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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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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 | 세계 10대 트레일 완주한 이영철] “퇴직하면 여행 다니고 싶다는 꿈이, 여기까지 왔네요”

월간산
  • 입력 2017.01.16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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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운영하며 기록 남긴 것이 여행작가 되게 해

파타고니아 트레킹을 마치고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을 찾은 이영철씨.
파타고니아 트레킹을 마치고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을 찾은 이영철씨.

“야근은 기본이고 주말도 일할 때가 많았죠. 우리 때는 다 그렇게 일했으니 힘들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일이 보람되고 즐거웠지만 워낙 치열했던 탓에, 해외여행은 꿈도 못 꿨죠. 다만 은퇴하면 ‘여행을 해야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어요.”

회사와 집밖에 모르던 직장인 이영철(59)씨가 퇴직 5년 만에 세계 10대 트레일을 완주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라운드트레일 211km, 산티아고 순례길 782km, 뉴질랜드 밀포드 트레일 54km, 일본 규슈 올레 206km, 영국 횡단 CTC 309km, 파타고니아 3대 트레일 117km, 알프스 투르 드 몽블랑(TMB) 170km, 동해안 해파랑길 770km, 페루 잉카 트레일 49km, 아일랜드 위클로웨이 132km를 모두 완주했다.

그는 등산 마니아가 아니었다. 집 뒷산 정도만 가끔 찾던 평범한 체력이었다. 오로지 ‘여행을 해야겠다’는 꿈을 구체화시킨 결과였다. 여행이란 뭉게구름 같던 꿈은 세계 10대 트레일을 5년 안에 완주하는 것으로 뚜렷해졌다. 하지만 세계 10대 트레일이 8,000m 14좌처럼 명확하게 통용되는 것은 없었다. 나름대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트레일을 선정했다. 가장 덜 알려진 곳이 동해안 해파랑길과 규슈 올레였다. 우리나라 트레일을 한 곳은 포함시키고 싶었고, 일본은 그가 직장 생활 중 몇 개월간 일본에서 연수를 받으며 관심을 갖게 된 곳이었다.

유명하기로 따지면 제주올레가 해파랑길보다 위에 있지만, 장거리 트레일 위주로 10대 트레일을 뽑고 싶었다. 425km인 제주올레에 비해 770km로 해파랑길이 더 길다. 또 제주가 고향인 그는 올레에 대한 애정이 깊어 오히려 아껴두고 싶었다. 미국 존 뮤어 트레일(358km)이 빠진 것을 지적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는 “위험 요소도 많고, 장기간 야영할 자신이 없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2011년 12월 말 퇴직한 그는 2012년 1월부터 여행에 나섰다. 첫 목적지는 경남 남해였다. 남해 바래길 74km(현재 150km로 늘어남)였다. 3박4일간 혼자 걷고 혼자 밥을 사먹고 민박집에서 잠을 잤다. 남해의 경치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고, 혼자 움직이는 생활도 좋았다.

10대 트레일의 마지막 여정이었던 아일랜드 위클로웨이 트레킹을 끝내고, 더블린 시내의 펍에서 현지인들과 어울렸다.
10대 트레일의 마지막 여정이었던 아일랜드 위클로웨이 트레킹을 끝내고, 더블린 시내의 펍에서 현지인들과 어울렸다.

영국 CTC 횡단 중 요크셔 지역 숙소에서의 아침식사. 미국인 트레커인 쉐릴, 킨시씨와 3일을 함께 걸었다.
영국 CTC 횡단 중 요크셔 지역 숙소에서의 아침식사. 미국인 트레커인 쉐릴, 킨시씨와 3일을 함께 걸었다.

