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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산수화 속 가을 명산 | 산수화의 배경] 산수는 道가 구현된 물상이자 인격 발휘 공간

월간산 글 박정원 부장대우
  • 입력 2017.11.2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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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로 객체 그려내… 도교와 성리학적 자연관 영향 많이 받아

겸재 정선은 기존 중국의 화풍과 구별되는 독특한 화풍으로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장을 연다. 그림은 그가 금강산의 모습을 보고 그린 ‘금강전도’. /출처 겸재 정선 미술관
겸재 정선은 기존 중국의 화풍과 구별되는 독특한 화풍으로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장을 연다. 그림은 그가 금강산의 모습을 보고 그린 ‘금강전도’. /출처 겸재 정선 미술관
조선시대 산수화는 어떤 배경으로 탄생했으며, 어떻게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됐을까?

산수山水는 예로부터 항상 한 묶음으로 붙어 있었다. 동양에서는 적어도 산수란 개념은 도道가 구현된 물상으로 파악했다.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가 도가의 근본 개념이다. 물상은 또한 인격의 발휘에 가장 적합한 공간으로 인식했다. 도가에 근본을 둔 도교의 핵심사상이다. 이러한 가치가 산수화 발생의 토대가 된다. 산수화는 단순히 산과 물을 보고 그린 그림이 아니고 시대의 철학과 사상의 흐름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산수화는 특히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결과로 보인다. 도교의 무위자연사상은 성리학의 자연관과 맥을 같이한다. 선비들은 자연 속에서 음풍농월하며 학문을 하고, 화가는 선비들의 그런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다. 선비들은 또한 산을 찾아 유람을 즐긴다. 무릉도원이나 동천을 찾는 유산은 선비들 사이에 크게 유행한다. 그 매력에 푹 빠진 선비들은 세속을 등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산수화는 이런 배경으로 지금 수많은 작품이 남아 전한다.

조선 전기 선비들의 모습은 산수화로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조선 전기 산수화의 대표적인 작품은 안견의 ‘몽유도원도’. 이는 관념 산수화의 걸작으로 불린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장면을 그림으로 그대로 옮겨 그린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때까지의 화풍은 성리학적인 관념론과 명분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관념산수화, 추상산수화가 주류를 이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조선 초기에는 도교에 바탕한 유가적 사고에 기초한 이상적인 산수화가 그려졌다. 조선 중기는 거친 산세 속에서 은일隱逸하던 옛 현인의 뜻을 좇던 시기다. 이 시기에는 선비들의 유산이 황금기를 이룬다. 경쟁적일 정도로 유산기가 많이 양산된다. 이에 못지않게 산수화도 많이 나타난다. 18세기에는 개인의 경험과 정서가 적극적으로 산수화에 반영됐다. 이른바 현장에서 보고 느낀 감상을 화폭에 그대로 담은 진경산수화가 발달한다.

조선 3대 화가로 꼽히는 장승업의 산수도. 화가수업을 제대로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천재적인 재질을 보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조선 3대 화가로 꼽히는 장승업의 산수도. 화가수업을 제대로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천재적인 재질을 보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관념론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세계관과 구체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노력이 조선 후기 들어서 곳곳에 보인다. 개혁정신과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형식화된 창작보다는 현실을 직접 그림으로 나타내려는 노력, 즉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등장한다. 서민들 사이에서는 민화로 나타났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가인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진경산수화의 백미로 꼽힌다. 이어 단원 김홍도, 오원 장승업 같은 불세출의 화가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이들이 조선 후기 실학과 함께 조선의 문예부흥을 이끈다.

조선시대 4대 화가는 현동자 안견,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오원 장승업이다. 여기서 3대 화가라고 하면 안견이 빠진다. 안견은 현존하는 유일한 작품이 ‘몽유도원도’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본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안견이 조선 초기 관념적 산수화의 대가라면 나머지 세 사람은 조선 후기 중국과는 구별되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화풍을 구사한다. 이는 산수화에서는 진경산수화로 나타나고, 풍속이나 인물화에서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특히 겸재가 ‘진경산수화의 화성畵聖’이라면, 김홍도는 다양한 회화세계를 현실적으로 표현하며 가장 국민적 사랑을 받은 ‘국민 화성’이었다. 그는 산수화, 풍속화, 신선도, 인물화 등 조선시대 회화 중 가장 한국적 정취를 잘 그려낸 화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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