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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화제 | 최고령 호남정맥 종주 홍성문 옹] “세상사·부모님 생각하며 걸었지… 욕심 없이 사는 게 건강 비결”

월간산
  • 입력 2015.11.10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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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세에 1,600km 종주 끝내 세계 기네스북 등재감

96세에 호남정맥 종주를 마친 인물이 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건강한 노인들도 80대만 넘기면 지팡이를 짚기 시작하는데, 90대를 훨씬 넘긴 고령에 그 험한 호남정맥 종주를 끝냈다니…. 백두대간이나 정간 포함해서 역대 최고령 종주꾼일 뿐 아니라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사건이다.

1920년생인 홍성문(洪成文) 옹이 그 주인공이다. 그것도 생일이 지났으니 만 95세를 넘겼다. 인간계가 아닌 거의 신선급이다. 어떻게 그 연세에 호남정맥을 종주했을까?

홍 옹의 백두대간과 정맥 종주는 세기 말부터 시작된다. 70세에 고희 기념으로 일본 북알프스 종주를 끝내고 2,500m 이상 63개 봉우리를 등정한 홍 옹은 78세인 1998년 10월 지리산을 출발해서 81세인 2001년 8월 19회에 걸쳐 총 64박 83일간의 백두대간 종주를 진부령에서 마쳤다. 비슷한 연배의 다른 사람들은 지팡이를 짚기 시작하는 시기에 홍 옹은 1박2일에서 길게는 5박6일까지 산에서 야영하며 지냈다. 당시엔 홍 옹이 소속한 한국산악회에서 김성대 회원이 그의 연세를 감안해서 동행했다.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심심치 않았다. 홍 옹은 “하지만 백두대간을 같이 종주한 김성대씨는 나보다 20년이나 어린 70대 중반인데 최근 거의 걷지 못하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그만큼 홍 옹은 체력이 아직 건재하다.

홍성문 옹이 호남정맥을 마친 뒤 깊어가는 가을을 즐기기 위해 낙엽이 떨어지는 거리를 걷고 있다.
홍성문 옹이 호남정맥을 마친 뒤 깊어가는 가을을 즐기기 위해 낙엽이 떨어지는 거리를 걷고 있다.
낙동정맥은 순전히 홍 옹 혼자서 끝냈다. 낙동정맥은 백두대간보다 먼저 1995년 시작했으나 중간에 백두대간 종주를 하느라 태백산 직전까지 하고 중단한 상태였다. 이를 다시 2006년 6월 6회부터 시작해서 1년 남짓 13차례에 걸쳐 88세 가을인 2008년에 끝냈다. 태백산 삼수령에서 출발해서 부산 다대포에서 마쳤다. 산에서 3박, 4박 하는 건 예사. 배낭만 해도 20㎏가 넘는다. 그 연세에 그 무게의 배낭을 질 수 있다는 것 자체도 믿기질 않는다. 덩치가 크지도 않다. 160cm 내외 되는 크지 않은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다.

낙동정맥을 끝낸 뒤 호남정맥을 바로 시작했으나 주변의 만류가 심했다. “연세도 있으니 그냥 참으시라”고. 하지만 홍 옹은 “나는 뭐든지 한 번 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며 강행했다.

90 가까운 나이에 종주를 새로 시작한다는 게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주변의 만류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 홍 옹 혼자서 출발했다. 하지만 홍 옹이 아무리 강골이지만 세월의 무게는 견디기 쉽지 않았다. 낙동정맥 종주를 끝내고 바로 출발한 호남정맥 종주는 무려 8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한 번 가면 처음에는 4박5일, 5박6일로 갔다. 날씨가 안 좋아 비를 맞으면 몇 달은 그냥 넘겨야 했다. 장비가 젖어 말려야 하고, 다시 취사와 취침장비들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작년에는 날씨가 안 좋은 날이 많아 한 번도 가지 못했다. 날씨 관계를 고려, 1년에 3차례 정도 종주했다.

