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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유산록 따라 가는 산행<13> 이동항 <유속리산기遊俗離山記>] “문장대 위 큰 바위가 도끼에 쪼개진 듯…”

월간산
  • 입력 2018.06.15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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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상대 상세히 묘사… 상대 위 웅덩이는 한강·낙동강·금강으로 나뉘어 흘러

이동항이 <유속리산기></div>에서 말한 상대, 중대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현재 문장대 자리가 중대, 철사다리를 타고 정상에 올라간 지점이 상대로 추정한다.
이동항이 <유속리산기>에서 말한 상대, 중대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현재 문장대 자리가 중대, 철사다리를 타고 정상에 올라간 지점이 상대로 추정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16 보은현 산천조에 속리산과 삼파수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속리산은 고을 동쪽 44리에 있다.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嶽이라 일컫고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마루에 문장대가 있는데, 층이 쌓인 것이 천연으로 이뤄져 높게 공중에 솟았고, 그 높이가 몇 길인지 알지 못한다. 그 넓이는 사람 3,000명이 앉을 만하고, 대臺 위에 구덩이가 가마솥만 한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불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눠서 반공半空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가서 달천(남한강 지류)이 되어 금천으로 들어간다. (후략)’

속리산에 대한 압축적인 설명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내용과 별로 다르지 않다. 문장대와 세 강으로 흘러가는 삼파수三派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속리산을 다른 명산과 비교한 부분도 있다. 이만부(1664~1732)의 <속리산기俗離山記>에서다.

‘(전략) 청량산의 빼어남이 있으면서 포세鋪勢는 그것보다 크고, 덕유산의 깊숙함이 있으면서 기이함을 드러내어, 지리산보다 훨씬 뛰어나니, 역시 좋고 나쁘고의 품명에 관해서는 말할 만한 것이 있다. 또한 우람한 집과 아스라한 구조물의 경우에는 사람의 힘과 신통의 창조를 극도로 다하였기에 가야산의 해인사와 어근버근하다. (후략)’

이만부는 전반부에 금강산과 비교하면서 금강산보다는 한참 모자라다고 설명하면서 다른 명산과는 비교할 만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속리산 등산객이 철사다리를 타고 상대를 오르고 있다. 속리산 능선이 신록으로 연초록으로 물들어 있다.
속리산 등산객이 철사다리를 타고 상대를 오르고 있다. 속리산 능선이 신록으로 연초록으로 물들어 있다.
어느 유산록에나 등장하는 속리산 수정봉이 법주사 청동미륵대불의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다. 그 앞에 한국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이 보인다.
어느 유산록에나 등장하는 속리산 수정봉이 법주사 청동미륵대불의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다. 그 앞에 한국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이 보인다.

조선 정조 때의 학자 이동항은 1787년에 속리산, 1790년에 지리산, 1791년에 금강산을 유람한 후 기행문을 남겼다. 그는 이것을 <방자유록放恣遊錄>이라 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산을 다니면서 남긴 기록이라고나 할까.

그는 법주사로 들어가 복천사(복천암)→보현재→중사암→중대→상대→문장대→중사암에서 산골 물을 끼고 석문 2개를 거쳐 법주사에 투숙하며 유산 일정을 마친다. 그가 유람한 당시에도 정이품송은 유명했었던 듯하다. 이를 보면서 법주사로 들어가 유람이 시작된다.

‘칡고개에서 한 굽이를 돌아 동쪽을 바라보니, 눈 덮인 높은 산과 옥을 깎은 봉우리들이 구름 하늘 위로 우뚝하게 꽂혀 있다. 괘련송掛輦松(정이품송)을 지나 법주사로 들어갔다. 절의 오른쪽에는 수정봉이 있어, 혼자만 유달리 고상하고도 단정하며 후덕하다. 마치 풍악에 있는 천일대와 같다. 위에는 거북바위가 있는데, 돌의 등은 궁륭 모양으로 둥글게 생겼고, 머리는 서쪽을 향해 쳐들고 있다. 임진년(1592)과 계사년(1693) 사이에 명나라 술객述客(점술가)이 그 바위를 보고 말하기를 “중국 재보의 기운이 이 바위 때문에 점점 흩어져 없어지게 된다”고 하고는 그 거북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 <산문기행> 인용

속리산 서쪽 수정봉은 의미 있는 듯

절의 오른쪽에 있는 수정봉은 현재의 이름과 동일하다. 우뚝 솟은 봉우리다. 속리산의 서쪽에 있다. 수정봉은 위험한 구간으로 통제구간이다. 그 봉우리 아래 법주사 방향 암벽 바위에 보물 218호 마애석불이 모셔져 있다. 강한 기운이 전해지는 듯 옛날부터 제사를 지낸 흔적이 주변에 남아 있다. 들어가는 방향으로 법주사 일주문 왼쪽에 있다. 청동미륵대불도 수정봉 아래 등지고 법주사를 지키며 내려다보는 듯하다. 그 앞쪽에 남한 유일의 목조탑인 국보 55호 팔상전이 있다.

