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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김창호 8,000m급 14좌 무산소 완등 특집 | 등반역정] 탄탄한 등반 경험이 8,000m 14좌 무산소 완등 이끌다

글·한필석 부국장
  • 입력 2013.06.10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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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7,000m급 세계 초등 거쳐 14좌 완등에 이르기까지

2008년 로체 정상에 오른 김창호.
2008년 로체 정상에 오른 김창호.

김창호(金昌浩·44·서울시립대 OB·몽벨 자문위원)가 5월 20일 오전 9시경(현지 시각)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등정에 성공, 히말라야 8,000m급 14개 고봉 무산소 완등의 대업을 달성했다.

그의 기록이 돋보이는 것은 무엇보다 14개 고봉을 모두 인공 산소의 도움 없이 올랐기 때문이다. 14좌 완등자가 31명에 이르지만 무산소 완등자가 17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무산소 완등이 얼마나 어려운 등반 행위인지를 가늠케 한다. 그의 기록은 한국 최초임은 물론 아시아 최초이기도 하다. 14좌 완등 기록만 따지면 세계 30번째, 국내 5번째 기록이다(캉첸중가 등정 논란 중인 오은선 제외).

히말라야 등반에 ‘무산소 등정’이란 타이틀이 주어지는 해발 8,400m 이상의 고도는 공기 중 산소의 함유량이 5분의 1 이하로 떨어지는 ‘죽음의 지대’다. 때문에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K2(8,611m), 캉첸중가(8,563m), 로체(8,511m), 마칼루(8,463m) 등 8,400m를 넘어서는 고봉 등정은 14좌 등정 중에서도 몇 단계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김창호는 무산소 등정 타이틀이 더해지는 5개 고봉을 포함해 14개 고봉을 인공적인 산소의 도움 없이 등정에 성공했다.

1 2005년 낭가파르바트 원정.  / 2 2005년 낭가파르바트 등정시 찾아낸 메스너캡슐. / 3  2001년 힌두쿠시 탐사 때 설원에 앉은 김창호. / 4 2000년 카라코룸 탐사 때.
1 2005년 낭가파르바트 원정. / 2 2005년 낭가파르바트 등정시 찾아낸 메스너캡슐. / 3 2001년 힌두쿠시 탐사 때 설원에 앉은 김창호. / 4 2000년 카라코룸 탐사 때.
김창호가 앞서 14좌를 완등한 선배 산악인들과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면 산악계로부터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한 단계씩 체계적으로 난이도를 높이면서, 그 나름의 극한 등반을 펼쳐 왔다. 첫 해외 등반부터 유별났다.

2000년 이후 8차례 1,700여 일 동안 파키스탄 탐사

서울시립대 88학번(무역학과)인 그는 재학 중인 1993년 첫 해외원정에 나섰다. 카라코룸 히말라야의 대암탑 그레이트트랑고타워(6,284m)였다. 해발 6,000m를 조금 넘어서는 봉우리지만 당시 기라성 같은 클라이머도 선뜻 도전하지 못할 만큼 거대하고 위협적인 암봉이었다.

히말라야 등반에 경험 많은 산악인들로부터 출발 전부터 회의적인 평판을 받은 그 원정에서 예상대로 여러 차례 난관을 만났다. 설사면이 끝나고 벽등반이 시작되는 지점에 올려놓은 장비와 식량이 눈사태에 사라져버리는가 하면, 겨우 찾아낸 장비와 식량으로 시도한 벽 등반 닷새째 김창호는 설사면이 무너지면서 무려 80m나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그런데도 김창호는 포기하지 않고 등반을 강행, 끝내 목표를 달성한다. 
이렇게 모진 고통 속에서 등정에 성공하고 귀국했지만 그는 기쁨이 아닌 깊은 회의에 빠졌다. 등반 목표는 벽이었다. 그래서 벽 등반이 끝나는 지점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약 2피치 길이의 설사면을 오르지 않고 내려섰다. 그에 대한 주변 반응은 뜻밖에도 ‘등정 실패’였다. 무엇보다 선배들이 의혹 가득 찬 눈초리는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산악부와 1년간 인연을 끊고 지낼 만큼 큰 상처를 이겨내고 두 번째로 나선 해외원정 역시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에 남을 만큼 획기적인 도전이었다. 1996년 가셔브룸4봉(7,925m) 동벽 신 루트 등반이었다. 그 원정은 그 스스로 “확보 보고 있는 후배에게 너무도 잔혹한 행위였다”고 회고할 만큼 위험천만한 등반이었다.

