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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안동ㆍ예천 특집 | 하회마을 족집게 투어 가이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인의 삶, 그 조화로운 깊이에 대하여

월간산
  • 입력 2016.08.22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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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 둘러보고, 화산 산행하고, 강변 아홉 가지 명소까지 100% 즐기기

안동 하회마을 양진당.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대문 안 사랑채가 600년 역사의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 건축물이다.
안동 하회마을 양진당.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대문 안 사랑채가 600년 역사의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 건축물이다.
한국에서 안동 하회마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안동 하회마을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세계인에게 인정받는 한국의 전통 유산이다. 당시 안동을 찾았던 유네스코 실사단은 “전통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고, 마을의 공간 배치가 조선시대 사회구조와 독특한 유교 양반문화를 잘 보듬고 있으며, 이런 전통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평했다. 또한 보여 주기 공간이 아닌 주민들이 대를 이어 지금도 거주하는 생활공간임을 높이 평가했다.

보통은 하회마을을 풍산 류씨 일가가 모여 사는 민속촌이라 여기지만, 그 안에는 다채로운 이야기와 풍경이 담겨 있다. 오래된 가옥 몇 채 둘러보고 식사만 하고 떠나기에는 아까운, 마을을 둘러싼 산과 강에는 산꾼 스타일의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널려 있다.

이제부터 박점석 안동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하회마을을 둘러보자. 박점석 해설사는 1990년대부터 안동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한 20년 경력의 안동 전문가이다.

부용대에서 본 안동 하회마을. 낙동강이 하회마을을 섬처럼 둘러싸고 흘러간다.
부용대에서 본 안동 하회마을. 낙동강이 하회마을을 섬처럼 둘러싸고 흘러간다.

하회마을 속살 들여다보기

안동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豊山 柳氏)가 600여 년간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씨족마을이다. 우리 전통 기와집과 초가집이 잘 보존된 곳이며, 조선시대 학자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 형제가 자란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회(河回)라는 마을 이름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데서 유래한다. 박점석씨는 하회마을이 원래 강이었다고 일러 준다. 강물에 실려 온 토사가 끊임없이 쌓여 땅이 되었다는 것. 600여 년 전 풍산 류씨의 선대인 류종혜 공이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땐 질퍽한 갈대밭이었다고 한다.

류종혜 공은 이 땅이 천혜의 길지라 여겨 이곳에 처음으로 집을 짓고 살았다. 허나 땅이 물러 집이 계속해서 무너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꿈에 도인이 나타나 “이렇게 좋은 땅을 그냥 차지하려 하다니 무뢰하다”며 “이 땅을 갖고 싶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쌓아라”고 얘기했다. 이후 그는 하회마을 입구인 병산서원 삼거리에 움막을 짓고 지나는 길손들에게 숙소와 음식을 3년 동안 내어주었다. 그 뒤로 마을에 집을 짓자 더 이상 무너지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에 대해 향토사학자들은 당시 하회마을 인근은 김해 허씨와 광주 안씨가 살던 마을이었는데, 풍산 류씨가 처음 와서 터를 잡아야 했기에 주변 인심을 살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또 토사가 쌓인 땅이 집을 지어도 괜찮을 정도로 굳어지려면 최소 3년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토박이였던 허씨와 안씨 집은 지금은 한 가구도 없단다. 하회마을은 ‘허씨 터전이요, 안씨 문전에 류씨 배반(杯盤)’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뒤늦게 들어온 풍산 류씨가 점차 번성하자 허씨들이 한두 집 떠나고, 이어 안씨들이 떠났다는 이야기다.

수령 600년의 하회마을 느티나무. 마을의 삼신당 역할을 한다.
수령 600년의 하회마을 느티나무. 마을의 삼신당 역할을 한다.

하회별신굿탈놀이 매주 공연 열려

하회마을 내에는 차량이 통제된다. 하회마을 입구에는 매표소, 식당가인 하회장터와 주차장, 하회탈박물관이 있다. 하회마을 내에는 편의점이 없고 식당 수가 적으므로 입구의 식당가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한다. 셔틀버스를 타고 1km를 들어가면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수관에 닿는다. 매주 수·금·토·일요일 오후 2시에 전수관에서 굿탈놀이 공연이 상시 열린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옛 서민들의 놀이였다. 500년 전부터 안동 지역에서는 특별한 날 서낭신에게 별신굿을 해왔는데, 굿과 아울러 서낭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탈놀이를 했다. 우리나라 탈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일제시대에 단절되었으나 뜻있는 인사들에 의해 재현되어 상설공연장에서 매주 열리고 있다.

