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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그림산행|화폭에 솟아오른 히말라야 14좌] K2는 무소불위의 제왕처럼 위풍당당했다

그림·글 | 곽원주 한국화가
  • 입력 2013.11.29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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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르두~아스콜리~발토로빙하 트레킹

울리비아호의 위용.
울리비아호의 위용.

삶이 무료하고 답답하다고 느껴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정보가 부족한 오지로 떠나는 여행은 처음 접하는 신비감 때문에 삶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어 더욱 그렇다. 그러다가 혼자 상상했던 것보다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면 한없는 환희와 걷잡을 수 없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

발토로빙하 위에 솟아오른 히말라야군봉들을 접하면 그렇다. 네팔의 히말라야를 지리산에 비유해 여성적이라 한다면, 파키스탄 발토로빙하(Baltoro Glaciers)에 솟아오른 히말라야산군은 한겨울 설악산을 빼닮아 강한 남성적 느낌을 갖게 한다. 그래서 발토로빙하를 걷다 보면 내가 히말라야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히말라야 산들이 나를 오르게 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발토로빙하의 등대 역할을 하는 가셔브룸4봉과 가셔브룸2봉.
발토로빙하의 등대 역할을 하는 가셔브룸4봉과 가셔브룸2봉.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이럴 때 위안되고 고마워

발토로빙하 끝자락 가셔브룸 베이스캠프로 가려면 스카르두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슬라마바드에서 스카르두로 가는 길은 육로와 항공편이 있지만 변덕스런 산악지역 날씨와 탑승객 수에 따라 결항이 심해 운항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많아 불편을 감소하고라도 대부분 육로를 이용한다. 육로 이용은 마(魔)의 길이라 불리는 살인적인 카라코룸하이웨이를 달려 탈레반 집단거주지역인 칠라스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큰 부담이 따른다.

스카르두에서 지프를 타고 황토먼지를 뒤집어쓰며 산허리를 휘감고 도는 비포장길을 곡예하듯 달려 아스콜리에 도착한 뒤 빙하 위에서 캠핑을 하며 꼬박 8박 9일을 걸어가야 가셔브룸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수 있다. K2 베이스캠프까지 다녀와야 하는 일정을 감안한다면 이번 카라코룸 트레킹은 20일  넘게 빙하 위에서 텐트 생활을 해야 한다.

작은 나무 그늘 하나 없고 녹색이라고는 이끼 낀 돌멩이 하나 찾아 볼 수 없는 빙하계곡에서 20일 넘게 생활한다는 것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은 일이다.

낭가파르바트 트레킹을 마치고 가셔브룸 베이스캠프와 K2 베이스캠프를 가기 위해 타르싱에서 출발해 라나호텔에서 1박하고 샹그릴라에 들러 BC 2000년의 흔적을 영혼으로 느낀 후 스카르두(2,500m)에 도착했다.

스카르두 K2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다음날 KBS 다큐제작팀과 불교 유적지를 스케치한 다음 시장 풍경을 촬영하고 함께한 일행은 다음날 이슬라마바드로 떠났다.

스카르두는 이슬람문화권이 들어오기 전에는 불교문화권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불교 유적지가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거대한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불상이 있는 곳을 찾아 불심을 느껴본다.

세계 제2위 고봉 K2의 위용.
세계 제2위 고봉 K2의 위용.
일행들이 모두 떠나고 혼자 남아 가셔브룸1봉 김미곤 대장 팀(블랙야크 후원)과 합류를 위해 호텔 주위를 스케치하며 3일을 기다렸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이럴 때 스스로 위안을 삼고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시간의 무료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K2호텔은 시가르강(Shigar river)과 인더스강(Induse river)이 합쳐지는 강 언덕에 위치해 조망이 좋다. 그림 그리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시장 풍경을 스케치하러 나선다. 어떤 가게는 화덕에 짜파티를 굽고, 길바닥에 좌판을 깐 촌로는 구두수선을 하느라 바쁘다. 망고를 비롯해 열대과일도 많다. 갓 구운 짜파티도 사먹고, 망고 4kg를 450루피에 샀다. 시장의 가게들은 모두 남자들이 운영하며 시장거리에서는 여인들을 구경할 수 없다.

