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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해외원정 | 힘중 세계 초등정] 치영은 웃었고 나는 괴성을 질러댔다

글·사진 김창호 몽벨 자문위원, 월간山 기획위원
  • 입력 2012.12.2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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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히말라야의 미등정봉
힘중(7,140m) 세계 초등정

힘중 남서벽 두 번째 피치에서 고난이도 드라이툴링 등반을 하는 안치영 대원. 암질은 캠과 피톤을 설치하기에 적절했다.
힘중 남서벽 두 번째 피치에서 고난이도 드라이툴링 등반을 하는 안치영 대원. 암질은 캠과 피톤을 설치하기에 적절했다.

20여 년 전 파키스탄의 그레이트 트랑고타워로 첫 히말라야 등반을 떠날 때에 가졌던 마음으로 돌아가 보고 싶었다. 특히 올해는 한국이 히말라야에 진출한 지 50주년 되는 해라 좀더 모험적인 등반을 해보고 싶었다. 힘중(Himjung·7,140m)으로 갔다.

도대체 힘중이라는 봉우리는 어디에?

힘중으로 가는 길은 나침반과 같이 옳은 방향을 가리켜줄 산의 위치나 정확한 지도, 그리고 과거에 시도했던 어떤 등반 자료도 없었다. 다만 2009년 봄시즌 마나슬루를 등정하고 정상 근처에서 북쪽으로 찍은 페리 히말(Peri Himal)산군의 파노라마 사진과 2002년 네팔 정부가 세계 산의 해를 기념해 새롭게 개방한 산봉목록에 ‘힘중(Himjung 7,140m)’이라는 봉우리의 경위도로 파노라마 사진에 찍힌 페리 히말의 7~8개 봉우리 중에 하나일 거라는 기대감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구글 어스에는 이미 등정된 힘룽 히말(Himlung Himal·7,126m), 넴중(Nemjung·7,139m), 갸지캉(Gyajikang·7,038m) 등만 나타나고, 미국산악협회가 발행한 아메리칸알파인저널(THE AMERICAN ALPINE JOURNAL) 2002년 판에는 ‘Himjung (Nemjung) 7,140m’라 분석해 네팔 정부가 힘중을 넴중으로 잘못 판단해 공시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는 듯했다.

베이스캠프 (4,880m)에서 힘중의 남서벽까지는 직선거리로 8㎞, 걷는 거리로는 12㎞는 족히 넘을 것이며 해발고도는 1,200m를 올려야 한다.
베이스캠프 (4,880m)에서 힘중의 남서벽까지는 직선거리로 8㎞, 걷는 거리로는 12㎞는 족히 넘을 것이며 해발고도는 1,200m를 올려야 한다.

그리고 내가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작업의 마지막은 네팔에 상주하며 네팔 히말라야의 원정등반 정보를 수집·자료화하는 엘리자베스 홀리(Miss Elizabeth Hawley)의 히말라얀 데이터베이스(The Himalayan database)였다. 다행히 약간의 정보가 있었다. 그 위치는 힘룽 히말의 남쪽에 있고 넴중 고트(Nemjung Goth)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며 2008년 업데이트된 지도에는 힘룽 히말과 넴중 사이에 위치를 찍고 있었다. 한 가닥 희망이 보였다. 그러나 홀리의 데이터에도 오류는 다수 있기 때문에 100% 신뢰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독일 카라코룸 연구 논문집 발행에 자료를 제공했던 나는 히말라야 등반 연대기 기록자 볼프강 헤첼(Wolfgang Heichel)에게 자문을 구했고 그는 독일에서 발행된 지도(1:50,000 Nepalese Map, Phuga´u Ghomion)와 1992년 홋카이도대학팀(Academic Alpine Club of Hokkaido·AACH)이 힘룽 히말을 초등정한 보고서에 등록된 지도를 동봉하며 그 지도상에 ‘7,098’ 봉우리가 힘중이 아닐까 생각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카라코룸이 아닌 히말라야는 자신의 연구 전문분야가 아니라며 조심스러워했다. 그렇다면 페리 히말의 7,000m급 5개 봉우리 중에 4개 봉을 초등정한 일본에서 답을 구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암과설(ROCK&SNOW magazine)>의 히로시 하기와라(Hiroshi Hagiwara·萩原浩司) 편집장에게서 회신이 왔다. 하기와라는 1993년 암과설 별책판(岩と雪 別冊版 1993, pp64~65)에 실린 홋카이도대학팀의 힘룽 히말 원정대 자료를 동봉하며 사진 상에 ‘NAMELESS’로 표기된 봉우리일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며 정확하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또 그는 엘리자베스 홀리의 데이터에 힘중을 등반했다고 등록된 유일한 일본원정대에 관해서도 수정된 자료를 보내왔다. 그 일본원정대는 힘룽 히말 북서릉을 등반했고 아유무 노자와이(Ayumu Nozawai) 대장이 6,100m에서 눈사태로 사망해 등반을 끝냈다고 했다. 그 이상의 정보는 일본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세계 산악계의 히말라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았고 최근 네팔에서 발행된 지도에 7,092m의 봉우리가 힘중일 것이라는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졌다. 그런데 왜 네팔 정부는 7,140m로 개방 봉우리 목록에 기재했을까? 우리가 등정하면 세계 초등정을 주장해도 될까? 하나가 해결되면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팡리 빙하 중단부로 오르는 장벽, 중앙의 바위 홈통 쿨와르가 빙벽으로 변해서 쉬운 접근로를 만들어 주었다.
팡리 빙하 중단부로 오르는 장벽, 중앙의 바위 홈통 쿨와르가 빙벽으로 변해서 쉬운 접근로를 만들어 주었다.