하회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전통가옥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어 조선시대로 간 것 같은 독특한 체험을 할 수 있다. 하회마을은 보여 주기 식 전시 가옥이 아닌 현재 주민이 살고 있는 자연마을이다. 구한말까지 350호가 살았으나 현재 150여 호가 살고 있다. 총 127개 가옥이 있으며, 이 중 12개 가옥이 보물이나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보물 제306호인 양진당(養眞堂)은 풍산 류씨의 대종가(大宗家)이다. 류종혜 공이 맨 처음 지은 집이 바로 이곳이다. 임진왜란 때 일부 소실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해, 고려 말 건축양식과 조선 중기 건축양식이 섞여 있다.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 집이며 99칸으로 전해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 류성룡의 생가이며 지금도 후손들이 살고 있다.

양진당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사랑채가 있는데 600년 된, 하회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원조격의 건물이다. 집은 99%가 소나무로 만들어졌으며 1%가 싸리나무를 사용했다고 한다. 기둥마다 배어 있는 소나무의 손때 묻은 나이테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보물 제414호인 충효당(忠孝堂)은 서애 류성룡의 종가댁이다. 양진당에서 태어난 류성룡은 이곳에서 자랐다. 류성룡이 30여 년간 몸담은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했을 당시의 집은 현재의 충효당보다 극히 단출했다고 한다. 지금의 충효당은 서애 사후에 지은 집이며 조선 중기의 전형적 사대부 집으로서,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52칸이 남아 있다. 충효당 내에는 영모각이 별도로 건립되어 서애 선생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바깥마당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2세의 방문기념 식수가 있다. 하회마을에는 고택을 비롯한 볼거리가 많은데 미리 문화관광해설사 예약(054-840-6974)을 하면 무료로 해설을 들을 수 있다.

하회마을에서 꼭 거쳐야 할 곳 중 하나는 삼신당이다. 이름처럼 마을의 삼신나무인 셈이다.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로 류종혜 공이 처음 이곳에 터를 내릴 때 심은 나무라고 한다.

1 물로 지정된 충효당. 2 회마을의 덕여재 민박집. 전체 150여 호 중에서 40여 호가 민박을 운영한다.
1 물로 지정된 충효당. 2 회마을의 덕여재 민박집. 전체 150여 호 중에서 40여 호가 민박을 운영한다.
하회마을을 지키는 600년 된 느티나무

하회마을을 산 위에서 보면 삼면을 강이 둘러싼 배의 형상인데 돛이란 의미로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안내판을 굳이 보지 않아도 거대하고 신묘한 첫인상에 심상찮은 나무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마을 여성들이 자식을 갖게 해달라고 빌었으며, 지금은 방문객들이 소원성취를 비는 장소가 되었다. 한켠에 비치된 한지에 소원을 적어 나무 둘레의 새끼줄에 묶어 놓으면 매년 음력 1월 14일에 불에 태운다. 다음날인 정월대보름에는 지신밟기 행사를 열어 마을의 액운을 막는다.

가장 운치 있는 곳은 만송정(萬松亭)숲이다. 하회마을 북서쪽 강변의 모래밭에 펼쳐진 소나무숲으로 200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조선 선조 때 류성룡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용이 강 건너편 바위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해 이곳에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현재의 숲은 1906년에 다시 심은 것이다.

숲에는 수령 90~150년 된 소나무 100여 그루와 마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심는 작은 소나무들이 함께 자란다. 이 소나무들의 크기는 높이 16~18m, 가슴높이 줄기지름 30~70cm 정도이다. 이 숲은 여름에는 홍수 때 수해를 막아 주고 겨울에는 세찬 북서풍을 막아 주며, 마을사람들의 산책 공간으로 이용된다. 잘생긴 소나무들의 우람한 향연과 고즈넉하게 흘러가는 낙동강물이 조화로워, 하회마을에서 가장 자연미가 빼어난 곳이다.

화산 정상 직전의 벤치 전망대에서 본 하회마을과 낙동강 물굽이. 왼쪽 여러 가구가 모인 마을이 하회마을이다.
화산 정상 직전의 벤치 전망대에서 본 하회마을과 낙동강 물굽이. 왼쪽 여러 가구가 모인 마을이 하회마을이다.