오늘은 온종일 흐리고 빗방울이 오락가락한다. 이곳은 연평균 강우량이 150mm라고 하니 우리의 장마 때 하루 강우량도 못 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빗방울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다.

지난밤에는 강풍이 휘몰아쳐 호텔 정원의 잔디 위에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언덕 위에 키 큰 미루나무 너머로 산정의 짙은 감청색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녹색으로 변한 다음 엷은 갈색을 띤다. 마치 운보 김기창 화백이 즐겨 그리던 청록 산수화 한 폭을 여기서 실경으로 보는 듯하다. 언덕 아래는 삭막한 황무지에 미루나무를 심어 점점 푸른 숲을 이루어 가고 있다.

웅장한 첨봉들, 보초라도 서듯 오아시스 주변에 도열

스카르두에 도착한 지 4일 만에 아스콜리(Ascole·3,050m)로 출발했다. 김미곤 원정대와 합류해 아스콜리로 향한다(아스콜리까지 지프로 약 7시간 소요). 스카르두를 벗어나자 서부영화에서 보았던 황폐한 산악지대가 끝없이 펼쳐진다. 그러다 규모가 큰 시가르(Shigar) 바자르마을에 도착하니 마을 주위에는 밀밭이 황금색으로 물들어가고, 감자밭에는 흰색과 보라색 감자꽃이 만개했다. 고흐의 밀밭 그림을 떠오르게 하는 평온한 마을이다. 황폐한 불모지에 이런 오아시스 같은 마을이 있다는 것이 신비스럽기만 하다. 이런 오아시스 같은 마을을 지나면 또다시 어김없이 풀 한 포기 없는 산악지대로 변한다.

다소(Dasso)를 지나 목재로 된 출렁다리를 지프로 건넌다. 목재 난간은 부서져 제멋대로다. 위험천만한 상황에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오금이 저린다. 짐과 사람을 잔뜩 싣고 삐걱거리는 이런 판자조각마저 너덜대는 출렁다리를 건넌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현실이다.

브로드피크와 베이스캠프.
브로드피크와 베이스캠프.
아팔리곤에서 밀크티 한 잔을 마시며 화덕에서 직접 구운 짜파티를 간식으로 먹고 휴식을 취한 후 출발했다.

아스콜리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스콜리는 차량 이동이 가능한 마지막 마을로서 거대한 설산이 올려다 보인다.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매년 이곳을 찾는 원정대와 트레커들을 상대로 짐을 날라 주며 생활한다. 하루 10달러의 임금이지만 단기간에 목돈을 만질 수 있는 중요한 수입원이기 때문에 경쟁이 심하다.

첫 야영지인 아스콜리에서 밤이 되자 키 큰 미루나무가 고향 생각을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김미곤 대장이 “화백님, 오늘 저녁부터는 저희와 함께 텐트를 사용하시죠”라고 한다.

다음날 이른 아침 포터 1인당 25kg씩 짐을 나누어 메고 졸라를 향해 오른다. 파키스탄 포터들은 네팔과 달리 무게를 정확히 잰다. 이를 위해 가이드는 손저울로 개별 짐뿐만 아니라 공용 짐까지 정확히 맞추어 나눈다.

김미곤 원정대는 포터 58명, 가이드 1명, 쿡 2명이고, 블랙야크 문화원정대는 포터 11명, 가이드 1명, 쿡 1명, 치킨보이 1명으로 70명이 넘는 대인원이 함께 이동한다. 거기에다 당나귀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대부대다.

트레킹 첫날 졸라(3,353m)까지 가는데 약한 빗방울이 떨어진다. 다행히 도로에 먼지가 심하지 않다. 그러나 빗방울이 그치고 조금 오르니 금세 신발 위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다. 파유피크가 위용을 자랑하는 넓은 벌판에 해당화가 만발했다. 내려쬐는 햇빛에 챙 넓은 모자를 쓰고 긴팔을 입었지만 자갈밭 길을 걸어야 하는 발걸음이 쉽지 않다.

작은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중형카메라까지 가이드 굴람(45)에게 맡기고 걷는 나는 그나마 다행이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홑겹의 검정색이나 밤색으로 된 파키스탄의 전통복을 입은 포터들이 자기 머리보다 더 높이 올라간 짐을 메고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면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나는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흙먼지 날리는 길을 한참 걸으니 넓은 저수지가 있고 수양버들이 휘늘어진 고로폰(Golopon·3,100m)에 도착했다. 캠핑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삶은 달걀과 주먹밥으로 점심을 먹으며 아름다운 풍광을 스케치북에 담는다. 골격이 웅장한 첨봉들이 흰 눈을 뒤집어쓰고 오아시스 같은 곳을 보초라도 서듯 도열해 있다.

