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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김창호 8,000m급 14좌 무산소 완등 특집ㅣ인터뷰] "여행과 탐험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속의 방랑입니다"

글·사진 한필석 부국장
  • 입력 2013.06.11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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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빙하 위에서 나눈 김창호 대장과의 긴 얘기, 영원한 꿈

김창호 대장은 서성호, 전푸르나 대원과 함께 3월 14일 인도 벵골만을 출발해 강가(갠지스강) 카야킹으로 대장정을 시작했다. 닷새 동안 강을 거슬러 콜카타(구 캘커타)에 도착할 때까지 평균 4.5m에 이르는 조수간만의 차이로 위험한 상황이 많았다. 강물이 빠져 나갈 때에는 어선은 물론 거대한 상선이 뒤집힐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158km 거리의 카야킹을 마친 뒤 원정대는 인도평원과 네팔 테라이평원을 가로지르며 893km에 이르는 긴 거리를 자전거로 이동했고, 해발 410m 높이의 툼링타르에서 안치영, 오영훈, 서성호 대원들과 합류해 살파패스를 넘어 쿰부히말 트레킹과 캐러밴 기점인 루클라에 도착한 다음 남체와 팡보체를 경유해 4월 20일 베이스캠프(5,350m)에 도착했다. 도보캐러밴 거리만 해도 156km였다.

이렇게 38일간의 대장정을 거쳐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김창호 대장은 매우 지쳐 있었다. 20여 년간 인연 맺어 온 기자로선 처음 본,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베이스캠프 입경 이틀 전 딩보체(4,300m)에서 심한 몸살로 하룻밤 드러누웠던 터라 얼굴이 더욱 상해 있었다. 

김창호 대장과의 인터뷰는 첫 번째 고소적응 등반이 끝난 4월 29일 오후 베이스캠프 아이스폴 앞에서, 그리고 5월 8일 컨디션 조절을 위해 내려선 페리체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고소증세와 피로를 핑계로 서면 인터뷰도 요청했다.

Part. 1

"이제 탐험과 등산은 우리 내면으로 길을 찾아 나설 때입니다" 

이번 원정은 주목표인 에베레스트 등반이 시작되기 40여 일 전부터 시작되었기에 힘도 많이 들고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특히 카약이나 사이클 같은 종목은 낯선 스포츠 아닙니까?

“내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수많은 폴더 중에 ‘원정등반’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과거에 행했던 원정등반과 탐험에 관한 사진, 기고했던 원고, 그리고 각 원정의 서류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또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원정등반과 탐험에 관한 계획들이 각각의 하위 폴더로 분류되어 있으며 평상시 생각날 때마다 자료와 정보가 업데이트됩니다. 각 연도마다 그 시기에 적절한 하나의 원정등반 폴더를 선택합니다. 결국 어떤 원정등반이든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되고 있는 셈이죠.

‘From 0 to 8848’이라는 슬로건을 기치로 한 한국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도 마찬가지입니다. 6년 전인 2007년 나는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했습니다. 한데 함께 베이스캠프에 머무르던 다른 한국대 대원 2명이 추락사했습니다. 추락사한 이현조는 나와 함께 낭가파르바트(8,125m)를 횡단했고, 오희준은 가셔브룸1봉(8,068m)과 2봉(8,035m)을 함께 등정했던 후배였습니다.

그날 우리 팀도 마지막 캠프인 4캠프(7,980m)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몇몇 대원은 정상을 향해 등반 중이었고요. 나는 사고 소식을 듣고 등반을 포기하고 수습작업에 참여한 후, 하행 캐러밴을 할 때 다음에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한다면 뭔가 유니크한 프로그램을 구성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 루트, 에베레스트-로체 횡단등반, 그리고 이번에 행하고 있는 ‘해발고도 0m에서 에베레스트 정상 8,848m까지’라는 프로젝트입니다.

나는 항상 원정을 준비하면 국내에서 거의 90% 이상을 꼼꼼히 마치고 출국합니다. 실제 현장에서 보이는 모습은 원정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평소에 많이 하지 않는 짓이 포함되었습니다. 카약과 사이클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아쉽게도 국내에서 훈련했지만 충분치 않았습니다.

가장 신경이 쓰였던 점은 다른 나라에서 탐험과 등반 활동을 하려면 그 나라의 법규 범위 내에서 행해야 하는데, 네팔의 에베레스트 등반에 관한 절차는 이미 잘 알고 있었으나, 인도의 카약과 자전거 구간은 해양법, 하천법, 도로교통법 등 수많은 허가서를 받는 절차가 있었고, 그것이 지치게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인도에서 카약을 수배하는 과정에서 결국 캘커타에서 제작을 하기로 했는데, 현장에 도착했는데도 제작이 끝나지 않아 하루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무산소로 오른 높이는 8,611m의 K2입니다. 그런데 에베레스트는 그보다 250여m 더 높습니다. 8,400m 이상에서는 50m마다 공기의 산소분압률(山所分壓率)이 바뀝니다. 그 미지의 공간과 높이에서 내 몸이 어떻게 변할지 나도 알 수 없습니다. 사실 그게 궁금해서 에베레스트에 무산소로 도전한 겁니다.”

