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원정|랑탕원더러스 2014] 히말라야의 방랑자, 마음의 방랑자

[533호] 2014.03
  • 글·오영훈 서울농생대산악회·월간山 기획위원 | 사진·랑탕원더러스 2014
    입력 2014.03.13 13:08

    ‘랑탕원더러스 2014’ 2인조, 랑탕 지역 3개봉 등반

    한밤중에 나는 친구가 모는 차를 타고 신나게 달리고 있다. 뒤에서는 화가 치민 경찰이 우리를 쫓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비웃으며 좁은 골목길을 미친 듯 달려 빠져나갔다. 추격자는 손쉽게 따돌릴 수 있었고, 지저분한 도시의 광란은 새벽 어스름과 함께 어느새 잦아들었다. 훤히 밝아 온 어느 골목에서 느릿느릿 차를 멈추려다가 그만 어떤 이를 뒤에서 들이받고 말았다. 찰나의 순간에 그의 얼굴이 스쳤다. 아는 얼굴이었다.

    우르킹캉리 정상 능선을 등반 중인 오영훈. 뒤로 주갈 히말의 연봉들이 펼쳐져 있다.
    우르킹캉리 정상 능선을 등반 중인 오영훈. 뒤로 주갈 히말의 연봉들이 펼쳐져 있다.
    밤새 요동쳤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침착하려 애쓰며 나는 차에서 내렸다. 자동차 아래에 깔린 그를 안아 일으켰다. 그가 분명했다. ‘오영훈… 갑자기 보고 싶네.’ 등반을 출발하기 며칠 전 페이스북에 댓글을 달았던 대학 동창이었다. 이미 백짓장처럼 하얗게 된 그는 술 취한 이 마냥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깨진 뒤통수에서는 구불구불한 뇌 가닥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그의 머리를 감싸 안고 흘러나오는 내용물을 다시 담으려 애썼다. 시간이란 정말 되돌릴 수 없는 것일까. 사물들이라도 다시 맞춰 놓으면 언젠가 평온했던 때로 돌아오지 않을까.

    “형, 4시 넘었어요.”

    한 침낭 속에 껴안고 자던 진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꿈이었다. 우르킹캉리(5,863m) 북동벽 바로 아래 설원(5,300m)이다.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하기로 하고 엊저녁 일찌감치 누웠었다.

    “잘 잤냐.”

    “답답해서 그런가, 자긴 잤는데 찌뿌드드해요. 형은요.”

    “나는 뭐, 잘 잤지.”

    출발 전 눈을 녹이는 일은 늘 더디기만 했다.

    간잘라 히말 설원에서 올려다 본 간잘라 피크 및 동릉 등반루트.
    간잘라 히말 설원에서 올려다 본 간잘라 피크 및 동릉 등반루트.
    벽에 붙으면 모든 게 사라진다. 악몽은 등반을 시작하기 전에나 찾아올 뿐이다. 겨울이 한창인 지금은 눈사태나 낙석 없이 벽이 깨끗하고 계획한 루트는 그리 가파르지 않은데다가 오전엔 해가 들어 설벽 상태도 나쁘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두려웠다. 산은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어떤 산이든 그 앞에 선 내 눈은 올라봄직한 루트를 찾고 있었고, 등반의 상상들은 나를 한동안 꼼짝도 못하게 만들다가 마치 히든 크레바스처럼 보이지 않는 위험의 덫을 피해가는 행운이 마침내 다해버린 순간에서 멈춰버리곤 했다.

    진석과 함께 있다는 건 큰 위안이었다. 어젯밤 주절거린 예상대로 오늘 새벽의 일과를 당연한 듯 준비하는, 내가 떨리는 손으로 계획했던 등반을 믿고 따르는, 한 침낭 속에서 잔 형이 꾼 악몽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그와 함께 있다는 건.

    그렇게 등반은 본래 혼자만의 경험일 수밖에 없다.

    출발하기 40일 전에 원정을 결정지었다. 나는 2013년 가을 암푸1봉 등반과 코오롱등산학교 히말라야 등반과정을 차례로 마치고 네팔에 남아 개인적인 업무를 보던 중이었다. 진석은 대학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었다.

