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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8월의 클라이밍 | 최오순·손용식] 압도적인 폭염 뚫고 도봉산 황홀경에 오르다

월간산
  • 입력 2016.08.1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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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등산강사들의 도봉산 냉골리지 등반 스케치

슬랩의 미세한 돌기에 온 감각을 세워 집중하는 손용식.
슬랩의 미세한 돌기에 온 감각을 세워 집중하는 손용식.

햇살이 거칠어지는 계절. 가만히 있는데도 허공 속에서 누군가 목을 조르는 듯했다. 파란 하늘 아래 쏟아지는 뜨거운 햇살, 정신 나간 사내가 환하게 웃으며 멱살을 잡고 흔드는 것만 같은 착각. 도봉산 입구에서 선인봉을 생각하던 마음은 계속 낮아져 냉골에 이르렀다. ‘냉골리지’라고 발음할 때 잠시 시원해지는 느낌이 좋았고, 가까워서 좋았다. 몸이 원하는 바윗길, 그 앞에 선 사내와 여인은 친절했다.

두 사람의 직업은 프리랜서 등산강사, 매너와 안전이 몸에 배어 있다. 냉골리지는 리지등반 초보자를 위한 트레이닝길 같은 곳이지만 스스로를 낮추어 산의 물결에 몸을 맞춘다.

한국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 오른 최오순

최오순(49)의 산은 높이가 만만찮다. 1993년 에베레스트를 한국 여성 최초로 지현옥·김순주와 함께 올랐다. 1992년 캉텐그리(7,010m)와 임자체를 올랐으며, 1994년 북미 최고봉 데날리(매킨리·6,194m)를 올랐다. 2004년에는 유럽 최고봉 엘브루즈(5,642m)를 올랐으며 2006~2007년에는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6,959m)와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895m)를 올라 5대륙 최고봉 등정을 이뤄냈다. 선구적으로 활약한 여성 고산등반가인 것이다.

손용식(48)은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능력이 있다. 북한산 리지전문산악회였던 만효산악회에서 활동한 그는 1993년 코오롱등산학교 여름 암벽반을 수료하고, 설악산 비선대에서 일하며 몇 년간 살았다. 천화대, 울산바위, 장군봉 같은 외설악의 바윗길을 수차례 올랐다. 천화대만 200번 정도 올랐으며 홀드 위치를 모조리 외울 정도였으니, 외설악 전문가인 셈이다. 또한 워킹산행, 스키, 빙벽등반, 암벽등반, 인공등반 등 모든 방식의 등반을 소화하는 토털클라이머다.

1 멋들어지게 뻗은 소나무가 최오순의 등반을 구경한다.
2 은석암의 고난이도 슬랩을 자유등반으로 오르는 손용식.
1 멋들어지게 뻗은 소나무가 최오순의 등반을 구경한다. 2 은석암의 고난이도 슬랩을 자유등반으로 오르는 손용식.
도봉산에 든다. 오전의 나무 그늘은 달콤하다. 햇살이 선전포고하기 전, 바위에 붙는다. 크랙 날개를 언더로 잡고, 몸을 끌어올린다. 손용식 강사가 가볍게 올라선다. 냉골리지의 시작이다. 후등으로 최오순 강사가 오른다. 고산 등반 경력은 최오순이 앞서지만, 암벽등반 능력은 손용식이 앞선다.

손용식은 꼼꼼한 등반을 한다. 쉬운 바윗길도 최선을 다해 오르고 있음이 전해진다. 피치를 마친 다음엔 후등자들을 세세하게 챙긴다. 오랜 강사 생활 때문인지 함께 등반하는 이를 챙기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스릴 넘치는 발자국 모양의 슬랩을 오른다. 공룡발자국 바위라 불리며 여기서부터 시야가 트인다. 프리랜서 등산강사인 두 사람이 리지 특유의 고도감을 만끽하며 오른다. 손용식 강사가 볼트 상태를 점검하며 주도면밀하게 오른다. 최대한 안전하게 오르려는 습관이 묻어난다.

파란 하늘과 맞닿은 크랙을 피아노 건반 치듯, 손을 번갈아 넣으며 안정적으로 오른다. 군살 없는 체격과 팽팽한 장딴지에서 현역 클라이머 특유의 성실함이 풍긴다. 최오순 강사는 스타트는 조심스럽지만 일단 몰입하면 과감한 몸짓이다. 여성적인 균형감과 파워를 동시에 사용하며 천천히 오른다.

