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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일본의 독도 도발|②고지도·석각에 기록된 독도] 일본 고지도 조차 일부만 독도를 일본 영토표시

월간산
  • 입력 2018.03.1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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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토 확인한 고지도가 훨씬 많아… 석각은 일본 흔적 전혀 없어

한국산악회에서 독도수비대를 조직, 활약상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한국산악회에서 독도수비대를 조직, 활약상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우리 국민은 울릉도와 독도가 당연히 우리 땅인 줄 알고 있다. 일본 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친일親日 부역한 후손들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길까? 정말 궁금하다. 일본인들의 이같은 주장에 한국민들은 일본인을 얼토당토 않는 주장을 하는 민족이거나 우기는 데 능한 민족쯤으로 생각하는 인식이 강한 것 같다. 아니, 일본인들이 주변 국가들에 그런 인식을 심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까지 들 정도다. 혹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사나 고지도, 독도에 새겨진 글자 등으로 인해 그들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닐까. 하나씩 살펴보자.

우리 기록에는 독도가 일찌감치 <삼국사기>부터 등장한다. 신라 지증왕이 512년 우산국을 굴복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에도 우산국 피란민들을 호적에 편입시키고 농기구를 내려보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시대 기록은 더욱 넓고 다양하게 소개된다.

그런데 1690년쯤 독도 어획 관련 한일 간의 첫 충돌이 발생한다. 일본 막부가 돗토리번(지금의 돗토리현)에 거주하는 오야大谷와 무라카와村川 양가에 다케시마, 즉 울릉도 어업면허를 허가했다. 일본이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주장하는 대단히 중요한 근거가 되는 면허다. 이에 1693년 조선인 안용복과 박어둔 두 사람이 울릉도 근해에서 어업을 하다 울릉도에 온 일본인 오야와 무라카와 가문의 선원들에게 잡혀서 일본으로 끌려간다. 한일 간 첫 해양영토분쟁인 것이다.

1693년 11월, 일본은 안용복을 돌려보내면서 조선인의 울릉도 출어금지를 요청한다. 반면 조선은 삼척첨사 장한상張漢相을 울릉도에 파견해 현황을 조사한다. 그 결과, 2년 걸러 한 번씩 관원을 울릉도에 파견해 현황을 조사하고 주변을 살피기로 결정한다.

그 즈음 에도 막부는 죽도가 어느 나라에 가까운지 돗토리번에 질문한다. 돗토리번은 이에 대해 1695년 12월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쓰시마(독도)는 돗토리번의 소속이 아니라고 답변한다. 당시 돗토리번은 조선에서 마쓰시마까지의 거리가 80~90리, 마쓰시마에서 다케시마까지 80리라는 사실도 답변서에 포함시켰다.

에도 막부, ‘일본인 독도 출어금지령’

에도 막부는 두 섬이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어 1696년 1월 ‘울릉도에 일본인 출어금지령’을 내린다. 출어금지령은 에도 막부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스스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1699년 울릉도·독도가 조선령을 확인한 안용복은 다시 독도로 나가 어업 나온 일본 어선을 쫓아버리기까지 한다. 이에 대해 일본은 “안용복이 어느 나라 인물인지 불분명하다”며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자세로 일관한다.

일본의 고지도에는 대략 18세기부터 울릉도와 관련한 내용이 등장한다. 그 이전 고지도는 백제에서 건너간 왕인 박사의 후예인 행기行基 스님이 745년쯤 제작한 ‘행기도’가 대세를 이룬다. 이후 1,000년 가까이 지난 1687년 이시카와 토모노부의 ‘본조도감강목本朝圖鑑綱目’이 나올 때까지 일본 전국지도의 원형이 됐다.