5 2006년 오른 가셔브룸1봉 전경. / 6 2006년 가셔브룸1봉 정상. / 7  2006년 가셔브룸2봉 정상.
5 2006년 오른 가셔브룸1봉 전경. / 6 2006년 가셔브룸1봉 정상. / 7 2006년 가셔브룸2봉 정상.
김창호는 일본의 세계적인 암벽등반가인 야마노이 야쓰시의 등반 자료를 외우다시피 하고 철저히 분석했기에 등정을 자신했다. 예상대로 잘 진행되던 등반은 해발 7,250m 지점을 넘어서면서 난관이 거듭됐다. 크리스털처럼 단단한 바위는 하켄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렵사리 야마노이 야쓰시의 최고도달점을 지나 해발 7,450m 지점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후배에게 확보를 맡긴 다음 등반에 나섰다.

20m쯤 진행하자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발밑은 천길낭떠러지. 후퇴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는 곡예하듯 아슬아슬하게 몸을 움직여 후배에게 돌아갔다. 후배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눈물만 주룩주룩 흘렸다. 김창호가 추락하는 순간 줄을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런 결정을 해야 하는 후배로서는 너무도 힘겹고 무서운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날의 충격이 컸던 후배는 귀국하자마자 산악부를 탈퇴했다. 이날 이후 김창호는 생각을 바꿨다. 히말라야의 빙하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빳따’를 치고, 암벽을 시원찮게 오른다 싶으면 등반이 끝난 다음까지도 욕설을 퍼붓던 자신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 못마땅하면 얼차려를 주는 정도로 후배들에 대한 질책 방법을 바꾸었다, 1997년 가을, 산에만 미쳐 지내던 그에게 학생으로서는 최악의 형벌이 내려졌다. 제적. 등록금은 매번 냈지만 수업을 거의 듣지 않고 지내온 그를 학교 측으로서는 더 이상 못 본 체할 수 없었다. 그래도 김창호는 담담했다. 그에게 산은 인생의 전부였다. 오히려 단독등반에 몰입했다. 인수봉의 수많은 코스를 홀로 오르내리고, 설악산 적벽도 겁 없이 홀로 붙었다. 당시 그는 5.12급에 이를 만큼 수준 높은 등반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위험천만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잘 되던 기업도 파키스탄 열정에 접어

학교는 안 다녀도 그만이지만 산만 다닐 순 없었다. 선배 두 사람과 ‘윈스포코리아’라는 아웃도어·스키 유통업체를 창업했다. 기대 이상 잘 굴러갔다. 낮밤 가리지 않고 일해야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을 정도로 바빴다. 하지만 작은 업체를 셋이서 운영하자니 관리에 문제가 생겼다.

1 2006년 가셔브룸2봉 등정길. / 2 2006년 중국 티베트 탐사 때 원주민들과. / 3 2007년 K2 정상에 선 김창호, 김진태, 오은선(오른쪽부터). /
1 2006년 가셔브룸2봉 등정길. / 2 2006년 중국 티베트 탐사 때 원주민들과. / 3 2007년 K2 정상에 선 김창호, 김진태, 오은선(오른쪽부터). /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운영의 어려움이 회사 정리의 이유 중 하나지만 더 큰 까닭은 재학시절 두 차례의 원정에서 마음속 깊이 자리잡은 카라코룸 히말라야 탐험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가 잠이 오지 않을 때에는 지형도를 펼쳐놓고 ‘상상 탐험’에 나섰다. 그레이트트랑고타워를 등반할 때 발밑에 펼쳐졌던 빙하를 파고 들고 산봉을 건너뛰며 새로운 봉우리에 올라설 때마다 환희에 휩싸였다. ‘빙하 깊숙이 자리 잡은 마을 주민들은?’, ‘저 빙하 저 계곡은?’ 하는 궁금증이 꼬리를 물어 잠을 못 이룬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회사를 정리하자마자 파키스탄행을 결심했다. 학창시절 진저리칠 정도로 산에 다니는 것을 싫어하시던 노부모도 더 이상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곤 “제발 위험한 곳에만 가지 말라”는 단서를 달고 파키스탄행을 허락하셨다.