전북 고창이 고향인 그녀는 고교 시절부터 산악부 활동을 했다. 선운산에서의 야영을 누구보다 즐겼기에 취직 후에도 자연스럽게 등산을 했다. 고교 졸업 후 곧장 수원 삼성전자에 입사한 그녀는 우연히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다가 인수봉을 보고, 울컥 눈물을 쏟았다. 인수봉의 거대한 아름다움과 등반하는 클라이머들을 보며 가슴이 아릴 정도로 등반 욕구에 휩싸인 것이다. 회사내의 많은 산악회 중에서도 암벽등반을 전문으로 하는 삼성전자 산악부에 반년간의 테스트를 거쳐 1990년 입회해 무섭게 산에 빠져들었다. 매주말 산에 가는 것은 물론이고, 일 하는 짬짬이 늘 매듭법을 연습하고, 산악서적을 읽으며 기초를 쌓았다. 1991년에는 정승권등산학교에서 암벽 교육을 받았다.

냉골리지 스타트 구간을 오르는 최오순. 언더 홀드를 잡고 순간적인 힘을 쏟아 올라선다. 짧은 볼더링 바위라 로프 없이 스파팅만으로 등반한다.
냉골리지 스타트 구간을 오르는 최오순. 언더 홀드를 잡고 순간적인 힘을 쏟아 올라선다. 짧은 볼더링 바위라 로프 없이 스파팅만으로 등반한다.
큰 침니 구간을 섬세한 동작으로 오르는 손용식 강사. 그는 어떤 스타일의 바윗길을 만나도 정교한 등반을 구사한다고 정평이 나 있다.
큰 침니 구간을 섬세한 동작으로 오르는 손용식 강사. 그는 어떤 스타일의 바윗길을 만나도 정교한 등반을 구사한다고 정평이 나 있다.
경기도산악연맹 구조대로도 활동한 최오순은 1993년 한국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경기연맹 추천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국의 많은 여성 산악인들이 지원해 경쟁이 치열했다. 최오순은 5일 동안의 테스트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직장에 사표를 쓰고 왔을 정도로 에베레스트를 오르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다. 1992년 임자체와 캉텐그리를 등정한 경험이 있었기에 고산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 직장까지 그만두고 간 원정이었기에 에베레스트에서 자신의 모든 걸 쏟아 부었다. 

“최종캠프인 사우스콜까지 갔어요. 지현옥 대장, 김순주, 정건, 저까지 네 명이었어요. 정상이 목전인데 산소는 세 명분밖에 없었어요. 등반 능력이 제일 뛰어난 A조였던 지현옥 대장과 김순주를 제외하고, B조인 저희 두 사람 중 한 명이 정상을 포기해야 했어요. 둘 다 울기만 하고 포기하겠다는 말을 못 했어요. 결국 대장이 4캠프에 올라온 순서대로 간다고 해서 제가 올라갈 수 있었어요.”

이후 그녀는 외벽청소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산을 오르는 데만 열중했다. 그러다 1996년 남편인 가의용과 결혼해 딸을 낳았으며 육아와 일에 집중하다 2004년부터 고산등반에 나서 2007년 5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했다.

1993년 경기도등산학교 졸업식장에서 수료생과 에베레스트 등정을 마치고 귀국해 인사차 들른 원정대원으로 만나 결혼한 가의용·최오순 부부는 산악계에서 손꼽히는 잉꼬부부다. 그는 “남편이 알뜰하게 지원해 주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며 남편 자랑을 보따리 풀어놓듯 이야기한다.

오후로 접어들자 햇살의 폭격이 시작된다. 은석암 아래 테라스를 나와 슬랩으로 접어든다. 햇살을 피할 곳이 없는 너른 암벽. 암벽화가 녹아내릴 것 같은 무더위 덕분에 등반 난이도가 높아진다. 당연하다는 듯 바위에는 아무도 없다. 두 사람이 폭압적인 제왕의 독재에 외롭게 맞선다. 바위와 하늘 사이에는 두 사람뿐이다. 클라이머가 자유로워지는 시간이다.