정해지지 않은 베이스캠프 자리

책상 위에서의 탐험으로 3년이 후딱 지나갔다. 통상 이러한 초등정 원정대는 한 해 전에 현지 정찰을 하는 게 상례지만 우리는 등반하며 현장 답사를 하기로 했다. 자일파트너로 안치영(봔트클럽·한국산악회·35)을 초청했다. 그는 새로운 루트 개척을 추구해 2005년 로부제 서봉(6,145m)의 남서벽, 2009년 중국 그로스베너(6,376m)의 북벽에 새로운 길을 냈고, 올해 키르기스스탄 악사이산군 테케토르(4,441m) 북동벽에 신 루트를 개척했다. 무엇보다 2006년 동계시즌 로체 남벽 등반에서 8,200m까지 올라 국내 산악계에서 여러 번 시도되었던 남벽에서 최고 도달지점에 오른 고산거벽 등반가였다. 우리는 히말라야 등반을 함께한 적은 없지만 치영이의 뛰어난 고산 등반 잠재력을 믿었다.

원정대는 단 두 명. 개인 의류와 등반 장비를 꾸린 카고백 하나씩을 가지고 9월 20일 출국했다. 일제 알파미 20인분과 에너지파우더 10인분을 포함해 8kg의 음식을 한국에서 현지로 가져갔다. 베이스캠프와 등반에 필요한 기타 장비와 식량은 카트만두에서, 그리고 캐러밴 도중에 마을에서 조달하기로 해 작은 규모로 꾸렸다. 총 450kg의 물량을 7마리의 당나귀로 나르기로 하고, 베이스캠프 고용인으로 치링 보테를 쿡으로, 텐징 파상을 키친보이로 고용했다. 치링은 6년째 나와 파트너가 되었다.

상행 캐러밴 이틀째 구룽(Gurung)족 마을인 다라파니(Dharapani) 로지에 묵었다. 이날 저녁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락파 소남 셰르파(Lhakpa Sonam Sherpa)를 만났다. 락파의 고향은 원래 쿰부 히말의 팍딩인데 몇 년 전 힘룽 히말 원정대의 고소등반 포터로 고용된 적이 있었다. 그때 푸마을(Phoo Gaon·4,100m) 처녀와 눈이 맞아 결혼한 20대의 셰르파족이었다.

세 번째 피치는 바위 사이의 빙벽을 이용해 올랐다. 우리는 무게가 가벼운 7㎜×50m 다이니마 1동과 6㎜×50m 케블라 1동을 사용했다.
세 번째 피치는 바위 사이의 빙벽을 이용해 올랐다. 우리는 무게가 가벼운 7㎜×50m 다이니마 1동과 6㎜×50m 케블라 1동을 사용했다.

에베레스트를 여러 번 등정한 경험이 있는 락파는 힘중을 설명하자 이름은 모르지만 자신도 그 봉우리를 보았다고 했고 우리가 예정했던 힘룽 히말의 베이스캠프로 가서는 등반하려는 봉우리로 접근이 어렵다고 했다. 그는 동충하초를 채취하러 힘중의 발치까지 가본 적이 있었고 우리의 베이스캠프는 예전에 일본대가 갸지캉을 등반할 때 설치했던 곳으로 택해야 한다고 했다. 캐러밴 루트의 바로 동쪽에 있는 마나슬루 북동면에서 9월 23일 눈사태로 11명이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코토(Koto·2,600m)에서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일을 벗어나 접어든 나르-푸계곡(Nar-Phoo Khola)은 신비로운 풍경을 보여주어 걷는 내내 즐거움을 더했다. 2002년부터 단체에게만 트레킹을 허가해 적은 트레커들로 한적함이 더했다. 컁(Kyang·3,840m)부터는 수목한계선으로 황량한 무스탕을 연상케 했고, 요새와 같이 절벽에 지어진 푸마을은 뭔지 모를 음험한 기운도 있었지만 원주민들은 친절했다.