    (위)사브루베시에 내려 짐을 메고 이동 중인 김진석(좌)과 연락책으로 고용한 파상 셰르파. 이곳에서 포터 1명을 고용해 각자 30kg이 넘는 짐을 메고 상행캐러밴에 나섰다. / 로우 캠프라 불리는 베이스캠프(4,300m). 오영훈이 연락책 파상 셰르파와 함께 취사 중이다.
    더 살 떨리기 위해 선택한 2인 원정대

    “친구들은 다들 이력서 쓰고 있지만요….”

    그래서 떠나야 했단다, 삶의 전환기에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등반은 이메일로 준비했다.

    ‘2인보단 3인이 더 좋지 않을까요?’

    ‘2인과 3인… 장단점이 있겠지. 2인의 장점이라면, 더 살 떨리고 산과 환경을 직접 대하는 맛이 있는 것 같아. 속도도 아무래도 빠르고. 단점은 어느 때든 불안함이 가시지 않지. 3인의 단점은 한 명이 남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겠지—이건 장점이자 단점일거야. 물론 더 안전하고 파워풀한 원정대가 되긴 하겠지만.’

    그동안 내가 만났던 산은 어디나 긴장이 맴돌고 있었다. 하강을 마치고 진짜 땅을 디뎠을 때의 평안은 내가 누워 봤던 어떤 포근한 침대보다도 따뜻했다. 그렇게 산과 땅, 긴장과 평안은 오래된 쌍둥이처럼 멀리 있어도 붙어 있었다. 두 명을 고집한 것은 그게 너무도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가이드도, 쿡도, 포터도, 마음이 기대려 할 어떤 그림자도 허용하지 않고서 말이다. 하지만 혼자는 절대 알 수 없으리라. 혼자라면 단 하루도 그 공포를 못 견디고 도망칠 게 분명했다. 둘은 혼자보다는 아주 조금 낫겠지만 완전히 다른 등반을 만들어내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간잘라 피크 정상에 선 오영훈. 뒤로 큼직한 케른 두 개가 세워져 있다.
    간잘라 피크 정상에 선 오영훈. 뒤로 큼직한 케른 두 개가 세워져 있다.
    돈도 없었다. 항공권을 제외하고 지출한 예산은 채 200만 원이 안 됐다. 한국히말라얀펀드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는 김창호 대장이 2013년 봄 에베레스트 등반 당시 설립한 기금으로, 히말라야에 등반을 나서는 원정대에 적은 금액이나마 입산료 일부를 지원해 주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기금은 주위의 산악인들이 조성해 왔다.

    김 대장은 그러나 우리의 등반에 걱정 섞인 눈길을 보내 왔다. 꿈을 현실과 진배없이 믿기 시작하면 더 이상 몽상가로 남을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누구보다 꿈을 꾸는 덴 선수인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연락책 1명을 고용해 마지막 마을 로지에 머무르게 하며 비상시 대처하기로 했다.

    랑탕 지역은 기록상 네팔 히말라야에서 최초로 서양 산악인들의 본격적인 탐사가 이루어진 곳이다. 1949년 영국인 빌 틸먼 일행이 방문한 뒤로 카트만두에서 접근이 쉬운 탓에 오늘날까지 수많은 외국인들이 방문했다. 이 지역의 랑탕리룽(7,227m), 도르지락파(6,966m), 렌포강(6,979m), 랑시사리(6,427m) 등 주요 산들에서는 한때 특히 일본과 한국의 몽상가, 아니 산악인들이 혼신을 쏟아 등반을 펼치기도 했다.

    우르킹캉리 북동벽(간잘라피크 하이캠프에서 촬영).
    우르킹캉리 북동벽(간잘라피크 하이캠프에서 촬영).
    우르킹캉리 북동벽 루트도.
    우르킹캉리 북동벽 루트도.
    코오롱등산학교에서 2012년부터 개설한 히말라야 등반과정에서는 이 지역의 낮은 산들을—얄라피크(5,500m), 체르코피크(5,749m)—올랐다. 2012년, 2013년 모두 강사로 참여한 나는 불발로 돌아가긴 했지만 별도의 등반을 두 차례 기획하기도 했다. 아직 남은 등반지 킨슝(6,781m), 유브라(6,264m), 랑시사리 북벽 등을 오르는 계획이었다. 못 오른 산에 미련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올라도 궁금하기만 했다. 불안이란, 외로움이란 진정 어떤 것일까. 어디까지 다가가야 그 맨얼굴을 볼 수 있을까.

