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산수화 속 가을 명산 |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비 온 뒤 자욱한 운무 뒤덮은 인왕산에 감격하다!

월간산
  • 입력 2017.11.07 10:3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진경산수화의 걸작… 소나무·활엽수 혼재해 단풍도 좋을 듯

인왕제색도와 비슷한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효자동주민센터 옥상에서 앵글을 맞췄다.
인왕제색도와 비슷한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효자동주민센터 옥상에서 앵글을 맞췄다.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비 온 뒤 인왕산의 신비스러운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1751년 어느 날, 일주일째 내리던 비는 마침내 그쳤다. 그 순간 인왕산 골짜기에 신비하고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자욱한 운무가 산자락을 뒤덮은 것이다. 좀처럼 보기 드문 풍경이었으리라. 조선 최고의 화가 겸재 정선이 이 풍경을 놓칠 리 없다. 즉시 먹물을 가득 묻힌 붓을 들었다. 그리곤 눈앞에 풍경이 보이는 대로 조선 최고의 화성畵聖의 손끝에 안긴 붓은 살아 꿈틀거리는 듯 한지에 고스란히 담겼다.

겸재는 생생한 현장감을 생동감 있는 필치로 그려나갔다. 비에 젖은 뒤편의 암벽은 거대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기 위해 큰 붓을 반복해서 아래로 과감하게 내리 그었다. 능선과 나무들은 섬세한 붓질과 짧게 끊어 찍은 작은 점으로 실감나게 표현했다.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눈에 본 대로 한 편의 산수화를 완성했다. 그냥 그림이라고 그렸다. 괜찮아 보여 그를 스승 김창흡에게 소개해 준 그의 친구 이병연에게 선물했다.

그 그림이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걸 작으로 불리는 ‘인왕제색도’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인왕산의 비가 갠 뒤의 색깔을 그린 그림이 되겠다. 지금 국보 제216호로 지정된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다.

이 그림은 조선 후기 겸재 정선(1676~1759)과 단원 김홍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새로운 화풍의 대표작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관념적 풍경이 아닌 사실적 산수를 보고 그린 ‘진경眞景산수화’라는 점이다. 진경산수화는 실학과 함께 조선 후기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학문과 화풍으로, 중국의 그것과 구별하게 하는 대표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겸재 정선이 75세 때인 1751년 비 온 뒤 운무가 자욱한 인왕산을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화면을 꽉 채운 화풍과 강렬한 필치로 진경산수화의 대표적 걸작으로 꼽힌다. 출처 겸재정선미술관.
겸재 정선이 75세 때인 1751년 비 온 뒤 운무가 자욱한 인왕산을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화면을 꽉 채운 화풍과 강렬한 필치로 진경산수화의 대표적 걸작으로 꼽힌다. 출처 겸재정선미술관.
걷기의 계절, 활동의 계절 가을을 맞아 진경산수화의 대표적 걸작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의 배경을 찾아 가을을 만끽하면서 걸어보자. 그림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몇 가지 포인트가 보인다.  

우선, 겸재는 이 그림을 어디서 보고 그렸을까? 진경산수화라 하면, 분명 그 풍경을 본 장소가 있을 것이다. 겸재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 유란동幽蘭洞(창의리 인왕곡설도 있음)에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란동은 현재 경복고교 자리인 서울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일대다. 겸재가 바로 인왕산 자락 아래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는 얘기다. 인왕제색도는 일반적으로 효자동 방면에서 인왕산의 동쪽을 보고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일단 경복고교로 갔다. 당연히 앞을 막는 경비원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혹시 관련 유적이 없는지, 어디에서 인왕제색도와 같은 풍경을 자세히 볼 수 있는지 등에 관해서 물었다.

경복고 안에 겸재 집터 바위 있어

마침 교내에 겸재 정선의 집터를 알리는 바위를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귀가 확 열리는 반가운 정보다. 바로 그곳을 찾아 갔다. 간송미술관장으로 있는 최완수씨가 쓴 글씨를 새긴 바위가 있다. 최씨는 경복고 출신으로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며 수많은 인재배출의 산실에 후배들도 겸재 정선과 선배들을 보며 분발하라고 비석을 만들어놓았다.