14좌 무산소 완등을 꿈꾸게 된 시점은 언제입니까? 그 과정은 어떠했고 가장 어려웠던 적은 언제인지요.

“히말라야 등반은 기록을 앞세우거나 남에게 보여 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2005년 첫 8,000m급 봉우리인 낭가파르바트 루팔벽을 오르면서 자이언트봉에 입문했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저는 14좌를 목표로 했다기보다는 광주 전남, 부산 산악인들, 그리고 전국의 등반가들과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14좌 마지막 봉우리인 여기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아는 한국의 어떤 산악인도 처음부터 8,000m급 14좌를 목표로 도전정신을 불태운 사람은 없을 겁니다. 만약 그랬다고 말한다면 한국의 다른 산악인들이 과연 믿을까요? 제가 히말라야를 다니면서 꿈꾸는 무언가는 8,000m급 14좌가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사람입니다. 그들과 고난을 극복하면서 함께한 추억들, 우정이 소중했고, 그리고 그들은 왜 산에 가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같은 공간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이제 지구상에 미지라고 불리는 공간은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제 탐험과 등산은 아직도 무궁무진한 미지로 남아 있는 우리 내면 속으로 방향을 틀어야 할 때입니다. 산에서 나는 내 자신의 깊은 곳에 숨겨진 것들을 찾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도전하여 성취한 에베레스트 정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의 나약함에 도전해 폭풍설 속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용기입니다. 그러니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만의 정상을 찾아 가보자는 것입니다.

8,000m급 14좌가 내 자신의 정상은 아닙니다. 내가 오르고자 하는 정상을 찾기까지가 가장 어렵고 거친 길이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파키스탄에서 홀로 1,700여 일을 탐사하는 동안 내가 꿈꾸는 정상은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김창호 대장은 취재 도중 텐트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일기장을 들고 나왔다. 그리곤 카약 도착지인 콜카타의 바부가트에 도착한 날 작성한 일기를 보여 주었다. 지난 3월 18일자였다.

‘어깨와 팔의 통증에도 쉼 없이 패들을 젖지 않으면 카약은 뒤로 밀려났다. 밥도 카약 위에서 먹었다. 모기들의 극성에 잠자리는 불편했다.

탐험과 등반은 내 신념에 대한 믿음이며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 증명해 나가는 과정이다. 생각과 행위 사이의 갈등과 모순에서 방황하지 말라. 멀리 목표점을 향해 활의 시위를 당겨 화살을 날렸다.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에 전념해라. 우리 원정대의 목표는 해발고도 0m에서 에베레스트 정상 8,848m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의 목표는 정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패들링 한 번의 이 순간이 바로 나의, 우리의 정상이다.’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대한 부담감은 없습니까?

“오랜 시간 산에서 함께 고난을 이겨내며 우정을 나눈 선후배 30여 명이 산에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히말라야는 너무나 거대하고 그곳을 오르는 사람은 너무나 미미한 존재입니다.

에베레스트는 정상은 해발고도 0m대에 비해 기압이 3분 1 이하로 떨어집니다. 공기 중 산소의 양도 기압에 비례해 3분의 1 이하로 떨어지죠. 움직이고 있지만 죽어가고 있다는 게 맞을 겁니다. 우리 몸은 이러한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남겨놓고 본능적으로 하나하나 버립니다.

영하 30℃를 내려가는 저온 상태에서 산소를 제대로 마시지 못한다는 것은 곧 손가락을 잘라야 하는 상황을 맞아야 함을 의미하기에 불안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저도 사람입니다. 하지만 산소를 쓰지 않는 상태에서 8,611~8,848m 사이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산악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탐험 본능이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산, 가장 기억에 남는 산, 또 가고픈 산이 있다면?

“낭가파르바트 루팔벽은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벽입니다. 2005년 원정대는 107일간 베이스캠프에 머무르며 등반을 지속했습니다. 캠프1의 텐트는 4번이나 파손되었습니다. 그리고 베이스캠프를 떠난 지 9일 만에 정상을 넘어 봉우리의 반대편 디아미르벽으로 하산했습니다. 고(故) 이현조와 나는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루팔벽을 초등한 1970년 메스너 형제는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동생은 죽었으니까요. 낭가파르바트 루팔벽이 가장 어려웠던 산이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산은 당연히 히말라야와 빠진 첫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그레이트 트랑고타워입니다. 1993년 서울시립대학교산악회가 꾸린 원정대는 15박16일 동안 포타레지를 이용해 수직고 1,500m의 대암탑을 올랐습니다. 중단 설벽과 설탑을 선등하던 나는 러닝빌레이가 없는 상태에서 100m를 추락했습니다. 줄은 잘려 내피가 몇 가닥 안 남았고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다시 올랐습니다.

