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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새 연재 히말라야 14좌 | ‘김창호 대장의 그때 그 순간’<1> 2005년 낭가파르바트 2006년 가셔브룸1봉·2봉] 준비된 자만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월간산
  • 입력 2018.06.11 10:27
  • 수정 2018.11.02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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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오랜 탐험활동이 등반에 큰 도움… “자신과 타협 않으려 최선의 노력”

가셔브룸 1봉 정상에 선 김창호.
가셔브룸 1봉 정상에 선 김창호.

창간 49주년 기념호부터 새 연재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등정 ‘김창호 대장의 그때 그 순간’을 시작한다. 김창호 대장은 히말라야 14좌를 7년 10개월 6일 만에 세계 최단기간 무산소 등정 했을 뿐만 아니라 50줄에 든 나이에도 아직 현역으로 활동하는 ‘불굴의 한국인’의 표상이기 때문에 그를 첫 대상으로 선정했다. 올해는 그의 무산소 14좌 등정 5주년이다. 그가 등정한 히말라야 14좌를 통해 가장 인상적이고 위험했던 순간들을 되새겨보면서 다른 산악인이나 일반인들이 삶의 교훈이나 메시지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 달에 두 봉우리씩 총 7회에 걸쳐 그가 등정한 히말라야 14좌를 올 연말까지 연재할 예정이다. _편집자

2005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변형 신 루트 개척

가셔브룸 2봉 능선에서.
단독등반이지만 한국팀이 보이는 건 김창호가 먼저 출발한 이들을 전부 따라잡았기 
때문이다.
가셔브룸 2봉 능선에서. 단독등반이지만 한국팀이 보이는 건 김창호가 먼저 출발한 이들을 전부 따라잡았기 때문이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온다. 김창호 대장은 파키스탄의 북부지역 길기트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2004년 10월 즈음이다. 바로 그의 산 친구 문종국이었다.

“창호야,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정찰을 해줬으면 하는데….”

그는 단호한 부탁보다는 말끝을 흐리며 해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지금 파키스탄 히말라야와 카라코룸산맥은 겨울로 들어서고 있는데….”

김 대장도 말끝을 흐렸다. 확답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이렇고 저렇고 상황을 설명하면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김 대장은 2000년부터 그때까지 파키스탄의 카라코룸산맥과 낭가파르바트를 홀로 탐사하고 있었다. 등반보다 이 산맥들을 모두 보고 싶었고, 한국에 전무했던 산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싶었다. 그러던 도중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이 멀지 않은 산군에서 갑작스런 ‘파키스탄 탈레반’의 총격을 받은 김 대장은 이들을 대상으로 길기트에서 재판 중이었다. 정신적·육체적으로 지쳐 있던 그는 귀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확답을 할 수 없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김 대장에게 총격을 가한 3명 중 2명은 체포됐고, 한 달간 진행된 재판은
1차 마무리 되었다. 11월 중순 피워놓은 모닥불이 얼 것 같은 겨울 시즌에 낭가파르바트 루팔벽을 혼자 정찰했다.

귀국 후 지리, 등반사, 벽 브리핑 등을 포함한 30여 장의 정찰 보고서를 전달했다. 오랫동안 탐사를 해온 김 대장은 히말라야에 대한 지식이 한국에서 독보적이었다. 그는 ‘한국 낭가파르바트 루팔대장벽 원정대’ 등반대원으로 선발되었다. 기회가 찾아왔다.

낭가파르바트는 우루두어로 ‘벌거벗은 산’이라는 뜻이다. 눈이 달라붙지 못할 정도로 사면이 가파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남쪽에 아주 가파르게 치솟은 벽이 루팔벽이다. 4,700m의 표고차를 갖고 있고, 라인홀트 메스너 형제가 1970년 초등한 이후 세계적 명성의 등반가들이 모인 10개 이상의 팀이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라인홀트 메스너의 동생인 귄터 메스너가 하산 중 눈사태로 실종됐을 만큼 위험한 산이다. 초등했던 메스너의 등정과 비화는 ‘벌거벗은 산’이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국내에도 개봉됐다.