답사를 결정짓고 1999년 한 해 동안 방안에 틀어박혀 카라코룸에 대해 공부했다. 탐사 예정지의 지형도를 외우고 탐험 등반사를 외웠다. 파키스탄 히말라야 답사에 필수적인 언어 습득을 위해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7개 언어의 단어를 외우려 무진 애를 썼다.

시간 단축을 위해 단독 탐사를 결심했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겁이 났다. 2000년 여름 마침 영호남 원정대가 카라코룸 히말라야 깊숙이 솟아오른 K2를 등반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평소 친분이 있던 대원들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K2 캐러밴 기점이자 탐험 기점인 스카르두까지는 그럭저럭 원정대와 동행할 수 있었지만 동행 이유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는 원정대장의 반응이 묘해지자 친구 대원들은 그에게 숙소를 옮길 것을 부탁해 왔다.

그런 상황에서도 K2 도보 캐러밴 기점이자 탐사 기점인 아스콜리까지 동행했다. 발토로빙하 초입에서 원정대와 헤어질 때에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앞만 보고 걸어갔다. 이렇게 시작한 탐험은 밴타부락(바인타블락, 오거)에서 서쪽으로 한없이 진행되어 힌두쿠시 탐사로 이어졌다.

2007년 K2 제3캠프 출발.
2007년 K2 제3캠프 출발.
김창호의 파키스탄 히말라야 탐사는 2008년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무려 1,700여 일 동안 이어졌다. 첫 해 탐험은 한 달 새 몸무게가 20kg이나 빠질 만큼 고행 길이었다. 그럼에도 그레이트히말라야 서단(西端)의 명봉 낭가파르바트의 루팔벽(남벽)을 보고자 하는 열망에 탐사 시기가 지난 10월 깊은 눈을 헤치며 다가서기도 했다.

이후 탐사에서는 크레바스에 빠지거나 눈사태가 덮치는 위험한 순간을 만나는가 하면 귓가에 총알이 스쳐지나가기도 했다. 그런데도 새로운 봉우리와 빙하를 보고픈 욕구를 떨쳐버릴 수 없었다. 당시 김창호에게 삶은 미지에 대한 탐험의 연속이었다.

김창호는 탐험에 머물지 않았다. 그가 파키스탄의 수많은 빙하를 파고든 것은 그의 등반열정을 충족시켜 줄 만한 산을 찾기 위해서였다. 2000년 7개월간의 파키스탄 히말라야 탐사를 마친 뒤 귀국해 선후배들에게 자신이 다녀온 지역을 선후배들에게 선보였다. 그들이 꿈꿔 오던 산봉들이었다. 이들은 이듬해 2001년 원정을 계획했고, 김창호도 합류를 결정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고 아름다웠던 멀티4 원정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까지 왕복 국제항공료 포함 150만 원의 회비로 결성된 ‘가난한 원정대’였다. 김창호는 그나마 120만 원의 회비로 동참이 결정되었다. 그래도 서기석 대장을 비롯, 임성묵, 최석문-이명희 부부 등 7명으로 구성된 원정대는 당시 한국 산악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5,000m급 4개 고봉들 등반, 카체블랑사(5,560m) 세계 초등정과 혼보로피크(5,500m) 신 루트 등반에 이어 시카라(5,928m) 신 루트 등정  등의 기록을 내기도 했다. 당시 대원들은 귀국 직전 텐트와 피켈 등 장비를 팔아 숙식을 해결해야 했음에도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원정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창호는 대원들이 귀국한 뒤에도 홀로 파키스탄 히말라야 탐사에 나서 라카포시산군과 바투라산군 그리고 훈자 일원을 답사하고 돌아온다. 바투라산군 답사는 훗날 서울시립대 개교 90주년을 맞아 나선 원정에서 당시 가장 높은 미등봉이었던 바투라2봉(7,762m) 세계 초등정의 밑바탕이 된다.