이계남 형과 이수용이 일으켜 주어야만 안전벨트를 찰 수 있었지만 나는 선등을 섰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르고자 했던 지점까지 갔습니다. 첫 히말라야 등반은 나에게 흰 산에 대한 환상과 좌절과 극복, 그리고 20대 젊은 날을 모두 바친 등반이었습니다.
나는 히말라야 등반에서만큼은 단독등반 경험을 가진 자일파트너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단독등반을 해본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캄캄한 밤에 아득한 절벽에 홀로 매달려 본 사람은, 진정 둘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됩니다. 파트너가 맛있는 음식만 골라 먹어도, 좁은 텐트 안에서 방귀를 계속 뀌어도, 밤새도록 코를 드르렁 곯아도.

다시 가고 싶은 산도 있지만 내가 가보지 않은 봉우리의 단독등반을 해보고 싶습니다.”

김창호 대장에게 14좌 무산소 완등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명에? 성취감?

“고통스럽더라도 온전히 내 자신의 힘으로 산을 오르고 싶었습니다. 산소를 쓰면 내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싫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Part. 2

"고도가 산이 가진 '외형적 높이'라면 남이도는 인간이 만들어낸 '창의적 고도'입니다"

자신의 등반역정을 통해 느낀 고도와 난이도의 가치적인 면에서 차이는 무엇입니까?

“고도와 난이도, 모두 등반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암벽과 빙벽등반 등 전문성을 가진 등반을 추구하는 대학산악부 출신인 나는 선배들로부터 자연스럽게 히말라야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꿈도 국내의 낮은 산에서 더 높은 산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으니까요. 등반에서 고도 지향성은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국내 암벽등반도 처음에는 단 피치에서 멀티 피치로 달라지며, 또 국내의 1,000m대 산을 오르면서 높은 유럽알프스나 히말라야를 오르고 싶어 하지요.

해발고도가 산이 가진 ‘외형적 높이’라면 난이도는 인간이 만들어낸 ‘창의적 고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도와 난이도는 서로 어울림이 있어야 좋은 등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등반 프로필에서 이러한 모습을 살필 수 있습니다. 8,000m급 14좌를 등반하기 전에는 난이도에 비중을 두었다면, 14좌를 하면서는 높이에, 또 멀티피크 원정대와 6,000m급 4개봉 단독등반, 바투라2봉과 힘중 등은 고도와 난이도가 어우러진 등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 대장은 등반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저는 등반의 가치를 동기(Motivation)에 큰 비중을 둡니다. ‘왜 그 산을 오르고자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오를 것인지’입니다. 그래서 현지에서 배낭을 꾸려 오르는 행위보다, 자신이 목표로 정한 산에 오르는 준비 과정에서 오는 심리적 불안과 압박을 극복하는 과정을 저는 즐깁니다. 이번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신 루트를 개척하러 와 있는 카자흐스탄의 데니스 우룹코의 지금 심정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습니다. 등반가는 벽 밑에서 자일을 묶고 출발을 하면 정신과 행위는 무아지경으로 통일되기 때문에 마음속에 오히려 고요함을 느낍니다.

정상을 정복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정복해 고요함을 유지하며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를 추구하는 것이 궁극적인 가치입니다.”

김창호 대장은 8,000m 14좌 완등 레이스 중에도 바투라2봉(7,762m)과 힘중(7,140m) 같은 히말라야 미등봉을 초등정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대단한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초등정에 대한 자부심 또한 대단할 것 같은데요.

“2001년 멀티피크 원정대, 2003년 6,000m급 4개 봉 단독등반, 바투라2봉과 힘중 같은 원정등반은 세계 초등반이라는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의 산이었지만, 그보다는 어떤 가능성을 제시하는 등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가능성이라 표현하는 이유는, 등반가로서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이끌어 내게 해주었으니까요.

예를 들어 초오유(8,201m)를 북서면 노멀루트로 오를 준비를 한다면 나에게 그 산과 등반루트는 큰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접근과 등반루트 등에서 해답이 나와 있으니까요. 그러나 미등봉과 신 루트는 하나의 산을 접하는 방식인데, 이러한 선택은 학문적이어야 하며, 창의적이어야 합니다. 그 하나의 봉우리를 오르기 위해 보낸 시간은 오히려 이미 많은 사실들이 알려진 여러 봉우리를 오를 때보다 많은 체험을 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내가 오르는 등반루트에 예전에 버려졌던 텐트의 잔해와 바위 틈새에 하켄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 이미 김이 빠져 버리죠.”

아직도 개척등반에 대한 열정이 남아 있는지요. 