류종혜 공이 올라 하회마을 자리 점찍은 꽃산(花山)
하회마을 소방서~화산봉~정상~병산서원 4.2km 코스

하회마을 구경은 화산(327m) 산행으로 완성된다. 화산에 올라서야 하회마을이 왜 천하의 명당인지 알 수 있다. 화산은 꽃 화(花)자를 쓰는데 이 산에 진달래가 많았고, 마을에 배나무가 많아 봄이면 흰 꽃이 장관이었다 하여 유래한다. 때문에 과거에는 꽃뫼 혹은 꽃산이라고 불렸으며, 하회마을을 휘감아 도는 강물을 ‘꽃물’이라 불렀다고 한다.

화산은 문수지맥에서 갈라져 나온 지능선 끝에 솟은 산이다. 경북도청이 자리한 검무산 언저리에서 능선이 갈라져 나와 솟구쳤기에 경북도청의 명당 기운이 이어져 있다. 지형도를 보면 하회마을은 화산에 안긴 터임을 대번에 알 수 있다.
 
화산은 탈놀이 공연장과 하회마을 입구 주차장, 병산서원 세 곳이 대표적인 들머리다.
탈놀이 공연장 옆에는 119 소방서가 있는데, 소방서 옆 임도에서 산행이 시작된다. 임도를 따라가면 곧장 왼쪽으로 ‘화산봉 1.55km’라 적힌 이정표를 만나고 여기부터 산길이다.


소방서의 고도는 127m, 정상은 327m, 고도 200m를 높여야 한다. 솔잎이 땅에 깔린 전형적인 육산 능선을 따르게 되는데, 오르막이 꾸준히 이어져 낮다 하여 방심했다간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길에 당황할 수 있다. 소나무와 굴참나무가 뒤섞여 제공권 싸움을 벌이고 있는 화산은 등산객이 많지 않아 고즈넉한 산행이 가능하다. 등산객은 드물지만 산길은 뚜렷해 길 찾기는 어렵지 않다.

20분을 땀 흘려 오르면 보상인양 처음 경치가 드러난다. 벤치가 있는 봉우리 쉼터로, 나무 사이로 띄엄띄엄 풍경이 드러난다. 탁 트이진 않았지만 하회마을이 처음 내려다보이는 곳이라 감탄이 절로 나온다.

능선을 따라 고도를 더 높이면 화산봉이 나온다. 화산봉(270.7m)은 표지석과 안내판이 있으며, 간벌을 해놓아 경치가 트여 있다. 화산에 오르면 하회마을이 반도 형태로 튀어 나왔으며 강물이 휘감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마치 배가 나아가는 모습 같아 ‘행주형(行周形)’이라 한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우물을 파면 배 형태의 마을이 가라앉는다 하여 파지 못하게 했단다.

하회마을은 물 위에 뜬 연꽃 같다 하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했다. 때문에 돌담을 쌓으면 연꽃에 구멍이 생긴다 하여 금기시한 적도 있었다. 특히 하회마을을 둘러싼 강물이 큰 곡선을 그리며 도는 것이 태극과 같다고 하여 옛날부터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의 대길지로 보았다.

화산은 흙이 많은 낮은 산이라 화려한 바위나 거대한 나무는 없다. 소나무에서 굴참과 떡갈 같은 참나무로 식생이 변하고 있는 과정이다. 다만 드문드문 드러나는 하회마을 물돌이 모습이 색다른 조망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때문에 이곳에 처음 집을 지은 류종혜 공은 화산에 수십 번 올라 주변 지세를 살폈다고 한다.

1 하회마을 뒷산인 화산은 소나무가 많은 육산이다. 2 등산로 입구에서 20여 분을 올라서면 경치가 보이는 쉼터에 닿는다.
1 하회마을 뒷산인 화산은 소나무가 많은 육산이다. 2 등산로 입구에서 20여 분을 올라서면 경치가 보이는 쉼터에 닿는다.
하이라이트는 정상 직전의 벤치 전망 터. 사방으로 트인 건 아니지만, 벤치에 올라서면 하회마을 맞은편 광덕리가 한반도처럼 생긴 모습이 드러난다. 검무산 기슭의 경북도청과 경북교육청의 거대한 기와지붕은 마치 북악산 기슭의 청와대를 닮았다. 검무산은 332m로 낮지만 생김새의 비율이 이상적이고 바위가 인상적으로 솟아, 비범한 산임을 멀리서도 알 수 있다.