겸재가 그린 ‘창의문(彰義門)’. 왼쪽 인왕산과 오른쪽 북악산 사이 창의문을 잘 표현했다. 
창의문 위 인왕산 부암바위는 항상 빠트리지 않는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겸재가 그린 ‘창의문(彰義門)’. 왼쪽 인왕산과 오른쪽 북악산 사이 창의문을 잘 표현했다. 창의문 위 인왕산 부암바위는 항상 빠트리지 않는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겸재가 그린 ‘백운동(白雲洞)’의 당시 풍경은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겸재가 그린 ‘백운동(白雲洞)’의 당시 풍경은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겸재가 이곳에서 인왕제색도를 그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전망이 트인 운동장 벤치로 자리를 옮겼다. 인왕산이 제대로 보인다. 각도도 제법 비슷하다. 봉우리의 구성상 효자동 방향으로 가면 더 맞을 듯싶다. 경비원은 어디서 들었는지 “효자동에 있는 무궁화동산이 인왕제색도를 그린 장소”라고 말한다.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집들이 많이 들어서 있고 경복고 위치보다 못하다. 효자동주민센터 옥상에서도 각도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일단 전체 윤곽은 잡았다.

이젠 그림 속에 나오는 배경을 찾아 가보자. 방향을 창의문 쪽으로 잡았다. 그림의 왼쪽 끝 미끈한 봉우리가 부암付岩동 부침바위다. 자식을 원하는 부모들이 소원을 적어 돌에 붙여 빌었다고 해서 부침바위다. 그 부침바위가 부암동의 유래다. 겸재의 ‘창의문彰義門’이란 작품에 부침바위가 뚜렷이 그려져 있다.

창의문 방향으로 향했다. 거기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그림 속 배경을 찾아보기로 한다. 부침바위는 여전히 그대로다. 산천도 상당 부분 온 데 간 데 없지만 부침바위는 의구하다. 창의문 조금 못 가서 윤동주문학관이 나온다. 그곳에 인왕산자락길과 인왕산숲길 안내도가 있다. 조금 더 가면 한양도성길도 지난다. 인왕산숲길로 가면 백운계곡과 수성동계곡을 지나친다.

겸재가 인왕산 자락 아래 살았던 곳으로 알려진 ‘인곡정사(仁谷精舍)’가 그림으로 남아 있다. 출처 겸재정선미술관(왼쪽).
겸재가 1739년 그린 ‘청풍계(淸風溪)’. 출처 간송미술관 .
겸재가 인왕산 자락 아래 살았던 곳으로 알려진 ‘인곡정사(仁谷精舍)’가 그림으로 남아 있다. 출처 겸재정선미술관(왼쪽). 겸재가 1739년 그린 ‘청풍계(淸風溪)’. 출처 간송미술관 .
청계천의 발원지가 되는 백운계곡부터 찾아본다. 인왕제색도의 부침바위 바로 아래 능선 사이를 이룬 계곡인 듯하다. 청계천의 발원지는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4개 산 모두 해당된다. 청계천은 당시까지는 개천開川으로 불렸다. 백운동白雲洞이란 지명은 인왕제색도 그림 전체의 배경과 관련 있다. 인왕산 아래 항상 흰 구름이 있는 동네라고 해서 백운동이라 명명됐다. 지금 청운초등학교 뒤에 있었던 청풍계淸風溪의 淸과 백운동의 雲이 합쳐져 청운동이 됐다. 그리고 청풍계는 지금 청계천 명칭의 유래가 되는 계곡이다. 청풍계에서 風이 빠지고 맑은 계곡이 하천이 되면서 청계천이 됐다. 원래의 개천이란 명칭보다 훨씬 운치 있는 명칭으로 개명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찾은 백운계곡은 나무만 무성할 뿐 물이 흐르지 않는다. 구름다리(기온다리라 명명)같이 다리만 거창하게 만들어놓았다. 계곡은 아래로 흘러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연결되면서 끝이 난다.