“고대부터 히말라야 주위에 살던 인간들에게 히말라야의 하얀 설산은 신비로운 영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성산이자 경외의 대상이었으나 19세기 후반부터 등반의 영역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세속화되었습니다. 누구나 히말라야라는 공간에서 원주민과 만나고 문화를 접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렇게 누구나 접할 수 있는 히말라야가 되었지만 누구나 가지 못했던 지역과 봉우리에 가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등반을 할 수 있고, 보지 못한 문화를 접할 수 있게 해줍니다.


Part. 3

"파키스탄 탐사는 8,000m 14좌의 막바지 시점인 지금 돌이켜보면 제 젊은 날은 가장 소중한 체험이자 추억입니다"

김창호 대장은 등반가보다는 탐험가로서 산악계에 데뷔했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 이후 2008년에 이르기까지 8차례에 걸쳐 1,700여 일 동안 파키스탄 히말라야 탐사에 나섰습니다. 그 탐사는 <월간山>에 무려 38회에 걸쳐 소개된 바 있습니다. 이미 학창시절 그레이트 트랑고타워 등반을 통해 파키스탄 히말라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파키스탄 히말라야 탐사와 열정, 에피소드 좀 전해 주십시오. 또한 아직 답사하지 못한 지역을 찾을 계획이 있는지요. 김 대장이 생각하는 파키스탄 탐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레이트 트랑고타워와 가셔브룸4봉 등반 후, 20대의 내 가슴속에 시간과 자금이 허락한다면 카라코룸산맥을 모두 다녀봐야겠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것은 통장에 잔고가 쌓이고 나이가 든 이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머니는 두둑하더라도 다리에 힘이 빠지고 나이가 들면 과연 내 가슴속에 그러한 열정이 불타고 있을까’라는. 그 고민 후 지금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 카라코룸에 관련된 자료는 원정기 외에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1년간 방 안에서 카라코룸에 관한 외국 자료를 외우다시피 하고 홀로 떠났습니다. 비용이 넉넉지 않아 현지에서 로컬포터를 고용할 수 없어 혼자 먹고 자고 촬영 장비를 배낭에 꾸려 다녔습니다.

한 달 만에 체중이 20㎏ 이상 빠져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무거운 짐과 부족한 음식이었죠. 이후 먹는 것을 현지화 전략으로 바꾸었습니다. 산골 마을에서 구한 밀가루 수제비를 주식으로 했습니다. 수제비는 장점이 있습니다. 먹는 양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죠. 물의 양만 조절하면 됩니다. 그리고 마른 야크 똥으로 불을 피워 밀크티를 마셨습니다. 그리고 밭에서 감자 캐는 일을 도와주고 감자를 얻고, 양치기 움막에서 젖을 짜거나 양몰이를 도와주고 치즈를 얻었습니다. 그러니 절로 짐 무게도 해결되었습니다.

그렇게 6년이 흘러갔습니다. 봄에 출국해 초겨울에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당시 무거운 짐을 지고, 매일 돌아다니는 동안 사람 마음이 너무나 작은 영향에도 크게 흔들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산골 마을을 지나는데 꼬마 아이가 욕을 하면, 내가 기분이 좋은 날은 그냥 지나치는데 그렇지 못한 날은 배낭을 벗어놓고 그 꼬마 잡으려고 날뛰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힘든 날은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지’하며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욕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나자 저절로 마음은 고요해졌습니다. 힌두쿠시의 빙하 언저리 풀밭에 작은 텐트를 쳐 놓고 야크 똥으로 끓인 찻잔을 들고 서면 별빛이 쏟아집니다. ‘좋구나. 나는 내가 선택해서 지금 이 길을 걷고 있어. 이 순간 내 인생의 가장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야’라는. 이런 마음이 저절로 생기더군요.

파키스탄 탐사는 순전히 제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떠났습니다. 그러나 2년째 <월간山>에 파키스탄 히말라야 대탐사를 연재하게 되었어요. 탐사니 탐험이니 하는 단어도 사실 이때부터 쓰게 된 겁니다. 아무튼 그래서 내가 다녔던 카라코룸, 힌두쿠시의 사진과 글이 실리면서 우리 산악인들에게 그 산맥과 산들을 소개하는 기회가 되었던 거죠. 국내 산악인들이 이 지역으로 진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면 거기서 의미를 찾고 싶습니다.

파키스탄 탐사는, 8,000m 14좌의 막바지 시점인 지금 돌이켜보면 제 젊은 날의 가장 소중한 체험이자 추억입니다. 이 탐사는 중간에 그만 두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고개를 넘는 어떤 날은 너무 힘들어 어금니 옆의 볼 살을 씹고 피를 빨면서 걸었던 적도 있습니다. 고산등반도 이보다 더 고통스럽지는 않았습니다.

파키스탄 탐사 후, 원래 인도 탐사를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밀레니엄(새 천년) 이후 지리적으로 근접한 중국 히말라야에 한국산악인들의 관심이 커졌고 또 원정대가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쓰촨성, 운남성으로 세 번의 탐사를 다녀오고 <부산산악포럼>에 ‘중국 횡단산맥 연구’라는 50페이지 연구 논문을 기고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잦은 원정등반으로 탐사를 연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티베트와 신장위구르자치구를 두세 차례 돌아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티베트 탐사를 하다가 멈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탐험이나 탐사에 대한 계획이 있는지요.

