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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12월의 클라이밍 | 송한나래·송석원] ‘빙벽의 잔다르크’ 상승기류를 타다

월간산
  • 입력 2016.12.0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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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 챔피언 딸과 골수 바위꾼 아버지의 가래비 드라이툴링

위협적인 검은벽을 송한나래가 침착하게 오른다. 얼음이 없는 바위벽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용감하고 꼼꼼하다.
위협적인 검은벽을 송한나래가 침착하게 오른다. 얼음이 없는 바위벽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용감하고 꼼꼼하다.

여인은 고요한 흡입력이 있다. 잡아먹을 듯 험악하게 포효하는 압도적인 바위벽, 하얀 피부에 깊은 눈망울을 가진 그녀의 반대편에 있다. 가장 거친 것과 가장 섬세한 것의 만남. 그녀의 등반은 부드러운 힘이 있다.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능력이 있다. 살벌한 벼랑 위를 바람 타고 맴도는 솔개의 우아한 비행술처럼 상승기류를 타고 오른다.

아버지와 딸이 양주 가래비를 찾았다. 얼음이 없는 얼음벽은 공허하다. 바람만 휘감아 돌 뿐 단단한 바위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등장으로 압도적인 제왕의 폭정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잔다르크의 등장마냥, 약한 것들을 대변하는 섬세한 그녀가 공간을 흔들어 놓는다.

‘빙벽의 잔다르크’ 송한나래(아이더 클라이밍팀·25)의 등장이다. 그녀의 등장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2011년부터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 대회가 청송에서 열렸고, 사람들은 한국 선수의 대회 우승을 기다렸다. 박희용·신운선 같은 세계적인 선수가 있었기에 금방 이뤄질 것 같았던 한국 선수의 우승은 2015년이 돼서야 이룰 수 있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주인공은 송한나래였다.

그녀의 승리는 극적이었다. 시간 종료와 동시에 완등에 성공했고, 결승 루트 꼭대기에 오른 유일한 완등선수였다. 태극기를 처음으로 청송 얼음골 꼭대기에 올린 것이다. 모든 균형을 깨뜨려버린 잔다르크의 등장처럼 그녀는 빛났다.

“운이 좋아 어쩌다 한 번 1등을 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2016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아이스클라이밍 4차 월드컵 대회에서 다시 우승하며, 얼음벽의 잔다르크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가래비 우벽 믹스루트 앞에서 장비를 꺼낸다. 갑옷을 입듯 하네스와 헬멧을 착용하고 창과 방패를 챙기듯 아이젠과 아이스바일을 장착한다. 얼음이 전혀 없는 바위벽을 아이스클라이밍 장비로 오르는 드라이툴링은, 프로선수들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경기장용 합판벽과 바위벽은 감각이 다르다.

하지만 용감하다. 그녀는 겁이 없다. 장비를 갖추자 눈빛이 변한다. 솜털 날리는 소녀는 없다. 잔다르크처럼 돌격하듯 벽에 붙는다. 바위와 쇠붙이의 마찰음이 가래비에 울린다. 생소한 감각 탓에 초반 오름이 더디다. 크랙에 바일을 꽂아 바위 상태와 감각을 꼼꼼히 확인한다. 못지않게 분주한 이는 부친 송석원(어센트산악회·61)이다. 신중하게 로프를 풀어 주며 다치지 않도록 확보에 집중한다.


아직 노장이라 불릴 때가 아니라는듯 송석원이 시원한 자세로 벽을 오른다. 그는 1979년부터 지금까지 어센트산악회에서 현역으로 등반하고 있다.
아직 노장이라 불릴 때가 아니라는듯 송석원이 시원한 자세로 벽을 오른다. 그는 1979년부터 지금까지 어센트산악회에서 현역으로 등반하고 있다.

IMF의 높은 벽을 오르고 오르다

8남매 중 막내인 송석원은 대전 보문산 아래가 고향이다. 대전의 만석꾼 집안이었으나 토지개혁 때 신고하지 않는 바람에 땅을 모두 몰수당하고 말았다. 초등학교 때 서울로 이사 온 그는 가세가 기울어 모친의 삯바느질로 덕수상고를 졸업할 수 있었다.