김창호는 독특한 캐릭터의 소유자이다. 자신이 생각한 가치관과 맞지 않으면 여간해서 융화되지 않는 이다. 2003년 그는 대학산악연맹이 주최한 네팔 히말라야의 훙치 원정대의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한데 출국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연락이 끊겼다. 자신의 등반관과 가치관에 맞지 않는 원정을 나간다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해서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원정에 참가하지 않았다.

2007년 브로드피크 등정 후 하산길(김진태 대원을 촬영).
2007년 브로드피크 등정 후 하산길(김진태 대원을 촬영).

대신 그 자신이 원하는 등반을 택했다. 마침 파키스탄은 세계 산의 해를 맞아 해발 6,500m 이하의 산은 입산허가나 등반비가 필요하지 않다고 발표했다. 김창호는 단독등반을 기획했다. 해발 6,000m급 설산에서 등반기술을 익히고 고독을 이겨내야만 비로소 큰 등반을 해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그해 여름 원정에 나서 딜리상사르(6,225m), 아타르코르(6,109m), 하이즈코르(6,105m), 박마브락(6,150m) 4개 봉을 단독 세계 초등정하는 개가를 올렸다.

김창호가 8,000m급 고봉 등반을 시작한 것은 그의 등반 경력에 비하면 늦은 2004년 로체 남벽 등반부터였다. 영호남 합동 로체 남벽 원정이었다. 이는 2002년 한국도로공사 시사팡마 남벽 신 루트 원정 때 “등반 동참이나 주변 탐사라도 가능하겠느냐”는 김창호의 요청을 기특하게 여기고 있던 선배 산악인 박상수(전 한국도로공사 직원)씨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그 등반에서 김창호는 등정의 꿈을 이루지는 못하고 해발 7,450m를 최고도달점으로 찍고 하산해야 했으나 뛰어난 영호남 고산 클라이머들과 끈끈한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이듬해 2005년 낭가파르바트 루팔 원정대(대장 이성원)에 이어 2007년 에베레스트 원정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살벌했던 2005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중앙 직등루트 등반

김창호는 2005년 낭가파르바트(8,125m) 루팔벽 중앙 직등 루트 세계 제2등이란 기록을 세웠다. 낭가파르바트는 1953년 오스트리아의 헤르만 불에 의해 초등될 때까지 31명이라는 많은 등반가가 목숨을 잃어 ‘죽음의 산(The Killer Mountain)’으로 불리는 봉으로, 중앙 직등 루트는 세계의 철인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 형제가 1970년 초등한 이후 두 번째 등정이었다.

1 2008년 로체 정상으로 향하는 김창호. / 2 2007년 브로드피크 정상.  /3 2008년 마칼루 3캠프를 향해 오르는 김창호.
1 2008년 로체 정상으로 향하는 김창호. / 2 2007년 브로드피크 정상. /3 2008년 마칼루 3캠프를 향해 오르는 김창호.

김창호는 당시 동료 대원인 이현조(2007년 봄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중 사망)와 함께 등정 후 반대편인 디아미르벽을 타고 하산하면서 환각에 빠지기도 했다. 막판 이틀간은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정상에 오른 이들은 탈진 상태였다. 이현조는 7,800m 설사면에서 눈사태로 50여 m나 추락하는가 하면 김창호는 7,700m 지점에서 절벽을 만나자 뛰어내렸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그가 손에 잡고 있던 피켈과 안경, 랜턴이 날아가 버렸다. 이후 두 사람은 외국 원정대의 캠프에서 새나오는 불빛을 좇아갔으나 점점 멀어졌다. 거의 초주검 상태에서 베이스캠프에 내려서서야 그 불빛이 정상을 향하는 외국 클라이머들의 헤드랜턴 불빛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등반은 같은 시즌 미국 2인조가 루팔벽에 신 루트를 뚫으면서 세계 산악계에서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최근 세계적인 카라코룸 연구가인 볼프강 헤첼이 낭가파르바트 논문을 통해 변형 루트로 공식인정함에 따라 뒤늦게나마 뛰어난 등반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김창호와 이현조는 ‘등정은 하되 대원들이 조금도 다치지 않는 게 가장 큰 의무’로 삼는 대장의 의지에 따라 마지막 캠프 출발 이후 정상 직전(7,850m)까지 산소를 사용함으로써 무산소 등정을 기록하지는 못한다.