“나는 수직여행(등반)과 수평여행(탐사)을 좋아합니다. 등반이나 탐사 모두 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여행 ‘From 0 to 8848’도 바다에서 생성된 구름이 인도평원을 지나 히말라야산맥에 눈을 뿌리고, 그 눈은 다시 녹아 갠지즈강이 되어 바다로 갑니다. 이러한 자연의 순환논리를 좇아가 보는 의도였죠.

이제 나이가 들면 수직여행은 저절로 높이도 낮아지고 횟수도 줄어들게 될 겁니다. 반면 수평여행은 계속할 수 있겠지요. 티베트 탐사를 마치면 인도나 아프가니스탄으로 가고 싶습니다.

중국 쓰촨성과 운남성 탐사 이후,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책상 위에서 구글어스로 지구상을 속속들이 볼 수 있는데 돌아다니는 게 시간 낭비가 아닌가라는. 그런데 내가 배낭지고 다니는 것은 보고 싶은 산을 찾아 자료수집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오히려 산 주위를 걷는 것 자체를 즐긴다는 사실이 더 큽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산을 만나고.”


Part. 4

"나는 산악인으로 불릴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보다 매일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내 자신에게 자문해 봅니다"

김창호 대장은 공부하는 산악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최근의 정보나 산서를 통해 접한 첨단 등반가들뿐만 아니라 탐험시대의 옛 산악인들에 대해 얘기 나누며 그들과 같은 꿈을 꾸고 나래를 펴는 게 일상이다. 그는 학창시절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산서로서 고(故) 김장호 선생의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꼽았다. 이는 바로 등반은 육체와 정신의 자유를 만끽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탐험이나 원정 전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사전 준비를 하는지요.

“어떤 후배가 ‘형은 훈련은 안 하고 왜 그렇게 자료 분석에 집착해요?’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나는 산에서 죽고 싶지 않아. 그러려면 많이 알아야 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믿으니까’라고 답했습니다.

가고자 하는 산에 대한 책과 자료는 과할 정도로 봅니다. 작년 힘중과 같은 봉우리는 일본의 하기와라 편집장(山の溪谷), 독일의 볼프강 헤첼(파키스탄히말라야 등반사 전문가), 미국의 존 할린 Ⅲ세, 영국의 린드세이 그린핀 등 전 세계에 교류하고 있는 히말라야 전문가나 역사가한테 이메일로 연락해 최대한의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파키스탄 탐사에 대한 열망 때문에 읽은 책과 지도의 양은 얼마나 됩니까?

독일의 볼프강 헤첼은 카라코룸 연구 논문을 꾸준히 발간하고 있습니다. 그도 파키스탄과 카라코룸에 관한 한 저에게 많은 자문을 구하기도 합니다. 저는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히말라야의 동쪽 남체바르와부터 서쪽의 낭가파르바트까지 2,500km, 카라코룸, 힌두쿠시산맥에 있는 각각의 봉우리를 순서대로 외우면서 이 산에는 어떤 루트가 있고, 또 어떤 신 루트 개척의 가능성이 있으며, 외국의 어떤 산악인이 이 루트에 관심이 있다는 등의 사실을 외우다가 잠듭니다.

나는 산악인으로 불릴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보다 매일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내 자신에게 자문해 봅니다.”

파키스탄에서 구입한 책의 양은 얼마나 되나요. 또한 어떤 방식과 어떤 돈으로 구입했는지 궁금합니다.

“파키스탄 히말라야에 관련된 책은 헌책방이나 선데이바자르와 같은 길거리에서 구입했습니다. 한권 한권 찾아낼 때마다 그 즐거움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보물을 찾은 기분이었죠.

파키스탄 히말라야와 카라코룸, 힌두쿠시에 관련된 지도는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파키스탄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도는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파키스탄산악회 회원으로 있으며 원정대에 참여했던 이들이 보관하고 있던 지도를 구했습니다. 카라코룸에 관련된 지도는 당시까지 폴란드의 예지 왈라( Jery Wala)가 작성하고 스위스 산악 연구소에서 발행한 지도가 가장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료는 지금까지도 한국의 지방 산악인은 물론 대한산악연맹과 한국산악회 회원들도 이용하고 있지요. 단지 그들이 잘 모를 뿐이죠.

파키스탄 탐사 때에는 비용이 넉넉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비자를 연장하러 이슬라마바드와 라왈핀디에 내려오면 먼저 헌책과 지도를 구입했습니다. 탐사 비용은 언제나 부족했죠. 그래서 현지체재 비용 중 식비는 한 끼에 한국 돈으로 200원만 썼습니다. 짜파티 2장과 랏시(삭힌 치즈 우유) 한 잔 값이죠.”