앞선 원정대의 실패 철저히 분석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루트 개념도. 정상 직전 안부에서 메스너는 돌아갔고 김창호는 직등한 점으로 인해 신 변형루트로 인정됐다.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루트 개념도. 정상 직전 안부에서 메스너는 돌아갔고 김창호는 직등한 점으로 인해 신 변형루트로 인정됐다.

루팔벽 원정대는 광주전남이 주관해 국내 유능한 8,000m급 등정자들을 주축으로 구성됐다. 김 대장은 그때까지 8,000m급 등정 경력이 없었다. 그가 대원으로 선발된 것은 등반 실적보다는 파키스탄 대정부 행정처리 능력과 지역 산들에 대한 많은 지식 때문이었을 것이고, 또 정찰등반으로 약속을 지켰기 때문일 것이다.

김 대장은 히말라야 등반은 학문이며 연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오를 산에 대한 깊은 자료 검토와 연구, 그에 따른 적절한 훈련과 준비가 등반 성공여부를 좌우한다. 우리나라 팀보다 능력이 훨씬 뛰어난 세계 산악인들이 등정에 실패한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그것이 원정대가 오를 길을 밝혀준다.

원정은 실행됐다. 현지에서 100여일 이상 머무르는 장기 레이스였다. 이성원 대장의 훌륭한 리더십과 대원들의 화합은 끝내 김창호, 이현조가 7월 14일 밤 11시께에 등정함으로써 마침표를 찍었다.

김 대장은 등정 성공의 원인으로 3가지를 꼽았다. 첫 번째는 정찰 및 연구로 앞선 원정대의 실패를 철저히 분석한 것이다. 두 번째는 당시 대장인 이성원과 원정대원들의 고산등반 경험이다. 세 번째는 김 대장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더럽게 좋은 운’이었다. 급격한 날씨 변화로 인한 강풍, 강설은 인간이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1차 정상 등정 시도에서 김미곤 대원이 7,500m 메르클 쿨와르에서 낙석에 맞아 다리가 골절됐다. 암울했다. 구조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환자를 줄에 매달아 4,000m의 벽을 타고 내려 보냈다. 이때 김미곤은 자신으로 인해 다른 동료가 위험에 처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 칼로 자신의 로프를 자르려고까지 했다고 후에 술회했다. 

전 대원이 3일 밤낮으로 달라붙어 김미곤을 베이스캠프까지 매달아 내려 길기트 병원으로 보냈다. 그런데 김미곤은 기브스를 한 채 말을 타고 다시 베이스캠프로 되돌아왔다. 사지에서 고생하는 친구와 선후배를 두고 혼자서 차마 귀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6년 8월 루팔벽 앞에서 만난 메스너와 김창호.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2006년 8월 루팔벽 앞에서 만난 메스너와 김창호.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아직도 김 대장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차 등정조가 구성되던 날 저녁, 이성원 대장을 독대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산은 오르고 싶어 하는 사람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등정조가 되어 베이스캠프를 떠나면 다시 이곳으로 내려오지 않을 작정입니다.”

이 대장은 그 이유를 물었고, 김 대장은 늦은 밤 정상을 향해 떠날 수 있었다.

등정 후 1970년의 메스너 형제처럼 등반했던 루트인 루팔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산의 반대편인 디아미르벽으로 하산했다. 이현조 대원과 김 대장은 며칠간 쉬지 못했으며, 물밖에 먹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두 대원은 환각에 시달렸다. 그리고 디아미르 베이스캠프로 무사히 하산했다. 메스너 형제는 여기서 하산 도중 동생 귄터 메스너가 눈사태에 실종됐다.

루팔벽에서는 눈사태와 낙석, 폭설을 피하기 위해 설동(얼음동굴)을 파고 지내야 했다.
루팔벽에서는 눈사태와 낙석, 폭설을 피하기 위해 설동(얼음동굴)을 파고 지내야 했다.


낭가파르바트 정상에서 가져온 메스너 캡슐.
낭가파르바트 정상에서 가져온 메스너 캡슐.