창의문·수성동 등 집 주변 그림 많이 남겨

다음은 수성동계곡으로 간다. 그림 속 수성동계곡은 인왕산 정상 바위 바로 아래 골짜기에서 형성된 듯하다. 그림에도 마치 물이 흐르는 것같이 표현됐다. 시내와 암석의 배경이 워낙 빼어나 ‘수성동’이란 그림을 따로 그려 남길 정도로 겸재가 많이 찾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수성동계곡은 종로구청에서 겸재의 그림에 맞춰 계곡자리에 있던 옥인동아파트를 2012년 철거하고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하면서 복원에 성공했다. 운치 있는 시민의 쉼터로 돌아왔다.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평일인데도 제법 사람들이 찾는다.

1, 2 겸재의 그림 ‘수성동’에 나오는  수성동계곡을 당시 풍경으로 최대한 복원했다.
3 선바위 가는 길에 인왕산의 신비한 바위를 바라보고 있다.
1, 2 겸재의 그림 ‘수성동’에 나오는 수성동계곡을 당시 풍경으로 최대한 복원했다. 3 선바위 가는 길에 인왕산의 신비한 바위를 바라보고 있다.
수성동水聲洞이란 지명은 아름다운 물소리가 흐르는 곳이라고 해서 명명됐다고 한다.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수양의 동생인 안평대군은 수성동계곡에 ‘비해당匪懈堂’이란 별장을 짓고 살며 시와 그림을 즐겼다고 전한다. ‘게으름 없이’란 뜻의 비해는 시경에 나오는 구절인 ‘숙야비해夙夜匪懈 이사일인以事一人’에서 따온 말이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 없이 한 사람을 섬기라는 뜻이다. 안평대군은 단종복위를 꾀하다 결국 그의 형 수양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의 소신대로 살다 간 셈이다.

청풍계도 보인다. 맑은 바람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다. 그림 제일 왼쪽에 보인다. 지금은 찾을 수도 없는, 이름조차 남지 않은 계곡이다. ‘청풍계’라는 제목으로 겸재가 그림을 따로 그려 남겼다. 소나무와 계곡, 강렬하게 흐르는 물이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림 속 자연풍경과 함께 아래쪽에 집 두 채가 보인다. 한 채는 친구 이병연의 집이고, 다른 한 채는 ‘인곡정사人谷亭舍’란 제목으로 그가 그린 그림이 전한다. 인곡정사는 그의 집 주소가 인왕곡이기 때문에 王자를 빼고 인곡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제색도를 그린 겸재는 친구 이병연에게 이 그림을 준다. 하지만 이병연은 이 그림을 받고 4일 뒤 사망한다. 무슨 병을 앓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겸재 정선의 ‘금강산도’로 박사학위를 받고, 오랫동안 겸재를 연구해 온 덕성여대 박은순 교수는 겸재와 진경산수화에 대해서 “조선 최고의 화가가 그린 걸작”이라고 평가한다.

인왕산은 선바위 등 신비한 바위들이 많다.
인왕산은 선바위 등 신비한 바위들이 많다.
“진경산수화는 18세기 문인계층이 관심을 가진 실경을 진경이라 부른다. 실경산수화와 진경산수화 모두 현실에 실재하는 경치를 다룬 그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실경산수화는 광의의 개념이고, 진경산수화는 조선 후기 유행했던 실경산수화를 가리키는 협의의 개념이다. 진경은 신선경처럼 아름다운 경치 또는 현장에서 본 경치라는 의미를 지닌다.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지니는 특징은 기행을 통해 본 경관을 강렬한 화풍으로 표현하는 기법을 잘 정립했다는 점이다. 항상 현장답사를 중요시했으며, 휘리법揮?法이라는 빠른 필선과 강한 필력, 풍부한 먹색을 사용하는 화풍을 구사했다. 구성은 늘 화면을 꽉 채우는 밀밀지법密密之法을 선호했다. 이것도 보는 이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중요한 요소다.”

겸재는 60대부터 중국 화법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화풍인 진경산수화로 새로운 시대를 활짝 연다. 이른바 그의 전성시대다. 1739년 <청풍계>, 1740년 <경교명승첩>, 1742년 <연강임술첩> 등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조선 최고 화가로 자리매김한다. 70대 들어서는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 그의 대표적 걸작인 ‘인왕제색도’를 1751년에 완성한다.

점점 더 깊어가는 가을에 기암괴석과 숲이 어우러진 도심의 아름다운 산을 찾아 숲길을 걸으면서 조선 최고의 화가가 남긴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하나의 삶의 재미이지 않을까 싶다. 

저작권자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