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봉산자연휴양림~천왕봉~계관봉~감투산~원통재 8.3km
“함양에 사람이 안 난다.”
한경택 함양군의회 사무과장의 설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함양 토박이인 그는 병곡면장으로 있으며 직접 등산로를 정비한 대봉산 전문가다. 원래 대봉산은 괘관산이라 불렸다. 걸 괘(掛)자에 갓 관(冠)자를 쓰는 괘관산은 ‘갓걸이산’ 이라는 뜻을 가졌다. 옛날 천지개벽이 일어났을 때 산 정상의 바위지대에 갓을 걸어둘 만큼만 남고 모두 물에 잠겨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함양군은 괘관산이란 이름이 의관을 걸어놓고 쉰다는 의미로 볼 수 있어 함양에 큰 인물이 나지 않는다고 판단, 대봉산으로 개명했다. 대통령 같은 큰 인물이 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큰 봉황의 산이라 이름을 바꾼 것이다. ‘대봉산’은 2009년 국토지리정보원 승인을 받아 공식 지명이 되었다.
함양으로 말하자면 지리산, 황석산, 거망산, 기백산, 금원산, 남덕유산 등 명산으로 손꼽히는 큰 산이 널려 있다. 그럼에도 알려지지 않은 대봉산에 신경을 쓰는 건 함양의 진산이기 때문이다. 함양 주민조차 이 산을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대봉산은 함양읍내의 바로 뒤에 솟아 북쪽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풍수지리상의 진산이다.
대봉산은 두 개의 큰 봉우리가 있는데 두 봉우리 역시 이름을 바꿨다. 괘관봉이라 불리던 정상은 걸 괘(掛)에서 닭 계(鷄)로 바꿔 계관봉이라 하고, 천황봉은 천왕봉으로 개명했다. 산행은 보통 원통재에서 시작해 능선 종주하여 계관봉과 천왕봉을 거쳐 휴양림으로 하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은 대봉산자연휴양림을 들머리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휴양림에서 1박 후 바로 산행을 시작할 수 있는 점 외에도 천왕봉까지 최단거리이며 오름길도 완만해 산행이 수월하다. 반면 원통재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오르막이 길고 초반 볼거리가 없어 상대적으로 산행이 힘들다.
고귀한 뜻의 봉황 닮은 산
산행 시작부터 감동이다. 들머리인 대봉산 생태숲에서 지리산이 보인다. 파란 하늘과 신비로운 운해, 산뜻한 코스모스, 부드러운 억새가 조연을 자처해 지리산의 장엄함을 완성한다. 의외다. 알려지지 않은 산이 시작부터 이렇게 감미로워도 되는지 놀랍다. 시작만 화려한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은 몇 발짝 안 가 깨진다. 억새와 나무가 섞인 부드러운 잔디밭길 앞에 백자처럼 티 없이 빛나는 바위가 능선에 버티고 있다.
항아리처럼 부드럽게 튀어나온 바위는 산을 올라갈수록 잘난 맵시를 뽐낸다. 잔디가 깔려 디딤이 편한 산길에는 억새며 구절초가 피어 가을 산행의 진수를 보여준다. 오르막을 오르다 잠깐 서서 뒤돌아보면 언제든 운해가 깔린 지리산 줄기가 현실의 풍경이 아닌 것 마냥 신비롭게 펼쳐진다. 걸음걸음이 달콤해 최대한 느리게 걷고 싶은 즐거운 오르막이다. 동행한 나인숙씨와 대봉산자연휴양림 직원 김진택씨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하다. 나인숙씨는 OBK(Outward Bound Korea)를 비롯한 여러 산악단체에서 객원 등산강사를 맡고 있다. 산에 가는 것이 일이지만 산에 가는 것이 가장 즐겁다는 산 아가씨다.
오르막은 조금씩 높아지지만 경치의 감미로움은 줄지 않는다. 알록달록 곱게 물든 단풍이 터널을 이루고 발밑을 수놓았다. 산행 시작 40분 만에 경치 좋은 바위다. 발아래엔 색동저고리를 입은 산자락의 겹쳐짐이 화려하다. 해발고도는 1,103m이다. 40분 만에 고도를 쑥 끌어올린 건 생태숲 콘크리트도로 덕분이다. 산길이 시작되는 들머리의 고도가 783m다.