정상에는 평상 형태의 정자와 ‘정상봉’이라 적힌 표지석이 있다. 경치는 나무로 둘러싸여 시원한 맛은 없다. 여기서 갈림길을 만나는데 왼쪽으로 내려서면 하회마을 입구의 주차장에 닿는다. 1km 거리라 20분이면 내려선다.

이 갈림길에서는 경북도청에 접한 큰 저수지가 보인다. 이곳은 옛날부터 둑이 자주 터져 주민들이 근심이 많았다고 한다. 어느 날 한 여자가 지나다가 “수로를 서쪽으로 내라”고 충고해 주었고, 이를 따르자 그때부터 둑이 넘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 ‘여자가 지목해 준 못’이라 하여 ‘여자지’로 불렸으나 묘한 뉘앙스가 있어 최근 ‘호민지’로 이름을 바꾸었다.

병산서원으로 향하는 하산길. 봉우리 두 개가 나타나며 아직 하산은 멀었다고 엄포를 놓는다. 하산길에는 간간이 풍산읍 일대가 드러나는데, 너른 평야라 시원하게 트여 있다. 풍요로움이 산과 같다 하여 이름이 유래하며 안동에서 가장 넓은 평야지대다.

소나무가 무성한 능선을 내려서자 기와집인 병산서원과 낙동강 물굽이가 산행이 끝났음을 알려 준다. 하회마을 소방서에서 화산봉과 정상을 거쳐 병산서원으로 내려서는 코스는 총 4.2km,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더 짧은 산행을 원한다면 정상에서 주차장 방면으로 내려서면 된다.

1 병산서원 입교당에서 본 만대루와 병산. 산이 병풍처럼 앞을 막고 있어 집중력이 높아진다고 여겼다. 2 류운룡이 제자를 가르쳤던 겸암정.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으며 카페로 활용되고 있다. 현판 글씨는 류운룡의 스승인 퇴계 이황이 쓴 것. 3 하회마을에서 가장 운치 있는 장소인 만송정. 소나무 방풍림이다.
1 병산서원 입교당에서 본 만대루와 병산. 산이 병풍처럼 앞을 막고 있어 집중력이 높아진다고 여겼다. 2 류운룡이 제자를 가르쳤던 겸암정.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으며 카페로 활용되고 있다. 현판 글씨는 류운룡의 스승인 퇴계 이황이 쓴 것. 3 하회마을에서 가장 운치 있는 장소인 만송정. 소나무 방풍림이다.

아홉 가지 명품 경치 하회구곡(河回九曲)

남옹 류건춘(1739~1807)이 하회마을 강줄기에 설정한 명소 하회구곡은 그가 지은 ‘하회구곡시’를 통해 전한다.

1곡은 병산(屛山)으로 병산서원의 앞산이다. 병산서원에서 본 병산을 류건춘이 첫 번째로 꼽았다.

병산서원은 입구부터 화사한 분홍꽃을 만나는데 백일홍 100그루가 식재되어 있다. 백일홍은 청렴결백한 선비를 상징한다 하여 서원 주변에 많이 심었다. 병산서원은 풍산 류씨 가문의 서당으로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 백미로 꼽힌다. 병산서원에서는 앞을 흐르는 강과 산이 보인다. 병산은 병풍 병(屛)자를 쓰는데 실제로 병풍이 앞을 막고 있는 듯 보인다.

때문에 풍수적으로 집터로는 낙제라고 한다. 산이 시야를 막고 있어 답답하다는 것이다. 또 급물살이 흘러 재물이 빨리 빠져나간다고 믿었다. 서원으로 길지였던 것은 산이 막고 있어 잡생각 없이 집중할 수 있으며, 물살처럼 빨리 입신해 출세할 수 있다 믿었기 때문이다. 원래 풍산읍내에 있던 것을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겨 왔다. 지금도 이곳에서 지방 유림들이 류성룡 선생 제사를 매년 봄·가을에 지내고 있다.

선시대에는 악산인 바위산을 정면으로 보고 있으면 악산처럼 난폭한 성품을 갖게 된다고 믿었다. 때문에 현관 정면에 만대루(晩對樓)를 세워 병산의 일부분이 가려지게 했다고 한다.

2곡은 남포. 하회마을 남쪽의 강을 건너는 섶다리였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이름만 남아 있다. 3곡은 수림으로 하회마을 강 건너에 자리한 상봉정 뒤의 작은 언덕 숲을 말한다. 수림 뒤로 지는 노을이 장관이었다고 하는데, 도로가 생기며 지형이 변해 옛 모습은 찾기 어렵다.