김창호는 훗날 그 하산길에 대해 “2003년과 2004년 파키스탄 탐험 도중 루팔벽뿐만 아니라 디아미르벽을 살피면서 머릿속에 잘 그려 넣었기 때문에 그래도 살아 내려올 수 있었던 것 같다”며, “두 차례의 탐사 이후 작성한 16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김창호는 2006년 8,000m급 고봉 속도등반을 시도한다. 그간 한국 원정대들의 8,000m급 고봉 등반이 과장된 것이 많다고 판단한 그는 가셔브룸1봉(GⅠ·8,068m)과 2봉(GⅡ·8,035m) 연속 속도등반에 나선다. 큰 등반을 하려면 솔로 등반, 난이도 등반, 속도등반 순으로 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도한, 베이스캠프 출발 이후 정상에 올라섰다가 다시 베이스캠프 귀환까지 당일에 해내는 등반이었다.

1 마칼루 정상에서 부산산악연맹 깃발을 펼쳐들고 선 김창호(오른쪽). / 2 2009년 다울라기리 제1캠프로 오르는 김창호.  / 3 2010년 낭가파르바트 디아미르벽 등정시의 김창호(왼쪽), 서성호.
1 마칼루 정상에서 부산산악연맹 깃발을 펼쳐들고 선 김창호(오른쪽). / 2 2009년 다울라기리 제1캠프로 오르는 김창호. / 3 2010년 낭가파르바트 디아미르벽 등정시의 김창호(왼쪽), 서성호.

당시 베이스캠프에는 동아대산악회 팀, 김홍빈-김미곤 팀, 오희준-세라부 장부 셰르파 팀 등 4개의 한국 팀이 모여 있었다. 이미 8,000m급 고봉 등반 경험이 많은 오희준(2007년 봄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중 사망)과 네팔 셰르파 세라브 2인조는 등반속도가 무척 빨랐다. 그 모습에 5,000m대 고도에서 훈련하면 등반에 효과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베이스캠프 일원에서 달리기를 하기도 했으나 효과는커녕 편도선만 붓는 결과만 가져왔다.

가셔브룸은 속도등반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다. 무엇보다 베이스캠프에서 제1캠프까지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크레바스 지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GⅡ 등반은 7,500m에서 끝난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지친 그는 다 찢어진 텐트에서 하룻밤 지낸 뒤 베이스캠프로 돌아와 며칠 동안 쉰 다음 제1캠프에서 다시 GⅡ 속도등반에 도전해 18시간20분 만에 등정하고 이어서 GⅠ 등정에도 성공한다.

김창호는 한국도로공사 산악팀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에베레스트 등정의 기회를 갖게 된다. 2007년 봄이었다. 그러나 막판에 불의의 사고로 정상을 목전에 두고 등정을 포기해야 했다. 당시 김창호는 후배인 김미곤과 양손가락 장애인인 선배 산악인 김홍빈을 위해 발코니(8,500m) 아래 3피치 구간에 고정로프를 설치하고 마지막 캠프로 돌아왔다가 정상 공격에 나서려 했으나 대기 도중 박영석 원정대 대원으로서 남서벽 신 루트를 등반 중이던 후배 오희준, 이현조 대원이 눈사태 사고를 당해, 이 사고 수습을 위해 등정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컨디션 상 정상 공격에 나섰다면 산소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게 김창호의 고백이었다.