일본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여기는 근거가 되는 독도 지도는 대략 몇 종류 된다. 그중 1724년 제작한 ‘죽도지도’가 최초로 추정된다. 당시는 조선과 울릉도·독도 분쟁이 에도 막부의 어업금지 조치로 일단락됐지만 돗토리번에서 제작한 1724년 지도에는 명확히 독도가 일본령에 속한 것으로 표시돼 있다. 독도를 마쓰시마松島로 표기하면서 동도와 서도로 나눠 일본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지도1 참조) 이는 당시 에도 막부의 공식 입장과는 달리 지방 번주藩主들이 자체 제작해서 막부에 제출한 것으로 판단된다.

1790년 제작한 ‘하이풍속인정지사태부도전도蝦夷風俗人情之沙汰付圖全圖’는 쿠릴열도가 정확하게 그려진 최초의 일본지도로, 울릉도와 독도는 명칭은 없으나 일본 본토와 동일하게 적색으로 표기되어 일본 영토로 표시돼 있다. (지도2 참조)

1806년 제작된 ‘화이일람도華夷一覽圖’는 아시아 전도에 가까운 지도로서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의 해안선과 같이 적색으로 칠해져 명확히 일본령으로 표시돼 있다. 울릉도를 다케시마, 독도를 마쓰시마로 표기하고 있다. (지도3 참조)

일본 근세 지리학의 대가도 조선 영토로 표시

나가쿠보 세키스이가 1779년 제작한 원본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改正日本輿地路程全圖’는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으나 1846년에 제작된 해적판은 원본과 달리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지도4 참조)

세키스이의 원본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일본지도의 특징을 나타낸다.

가장 큰 특징은 당시 일본 전국지도에 없었던 경위선을 그려 넣은 점이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조치였다. 또 다른 특징은 좌측 상단에 조선의 남동쪽 해안을 그리고, 그 동쪽 바다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남북으로 나란히 그려 넣었다. 하지만 일본 본토와 같은 채색을 하지 않고 경위선 밖으로 밀어낸 점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허구라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렇더라도 세키스이는 일본 근세사에 불멸의 발자취를 남긴 지리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1940년 제작된 ‘일본병북방도日本?北方圖’는 일본, 청, 조선, 만주, 러시아를 포함한 지도로 여러 지도를 합성한 관계로 지명이 한자, 러시아 등 다양한 언어로 섞여 있다. (지도5 참조) 울릉도를 다케시마, 독도를 마쓰시마로 표기하고 일본 영토와 같은 색으로 표시했다. 당시는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을 한창 불태우고 있을 시기여서 독도를 당연히 일본 영토로 표시했을 것이다.

이상은 일본이 제작한 지도 중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시한 대표적인 고지도로 꼽힌다.

반면 일본이 제작한 지도 중에 독도를 한국 영토로 표시한 지도도 상당수 있다. 위에서 제시한 지도 외에는 거의 전부 한국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79년 제작한 세키스이의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에 이어 시헤이가 1785년 제작한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는 채색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지도6, 지도7 참조)

더욱이 다카하시 카게야스가 1809년에 그린 ‘일본변계약도日本邊界略圖’는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하고, 울릉도와 독도는 한반도 해변 가까이 그려 놓았다. 울릉도는 ‘울릉도’로, 독도는 ‘천산도’로 표기하고 있다. (지도8 참조) 일본으로서는 감추고 싶은 지도일 것 같다.

조선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일본육군참모국이 제작한 지도인 ‘조선전도朝鮮全圖’도 울릉도를 다케시마, 독도를 마쓰시마로 표기하고 조선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지도9 참조, 이상 최선웅 한국지도학회 부회장 자문)