이 등정은 첫 8,000m 등정이었지만 무산소 등정은 아니었다. 7,950m에서 산소를 썼다. 워낙 난이도가 높아 안전을 위해 산소를 쓰는 게 원정대의 원칙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김 대장은 처음으로 산소를 써봤다. 산소를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원정대의 원칙에 충실했다. 애초에 8,000m 연속 등정이나 무산소 등정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루팔벽을 오른다는 도전에 몰두해 있었다.

이때 산소를 쓰지 않고 등정에 성공했다면 무산소 14좌 등정 기록은 더욱 단축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산소를 안 썼다고 기록하면 그만이다. 실제로 산소를 안 써도 등정할 수 있을 거란 판단도 됐다. 그러나 김 대장은 “극지나 고산에서 용감한 것보다 자신의 기록에 대해 더욱 용감해져야 한다”고 했다. 자기 자신과 타협을 하게 되면 성장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보여 주기 싫은 부끄러운 실수도 후대를 위해서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는 지론을 내세웠다. 실패를 알려줘야 후대가 그 실패를 딛고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

김 대장은 “실패를 숨기는 건 자기 자신과 후대에도 죄가 된다는 인식을 가지는 것이 등반가가 지켜야 할 기록의 원칙”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아울러 루팔벽은 메스너와 독특한 인연을 맺게 해줬다. 메스너의 루트로 정상에 등정했을 때 카메라가 얼어붙어 정상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대신 등정 징표로 가져온 것이 1978년 메스너가 동생의 시신을 찾아 디아미르벽을 올랐을 때 정상에 두고 온 캡슐이었다. 게다가 두 명 다 루팔벽 등정 파트너를 히말라야에서 떠나보냈다.

김 대장의 파트너였던 이현조는 2007년 봄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중 사망했다.

또한, 이 등정은 이후 미국팀이 9월초 동쪽 신 루트를 등정해 다소 빛이 가려진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메스너가 초등 당시 동행했던 독일 원정대와 원정 과정의 문제로 법정 분쟁이 벌어질 때 이에 관해 세계적인 카라코룸 연구가인 볼프강 헤첼이 저술한 논문에서 김 대장의 루트가 신 변형루트로 공인돼 뒤늦게 등반의 가치가 조명되기도 했다.

2006년 가셔브룸1봉·2봉

가셔브룸 빙하를 단독으로 돌파하는 한 대원의 모습. 파트너가 있으면 서로 로프를 연결해 확보를 하지만 단독등반으로 크레바스를 통과할 경우 많은 위험을 수반한 채 다른 기술을 적용해야 한다.
가셔브룸 빙하를 단독으로 돌파하는 한 대원의 모습. 파트너가 있으면 서로 로프를 연결해 확보를 하지만 단독등반으로 크레바스를 통과할 경우 많은 위험을 수반한 채 다른 기술을 적용해야 한다.

등산, 즉 알피니즘은 산과 사람이 만나 위대한 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동물이 먹이를 찾아 땅 바닥을 바라보며 어슬렁거릴 때 오직 인간만이 고개를 쳐들어 높은 곳, 이상을 바라본다. 김 대장이 바라보는 곳은 히말라야였다.

낭가파르바트 루팔벽을 오른 뒤 김 대장은 탐험에서 등반가의 길로 뛰어 들었다. 등반가의 길을 걷고 또 성공하려면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바로 산과 사람이다. 카라코룸산맥을 1,700여 일 단독으로 탐사하면서 산을 배웠다. 이제 김 대장의 능력을 알아야 할 때다. 시험대에 올렸다. 8,000m급 중에서 낮은 봉우리 축에 속하는 가셔브룸 1봉과 2봉에서였다.

2006년, 김 대장은 가셔브룸1봉(8,068m)과 2봉(8,035m)을 단독으로 연속 등정하며 무산소 등정 도전의 막을 열었다. 8,000m급 단독 등반은 국내 최초의 기록이었다.

당시 김 대장은 카라코룸을 홀로 답사하고 있었다. 소속이 없었기 때문에 팀을 꾸리기에는 예산이 부족했다. 그러던 중 동아대산악부에서 가셔브룸1·2봉에 입산신청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김홍빈-김미곤 팀, 오희준-장부 셰르파팀, 김창호 단독팀 3개 원정대는 동아대에 요청해 허가서를 공유했다.