산서와 지도 읽는 즐거움은 어느 정도입니까.

“어쩌면 나는 상상여행, 관념여행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프랑스의 작가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침대여행이죠. 이는 곧 등반과 탐험을 실행에 옮길 가능성이 없어도 그곳에 관한 책이나 지도를 보며 마음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행에는 실제적인 공간과 시간은 중요치 않습니다.”

현재 집에 가지고 있는 책은 주로 어떤 내용인지요.

“작년 5월 20일 결혼하고 집을 옮길 때 한 번 정리했고 지난 4월 내가 인도로 떠나 있는 동안 아내는 집을 리모델링했습니다. 그 때 한 번 더, 보지 않는 책을 정리했습니다.

이제는 오직 히말라야에 관해 전 세계에서 발행된 책, 지도, 그리고 자료 출판물만 남게 되었습니다. 아내도 나의 이런 집착 같은 행위에 늘 웃으며 이해해 주었습니다. 이번 에베레스트 등반을 마치고 나면 새롭게 꾸며진 서재가 어떨지 기대됩니다. 잠이 오지 않는 날 그곳에 들어가면 전 세계 어떠한 곳이든지 바로 여행을 떠날 수 있으니까요.”

만약 책을 펴낸다면 어떤 내용과 타이틀의 책을 낼 것인지요.

“나는 등반을 할 때, 심지어 내 자신의 체험이나 경험도 믿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내 무의식 속의 본성이나 생존 본능이 내 이성을 누를 때가 있었으니까요.

주위의 많은 분들이 파키스탄의 단독탐사 이야기나 많은 히말라야 봉우리를 올랐던 이야기를 출판하는 게 좋다는 의견을 말합니다. 그날이 올 겁니다. 그러나 먼저 저는 한국 산악인이 쉽게 볼 수 있는 히말라야와 힌두쿠시, 카라코룸, 중국 횡단산맥 등 자료집을 출간하고 싶습니다.

이는 8,000m 14좌를 오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런 작업이 될 것이 자명합니다. 산을 오르는 것은 날씨가 좋지가 않으면 베이스캠프에서 쉬면 되지만 이러한 작업은 매일 노력하지 않으면 공허한 메아리가 될 테니까요.”

오래 전 만든 카라코룸히말라야연구소는 지금 어떤 상황인지요.

“어찌 보면 실체가 없는, 내 개인 연구소입니다. 그러나 매우 효율성 있는 연구소입니다. 나 혼자니까 관리나 제반 부대비용이 들지 않지요. 한국은 물론, 세계의 많은 산악인들과 히말라야 연구자들과 교류하고 있습니다. 자료 제공은 모두 무료였습니다. 개개인이 요청해 오는 자료 요청에 답하기 위해서는 밤샘 작업이라는 노력과 시간의 투자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작업으로 나는 외국은 차치하더라도 한국의 많은 원정대에 참여했습니다. 원정대는 좋은 성과를 거두면 연락이 없지만 결과가 좋지 못하면 자료 제공자의 적절치 못함을 탓하기도 하죠. 이러한 반응에 대처할 용기가 없다면 제공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제 자신이 좋아합니다.


Part. 5

"서성호는 나와 함께 8,000m급 11개 봉우리를 오르고 이번에 에베레스트 무산소를 위해 함께 와 있습니다. 성호는 제 친동생입니다"

김창호 대장은 산에 입문한 이래 25년간 치열한 등반활동을 펼쳐왔다. 그 사이 맺은 인연도 많다. 특히 한국도로공사 클라이밍 팀과 부산산악연맹과의 인연은 그를 14좌 무산소 완등이라는 대업을 이루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

학창시절, 방황하던 시절, 14좌 완등과정 등 산 인생을 통틀어서 자신이 산악인으로 성장하는 데에 정신적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 산악인들이 있을 텐데요.

“1988년 서울시립대학교산악회에 입회하면서 전문 등반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운이 좋아 1학년 때 동계 일본 북알프스로 원정등반을, 1993년에 그레이트 트랑고타워, 1996년에 가셔브룸4봉 동벽 신 루트 등반을 학교 이름을 걸고 다녀왔습니다. 원정등반에 대한 갈등과 회의를 겪은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경험이 많지 않던 형들, 등반의 감성을 부르짖던 조동영 형(행정학과 85학번), 등반의 창의성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던 이계남 형(건축과 86학번), 그리고 등반은 장비의 풍요로움이 아니라 부족함 속에 난관을 헤쳐 나가는 것이라고 했던 신태문 형(경영학과 86학번)이 생각납니다. 이들의 정신은 내가 히말라야를 잘 오를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국 팔도를 김삿갓처럼 돌아다니며 원정대에 참여하면서 모셨던 경남의 조형규 대장님, 이병갑 대장님, 전남 광주의 위계룡 원장님, 박상수 대장님, 이성원 대장님, 그리고 부산의 홍보성 대장님 등, 이분들이 원정대를 이끌었던 추진력과 열정, 그리고 원정대원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베이스캠프를 떠나 폭풍설 속의 캠프에서 새벽의 추위를 이겨내며 무거운 짐을 지고 함께 올랐던 수많은 내 동료 선후배들은 같은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선배는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항상 배낭에 담배를 넣어 다니다가 후배들에게 주기도 했습니다.