직선으로 16km 길이, 평균 폭 1km의 팡리빙하(Pangri Glacier) 남측의 초원을 따라 4시간가량 올랐다. 평평한 초원의 끝자락에 뿌자(Puja)를 위한 초르텐이 하나 덩그러니 있는 모습이 예전에 베이스캠프(4,880m)로 사용되었음을 표시해 주고 있었다. 동쪽으로 정상부가 뾰족한 힘중의 자태에 가슴이 벅찼다. 캐러밴 7일째, 9월 29일이었다.

6피치. 건조한 빙벽은 쉽게 깨져 나갔다. 오른쪽으로 넴중 동벽이 보인다.
6피치. 건조한 빙벽은 쉽게 깨져 나갔다. 오른쪽으로 넴중 동벽이 보인다.

길고 복잡한 벽 밑까지의 접근

베이스캠프는 흠잡을 데 없는 쾌적한 자리였다. 다만 빙하까지 내려가 텐징이 물을 길어 오는 데 반시간이나 걸린다는 것을 빼고는. 베이스캠프 설치는 3시간 만에 끝났다. 우리가 등반을 떠나면 치링 혼자 베이스캠프를 지킨다는 것이 안타까워 그의 사촌동생 텐징을 붙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올해는 봄 윤달이 끼여 여름 계절풍 몬순은 20여 일 미뤄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만큼 출국 날짜를 늦췄고 캐러밴 내내 날씨는 좋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우리는 하루를 쉬고 곧 바로 등반을 속개했다.

빙퇴석의 팡리빙하로 내려섰다. 힘중의 발치까지는 직선거리로 8km, 걷는 거리로는 12km는 족히 넘을 것이며 해발고도는 1,200m를 올려야 한다. 이번 등반의 최대 관건이자 미로와 같은 접근로를 얼마나 잘 찾아가느냐가 중요했다. 자칫하면 과거에 넴중 서릉을 시도했던 팀들처럼 봉우리에 접근하지 못할 수도 있다.

팡리빙하를 북측으로 건너자 모레인 언덕과 산사면 사이로 운행 속도를 낼 적당한 길을 찾았다. 두 시간을 올라 길이 험해지자 빙하 중앙의 평평한 얼음지대로 들어섰다. 한 시간을 더 걷자 빙하 하단부가 끝났다. 중단부로 오르는 루트는 좌측의 낙석이 있는 모레인 흙 절벽, 우측의 아이스폴 지대, 그리고 중앙의 바위 절벽 사이의 쿨와르였다.

이 부분을 위해 가지고 온 체인 아이젠을 트레킹 중등산화에 착용하고 얼어붙은 100여 m의 좁은 바위 홈통을 올랐다. 그러나 물이 쏟아지는 5m 높이의 폭포에 막혔다. 다음 운행에는 2~3시간 돌아가는 우측의 아이스폴을 시도해 보자고 치영과 얘기를 나누고 발길을 돌렸다. 하산은 다른 길인 팡리 빙하의 남쪽으로 내려왔지만 북측보다 길이 험했다.

남서벽 등반 도중 유일하게 비박지(6,770m)를 제공해 준 얼음 동굴. 침낭 하나로 버틴 밤은 추웠다.
남서벽 등반 도중 유일하게 비박지(6,770m)를 제공해 준 얼음 동굴. 침낭 하나로 버틴 밤은 추웠다.

남서벽으로 등반루트 선택

라마제를 올리고 10월 4일 등반 장비와 비박 장비를 챙겨 운행을 나섰다. 이번에는 힘중 발치까지 가서 꼭 등반루트를 살펴야 한다. 빙하 중단부로 오르는 벽 앞에 섰다. 순간 우리는 놀랐다. 바위 홈통의 폭포가 그동안 기온이 내려가서 빙벽으로 변해 있었다. 한 피치의 아이스 클라이밍으로 150여m 길이의 홈통을 빠져나갔다. 정말이지 행운이었다. 중단부는 가파른 모레인의 빙퇴석과 빙하가 뒤틀리면서 만들어진 위험성이 없는 크레바스 지대로 인내를 시험했다. 오후 4시 남서벽 밑까지 얼마 남지 않은 곳에 텐트를 치고 비박했다.