가셔브룸 베이스캠프.
가셔브룸 베이스캠프.
고로폰을 지나 커다란 오르막을 건너니 강이 갈라졌다. 왼쪽은 두모르도(Dumordo)강이고 직진 방향이 발토로빙하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강 건너 거대한 암벽 밑에 화장실 같은 건물이 여럿 보이고 약간의 나무들이 서있는 오늘의 목적지인 졸라가 한눈에 들어온다. 졸라캠핑장이 눈앞에 빤히 보이지만 40여 분 이상 더 U턴해서 걸어야 했다. 출렁다리를 건너 티하우스가 있는 넓은 졸라캠핑장에 도착한다.

사각으로 수양버들이 우거진 공터에 텐트를 치니 별장이 따로 없다. 김미곤 대장 지원팀 대원인 김덕중씨와 함께 이곳에서 캠핑을 하며 김미곤 대장에게 건넬 위로주로 가져온 위스키 한 잔을 미리 마셨다. 모처럼 마신 술이라 얼마나 맛있던지. 파키스탄은 전국 어디를 가도 술 구경하기가 힘이 든다.

졸라캠핑장에서 첫날밤을 지낸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모두 분주하게 움직인다. 쿡은 식사준비에 바쁘고, 포터들은 당나귀에 짐을 싣기에 바쁘다. 포터들의 수다스런 목소리가 조용한 자연의 아침을 깨운다.

파키스탄에서 트레킹할 때에는 로지가 많은 네팔과는 달리 계속 야영을 하며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초기 컨디션 조절이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서두르거나 급하게 오르려 하지 않고 졸라에서부터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움직였다. 오늘은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쌀쌀하다. 가이드 굴람이 “오늘 같은 날은 축복 받은 날”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추겨 세우고 “선생님, 럭키 맨” 한다.

나무 그늘 하나 없는 황량한 곳에서 햇빛이 강하면 온도가 영상 40℃를 넘나들어 트레킹하는 데 많이 힘들다고 한다.

빗방울이 약간 떨어진다. 그래도 워낙 건조하고 메말라 흙먼지는 발등을 덮지만 곳곳에는 해당화가 곱게 피어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있다. 이렇게 흙먼지가 푹신 대는 것이 이곳은 밤사이 이슬도 내리지 않았나보다.

우루두카스에서 바라보는 그대로가 한 폭의 작품

졸라에서 출발한 지 2시간이 지나자 돌담으로 지어놓은 군 막사가 나타나고 막사에는 파키스탄 국기가 대나무 장대 끝에서 펄럭인다. 발토로빙하 일원은 중국과 인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곳곳에 군부대가 있다. 헬리콥터 2대가 수시로 보급품을 나르며 순찰하기 때문에 탈레반 피습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어 안전하다.

검문소에 도착하니 넓은 초원 같은 곳에 작은 티하우스가 있는 캠핑장이다. 대부분의 포터들은 이곳에서 아침과 점심을 겸한 식사를 한다. 어떤 포터는 마른 가지를 주워와 수프를 끓이고, 또 어떤 포터들은 비닐봉지에 싸온 짜파티를 꺼내 먹는다. 포터들은 하루에 두 끼 먹으며 일당 10달러를 받고 그렇게 힘든 일을 한다.

목재다리를 건너는 지프.
목재다리를 건너는 지프.
포터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7시간 정도 걸으니 멀리 푸른 숲이 보인다. 파유(Paiyu·3,450m)다. 어떻게 이런 곳에 울창한 숲과 물이 있을까. 사막 같은 모래지대를 걷던 트레커들에게는 오아시스다.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하기 전 이곳에서 고소적응을 하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대부분 이틀간 머물다가 출발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기에는 손색없는 곳이다.