부산연맹과 인연으로 14좌 완등 레이스에 박차

김창호의 14좌 완등 레이스는 부산연맹 원정대와 인연 맺으면서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2007년 여름 김창호는 K2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마침 부산산악연맹이 K2 원정에 나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홍보성 대장에게 동행을 요청한다. 뜻밖에 일이 잘 풀렸다. 여행사를 운영하는 선배 산악인 김수현(카일라스 대표)씨는 파키스탄에 해박한 김창호에게 부산연맹 K2 팀의 가이드를 부탁했고, 그 사실을 전해들은 홍보성 대장은 기왕이면 등반 동참을 요청했다.

2009년 다울라기리 정상.
2009년 다울라기리 정상.

에베레스트 등반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파키스탄으로 향한 김창호는 스카르두에서 부산 팀과 합류해 발토로빙하를 거쳐 베이스캠프에 도착, 도면 그리듯 등반 스케줄을 홍 대장에게 제시했다. 교과서적인 등반만 머릿속에 넣고 있던 홍보성 대장은 10일 안에 마지막 제4캠프(8,000m)까지 로프를 깔고 캠프를 설치하겠다는 김창호의 등반 계획에 대해 “국가대표급 클라이머로 구성된 1986년 K2 원정대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지만 김창호는 9일 만에 계획대로 제4캠프를 구축한다.

김창호는 최단기간 K2 등정을 기대했다. 그러나 4캠프에 올려놓은 산소통이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원정대에게 충격적이고도 낙심천만인 사건이었다. 이에 김창호는 모자라는 산소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산소를 사용하지 않고 등정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홍 대장에게 제안해 홀로 무산소 등정에 나선다.

그는 등정 도중 보틀넥 구간(약 8,400m)에서 동행한 셰르파가 위에서 떨어진 낙석에 균형을 잃고 추락사하는 사고로 위기를 만났다. 그러나 선배 산악인이 사고 수습을 위해 하산키로 결정함에 따라 김창호는 정상을 향해 계속 오를 수 있었다. 세계 제2위 고봉 무산소 등정이었다.

김창호는 K2 등반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고, 이듬해 2008년 결성된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 핵심 멤버로 발탁된다. 부산광역시가 후원하는 8,000m급 14개 고봉 완등 프로젝트였다. 이후 그의 8,000m급 고봉 등정 레이스는 박차를 가한다.

(위) 2009년 마나슬루 제2캠프로 오르는 김창호. / 2009년 마나슬루 정상 직하에 선 서성호와 락파 셰르파를 촬영했다.
(위) 2009년 마나슬루 제2캠프로 오르는 김창호. / 2009년 마나슬루 정상 직하에 선 서성호와 락파 셰르파를 촬영했다.

2008년 봄 김창호는 김진태, 서성호 대원과 함께 마칼루(8,463m)를 무산소로 등정하고, 셰르파니콜~암프랍차패스를 도보로 넘어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진입한 이후 2박3일 만에 로체(8,516m) 등정에 성공한다. 훗날 히말라야 전문 등반 기록자인 미스 홀리 여사의 데이터베이스에 ‘베이스캠프 설치 이후 최단 등정’으로 기록된 등반이었다.

마칼루·로체 등반은 김창호에게 짝을 맺어준 등반이기도 했다. 함께 등정한 서성호 대원은 속도, 고소적응력 등 김창호와 유사한 면이 많았다. 등반 도중 낮잠을 자면 고소증세가 온다는 일반적인 이론과 달리 오히려 머리가 맑아진다는 점까지도 같았다.

김창호는 8,000m급 14좌 등정 레이스를 펼치는 와중에서도 미지에 대한 도전의 꿈은 버리지 않았다. 2008년 여름 히말라야에서 그때까지 인간이 정상을 밟지 못한 봉우리 중 가장 높은 바투라2봉 세계 초등정을 이룩했다.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미지의 설산을 세계인을 대표해서 올라선 것이다.

바투라2봉은 서울시립대 개교 90주년 기념 원정이었다. 서울시립대산악회는 에베레스트, 초오유, 바투라2봉 3개 고봉을 대상으로 선정했다. 폼을 잡기에는 에베레스트가 맞았고, 등정 성공률 면에서는 초오유였다. 그러나 추진위원회는 바투라2봉을 최종적으로 낙점했다. 대외적인 체면보다는 등반 가치 면에 큰 비중을 두었던 것이다. 이 바투라2봉을 대상지로 내세운 것 역시 김창호였다.