다음날 2시간을 더 올라 크레바스를 건너 팡리빙하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날씨는 좋았다. 등반 가능한 두 개의 루트를 찬찬히 살폈다. 남서릉은 넴중과 힘중 사이의 6,400m 안부로 올라 바위의 능선을 타고 가는 등반선이다. 구글 어스에서 본 것과는 달리 리지의 중간까지 톱니 같은 암릉이라 오르는 것도 문제겠지만 하산도 어려워 보였다. 또한 등반거리가 길다는 단점도 있었다.

10월 12일 오전 9시5분경, 치영과 나는 칼날 설릉의 힘중 정상에 말 타는 자세로 걸터앉았다.
10월 12일 오전 9시5분경, 치영과 나는 칼날 설릉의 힘중 정상에 말 타는 자세로 걸터앉았다.

남서벽은 3분의 2까지는 두드러진 바위 스퍼와 얼음능선으로 형성돼 행여 있을 낙석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해 보였고, 6,500m대에 매달린 세락 밑에 비박사이트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이 루트에 시선을 고정했다. 크레바스 사이에 얼음 물 웅덩이가 있는 곳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 머물고 다음날 하산했다.

원정대장이랄 것도 없는 2명의 팀이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부담감은 컸다. 국내에서 휴대한 위성전화기가 불통이어서 네팔 대행사에서 하나를 빌렸는데 이것마저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한국에 연락을 못 한 지 10여 일이 넘어가는 상황인지라 속이 탔다. 그런데 베이스캠프에 또 다른 문제가 터졌다. 우리가 없는 사이 어찌된 일인지 솔라패널 축전지가 고장이 났다. 위성전화기, 무전기, 컴퓨터 등 모든 전자기기는 무용지물이 될 판이었다.

다음날 푸마을로 치링과 함께 내려갔다. 카트만두로 연락을 취한 결과 위성전화기는 심카드 번호를 잘못 알려줬기 때문에 생긴 소동이었다. 마을에 설치된 솔라패널로 충전을 대신했다. 욱하고 치밀어 올랐지만 그냥 웃어 넘겼다. 이번 원정기간 동안 현지 고용인들이 혹 실수를 하더라도 화난 얼굴을 보이지 않기로 한 것은 치영과 지키기로 한 몇 가지 항목 중에 하나였다.

다음날은 치영과 텐징이 마을에 다녀왔다. 베이스캠프 남쪽 갸지캉 사면으로 5,500m까지 올라 힘중 남서벽을 400mm 렌즈로 촬영했다. 이 사진을 컴퓨터에서 확대해 벽 밑에서 관찰하지 못했던 정상부의 상태와 적당한 비박지를 찾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벽상 비박지를 떠나 가파른 설·빙벽을 연등으로 빠르게 올려쳤다. 뒤는 넴중이다.
벽상 비박지를 떠나 가파른 설·빙벽을 연등으로 빠르게 올려쳤다. 뒤는 넴중이다.

남서벽을 통해 3일간의 등반으로 힘중 등정

아침마다 치영이가 원두를 갈아 만든 드립 커피의 향으로 보낸 3일간의 휴식 후, 우리는 10월 9일 본 등반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받은 일기예보는 제트기류의 영향으로 7,000m대에는 최대 풍속 100km의 강풍이 불고 가끔 싸락눈이 내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며칠간 기다려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는 조언을 뒤로하고 밀어붙이기로 했다. 지금 베이스캠프의 여건이 두 번의 기회는 없을 듯했다. 에베레스트 원정대도 등반에 나서지 못하고 베이스캠프에 머무른다고 했다.

이날 우리는 오후 2시경 벽 밑 비박지에 도착했다. 2009년 일본 넴중 서벽 원정대는 이틀이 소요된 비슷한 거리였다. 계획은 텐트를 설치하고 세 피치 정도를 등반하려 했지만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7,500m 상공에 제트기류가 만들어 내는 이상한 구름이 날렸고 강풍에 눈이 내렸다. 등반은 접고 텐트에서 휴식을 취했다. 밤사이 텐트 문을 열어 2시간마다 날씨를 확인했으나 출발할 수 없었다.

10일 오전 10시경 바람이 잦아들어 등반을 서둘렀다. 설사면을 올라 치영의 선등으로 오버행이 섞인 첫 피치를 올랐다. 두 번째 피치 또한 바위 틈새에 눈이 낀 암벽등반이었고, 세 번째 피치는 암벽 사이의 빙벽을 타고 올랐다. 암질은 캠과 피톤을 설치하기에 적절했다. 오후 2시 다시 바람이 세지고 구름이 차올라 비박지로 하강했다.