군 제대 후 연합뉴스의 전신인 합동통신 관리부서에 입사해 20여 년 근무했다. 1979년 직장 동료의 친구 권유로 어센트산악회에 입회한 그는 암벽등반의 재미에 매료되어 지금까지 등반하고 있다. 1989년 어센트산악회 회원들과 일본 북알프스를 다녀왔으며, 2004년에는 코오롱등산학교 강사들과 설악산 장군봉 남서벽 루트를 개척했다. 같은 해 미국을 45일간 횡단하며 요세미티를 비롯한 유명 등반지를 투어했다. 2005년 고 고미영과 함께 파키스탄 드리피카(6,447m) 원정에 참여해 5,800m까지 진출했으나, 등정 후 하산하던 대원이 부상을 입어 등정을 이루지 못했다. 2008년 일산 대화동에 해피볼더클라이밍짐을 개업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송석원은 쟁쟁한 클라이머들이 많았던 어센트산악회에서도 ‘선등 욕심이 엄청난 사람’으로 통했다. 그는 “선등해 본 사람만 아는 재미가 있다”며 “순간 위험을 무릅쓰고 치고 나갈 때의 짜릿함이 있다”고 말한다. 2000년대 중반 코오롱등산학교 강사를 지냈으며, 서울등산학교에서도 2년 동안 강사를 맡았다. 현재 어센트산악회 감사를 맡고 있다.

송석원이 바일을 쥔다. 인자한 아버지에서 벽 앞에 홀로 선 클라이머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스포츠클라이밍 장년부 경기에서 여러 번 결승에 올라 입상했으며, 속도 부문 1위에 오른 적도 있었다. 자연암벽에서의 툴링은 담력과의 싸움이다. 믹스등반을 자주 하는 등반가가 아닌 이상 접할 기회가 드물어 감각이 생소하다.

중단 페이스성 크랙 구간에서 악전고투를 거듭한다. 바일을 시원하게 꽂을 만한 곳이 없고, 아이젠을 꽂을 틈도 없다. 클라이머가 벌이는 사투가 바위와 쇠의 파열음으로 바뀌어 치열하게 울린다. 힘이 다 빠질 만한 시간임에도 포기하지 않고 올라, 완등 지점에 바일을 박아 넣는다. 화려하지 않지만 끈끈한 등반으로 집념의 끝을 보여 준 것이다.

그가 최근 걸어온 길도 그러했다. 1998년 IMF 때 명예퇴직해 서울에서 몇 번의 개인사업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는 등반에 몰두하며 때를 기다렸고, 2008년 일산에 실내암장을 세워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빚을 내어 차린 암장이었기에 그로서는 마지막 모험이었다. 여기에는 딸을 위한 마음도 담겨 있었다. 일산에서 왕복 4시간 걸리는 서울의 실내암장까지 다니던 딸이 안쓰러워 고교 3학년이 되던 해에 암장을 개업했다. 지금은 대화동의 대표적인 실내암장으로 자리 잡았다.

1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일 찍을 지점을 주시하는 송한나래. 2 송한나래가 로프를 클립하기 위해 바일을 입에 물고 등반에 집중하고 있다.
1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일 찍을 지점을 주시하는 송한나래. 2 송한나래가 로프를 클립하기 위해 바일을 입에 물고 등반에 집중하고 있다.
내 꿈은 IOC선수위원과 올림픽 금메달

송한나래는 169cm로 키가 크고 팔도 길어 클라이밍에 유리한 체격이다. 때문에 선천적으로 재능을 타고 났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지독한 노력파’라 얘기한다. 악착같은 정신력으로 큰 부상을 여러 번 딛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등반을 시작해 줄곧 우승하며 두각을 나타내던 송한나래는 중학교 2학년 때 지나친 운동으로 양 손가락 중지 성장판이 파손되었다. 의사와 아버지가 운동을 그만두자고 했지만, 밤새도록 울고 나선 “등반을 계속 하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중지가 덜 자라 다른 손가락보다 가늘고, 작은 홀드를 잡을 때면 남들보다 불리한 점이 있다.

2012년 무릎 부상을 당했을 땐 쉬어야 함에도, 한 발로 운동을 계속했다. 2014년에는 대회 등반 중 무릎 인대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당했다. 이로 인해 1년 동안 운동을 못 하게 되면서 ‘클라이밍을 그만둘까’ 생각할 정도로 큰 슬럼프에 빠졌다.

안정적인 피겨 4자세로 까다로운 구간을 돌파하는 송한나래.
안정적인 피겨 4자세로 까다로운 구간을 돌파하는 송한나래.
“고1 때부터 K2와 계약하고 지원을 받았어요. 브랜드에서 지원해 주는 만큼 책임감을 느끼게 되죠. 그래서 부상당했다고 맘 편하게 공부만 하고 있을 순 없었어요. 선수가 운동을 많이 했으면 자신감이 있는데, 부족하면 경기에 나가서도 부끄러워요. 늘 지고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고, 운동을 포기하고 싶다는 고민을 하게 됐어요. 상황이 너무 복잡하고 힘들었는데, 오히려 아이스클라이밍에 몰입하는 계기가 됐어요.”

이후 그녀는 결국 마음을 다시 잡고 돌아와 청송 월드컵에서 우승을 거뒀다.