이번에는 히말라야 등반 콘셉트를 바꿨다. 통상 한국 히말라야 원정대는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캠프1~베이스캠프~캠프2~베이스캠프~캠프3~베이스캠프로 내려와 쉬고 정상 등정일 잡아 전력을 쏟는다. 그러나 김 대장은 업다운 없이 베이스캠프에서 적응하고 한 번에 바로 정상까지 무산소 속도등반으로 밀어붙일 계획이었다.

김 대장은 베이스캠프에서 빙하의 아래쪽인 샤그린까지 고소적응 차 달리기를 했다.

5,000m대에서 달리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가셔브룸 2봉에 저녁식사 후 혼자서 출발했다. 캠프1까지의 크레바스 위험지대에서는 확보를 봐줄 동료가 없어 엎드려 기어가기 도 했다. 7,400m 캠프3까지 올랐으나, 그는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지쳤고 강하지 못했다. 김 대장은 찢어진 텐트에서 죽은 시신과 함께 하루 밤을 새우고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다.

며칠 뒤 늦은 밤 다시 출발했다. 캠프1에 도착하니 눈이 내렸다. 할 수 없이 다음날 낮 동안은 기다리고 저녁에 다시 출발해 18시간 20분 만에 가셔브룸2봉 정상에 섰다. 이어 가셔브룸1봉에도 올랐다.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도 24시간 이내에 무산소 등정하고 하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았다. 김 대장은 고소 적응이 꽤 잘되는 편이다. 고산 등반가는 몇 번의 등반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8,000m급 단독 등반은 국내 첫 기록

김 대장이 가셔브룸1·2봉을 무산소로 도전하게 된 까닭은 뭘까? 김 대장은 웃으면서 “산소 살 돈이 없었다”고 답하며 “8,000m 초반대의 산들은 누구나  무산소로 시도한다”고 덧붙였다. 세계 산악회도 14좌 중 8,500m대 봉우리인 에베레스트, K2, 칸첸중가, 로체, 마칼루 5봉만 무산소로 등정 시 무산소 여부를 기록해 주는 관행을 갖고 있다. 500m의 차이가 그만큼 현격하다.

김 대장은 산소를 사용하는 것을  “등반의 목적을 정상에만 두는 행위”라고 봤다. 정상에 오를 확률을 높이기 위해 산소와 셰르파를 쓴다는 건 등반의 질적 수준에 상관없이 오로지 정상만이 목적이 된다는 것이다. 김 대장은 산소 사용 여부에 대해 “경중을 따질 수 없는 문제지만 서로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서로 다른 가치지 틀린 가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김 대장이 무산소로 오른 건 스스로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자기 힘으로 산을 올라가기 위해서다. 등반가가 궁극적으로 추구할 가치다. 사실 무산소 등정에는 규정이 없다.

통상적으로 세계 산악회는 같은 시즌, 같은 산에서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산소를 사용하지 않는 것 정도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뿐이다. 결국 자기 나름의 규정과 원칙에 따라 오르는 것이 등산이다. 심판은 오직 자신이다. 김 대장의 등반가치관은 원칙을 지키지 않는 현대의 풍조에 많은 울림을 준다.

2016년부터 김 대장은 ‘코리안웨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지구상에 남아 있는 미등정 봉우리와 고산거벽에 신 루트를 개척해 ‘코리안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프로젝트다. 이 원정은 알파인스타일로 경량속공 등반방식이다.

가셔브룸에서 경험한 속도등반은 코리안웨이 프로젝트를 실현 가능케 했다. 2016년 강가푸르나(7,455m) 남벽에 신 루트를 개척한 업적으로 산악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황금피켈상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한국인이 수상한 첫 국제산악상이다.
히말라야에 삶을 걸어 온 김 대장은, 원정대를 꾸릴 예산이 없더라도 당장 내일 떠날 것처럼 준비한다. 준비된 자만이 정상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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