11일 아침 6시에 출발했다. 치영의 선등으로 3피치까지 오르고 등반을 이어나갔다. 하단부 벽의 평균 경사는 80도 정도였고, 4~6피치는 바위 사이의 청빙구간이었다. 우리는 무게가 가벼운 7mm×50m 다이니마 1동과 6mm×50m 케블라 1동을 사용했다.

힘중 등반루트 개념도.
힘중 등반루트 개념도.

등반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확보는 암각에 슬링을 걸거나 피톤을 박았고 후등자가 회수해 올랐다. 7피치 믹스지대를 오르자 왼쪽에 촛대 바위와 같은 높이가 되었다. 12피치까지는 때로 둘이 연등을 하기도 하며 세락을 보고 등반했다. 13번째 피치를 등반할 때 힘중의 동봉 근처에서 떨어진 낙석의 무더기가 치영을 빗겨 떨어져 안도의 숨을 내 쉬게 했다.

도착한 세락 밑은 비박지가 없었다. 이어지는 14피치 빙벽, 15피치 빙벽 등반으로 경사가 수그러든 눈사면에 도착했다. 멀리 얼음 틈새가 벌어져 있었다. 300여 m를 연등으로 올라 6,770m 얼음 동굴의 가장자리를 깎아 900g 무게의 텐트를 설치했다. 그리고 텐트에 들어가 무게 때문에 반토막으로 자른 매트리스를 등에 깔고 다리는 배낭 위에 올려놓았다. 침낭도 하나만 가져왔기에 둘이 발만 넣고 덮었다. 텐트에 비친 태양빛은 따뜻했다. 남쪽으로 펼쳐지는 마나슬루에서 안나푸르나, 다울라기리까지의 연봉은 아름다웠다.

누워서 잘 수 있는 사이트가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지만 영하 22℃ 아래로 떨어진 밤 기온은 서로의 따뜻한 체온으로도 녹이지 못했다. 추웠다. 밤새 뒤척였다. 내가 움직이면 치영도 어쩔 수없이 자세를 바꾸어야 했다.

새벽 5시경 일어나 따뜻한 물에 에너지파우더를 타서 마시고 초코바 하나를 반씩 나눠먹고 출발했다. 고소내의, 보온 셔츠, 우모패딩 재킷, 윈드 재킷 순으로 입은 옷은 역동적인 클라이밍을 위해서는 좋았지만 보온에는 부족했다. 50m 줄을 반으로 접어 내가 앞장서고 치영과 연등으로 설빙벽을 각자의 클라이밍으로 올랐다. 삼중화를 신은 발이 시리다. 얇은 등반화를 신은 치영의 발이 걱정됐다. 남서벽이라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속도를 높였다. 정상 능선으로 올라서기 전 직상해야 할 등반선을 벗어나 햇빛을 따라 왼쪽으로 비스듬히 올랐다. 능선 밑 바위벽에 숨어서 출발 후 첫 휴식을 취하며 햇빛을 만끽했다. 그리고 마지막 피치, 치영에게 선등을 맡겼다.

힘중 위치도
힘중 위치도

지도에 없는 잘 생긴 봉우리 하나 찾아내

10월 12일 오전 9시5분, 치영과 나는 칼날 설릉의 힘중 정상에 말 타는 자세로 걸터앉았다. 치영은 웃었고 나는 괴성을 질러댔다. 1962년 한국이 히말라야에 첫 진출한 이래 초등정한 7,000m급 8개 봉우리에 7,000m급 한 봉우리를 추가했다. 이번 등반은 원푸시 스타일(One-push Style)로 초등정한 첫 기록이었다.

정상에서 우리가 있는 정점 외에 페리 히말산군에는 7,000m급 봉우리가 없었다. 아쉬운 점은 GPS가 내장된 위성전화기를 휴대했으나 강풍으로 정상의 해발고도는 측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네팔 정부가 공시한 7,140m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기존 지도에 나오는 7,092m도 병행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이날 얼음 동굴의 비박지까지 클라이밍 다운하고 휴식 후 현수하강으로 벽 밑 비박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10월 13일, 4박5일간의 등반을 끝내고 베이스캠프에 돌아왔고, 다음날 푸마을로 철수했다. 이어 힘룽 히말 베이스캠프와 라트나 출리(Ratna Chuli·7,128m) 베이스캠프를 탐사해 네팔-티베트 국경 상에 지도에도 없는 약 6,800m 잘 생긴 봉우리 하나를 찾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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