송한나래는 빙벽을 비교적 늦게 시작했다. 2012년 처음 시작했는데, 자연빙벽에서 N바디와 X바디 같은 기초 동작을 처음 배운 곳이 이곳 가래비였다. 그해 11월 처음 출전한 국내대회에서 힘으로 올라 결선에 진출, 7위에 올랐다. 하지만 2013년 1월에 열린 대회에선 얼음벽에 대한 적응력 부족으로 3m밖에 올라가지 못하고 추락했다.

1년 동안 복수의 칼을 간 송한나래는 국내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본격적으로 월드컵 시리즈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월드컵 참가차 해외에 나갔다가 툴링 전용 암벽에서 훈련 도중 추락해 갈비뼈 3개가 골절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통증을 참고 대회에 출전한 그녀는 11위에 올랐다. 이런 면모 때문에 부친인 송석원조차 ‘독하다’는 한마디로 그녀를 표현한다.

부드럽고 곱상한 외모의 송한나래지만, 어릴 적부터 승부욕과 끈기가 강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서울의 암장에서 운동하고 일산 집으로 돌아오면 밤 12시쯤 되었다. 그래도 코피를 쏟으면서도 공부를 하고 잤다. 그녀는 “운동도 공부도 지고 싶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고교시절 대회 성적만 놓고 보면 운동 특기자로 대학에 갈 수 있었지만, 원하는 학과의 공부를 하기 위해 일반전형으로 한국외대 국제스포츠레저학과에 입학했다.

아이스클라이밍을 시작하며 좋은 성적을 냈던 대학 시절에도 악바리처럼 공부했다. 전공 외에 영어통번역을 부전공이 아닌, 전공과 똑같은 비중인 이중전공으로 학점을 땄다.  2학년과 3학년 때는 성적 장학금을 받았을 정도로 치열하게 노력했다.

송한나래의 꿈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이 되는 것이다. 그녀는 “외국 대회에 나가보니 한국 선수들은 잘하는데, 스포츠 외교와 행정 분야가 너무 취약하다”며 “이를 개선하고 싶은 것이 꿈”이라 조목조목 이야기한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 목표이며, 평창 올림픽 시범 종목인 아이스클라이밍이 다음 올림픽에 정식 종목이 되면 도합 4번의 올림픽에 도전할 것까지 계획을 짜놓았다. 이렇듯 치밀한 그녀는 3분 시간이 주어지는 루트파인딩 때도 그림을 그려가며 동작을 계산한다.

“그림으로 루트를 그리면서 손을 길게 갈지 짧게 갈지, 피겨4 동작을 왼손으로 갈지 오른손으로 갈지, 계산해요. 시간을 최대한 아껴서 간결하게 등반하려 노력해요. 그렇다고 너무 파인딩에 치우치면 안 돼요. 파인딩이 제대로 안 됐다는 생각이 발목을 잡아서 등반에 실패했던 적도 있거든요. 파인딩도 중요하지만 즉흥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순발력이 중요해요.”

가장 끈끈한 자일파트너인 아버지와 딸이 등반 라인을 살피고 있다.
가장 끈끈한 자일파트너인 아버지와 딸이 등반 라인을 살피고 있다.
벽에서 진짜 나를 마주한다

송한나래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등반을 즐긴다. 스포츠클라이밍, 아이스클라이밍 대회 모두 나가고 있으며 둘 다 좋다고 한다. 자연 암벽에서의 하드프리등반과 멀티피치 등반도 좋아한다. 난이도 등반은 고교 2학년 때 이탈리아 아르코에서 5.13d를 오른 것이 최고 기록이었다. “나중에 5.14에 도전하고 싶다”고 한다.

송한나래는 등반 스타일도 독하다. 결승점이 다가오면 대부분 힘이 빠지게 되고, 추락이 무서워 적당한 때에 포기하는 선수도 있지만 그녀는 100% 힘을 다 쓰고 내려온다. 그녀는 “힘이 없는 걸 아는데 피겨4 동작을 하는 게 무서우면서 좋다”며 “왼손이 풀려도 오른손이 걸리면 산다고 생각하기에 끝까지 몸을 던진다”고 악착같은 자신의 등반 스타일을 이야기한다.

“벽에 매달리면 진짜 나와 마주할 수 있어요. 등반이 좋은 이유도 스스로와 겨뤄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인내심을 갖게 되고 용감해져요. 이 과정을 겪으면서 자신을 극복해 가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처음 빙벽을 배웠던 가래비빙장을 월드컵 챔피언을 경험한 송한나래가 오른다. 벽에 대한 계산이 끝났다는 듯 처음과는 너무도 다른 몸짓, 그녀가 날아오른다. 그녀의 이름 ‘한나래’는 부친 송석원이 큰 날개라는 의미를 담아 지은 것이다. 상승기류를 탄 솔개마냥 과감한 몸짓으로 솟아오른다. 잔다르크처럼 용감하게, 시원하게,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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