세면장이 따로 마련돼 있어 밀렸던 빨래도 하고 눈 덮인 파유피크를 올려다보며 스케치도 했다. 한낮에는 햇빛이 너무 강해 나무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오후가 되어 강 건너 보이는 설산의 암봉들을 스케치하는데 해가 산허리를 타고 눈 위로 미끄러진다. 금세 바람이 차갑게 느껴져 다운재킷을 입어야 했다.

저녁에는 아스콜리에서부터 데리고 온 흰 닭을 잡아 백숙요리를 한다고 한다. 원정대들은 장기간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체력 보강을 위해 염소나 소를 베이스캠프까지 몰고 올라가 잡는다. 아래서 잡아서 올라가면 햇살의 강한 열기 때문에 고기가 상해 못 먹을뿐더러 포터비도 추가로 들기 때문이다.

파유를 출발해 완만한 산자락 가운데를 걸으며 빙하가 시작되는 곳에 도착하니 만년빙하가 녹아내린 엄청난 양의 강물이 시커먼 입구로부터 콸콸 솟구쳐 강을 이룬다. 이것이 인더스 강물이 된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오르는 길이 트랑고타워로 가는 길이고, 곧바로 가면 K2와 가셔브룸 베이스캠프로 오르는 길이다.

이제부터는 빙하 위 모레인(빙하의 힘에 의해 밀려 내려오다 쌓인 퇴적층) 지대를 걸어야 한다. 길을 잃지 않으려면 가이드와 바짝 붙어 다녀야 한다. 날씨가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배낭에는 여벌옷과 장갑, 그리고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헤드랜턴과 비상식도 챙겨야 한다.

목적지인 우르두카스(Urdukas· 4,200m)까지 가는 길은 모레인 지대로 빙하의 연속이다. 커다란 빙하지대를 지날 때는 찬바람이 불어 한기를 느낀다. 하지만 어느 순간 파유피크(6,600m), 울리비아호(Uli Biaho·6,417m), 트랑고타워(Trango Tower·6,545m), 초리초(Choricho·6,756m) 등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 스케치북을 펼치지 않을 수 없다.

강줄기를 따라 한가한 마음으로 걷는다. 하늘은 회색 구름이 깔렸고, 산들바람은 보랏빛 야생화 꽃잎을 살랑댄다. 트레킹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날씨다. 가끔씩 내려오는 트레커들을 만나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위쪽의 상황을 묻기도 한다. 이곳에서 인천대 산악부 주임교수를 만났다. K2 베이스캠프를 다녀온다고 한다. 이런 곳에서는 고향을 따질 것도 없다. 한국 사람을 만나면 그저 기쁘고 반갑다.

비닐을 뒤집어쓴 당나귀들.
비닐을 뒤집어쓴 당나귀들.
네팔은 설산을 바라보며 걷는다면, 파키스탄은 설산을 끼고 설산과 함께 걷는 곳이다. 네팔에서는 며칠을 걸어야 멀리 전방에 설산이 나타나지만, 파키스탄에서는 사방으로 둘러싸인 설산을 바라보며 걷는다. 어느 한 방향의 설산을 보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장소에서 사방으로 병풍을 펼쳐 놓은 듯 설산이 보인다.

릴리고캠핑장에서 빙하협곡을 따라 계속 진행하는데 곳곳에는 빙벽이 녹아 돌멩이들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제는 하늘이 청명하다. 호부르체(Khoburtse·3,930m)가 가까워지면서 날파리가 눈을 뜰 수 없게 달라붙는다.

호부르체에 도착해 스케치하며 주먹밥으로 점심을 먹는데 어찌나 날파리가 극성을 부리는지 한 번 먹을 때마다 파리가 서너 마리씩은 입으로 들어가 씹히는 느낌이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 먹을 수 없으니 말이다. 어딘가에서 물소리가 요란하지만 물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빙하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그렇게 요란하다.

호부르체에서 오르는 길은 빙하 위의 모레인 지대의 연속이라 신경을 쓰지 않으면 곧바로 사고로 이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이 타는 갈증에 걷기가 무척 힘이 든다. 올라오면서 등대처럼 길잡이가 된 가셔브룸4봉이 점점 가까워진다.