크랙에 손을 번갈아 넣으며 오르는 최오순 강사.
크랙에 손을 번갈아 넣으며 오르는 최오순 강사.
공룡발자국 바위라 불리는 구간을 오르는 최오순 뒤로 서울 도봉구 일대가 펼쳐진다.
공룡발자국 바위라 불리는 구간을 오르는 최오순 뒤로 서울 도봉구 일대가 펼쳐진다.
폐결핵 딛고 설악산 프리등반가가 되기까지

손용식은 눈물 젖은 빵도 사치였던 유년시절을 기억한다. 가난한 집의 3남2녀 중 셋째였는데, 어머니는 위암에 걸려 집을 나갔다. 워낙 없는 살림이었기에 집에 폐를 끼치기 싫었던 게다. 부두 일을 하던 아버지는 술에 취해 때리는 날이 많았고, 학교에 도시락을 싸가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기에 친구들이 나눠 준 밥을 먹어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동네 형을 따라 서울로 가출한 건, 반항이 아닌 생존을 위한 자연스런 선택이었다.

“양복공장, 가방공장, 옷공장, 공장이란 공장은 다 돌았어요. 중국집 배달, 가스 배달도 오래 했어요. 제대로 못 먹고 차가운 데서 자는 게 일상이다 보니 폐결핵에 걸렸어요. 기침을 하는데 피가 막 넘어오는 거예요.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치료 차원에서 산을 다니기 시작했고, 여기까지 왔어요. 힘들었다고 생각지 않고 약이 된 시간이라 생각해요.”

폐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요양원에 들어간 그는 매일 사람이 죽어나가는 요양원에서 살아나왔다. 좋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20대 초반부터 산을 다녔고, 만효산악회에 가입해 북한산 만경대와 원효리지를 매주 올랐다. 전문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코오롱등산학교 암벽반을 수료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설악산 비선대산장에서 일을 도와주며 매일 등반했다. 천화대, 장군봉, 삼형제길을 가장 많이 했는데 평일에는 자일파트너가 없어 혼자 오르는 날이 많았다. 로프를 메고 오르면 무거우니 몸에 묶고 올라, 하강할 때만 로프를 사용한 것이다.

이때부터 프리랜서 등반가이드 일을 시작해 지금까지 하고 있다. 비선대에 살면서 밥 먹듯 외설악을 오르는 그에게 사람들이 등반안내를 부탁한 것이 계기였다. 당시 월간<山>에 오랫동안 외설악 등반가이드를 해준다는 광고를 싣기도 했다. 이후 코오롱등산학교를 비롯한 많은 아웃도어 브랜드와 단체에서 등산강사로 활동해 왔다. 스키에도 푹 빠져 겨울엔 스키 강사로 일했다. 2006년 등산학교 학생이었던 아내를 만나 2009년에 결혼했다.

은석암 꼭대기에 선 두 사람이 긴장을 풀고 환한 웃음을 짓는다.
은석암 꼭대기에 선 두 사람이 긴장을 풀고 환한 웃음을 짓는다.
한때는 선운산에서 5.13b 난이도까지 올랐으며 5.12a를 온사이트로 올랐다. 고산등반은 하지 않았지만 이탈리아 돌로미테는 여러 번 등반을 했다. 그는 “돌로미테는 고 난이도의 오버행벽 20피치를 하루에 올라야 하는 곳도 있어 등반성이 좋다”고 얘기한다.

그는 술·담배를 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의 별명은 ‘손사리’, 몸에서 사리가 나올 것 같다고 해서였다. 교육 스타일도 FM 스타일이다. 그는 “왕초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교육하고 싶다”고 한다. 워킹산행 보행법부터 시작해 암빙벽 선등까지 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싶다는 것이다.

최오순은 2007년 등산강사 연수를 받고 그 다음해부터 지금까지 아웃도어 브랜드와 기관·학교·단체 등에서 프리랜서 등산강사 일을 해왔다. 현재 대한산악연맹 등산교육원 전임강사이자 교무를 맡고 있다. 엄마 품이 그리울 땐 지리산을 찾고, 친구가 그리울 땐 설악산을 찾는다는 그녀는 산이 좋은 이유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한다. 특히 “매일 같은 코스를 가더라도 옆에 사람이 있으면 산행이 즐겁다”며 “사람이 좋아서 산에 간다”고 웃으며 얘기한다.

냉골리지의 클라이맥스인 은석암이 막강한 힘을 과시하며 불끈 솟았다. 왼쪽의 쉬운 길을 두고, 오른쪽 페이스성 슬랩으로 향한다. 일명 ‘볼트 따기’를 해야 하는 인공등반 코스, 손용식이 조심스럽게 자유등반을 시도한다. 파란 하늘과 누런 바위가 맞닿아 있다. 하늘과 바위의 틈을 최오순과 손용식이 오른다. 하늘에 속하지도, 바위에 속하지도 않은 채 미묘한 경계를 따라 오른다. 도봉산 황홀경 속으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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