 지난 뒤 이제 옛 산성도 지겹다 싶어진다. 비가 올 때 비닐만 씌우면 곧 대피처가 될 수 있게끔 팔뚝 굵기의 통나무로 뼈대를 엮어둔 쉼터에 곧 다다랐다. 이즈음에서 양걸석 사장은 하산을 선언한다. 그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에서 그만 물리는지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저 위 성루를 지나고 산봉을 넘어 삼각파도 형상으로 솟구친 무수한 산봉들의 어느 선인가를 따라 장성은 끊임없이 달리고 있다. 이곳을 지나 좀더 가면 응비도앙(鷹飛倒仰), 곧 매가 날아오르다가 부딪쳐 떨어졌다는 높디높은 망루도 있는 등, 길이 더 험해진다. 

허물어진 성벽 밑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 급경사 구간에 쌓인 성벽은 상대적으로 빨리 훼손되었다.

쉼터에서는 강한 억양의 독일어를 쓰는 유럽인 예닐곱 명이 앉아 쉬고 있다. 옆의 장사치는 우리가 다다르자 스티로폼 박스를 열어 마실 것들을 내보인다. 한눈에 산행에 중독된 것이 분명해 뵈는 무술인처럼 탄탄한 중국인 두 사람이 우리 일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길을 잇는다. 그들은 순식간에 가파른 계단을 올라 성루 뒤로 사라졌다. 저런 장성 타기 마니아들이 적지 않다고 서 이사는 말한다.

잡담을 나누며 하산길에 접어든 지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산골 마을이 나선다. 출발점에서 머지않은 곳인, 서책자촌(西柵子村)이라는 마을이다. 모택동모자를 쓴 순하디 순하게 생긴 마을 노인이 뵈자 너도나도 그와 더불어 기념사진을 찍는다. 오래지 않아 중국에서도 이런 순박한 표정의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워질지 모른다. 마을 한쪽에서는 관광객을 맞을 숙소를 짓노라 포크레인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트레킹 길잡이
안내판, 표지 없어 가이드 필요
전구장성은 베이징에서 직선거리로 약 70km 북쪽에 위치한다. 차량으로는 산행 시작지점까지 약 2시간 걸린다.

트레킹은 장성의 구간을 끊기 나름이지만 4~5시간 정도 걷고 끝내는 것이 적당하다. 성벽 위엔 그늘이 거의 없으므로 차양 모자, 긴팔 상의 등이 필수다. 식수도 잘 챙겨간다. 봄가을로 건조 상태에 따라 산행을 통제하기도 하고, 안내판이나 표지가 전무하므로 경험자가 동행하는 것이 좋다. 산악투어(02-730-7227) 등, 중국 명산 전문 여행사의 상품을 이용하는 것이 무난하다.

날짜가 넉넉하고 여러 명이 어울려 갈 때는 진천페리로 톈진 경유 베이징까지 가서 트레킹을 마친 뒤 귀로에 베이징→인천 항공편을 이용하면 한결 낭만적인 여정이 될 것이다.

진천페리 5인실
진천페리 1991년 한·중 합작으로 설립된 카훼리 운항선사로서, 주 2회 인천~톈진을 왕복한다. 이 항로에 운항되는 천인호는 길이 186m, 총톤수 2만6,463톤으로 여객정원 800명인 카페리선이다. 선내에 면세점을 비롯해 여러 편의시설이 있다. 인천~톈진 간 25시간 정도 운항하므로 책이나 음악 등으로 여유로이 시간을 보낼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5인 가족의 경우 디럭스 5인실 같은 것을 예매하는 등, 일행 수에 따라 독립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여러 모로 편하다. 취재팀이 가던 날 중국인 관광객들로 번잡스러웠어도 최상층의 수면실은 한국 찜질방식 분위기로 넓고 쾌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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