2009년 봄 마나슬루(8,163m) 등반은 추위, 바람과의 싸움이었다. 매끈하게 뻗은 능선과 곧추 솟은 정상부는 바람을 피할 데가 전혀 없었다. 서성호, 셰르파 2명과 원정에 나섰으나 셰르파 1명이 병이 나는 바람에 셋이서 등반을 펼쳐야 했다. 그나마 등반 도중 셰르파의 한쪽 아이젠이 벗겨지는 바람에 안전을 위해 함께 캠프로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1차 시도 때에는 첫 번째 관건인 숄더(7,500m) 위에 올라섰으나 엄청난 추위와 피켈과 아이젠이 박히지 않는 강한 청빙에 더 이상 등반을 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그러나 2차 시도에서 14좌 완등자인 호예호 가르시아를 추월하면서 등정에 성공했다.

2010년 낭가파르바트 정상으로 향하는 김창호 일행.
2010년 낭가파르바트 정상으로 향하는 김창호 일행.

같은 시즌에 도전한 다울라기리(8,167m)는 눈의 산이었다. 폴란드, 독일, 일본 그리고 오은선, 김재수-고미영 팀 등이 각축전을 벌이는 가운데 서성호 대원과 둘이서 등정길에 나선 김창호는 마지막 캠프에서 강풍을 만나 위기를 만났으나 이틀 동안 버티다가 바람이 잠잠해진 틈을 타서 등정에 성공한다.

14좌 무산소 완등 못지않은 미등봉 등정에 대한 열정

김창호는 한 시즌에 2개 고봉을 연속 등반했기에 지칠 법도 한데 탐험 욕구를 버리지 않고, 서면 무약티계곡 탐사에 나선다. 굶다가 마을이 나타나면 닭을 잡아먹으며 시도한 탐사였다.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에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으로 기록된 1962년 다울라기리2봉 정찰대의 족적을 밟는 길이었다. 하지만 한 시즌 3개 고봉 등정 목표는 안나푸르나(8,091m) 정상부에 제트 기류가 형성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2009년 여름 부산연맹 팀의 프로젝트인 낭가파르바트 등반에 나서 재등정에 성공한 김창호는 가을 시즌 안나푸르나 등반에 나선다. 하지만 이 등반은 14좌 완등을 목전에 둔 오은선 원정대, 김재수 팀, 김홍빈 팀 등이 베이스캠프에 모인 가운데 좋은 기회를 엿보다가 흐지부지 끝나고 만다.

2010년 봄 등반한 캉첸중가는 그간 등반한 고봉 중 가장 힘들었던 산이었다. 무엇보다 4~5번으로 끝나는 운행이 7번으로 늘어날 만큼 운행 거리가 길었고, 그로 인해 2명의 셰르파가 돈도 싫다며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게 해달라고 하소연했다.

1  2010년 시샤팡마 정상. / 2 2011년 가셔브룸1봉의 제2캠프를 향해. / 3  2010년 캉첸중가 정상부로 오르는 서성호를 촬영했다. / 4 2010년 캉첸중가 정상에 선 김창호.
1 2010년 시샤팡마 정상. / 2 2011년 가셔브룸1봉의 제2캠프를 향해. / 3 2010년 캉첸중가 정상부로 오르는 서성호를 촬영했다. / 4 2010년 캉첸중가 정상에 선 김창호.

게다가 1차 등정시도 때에는 제3캠프에 올려놓은 우모복이 바람에 날아가버려 랜턴 불빛에 의지한 채 하산을 강행해 밤 10시30분 베이스캠프로 돌아와야 했다. 두 번째 시도 때에는 셰르파에게 동상기가 있어 포기해야 했고, 세 번째 시도 때에는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 다시 베이스캠프로 내려서야 했다.