이외에도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표시한 지도는 ‘신찬조선국전도’ ‘은주시청합기’(1667, 일본), ‘조선왕국전도’(1734, 프랑스), ‘태정관 지령’(1877, 일본 내무성) 등 상당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이 지도들의 기록 자체를 부정하는 이유는, 가장 최근의 역사적 사건인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도가 대한민국의 섬이라는 사실을 적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계속 일본 영토로 주장하는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시한 일본 고지도. 1 일본이 1724년 제작한 ‘죽도지도’. 2 일본이 1790년 제작한 ‘하이풍속인정지사태부도전도 (蝦夷風俗人情之沙汰付圖全圖)’. 3 일본이 1806년 제작한 ‘화이일람도(華夷一覽圖)’. 4 세키스이가 1779년 제작한 해적판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 (改正日本輿地路程全圖)’.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시한 일본 고지도. 1 일본이 1724년 제작한 ‘죽도지도’. 2 일본이 1790년 제작한 ‘하이풍속인정지사태부도전도 (蝦夷風俗人情之沙汰付圖全圖)’. 3 일본이 1806년 제작한 ‘화이일람도(華夷一覽圖)’. 4 세키스이가 1779년 제작한 해적판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 (改正日本輿地路程全圖)’.
1940년 제작된 ‘일본병북방도(日本?北方圖)’.
1940년 제작된 ‘일본병북방도(日本?北方圖)’.
1 세키스이가 1779년 제작한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 2 시헤이가 1785년 제작한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 3 다카하시 카게야스가 1809년에 그린 ‘일본변계약도(日本邊界略圖)’. 4 일본 육군참모국이 조선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제작한 지도인 ‘조선전도(朝鮮全圖)’.
1 세키스이가 1779년 제작한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 2 시헤이가 1785년 제작한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 3 다카하시 카게야스가 1809년에 그린 ‘일본변계약도(日本邊界略圖)’. 4 일본 육군참모국이 조선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제작한 지도인 ‘조선전도(朝鮮全圖)’.

독도에 일본인 기거·상주 흔적 없어

그러면, 독도에 일본인들이 거주했거나 바위에 글씨를 새긴 흔적이 있을까. 그들이 주장하는 일본 영토라고 한다면 그런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독도지킴이를 자처하는 안동립 동아지도 대표가 수년간 1년에 몇 달씩 머물며 독도의 동도와 서도 구석구석을 찾아 헤매며 독도의 다양한 모습과 흔적을 렌즈에 담았다.

안동립 대표가 찾은 흔적들은 2017년 12월호에 발표된 <한국지도학회지>에 ‘독도에 새겨진 암각 글자의 분석과 영토인식’이라는 제하의 단보로 실렸다. 이 단보에 따르면, 독도에는 한국령, 한국, 독도, 영토 표석, 청동 영토표석, 한승수 비석, 이명박 비석, 동도 부두 준공비, 위령비, 한국산악회 독도비, 어민위령비, 위령비, 유신과업 완수하자, 김?? 등 풍화되어 알 수 없는 글자와 행정 관료나 경찰이 새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영토 수호와 애국적인 내용의 암각이 여러 곳에 흩어져 남아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독도의 비석 암각 중에 ‘독도, 獨島, DOKDO KOREA’는 한국산악회가 1951년과 1952년에 걸쳐 울릉도·독도의 학술조사단 일환으로 나가서 해방 직후 세운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추정된다. 한국산악회는 학술조사에 이어 일본과 독도분쟁이 일어났을 때 독도수비대로서 선봉에 서서 독도를 수호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비석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안 대표에 따르면, 독도에 있는 비석 외에 암각은 영어, 한문, 한글, 그림 등 동·서도에 다양하게 분포하지만 일본어나 일본식 이름으로 된 암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 어부들이 도해 면허를 받아 독도에서 어로행위를 한 적은 있지만 상주하거나 일시적으로 기거한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선조들이 독도를 오가며 장시간 체류하며,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서 바위에 글자를 새긴 것은 외로움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행위로 여겨진다”며 “풍화로 알아보기 힘든 글자는 새긴 연대가 그만큼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독도는 울릉도와 같이 동해안 어부들의 생활터전이었기에 당연히 우리 영토로 인식돼 왔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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