    우리만의 초등, 간잘라피크 등정

    12월 30일. 카트만두의 트리부반 국제공항에 도착한 진석의 목에 카타(티베트 불교에서 복을 기원하는 흰 천)를 걸어줬다. 그의 행운은 이제부터 그의 몫이다.

    (왼쪽)우르킹캉리 정상에 선 오영훈(앞)과 김진석. / 우르킹캉리 북동벽을 등반 중인 김진석.
    이튿날 커다란 배낭과 카고백을 로컬버스에 싣고 출발. 오후에 도착한 사브루베시(1,460m)에서 포터 1명을 수배해 짐을 나눠 들고 걷기 시작했다. 간잘라패스(5,130m)를 넘는 로우캠프(4,300m)에 4인용 텐트를 설치한 건 이틀 뒤였다. 하루를 쉬고 1월 3일, 이중화와 삼중화로 바꿔 신고 등반을 시작했다. 처음은 간잘라피크(5,675m)다.

    간잘라피크는 지도에 이름도 없고 고도 또한 표기되어 있지 않다. 그저 간잘라패스 능선에 있어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 혹시 초등일까? 그러나 하이캠프(5,200m)에서 동릉을 통해 네 시간 만에 오른 정상에는 큼직한 케른이 서 있었다.

    “제가 고산등반 한 뒤로 처음 오른 정상이에요.”

    남이 먼저 올랐는지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만의 초등일 뿐이다. 나는 기념으로 단체사진을 찍자는 진석의 청을 간단히 무시함으로써 그의 초등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너는앞으로 오를 산이 많으니까.

    하루를 쉰 뒤 우르킹캉리를 시도했다. 우르킹캉리는 고도는 낮아도 우뚝 선 자태가 꽤 볼 만한 산인데, 많은 등반가들이 근방에 위치한 나야캉가(5,844m)와 혼동해 오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네팔 정부에 등록된 나야캉가의 경위도 좌표는 전혀 엉뚱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어 믿을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네팔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구할 수 있는 지도(일명 핀란드 맵)에 표기된 방식을 따라 이 산을 우르킹캉리라고 여겼다.

    우르킹캉리 북동벽을 올라선 뒤 정상 능선에 붙기 위해 암릉 구간을 오르고 있다.
    우르킹캉리 북동벽을 올라선 뒤 정상 능선에 붙기 위해 암릉 구간을 오르고 있다.
    등반은 당초엔 동릉 신 루트를 계획했다. 하지만 겨울에 와 보니 적설량이 의외로 적고 동릉에는 가파른 바위가 드러나 있었다. 대신 북동벽 한가운데에 자연스러운 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벽 바로 아래까지 기어올라 하이캠프를 설치했다.

    우리는 등반로프로 7.8mm/100m 로프 1동을 사용했다. 15~30m 간격

    로 로프를 연결한 뒤 러닝빌레이 방식(중간확보물을 설치하며 선등자와 후등자가 동시 등반)으로 올랐다. 확보물로 22인치 스노바 5개, 아이스스크루 8개, 링크캠 1개, 하켄 4개를 항상 휴대했다.

    우르킹캉리 정상 능선에서 하강 중인 김진석.
    우르킹캉리 정상 능선에서 하강 중인 김진석.
    등반용 막영구로는 친구가 근무하는 코오롱스포츠에서 1인용 텐트를 지원받았고 침낭 1개와 매트리스 2장을 사용했다. 동계였지만 날씨가 잘 따라주었다. 바람이 부는 때를 용케 피해 등반이 이루어졌다. 좁은 텐트에서 한 침낭에 잤지만 반 시간이 멀다하고 뒤척거리고 가끔은 아예 누운 자리를 바꾸기까지 하니 긴 밤이 지루하지 않았다. 게다가 ‘난로’를 껴안고 자니 따뜻했다. 그나마 나중에는 피로에 지치고 껴안은 잠이 익숙해져 돌아눕는 것도 잊은 채 눕자마자 곯아떨어지곤 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카트만두에서 구입한 작은 압력솥으로 매일 맛있는 밥을 지어 먹었다. 진석의 요리 솜씨는 우리 원정대에서 최고였다. 언제나 같은 메뉴였지만—양배추 콩고기 된장국밥—그는 항상 “형 뭐 먹을까요” 라며 나를 선배 대접하는 예우를 잊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을 때면 마치 음식점에 와 한 턱 내는 듯 착각에 사로잡힌다.