등정은 네 번째 시도에서 이루어졌다. 그나마 밤 9시에 출발해 정상에 도착한 시각은 16시간이 지난 이튿날 오후 1시였다. 셰르파 2명은 산소를 사용하고, 김창호와 서성호 두 대원은 무산소로 이루어낸 등정이었다. 그런데도 셰르파들이 지칠 만큼 힘든 등반이었다. 김창호는 “능선에 올라선 이후 정상에 도달할 때까지 능선 구간이 워낙 복잡해, 길을 찾아낸 초등자에 대해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2010년 또다시 부산연맹 프로젝트에 따라 GⅠ·GⅡ 등반에 나서 연속 등정에 성공한 김창호는 그해 가을 중국 티베트령 시샤팡마(8,027m) 등정에도 성공한다.

이어 부산연맹 팀은 이듬해 2011년 봄 안나푸르나에 도전, 등정에 성공한다. 안나푸르나는 14좌 완등자 중 태반이 마지막 봉으로 삼을 만큼 위험한 고봉이다. 특히 7,200m대 세락 지대에서 제1캠프와 제2캠프 사이로 떨어지는 낙빙은 그야말로 살인적이었다. 김창호는 “그래서 북면 등반로는 러시안 룰렛에 비유된다. 14좌 완등자인 아벨레 블랑은 난이도는 높지만 낙석 낙빙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남벽으로 두 차례 시도하다가 결국 북면 루트로 성공했으나, 등정하기까지 6차례 도전을 반복해야 했다”고 루트의 위험성에 대해 얘기했다.

1 2011년 가셔브룸1봉 정상. / 2 2011년 초오유 정상. / 3 2011년 가셔브룸2봉 제1캠프로 오르는 중.
4 2011년 가셔브룸2봉 정상.
1 2011년 가셔브룸1봉 정상. / 2 2011년 초오유 정상. / 3 2011년 가셔브룸2봉 제1캠프로 오르는 중. 4 2011년 가셔브룸2봉 정상.
13번째 고봉인 초오유(8,201m)는 티베트등산협회(TMA:Tibet Mountaineering Association) 측으로부터 등정 보너스를 받으며 성공한 봉이다. 원래 초오유는 TMA 측이 루트 메이킹에 이어 고정로프를 깔고 루트 사용료로 1인당 100달러씩 받는 산이었다. 그러나 김창호-서성호 조 외에 김재수-손병우, 김홍빈-나덴지 셰르파-펨바 셰르파 총 3개 한국 팀이 합심해서 로프작업을 마치고, 마지막 캠프(7,400m)부터 정상까지는 고정로프를 사용하지 않고 밀어붙여 시즌 초등과 함께 등정에 성공했다. TMA 측은 고마움의 뜻으로 셰르파 두 사람에게 각각 300달러씩의 사례를 표했다.

김창호 대장은 마지막 고봉 에베레스트를 남겨놓은 상황에서도 미등봉 등반에 대한 열정을 접지 않고 네팔 히말라야의 미등봉 힘중(7,140m)에 도전한다. 안치영(봔트클럽)과 파티를 이룬 김창호는 남동벽으로 등반에 나서 베이스캠프 출발 이후 3박4일 만에 힘중 정상에 올라서는 데에 성공한다.

마지막 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 역시 서성호 대원과 파트너를 이루어 진행됐다. ‘From 0 To 8848’ 무동력 무산소 등정을 목표로 삼은 2013 한국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 김창호 대장은 12개 고봉을 함께 오른 서성호 외에 안치영(봔트클럽), 그리고 25년 후배인 전푸르나(서울시립대 졸업 예정자) 대원과 함께 등정길에 나서 김창호 대장과 서성호 대원은 무산소 등정에 성공하고, 안치영 대원은 마지막 캠프부터, 전푸르나 대원은 제3캠프에서부터 산소를 사용하면서 세계 최고봉 등정에 성공한다.

이렇듯 김창호 대장의 8,000m급 14개 고봉 무산소 완등은 탐험 열정으로부터 시작돼 5,000~7,000m급 고봉 초등정 등 탄탄한 등반 과정을 거쳐 이루어낸 결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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