천왕봉이 멀지 않다. 올려다 뵈던 큰 바위가 눈앞이다. 억새와 철쭉 덕분에 시야가 뻥 트였다. 봄이 되면 봉황이 날아오르듯 화려한 날갯짓의 철쭉이 천왕봉을 가득 메울 것이다. 앙상한 철쭉 터널을 지나 두꺼비 배처럼 불룩 튀어나온 천왕봉 꼭대기에 선다. 지리산 천왕봉이 부럽지 않은 전망대다. 파노라마로 뚫려 있어 묵은 도시의 체증이 싹 가신다. 파노라마로 트여 있다 해서 모두 명품 전망대는 아니다. 경치에도 급이 있다. 지리산, 장안산, 백운산, 황석산, 거망산 등 대형 명산들로 꽉 찬 이런 경치를 두고 명품 전망대라 할 만하다. 시선을 사로잡는 건 가야 할 계관봉, 즉 대봉산 정상이다. 닭벼슬 아니 봉황의 벼슬처럼 흰 바위가 능선을 따라 돋아 있어 거친 매력으로 발길을 설레게 한다.
천왕봉 주변에는 범상찮은 돌탑이 여럿 보인다. 등산객들이 어설프게 쌓은 것이 아닌 예사롭지 않은 기술과 정성이 보이는 돌탑들이다. 한경택 사무과장은 일주일에 몇 번씩 오를 정도로 천왕봉을 자주 찾지만 돌탑을 세운 이를 한 번도 보지 못해 자신도 누가 세웠는지 궁금하다고 한다.
급경사를 내려서자 지소마을 갈림길이다. 계관봉 가는 길, 누구나 멈춰 기념사진을 찍는 명물 나무가 있다. 보호수 비석까지 있어 평범한 나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수령이 1,000년에 이른다는 천년철쭉이다. 천왕봉의 철쭉과 달리 절벽 바위 사이에 뿌리를 내렸다. 메두사의 머리처럼 살아 꿈틀거리는 묘한 폼으로 가지를 뻗었다. 벼랑 끝에서 추락의 공포와 찬바람을 견뎌내고 척박한 바위 틈에서 살아남은 천년철쭉. 역경 속에 봉황 같은 인물이 난다고 이야기한다.
계관봉 암릉구간 입구에 정상 표지석이 있다. 정상이 아닌 곳에 정상 표지석이 있는 건, 바위 구간을 가기 힘든 이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봉황의 머리에 오른다. 불끈불끈 힘이 넘치는 바위지만 오르내림이 위험한 정도는 아니다. 적당히 부여잡고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바위 꼭대기, 실제 정상에는 삼각점과 압도적인 경치가 기다리고 있다. 발아래 절벽, 분지처럼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푹 패인 북쪽 산 뒷면의 결을 따라 시선이 흐른다. 황석산과 거망산이 더 가깝게 보인다. 능선을 따라 눈길을 두면 정상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리는 용의 등골 같은 암릉 줄기가 매력적이다. 용의 등골에서도 뿔처럼 불쑥 솟은 봉우리가 내중산이다. 바위능선으로 이어진 길에 표지기가 여럿 달린 걸로 보아 산행 재미가 쏠쏠할 듯하다.
하지만 계획대로 주능선으로 돌아가 원통재로 이어간다. 태양열 안테나를 지나자 능선은 스프링보드를 박차고 올랐다 수면으로 떨어지는 다이버처럼 곡선을 그리며 고도를 낮춘다. 고도를 내리기 직전 철쭉군락이 펼쳐져 가야 할 산줄기가 속 시원히 보인다.
지금껏 호텔에서 화려한 코스요리를 먹었다면 이젠 시장에서 먹는 국밥처럼 구수하고 소박한 산행이다. 트인 경치 없는 신갈나무 숲길의 오르내림에 몸을 맡긴다. 지소마을로 이어진 갈림길 안부와 헬기장이 여럿 이어진다. 마지막 봉우리인 감투산에서 호흡을 정리하고 원통재로 내려선다. 원통재는 빼빼령이라고 하며 빼빼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 이곳에 중국 사람이 살았다고 해서 유래한다. 백전면 북쪽에 있는 고개라서 북(北)의 중국 발음인 ‘빼이’를 붙여 그리 불렀다고 한다. 괘관산에서 이름을 바꾼 함양의 진산 대봉산. 수려한 경치가 고귀한 뜻을 지닌 봉황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