등반은 동행입니다. 상대방에게 무엇을 하지 말라가 아니라, 벽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며,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가 우선입니다. 나는 그런 많은 동료를 만났습니다. 지금은 지정을 꾸리고 더 이상 히말라야를 다니지 않지만, 전국 어디를 가나 깡소주 한 병이면 우리는 세상의 어떤 높고 험난한 봉우리도 단 번에 오를 수 있습니다. 동료애에 취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게 좋습니다. 나는 거만하게 산을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일을 묶었던 동료들의 우정을 아는 게 전부일지 모릅니다.

14좌를 하면서는 당연히 홍보성 대장님과 서성호 후배입니다. 홍 대장님은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니 차후로 미루지요. 서성호는 나와 함께 8,000m급 11개 봉우리를 오르고 이번에 에베레스트 무산소를 위해 함께 와 있습니다. 다른 어떤 말이 필요 없습니다. 성호는 제 친동생입니다. 다만 피를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 외에는.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습니다. 성호는 세계적인 산악인이 될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년에 힘중을 함께 등반한 안치영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국내에는 이들의 능력을 뽑아내어 훌륭한 등반을 이끌어낼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시기와 질투가 더 많지요. 앞으로 훌륭한 등반가보다 훌륭한 등반가를 만들어 내고 이끌 원정대장이 더 많이 배출되었으면 합니다.

또, 파키스탄에 숨겨 둔 여자를 만나러 간다는 루머가 도는 동안에도 내 주위에서 나를 돌보아 주었던 세 명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깊은 마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에베레스트를 인도 벵골만에서부터 원정을 함께한 20년 후배인 전푸르나를 비롯해 후배 대학산악인들에게 하고픈 얘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이번 출국 전에 푸르나에게 책을 한 권 선물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정상은 어쩌면 에베레스트 정상이 아닙니다. 카약의 패들링 한 번, 자전거의 페달 한 번의 그 순간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정상입니다.’

정상은 멀리, 그리고 어는 꼭짓점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이 순간,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자신이 진정 폭풍설 속에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자신만의 길을, 자신의 정상을 찾는 게 중요합니다.”


Part. 6

"아내에게 할 말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이번 원정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새벽에 침대에서 빠져나와 서재로 가지 않겠다고"

탐험이 김창호 대장 자신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행과 탐험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속의 방랑입니다. 방랑의 길은 자신 속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답해 보는 과정입니다. 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 산에 오르냐고 묻는 것과 같겠지요.”

등반과 탐험을 통해 배운 게 있다면.

“등반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허상의 산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자신밖에 남지 않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자신의 딱딱한 껍질 속에 남아 있을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등반과 탐험은 자신의 이러한 껍질을 깨고 새싹을 틔우는 것이어야 합니다. 새싹은 인고의 겨울을 이겨내고 나옵니다. 그래서 등반과 탐험은 자신에게는 가혹한 잣대를, 동료에게는 유해야 합니다. 등반과 탐험은 세상의 끝자락에서 중심을 향해 외치는 하나의 표현인데, 그것은 총구 앞에서도 용서를 말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의 행복을 기원할 줄 아는 마음을 배우는 것이며, 죽음의 언저리에서 삶의 희망을 속삭이는 것입니다.

자신만의 등반 철학이 있는지요.

“신화 속의 얘기에 의하면 산, 또는 자연과 인간은 원래 한 형제였습니다. 자연에 거스르지 않는 등반과 탐험을 하고 싶습니다.”

국내외에 존경하는 산악인이 있는지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외국 산악인은 영국의 크리스 보닝턴 경입니다. 그는 자신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가혹하고 동료 어깨를 다독거려 준 원정대장이었습니다. 그의 편안한 노년의 얼굴은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국내 산악인은 내 친구 윤치원을 들고 싶습니다. 최근 해병대 후배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는 나와 나이가 같았고 로체 남벽을 함께 올랐습니다. 그가 서울 등촌동 삼거리에 아웃도어 브랜드 점장을 하고 있을 때 우리 집과 가까웠습니다. 그는 내가 홀로 파키스탄 탐사를 다닐 때 끼니를 때우는지 걱정해 주었고 저녁이면 찾아와 술과 밥을 사주었습니다. 그의 성품이었습니다.

그러던 차, 2010년 그는 사람에 대한 무한한 휴머니즘이라는 화두를 우리에게 남겨놓고 7,400m 마나슬루 산기슭에서 후배 고 박행수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나는 한국 히말라야 진출 50년사에서 치원이를 ‘가장 위대한 산악인’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나는 고소증에 고통 받는 후배를 위해 영면까지 함께한 그를 존경합니다. 나약한 인간이 죽음의 순간에도 위대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탐험에 대한 계획이 있습니까?