    우르킹캉리 북동벽에는 신 루트 개척

    동계 특유의 화창한 날씨 탓인지 우르킹캉리 북동벽은 어렵지 않게 올랐다. 다만 약 400m의 정상 능선이 고역이었는데, 단단히 언 빙사면을 뒤뚱뒤뚱 게걸음으로 한 시간은 족히 횡단해야했다.

    유브라 루트도.
    유브라 루트도.
     유브라 남서벽 등반루트.
    유브라 남서벽 등반루트.
    등반을 모두 마치고 카트만두행 버스를 기다리는 팀부(1,580m)에서.
    등반을 모두 마치고 카트만두행 버스를 기다리는 팀부(1,580m)에서.
    속옷을 연상케 하는 세 번째 대상지 유브라는 2002년 외국 등반대에 등반이 허용된 이후 수차례 일본팀의 초등 시도가 있었던 봉이다. 그런데 마침 같은 시즌에 등반을 펼친 일본팀이 1월 4일 초등을 이뤄냈다. 이들은 2012년에도 왔었는데 당시에는 1캠프만을 설치했다가 체력소모가 커 등정을 실패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2캠프까지 설치했고, 열흘 동안 공략한 끝에 3명의 셰르파와 함께 대원 1명이 등정했다.

    유브라는 간잘라피크·우르킹캉리에서 겡진(3,830m)마을 건너편에 솟아 있다. 베이스캠프를 철수한 우리는 겡진의 로지에서 이틀을 묵은 뒤 이곳에서 한 시간 거리의 야크 움막 지대 평원(4,200m)에 베이스캠프를 새로 설치했다.

    일본 남성들이 동양인답지 않게 얼굴에 털이 많기는 해도 산에서는 유독 약하다는 건 네팔 셰르파들 사이에선 잘 알려진 비밀이다. 죽기 직전까지 오르고 보는 한국인들과는 달리 내려갈 때를 위해 30%의 체력을 비축한다면서 말이다. 일본팀이 열흘이라면 따라서 우리가 이틀 만에 해치울 계획을 세운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유브라 남서벽에서 하강 중인 오영훈.
    유브라 남서벽에서 하강 중인 오영훈.
    1월 12일, 가파른 잡석지대와 설사면을 올라 유브라설원으로 최대한 깊숙이 오르고자 출발했다. 이날따라 계곡을 타고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진석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보였다. 멀리 못 가고 유브라빙하로 올라서기 직전 해발 5,420m ‘어깨’에 하이캠프를 설치했다. 일본팀의 1캠프 근방이다.

    “형, 저거 무너지면 우리 텐트 덮치는 거 아니에요?”

    석은 뒤쪽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유브라빙하의 거대한 세락을 가리키며 말한다.

    “괜찮아 임마, 안 무너져. 여기까지 안 와.”

    그러나 나는 또 밤새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저게 무너질 리는 없어. 하지만 만일 무너지면 여길 덮치긴 할 것 같은데. 텐트 안쪽에서 자는 게 더 안전할까. 그럼 진석이 바깥쪽인데. 진석이가 얼음에 깔리면 나는 이렇게 피해야지. 하지만 피할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

    가파른 유브라 남서벽에서의 고민

    바람이 잦아들었다. 이튿날 유브라 남서벽 아래까지 빙하를 올라 설원을 횡단해 세 시간이 걸렸다. 문제는 베르크슈룬트였다. 그런대로 벌어진 틈이 적은 데를 골라 붙었다. 하지만 부실한 오버행 앞에서 불안 섞인 혼잣말을 실컷 중얼거리고 나서야 겨우 돌아내려올 수 있었다. 한참 좌측으로 옮겨 그런대로 이어진 베르크슈룬트를 넘어 붙었다.

    벽은 꽤 길었다. 뒤따르던 진석은 작은 크레바스에 빠지기도 했다. 러닝빌레이로 따라 오르는 그를 매몰차게 당겨댔다. 그가 숨을 몰아쉬느라 오르기를 멈추고 보나마나 단순한 생각 두어 개를 반복하고 있을라치면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무언의 압력을 넣었다.