4곡 겸암정(謙菴亭)은 하회마을 강 건너 맞은편의 정자로, 겸암 류운룡이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절벽 전망대인 부용대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하회마을 쪽에서 보면 짙은 숲에 둘러싸여 잘 보이지 않는다. '‘謙菴亭’이라 쓴 현판은 스승인 퇴계 이황의 친필이다. 겸암정에서 보면 강물이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강물이 소용돌이치며 흘러, 수영을 잘하는 사람도 익사하는 일이 다반사다.

만송정에서 본 부용대 절벽. 절벽을 두고 왼쪽에 겸암정이, 오른쪽에 옥연정사와 화천서원이 있다.
만송정에서 본 부용대 절벽. 절벽을 두고 왼쪽에 겸암정이, 오른쪽에 옥연정사와 화천서원이 있다.
하회마을 최고 전망대는 부용대

5곡은 하회구곡의 백미인 만송정은 류운룡이 심은 소나무숲이며, 6곡 옥연(玉淵)은 부용대 아래의 강물이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부용대 절벽이 비친 옥빛 연못이다.

부용대(芙蓉臺)는 하회구곡에서 가장 경치가 뛰어난 70m 높이의 바위벼랑이다. 부용대는 최고의 전망대로 하회마을을 끼고 물굽이가 휘돌아나가는 것을 생생히 볼 수 있다.

매년 음력 7월 16일 밤 만송정에서 강 건너편 부용대까지 밧줄로 이어 불꽃을 피우는 선유(船游)줄불놀이가 펼쳐진다. 부용대에서부터 밧줄을 타고 내려오며 참나무숯의 불꽃이 하늘에서 터지고, 그 빛이 강물에 비치는 모습이 장관이다.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의 뱃놀이와 함께 펼쳐졌다고 하니 그 풍류를 짐작할 수 있다. 4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이 줄불놀이는 일제강점기시대 중단됐다가 최근 다시 이어지는 전통놀이이다.

부용대 동쪽에는 류성룡이 <징비록>을 썼던 장소인 옥연정사가 있다. 옥연정사 옆으로 부용대 절벽 하단을 따라 위태로운 벼랑길이 있다. 친형인 류운룡이 부용대 서쪽의 겸암정을 오가기 위한 길이었다고 한다.

7곡 도포(島浦)는 옥연 하류의 작은 섬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8곡 화천(花川)은  하회마을 앞을 흐르는 강물을 말한다. 옛날 이곳에 배나무가 많아 늦은 봄이면 배꽃으로 온 마을이 하얗게 뒤덮여 마을의 산을 화산(花山)이라 하고 강을 화천이라 했다. 화천이란 이름은 류운룡의 학덕을 기려 유림들이 세운 ‘화천서원’으로 남아 있다.

9곡 병암(屛巖)은 하회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강물 하류의 바위 벼랑이다. 하회마을로 들어선 강물의 상류인 병산이 1곡이며, 강물의 가장 하류인 병암이 9곡이 되는 것이다. 병암은 도로에서는 잘 보이지 않으며, 비포장길로 연결된 드리미오토캠핑장에 들어서야 볼 수 있다.

교통
안동버스터미널에서 46번 하회마을행 버스를 타면 된다. 하루 7회(06:20~18:20) 운행. 주차료는 하루 2,000원, 하회마을 입장료는 3,000원. 매표소에서 마을까지 무료셔틀버스 10분 간격으로 운행. 예천에서 접근 시, 예천버스터미널에서 풍산행 버스를 타고 풍산고교 앞에서 하차해 하회마을행 버스로 갈아타면 된다. 예천에서 풍산행 버스는 하루 11회(06:30~18:50) 운행.

숙식(지역번호 054)
전통고택 체험을 하면서 1박할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도 있다. 매월 첫째 주 금·토요일 오후 4시부터 익일 9시 30분까지이며, 흙벽돌 만들기, 한지로 창호 바르기, 도자기 체험, 한옥 아궁이 체험 등이 가능하다. 하회마을 내에는 민박이 많다. 모두 전통가옥이다. 덕여재(857-2885), 감나무집(853-2957), 행산고택(853-2214), 회제고택(853-2630) 등이 있다.
식당은 매표소 인근의 식당가에 집중되어 있다. 하회식당(853-9467), 이화식당(842-3456), 하동고택(853-3776), 솔밭식당(853-0660) 등이며 안동찜닭이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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