“내 컴퓨터의 탐험과 등반 폴더에는 계획이 엄청 많습니다. 내 나이와 경륜에 맞는 적절한 시기에 행할 것입니다.”

등반은 언제까지 할 계획인지요.

“시한은 없습니다. 노년에는 아내와 함께 뒷산에 약수 뜨러 가겠지요.”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긴 원정을 이해해 주는 아내에게 하고픈 얘기는.

“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런 나를 아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나는 몽벨에서 주는 내 월급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끔 재경팀에 전화해서 얼마인지 물어봅니다. 아내는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한 집의 가장이 된 사람인데.

아내는 나에게 바라는 게 많지 않습니다. ‘술을 적게 마시라’는 얘기 외에는. 그래도 내가 쓸 수 있는 한 달간의 용돈 통장에 후배들에게 사줄 술과 밥값을 반드시 넣어 줍니다. 아내에게 할 말은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이번 원정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새벽에 침대에서 빠져나와 서재로 가지 않겠다’고.” 


NOTE

기자와 김창호와의 인연은 20년째다. 김창호가 학창시절인 1993년 그레이트 트랑고타워를 다녀왔을 때였다. 등반기를 청탁했으나 마감이 다 되도록 원고가 오지 않았다. 답답하기도 하고 화도 나서 서울시립대 산악부실을 쳐들어갔다. 그러나 소식을 들었는지 김창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등반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원고를 낸다는 게 그의 마음에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1,700일간에 걸친 그의 파키스탄 탐사기는 <월간山>에 38회 연재된 바 있다. 연재 당시 그는 ‘월간山 최고의 악덕필자’(악덕필자는 늘 새롭게 탄생한다)였다. 이 역시 완성되지 않은 원고를 절대 밖으로 내놓지 않는 스타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고가 마감 막판에 와도 좋았다. 김창호의 원고를 교열 보는 시간은 기자에게 상상 여행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김창호와는 알프스 몽블랑·오트 루트, 파키스탄 히스파르패스, 남미 아콩카구아 등지를 함께 등반하고 트레킹도 한 바 있다. 그때마다 김창호는 일행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컨트롤했다. 후배지만 산에 관한 한 전문가였다. 허황됨 없이 있는 그대로를 즐기고 탐사하기를 좋아했다. 한밤중 “저 봉을 올라야겠다”고 하면서 갑자기 등반에 나서 기자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2007년 1월 아콩카구아를 등반할 때에는 정상 길에 선배 한 명이 고소증세를 느끼자 기꺼이 등정을 뒤로 미루고 선배의 안전한 하산을 도왔다. 같은 해 봄 에베레스트 등정을 위해 기자와 함께 사우스콜에 있을 때였다. 선배 산악인의 안전 등반을 위해 정상을 향해 고정로프를 설치하고 마지막 캠프인 사우스콜에 머물고 있을 때 박영석 원정대의 오희준, 이현조 대원의 추락사고 소식이 전해졌다.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정상이 10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욕심을 버렸다. 그리고 후배 두 명의 시신이 누워 있는 제2캠프로 달려 내려갔다. 김창호는 등정보다 의리를 중요시하는 산사나이였다.

이번 에베레스트 원정 때 김창호를 처음 만난 것은 남체바자르 (3,440m)였다. 얼굴이 쪼글쪼글했다. 2000년 첫 파키스탄 탐사 때 한 달 만에 20kg이 빠지고 기진했을 때 모습이 바로 저랬겠구나 싶었다. 이후 캐러밴 사흘째에는 몸살감기로 드러누워 베이스캠프에 예정보다 하루 늦게 도착했다. 스케줄에 얽매이는 원정이다 보니 스트레스가 많았겠다 싶었다. 더욱이 큰 원정대를 대장으로 이끈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베이스캠프 도착 이후 얼굴빛이 나날이 좋아졌다. 베이스캠프(5,350m)에서 제2캠프(6,400m)를 3시간 50분 만에 오르는 대단한 등반력도 보여 주었다. 대원들을 다루는 솜씨도 세련되고 부드러웠다. 캐러밴할 때는 저녁마다 대원들이 그날그날 촬영한 사진으로 콘테스트를 여는가 하면 쉬는 날에는 대원들과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지장이자 덕장이었다.

김창호는 14좌 레이스 도중에도 바투라2봉과 힘중 등 처녀봉을 세계 초등했다. 그의 마음속 깊은 데서 솟구치는 탐험과 도전에 대한 욕망은 그를 한 자리에 놔두지 않는 것이다. 그는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하면서도 고민하고 있다. 이제 40대 중반 나이에 걸맞게 수평여행으로 전환할 것인가, 아니면 욕망을 따라 젊은 날의 꿈을 좇아 수직의 세계를 추구할 것인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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