호남정맥 종주하면서 20㎏에 가까운 배낭을 메고 있는 홍성문 옹. 96세라는 게 믿기질 않는다.
호남정맥 종주하면서 20㎏에 가까운 배낭을 메고 있는 홍성문 옹. 96세라는 게 믿기질 않는다.
70대에 일본 북알프스 2,500m
고봉 63개 다 돌아

“배낭에 물 무게가 제일 부담스러워. 최소 하루 2L 이상은 마셔야 하니 한 번 가면 물 무게만 10L 달해. 옛날에는 1시간에 2km는 충분히 갔으나 지금은 1km도 채 못 가니 안내판에 있는 시간의 배를 잡아야 했지.”

호남정맥 종주하면서 큰 일 날 뻔한 사고도 당했다. 종주길도 분명치 않고 내장산 이후부터는 거의 암벽에 가깝다. 막영 자리도 없다. 산죽이 덮여 길을 아예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급기야 내장산 남쪽 암벽에서 추락했다.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장성경찰서에서 출동해 장성역까지 데려다줘서 기차로 겨우 집으로 올라왔다. 병원에서 응급처치하고 봉합수술까지 받았다. 진달래 능선에서도 굴러 마침 진달래 군락 나뭇가지에 떨어진 적도 있었다. 가지가 힘이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지난 10월 7일 대장정을 끝냈다.

“이젠 종주는 더 이상 못 하겠어. 기력도 떨어지고 배낭이 너무 무거워. 당일치기 산행만 해야지. 주변에서 만류도 하지만 나 자신도 한계를 많이 느꼈지. … 힘들었지만 인생을 돌아보며 속죄하는 기분으로 걸었지. 부모님 생각하고, 남에게 서운하게 한 점 없나 하며 회상했지. 조용하게 혼자 걸으면서 많은 생각들을 정리했지. 이젠 할 만큼 했어.”

홍성문 옹은 원래 백두대간과 9개 정맥을 모두 끝내려고 했으나 1대간과 가장 긴 2개 정맥으로 만족했다. 그 거리만 해도 약 1,600km 된다. 지리산에서 백두산까지의 백두대간 거리와 비슷하다. 애초 대간 종주할 때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지리산에서 출발, 진부령에서 끝냈다. 홍 옹은 지금도 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고 있다.

“통일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생전에 남북통일이 되면 좋으련만….”

1대간, 2정맥을 96세에 모두 완주하고 손수 준비한 플래카드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1대간, 2정맥을 96세에 모두 완주하고 손수 준비한 플래카드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연세에 종주를 계속 하도록 내버려둔 가족들이 궁금했다. 부인은 2년 전 오랜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등졌다고 한다. 슬하에 1남2녀의 자식을 뒀다. 부인은 자식들이 돌봤고, 홍 옹은 일찌감치 집에서 나와 혼자 생활했다. 만주에서 중등학교와 대학교까지 졸업했고, 미 군정청 해상 운수국에서 근무하다 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 교통부 해운국에서 근무했다. 혼자 생활한 이유는 외국의 해양법을 정리해 법제화하기 위한 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홍 옹의 이름으로 된 해양법 관련 책들이 도서관에 많다고 한다. 책들이 여기저지 어지러우니, 아예 조그만 방을 하나 구해 따로 있겠다고 한 게 벌써 40년이 흘렀다고 한다.

“가족들도 수차례 내 나이를 생각해서 들어오라고 했으나 내 고집을 꺾지 못했지. 이젠 더 이상 권하지 않아.”

아들과 사위들 모두 국내 유수 기업에 다니다 은퇴했다고 한다. 사는 데 별 걱정은 없다. 이들과 손자들이 조금씩 생활비를 준다. 그리고 한국전 참전 유공자로 인정받아 연금도 조금 받는다.

계속 산에 다니기 위해 서울 옥수동에 혼자 살다가 용문으로 옮기려고 했다. 가족들이 “거기는 너무 머니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시라”고 해 타협해서 지금 구리시에 살고 있다.

어떻게 그 연세에 산행을 다닐 정도의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욕심 없이 긍정적으로 사니 건강한 것 같아. 그래도 할 일은 철저히 했지. 또 부모로부터 건강한 몸을 받은 덕이지.”

미 군정청 있을 때도 그랬고, 그 이후 공무원 하면서도 그랬고, 교수나 더 좋은 자리를 여러 차례 제안 받았으나 전부 거절하고 묵묵히 그 순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살았다고 말한다.

홍 옹은 그 연세에도 당일치기 산행은 계속 하겠단다. 속계가 아닌 선계의 목소리같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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