우르두카스캠핑장에 도착했다. 조망하기 좋은 가파른 언덕 위에 위치한 우르두카스는 최고의 전망대로서 암봉으로 둘러싸인 발토로빙하 위 풀이 있는 마지막 야영지다. 전면에 트랑고산군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이곳에서 바라본 트랑고산군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게 하고, 요동치는 심장 박동 소리가 천지를 울리며 알 수 없는 욕망이 솟구쳐 올라 푸른 창공에 일필휘지로 일획을 긋게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절벽과 가장 도전적인 암벽 등반을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장소임에 틀림없다. 그레이트 트랑고타워 바로 북서쪽에 네임리스타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트랑고타워(6,239m)가 솟아 있다. 내가 내려가던 날도 트랑고타워 등반을 위해 한국 여성 네 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우르두카스는 캠핑장 뒤쪽에 거대한 바위들이 버티고 있어 가끔 산사태가 나서 위험하다. 2년 전에도 산사태가 크게 나서 거대한 바위들이 캠핑장을 덮쳐 포터와 등산객 43명이 한꺼번에 생매장된 참사가 있었다고 한다. 우르두카스는 ‘바위가 떨어진다’는 뜻이라고 한다.

네임리스타워와 트랑고타워.
네임리스타워와 트랑고타워.
첨봉으로 둘러싸인 조망 좋은 곳이라 스케치 장소로도 그만이지만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빙하 녹은 호수 위에 솟아오른 거대한 암봉들, 이것이야말로 바라보는 그대로가 한 폭의 작품이다. 석양에 실루엣으로 솟아오른 봉우리들은 영기마저 흐른다.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호수의 물결은 신령스럽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왼편이 파유산군, 오른쪽이 트랑고산군이다. 파유피크 옆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울리비아호다. 이 봉우리를 스케치북에 담는다.

카라코룸의 고봉들, K2를 향해 조아리며 경배 올려

우르두카스에서 아침햇살을 받으며 지난해 사고를 당해 시신들이 묻혀 있는 거대한 바위 옆을 통과하고 군부대를 지나 다시 빙하지대로 들어서니 녹색은 자취를 감춘다. 가도 가도 끝없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빙하 위의 너덜지대를 걷는다. 가끔 백골이 된 당나귀 시신들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진행방향으로 가셔브룸4봉과 가셔브룸2봉이 우뚝 솟아 이정표 역할을 하고 그 옆으로 브로드피크가 얼굴을 삐죽 내민다. 오른편으로는 마셔브룸(Masherbrum·7,821m)이 위용을 자랑하고 바로 옆으로 우르두카스피크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쳐 있다. 발아래는 작은 물줄기들이 빙하 위에 골을 파고 흐르며 그 물줄기들이 모여 거대한 급류를 만들고 있다.

고로(Goro·4,380m)캠핑장에 도착해 빙하 위에 얼음을 정리하고 텐트를 쳤다. 포터들은 밀가루와 보리를 섞어 만든 짜파티와 짜이(차+우유)로 매 끼니를 해결한다. 그들은 따뜻한 옷도 변변히 차려입지 않은 채 돌로 쌓고 비닐로 한기만 막은 곳에서 밤새 떨다 아침이면 그들의 성지를 향해 기도한다. 통상적으로 하루에 5번 기도를 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포터들의 움막 옆에 비닐을 뒤집어쓰고 밤을 새운 당나귀들이 있다. 이 광경을 보니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가슴을 짓누르며 만감이 교차된다.

고도를 올릴수록 모레인지대 옆으로 빙탑이 많이 보인다. 어느 순간 드넓은 광장이 보이고 멀리 미트라피크(6,025m), 초골리사(7,654m), 가셔브룸5봉(7,321m), 가셔브룸4봉, 브로드피크(8,047m)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고봉의 자태를 뽐낸다. 아스콜리를 출발한 지 일주일 만에 콩고르디아(4,600m)에 도착한 것이다.

그동안 사진과 영상으로만 보았던 K2(8,611m)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마디로 장엄하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제왕처럼 위풍당당하다. 카라코룸의 내로라하는 고봉들이 K2를 향해 조아리며 경배를 올린다.

이웃한 브로드피크가 후덕한 왕비처럼 제왕의 위풍을 더욱 부추겨 세운다. 고드윈오스틴빙하(Godwin-Austen Glacier) 사이로 자태를 곧추세우고 서 있는 K2는 신비감마저 든다. 이곳 콩고르디아에서 보는 K2는 환상 그 자체로 일주일간 힘들게 발품을 팔며 올라온 보람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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