항상 최소한의 경비로 움직여

그해 2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을 하러 떠났다. 처음 가본 히말라야는 환상적이었으나 고소증이 발목을 잡았다. 통증이 심했던 건 아니지만 머리가 멍해 경치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미리 고소증에 대비했어야 하는데, 우연히 만난 한국 트레커들과 어울려 술을 계속 마신 데다 현지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제대로 영양보충을 하지 못했다. 때문에 체계적으로 준비해 꼭 다시 가서 제대로 히말라야의 풍광을 느끼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첫 해외 트레킹은 그가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트레킹을 마치고 포카라에서 9일을 쉬며 10대 트레일 완주 계획을 구체적으로 짰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안나푸르나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

안나푸르나 서킷의 정점인 해발 5,416m 쏘롱라에서, 호주인 트레커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멀쩡해 보이지만 둘 다 고산병으로 고생했다.
안나푸르나 서킷의 정점인 해발 5,416m 쏘롱라에서, 호주인 트레커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멀쩡해 보이지만 둘 다 고산병으로 고생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장거리라 트레킹 경험이 적은 그에게는 준비가 필요했다. 훈련 차원에서 동해안 해파랑길을 세 번에 나눠 10일씩 구간 종주했다. 해파랑길은 그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동해안의 해안가 절벽과 내륙을 오가는 코스인데 산을 넘을 때도 많아 제주 올레에 비해 훨씬 난이도가 높아 그의 훈련 코스로 제격이었다.

해파랑길을 6월에 완주하고 헬스장에서 기초 체력을 꾸준히 단련해 10월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았다. 29일 동안 걸었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처음 가 본 유럽 시골은 평범한 풍경조차 그에겐 너무 새롭고 예뻤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을 자며 최소한의 경비로 움직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뒤 장거리 트레킹과 해외여행에 대한 겁이 없어졌다. 영어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기본 영어와 보디랭귀지만 잘해도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알프스 몽블랑 트레킹 이틀째 날. 본옴므 고개로 이어진 길에서 이스라엘 트레커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알프스 몽블랑 트레킹 이틀째 날. 본옴므 고개로 이어진 길에서 이스라엘 트레커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2013년은 해파랑길을 다시 걸었으며, 한동안 책만 썼다. 해파랑길을 다시 간 건, 책을 쓰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첫 인상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인터넷 블로그에 늘 여행 기록을 올렸는데, 점점 찾는 이들이 늘기 시작하더니 여러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고 제안해 왔다. 그렇게 해서 펴낸 책이 그간의 여행 기록을 담은 <안나푸르나에서 산티아고까지>와 <동해안 해파랑길-걷는 자의 행복>이었다.

2014년 그는 뉴질랜드 밀포드 트레킹과 마운트쿡 산행에 나섰다. 그가 등산 경험이 없고 체력 약한 일반인에게 추천하는 곳이 뉴질랜드다. 걷는 데 이상만 없다면 누구든 큰 어려움 없이 갈 수 있는 부담 없는 코스이며, 영화에나 나올 법한 독특한 자연 풍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길찾기도 쉽고 안전한 대중적인 트레킹 코스로 추천한다.

2015년 4월에 찾은 규슈 올레는 21일 만에 완주했다. 제주올레에서 수출한 걷기길인 셈인데, 차이점은 걷기길이 연속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한 구간 걷고 차나 기차를 타고 이동해 걷는 식이다. 오히려 이런 방식이 더 좋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아기자기한 일본 특유의 동네 풍경을 즐길 수 있었고, 체력적인 균형도 맞출 수 있었다. 다 걷고 나선, ‘오히려 제주올레보다 세계적으로 더 유명해질 것 같아 걱정’되었을 정도로 좋았다.

아일랜드 위클로웨이 트레킹 도중 같은 숙소에 묵은 도로시 여사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발 직전에 함께 섰다. 이날이 여사의 81번째 생일이었으며, 두 딸과 함께 트레킹 중이었다.
아일랜드 위클로웨이 트레킹 도중 같은 숙소에 묵은 도로시 여사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발 직전에 함께 섰다. 이날이 여사의 81번째 생일이었으며, 두 딸과 함께 트레킹 중이었다.

그해 9월에는 영국 횡단코스인 CTC(Coast to Coast Walk)를 완주했다. 19세기 건물과 허물어진 수도원 등, 우리나라에서 상상하기 힘든 문화와 경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브론테 자매의 ‘폭풍의 언덕’과 시인 워즈워스의 고향까지, 예술과 역사의 깊은 향이 길에 녹아 있었다. 다만 영국 날씨 특유의 비가 자주 내려 곤혹스러웠다.