    유브라 하이캠프(5,420m). 좌측 위 세락이 위압적이다. 우측은 얀사뗀지(6,567m).
    유브라 하이캠프(5,420m). 좌측 위 세락이 위압적이다. 우측은 얀사뗀지(6,567m).
    “제가 못 따라가면 형이 너무 힘들지 않아요?”

    “아냐, 별로 안 힘들어.”

    마음은 무거워진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는 나에게 기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불안을 감추고 있었다. 언제라도 내게 갑자기 몰려들지 모르는 피로를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벽은 점차 가팔라졌다. 70도 설벽은 크러스트가 잘 되어 있다가도 갑자기 부실한 가루눈이 나타났고, 단단한 빙벽을 타고 올라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우리 사이에 확보물을 두 개씩 설치하곤 했다. 두 개나? 나중엔 다시 한 개로 바꿨다. 빠를수록 안전하니까. 그러나 정상은 쉽게 가까워지지 않았다.

    베르크슈룬트로부터 800m가량 올랐다. 스텝을 빠르게 딛기 위해서는 좁은 빙벽과 가루눈 지대 사이를 타고 올라야 했다. 어느새 서쪽에서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잠시 멈춰 구름이 설원에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감상했다. 이어 빙벽에 두 개의 스크루를 박아 넣고 고정확보지점을 만들었다. 아래에서 오르던 진석은 멈춰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본다.

    결국 오르지 못한 랑시사리 북서벽. 원정대가 계획한 루트는 제일 좌측 설원과 빙하를 타고 올라 설벽을 따라 오르는 루트였다. 북서벽에는 한 개의 루트만 개척되어 있다.
    결국 오르지 못한 랑시사리 북서벽. 원정대가 계획한 루트는 제일 좌측 설원과 빙하를 타고 올라 설벽을 따라 오르는 루트였다. 북서벽에는 한 개의 루트만 개척되어 있다.
    “내려가야 할 것 같아.”

    “…”

    “네 생각은 어때.”

    “…저야 뭐 형이 하라는 대로 해야죠.”

    “솔직히 말해봐.”

    “아쉽죠.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인데.”

    랑탕원더러스 원정대 등반피크 위치도
    랑탕원더러스 원정대 등반피크 위치도
    해발 6,080m, 정상까진 표고차 200m가 남았다. 나에게, 물론 진석에게도 궁금한 건 정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려가면 또 배가 고플 텐데, 마음껏 오르지 못한 걸 아쉬워 할 텐데.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하강용 로프를 걸 V-스레드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이른 어둠이 찾아들기 전 하이캠프로 돌아와 다시 한 침낭 속을 비집고 들어갔다. 가스가 떨어져 목이 말랐다. ‘저 세락이 하필 오늘 무너지진 않을 거야.’ 하지만 두 눈을 감고 있으면 잠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산이 마지막 목적이 아닌 방랑자들

    그렇게 한겨울 인적 없이 얼어붙은 랑탕에서의 방랑, 그러나 돌아보면 따뜻하고 충만했던 방랑은 막을 내려갔다. 우리는 원래 네 개의 산을 오를 계획이었다. 마지막은 랑시사리 북서벽에 신 루트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계획한 루트는 하루 종일 해가 들지 않는 빙벽과 설릉으로 이뤄진 구간으로 3~4일 등반을 예상했다. 우리 등반을 8,000m로 치면 4캠프에서 정상공격의 하이라이트다. 하지만 3캠프도 채 못 오르고 내려왔다. 랑시사리는 우리 능력 밖이었다. 능력, 즉 알 수 없는 불안을 흩어내고 눈앞의 있는 그대로를 오르는 마음의 기술 말이다. 못 오른 산에 아쉬움은 없다. 둘은 여전히 1인용 텐트에 침낭 하나를 들고 랑시사리 북벽이 잘 보이는 골짜기(4,600m)를 찾아가 벽을 바라보며 1박을, 이어 간잘라패스를 넘어 폭설 속에 사흘을 걸어 남쪽 헬람부 지역으로 하산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궁금증은 가시질 않았고 대신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우리를 발견한다.

    ‘산의 의지와 생각을 들어라.’

    유일한 멘토였던 김창호 대장이 출발 전 들려준 이야기다. 우리는 가진 것 없는 방랑자, 산이 마지막 목적이 아닌 방랑자로 가능한 열려 있고자 노력했다. 산에게, 서로에게, 그리고 우리 마음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히말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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