가장 준비를 많이 했던 곳은 남미였다. 파타고니아 3대 트레일과 잉카 트레일까지 남미 5개국을 35일 동안 도는 일정을 짰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함께할 일행이 필요했고, 자신의 블로그에 일정을 공개하고 함께할 사람을 모집했다. 의외로 인기가 있어 30여 명이 지원했고, 일종의 서류전형과 면접 아닌 면접을 거쳐 남성 4명을 길동무로 뽑았다.

팀을 꾸려 가는 건 처음이었기에 갈등도 있었지만, ‘사람을 통해 배울 것이 많다’는 긍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남미는 지구 반대편인 만큼 신기한 것 투성이였다. 풍경 자체가 “경이롭고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치고 카트만두 시내에서 거리의 수도사인 사두(Sadhu)와 함께 섰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치고 카트만두 시내에서 거리의 수도사인 사두(Sadhu)와 함께 섰다.

2016년 6월에는 알프스 투르 드 몽블랑을 다녀왔다. 예전 직장 후배가 동행해 예상보다 편하게 시작했지만, 트레킹은 어려웠다.

“사실 방심하고 갔는데, 10대 트레일 중 제일 힘들었어요. 12일 동안 오르내린 총 고도만 1만 m였어요. 매일 1,000m는 오르내린 셈이에요. 매일 지리산이나 설악산 종주 같은 산행을 한다고 봐야죠. 위험한 곳도 제법 있고, 대신 힘든 만큼 경치는 안나푸르나 못지않게 환상적이에요. 산장도 깨끗하고, 월간山 독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곳이에요.”

9월에는 마지막 트레일인 아일랜드 위클로웨이를 다녀왔다. 처제가 아일랜드인과 결혼해 살고 있었기에 도움을 받았다. 아일랜드의 자연도 좋았지만 사람들에게서 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외모만 서양사람일 뿐이지 한국적인 정이 많았다. 정 많고 감정적이며 다혈질적인 면이 끌렸다. 그는 “아일랜드 시골 펍(주점)에서 현지인들과 어울려 기네스맥주를 마시는 것이 가장 즐거웠던 추억 중 하나”로 꼽는다.

산티아고 순례길 15일째 날. 카리용의 숙소에 함께 투숙한 영국인 가이씨와 와인을 마셨다.
산티아고 순례길 15일째 날. 카리용의 숙소에 함께 투숙한 영국인 가이씨와 와인을 마셨다.

이제는 역사·문화 탐방 할 것

목표했던 10대 트레일을 완주했을 땐, 막상 별 감흥이 없었다. 오직 ‘아일랜드의 문화와 역사를 더 자세히 알고 싶어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의 취미는 등산이 아니었다. 그가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역사와 문화였다. 역사 관련 책을 탐독하는 걸 즐겼다. 때문에 다시 여행을 나선다면 역사·문화 탐방을 할 계획이다.

목표를 이룬 지금은, 책을 마음껏 읽고 트레킹 경험을 토대로 여행서적을 몇 권 낼 예정이다. 이영철씨는 본지에 기고를 해왔으며, 출판사에서도 인기 있는 여행작가다. 사진을 잘 찍고 꼼꼼히 메모하는 습관 덕분이다.

“무작정 가는 여행이나 트레킹은 없어요. 늘 예습을 하죠. 인터넷으로 정보를 모으고 일정을 짜요. 준비 없이 그냥 가면 막상 아무 것도 못 해요. 사진은 렌즈 교환식 카메라 안 쓰고 들고 다니기 편한 일반 디카로 찍어요. 인물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데 항상 허락을 받고 찍어요. 한국에 돌아가 책을 낼 때 사진을 실어도 되냐고 꼭 물어봐요.”

이영철씨에게 ‘대충’이란 말이 없었다. 매사에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했고, 한솔그룹에서 30년을 근무했으며 그중 10년을 임원으로 일했다. 그의 적극성은 퇴직 이후에도 이어져 하고 싶었던 여행을 원 없이 한 것은 물론 여행작가가 되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어디가 제일 좋냐”이다. 시간이 없는 사람에게는 일부 하이라이트 구간만 걸어보라고 권하기도 하지만, “기왕이면 완주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추천한다. 그는 “장거리 트레일이 갖는 매력이 있으며, 종착지에 도착했을 때 한층 성장해 있는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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