마치 신선이 드나든 듯한 자연의 문인 석문을 지나며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다./사진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
마치 신선이 드나든 듯한 자연의 문인 석문을 지나며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다./사진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
동암에서 바라본 법주사 전경. 
법주사는 배 모양으로 생겼다고 한다./사진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
동암에서 바라본 법주사 전경. 법주사는 배 모양으로 생겼다고 한다./사진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

법주사에는 문화재가 매우 많이 보존돼 있다. 안내판에 이런 문화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세조 얘기만 설명하고 있다. 세조는 단종을 폐위하고 종기가 나는 등 병이 들자 쉬기 위해서 속리산을 찾았다. 그가 머문 암자가 복천암이라고 전한다. 공단에서 일주문에서 복천암 올라가는 계곡 입구까지 ‘세조길’이라고 걷기 좋은 길을 조성해 탐방객들을 맞고 있다.

복천암은 속리산의 정중앙에 위치한다고 한다. 지도에서도 속리산 여덟 봉우리의 정중앙으로 보인다. 분지 같이 둘러싸여 있어 공부하기 딱 좋은 암자다. 송일이라는 행자승이 나와 복천암을 자랑한다. “복천암의 세 가지 진객은 금낭화와 주목, 그리고 목단이다. 조선 세조가 마셨던 샘은 지금도 바위틈에서 그대로 흘러나오고 있으며, 일반인은 마실 수 없고, 부처님 공양수로만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복천사의 동쪽에는 대臺(문장대)가 있고, 천왕봉에서 모자성까지는 기이한 산봉우리들과 괴상한 바위들이 마치 긴 창과 두 갈래 창들을 늘어놓은 듯하기도 하고, 병풍과 휘장을 삼엄하게 드리운 듯하다. 저녁 해가 비스듬히 비추자 옥처럼 흰 바위들이 찬란하게 빛났다.’

이동항은 잠시 속리산의 기이한 모습에 빠진 듯하다. 속리산은 예로부터 빼어난 산세와 기이한 바위, 그리고 계곡으로 유명했다. <동국문헌비고>에서는 속리산에 대해 ‘산세가 웅대하고 기묘한 석봉들이 구름 위로 솟아 옥부용玉芙蓉같이 보여 소금강산이라고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업대에서 바라본 입석대는 기암절벽으로 갖가지 형상을 하고 있는 듯하다./사진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
경업대에서 바라본 입석대는 기암절벽으로 갖가지 형상을 하고 있는 듯하다./사진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

이중환은 <택지리>에서 ‘바위의 형세가 높고 크며, 첩첩 봉우리의 뾰족한 끝이 모여서 막 피어나는 연꽃 같고, 횃불을 벌여 세운 것 같기도 하다. 산 밑은 돌로 이루어진 계곡이 싸고돌아서, 여덟 구비 아홉 돌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이 빼어난 돌이고, 샘물이 돌에서 나오는 까닭에 물맛이 맑고 차갑다. 빛깔 또한 아청빛이어서 사랑스러운데, 충주 달천의 상류다’고 묘사하고 있다.

세조가 쉬었다는 복천암은 속리산 정중앙

속리산은 지금도 8봉, 8대, 8석문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 이름도 8가지나 된다. 속리산이란 이름 외에 광명산光明山, 지명산智明山, 구봉산九峰山, 미지산彌智山, 형제산, 소금강산, 자하산紫霞山이라는 이름이 있다. 우리나라 산들이 대개 그렇듯이 불교적 색채를 많이 띤다. 속리산·광명산·지명산·미지산·자하산 등이 그 범주에 속한다. 특히 법주사 주변의 속리산은 불국토에 가까울 정도로 불교적 색채가 짙다. 한때 암자만 1,000개에 달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반면 화양동구곡 주변의 속리산은 유교적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 우암 송시열뿐만 아니라 조선 선비들이 주로 화양동 구곡과 선유동 구곡에서 음풍농월하면서 남긴 마애석각이 곳곳에 아직 전한다.

속리산의 옛 이름 구봉산은 속리산의 아홉 봉우리에서 유래했다. 실제 봉우리는 그보다 훨씬 많지만 뚜렷하게 손꼽을 만한 봉우리가 아홉 개다. 천왕봉,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 상학봉이다. 그런데 아홉이란 숫자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동양사상에서 ‘아홉’이란 셀 수 없이 매우 많다는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실제 속리산에 수많은 봉우리가 있는데, 굳이 아홉이란 숫자를 부여한 것은 수많은 봉우리가 있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중에서 특히 손꼽을 만한 봉우리 8개를 팔봉이라 했을 것이다.

8대는 여덟 개의 큰 돌을 말하며, 문장대, 입석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신선대, 봉황대, 산호대가 이에 해당한다. 바위가 문을 만들어낸 8석문은 내석문, 외석문, 상환석문, 상고석문, 상고외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추래석문이 있다. 속리산을 유람하면서 8봉, 8대, 8석문만 찾아다녀도 재미가 쏠쏠할 것 같다.

속리산 정중앙에 있는 복천암 전경. 세조가 휴양차 머문 암자로 알려져 있다.
속리산 정중앙에 있는 복천암 전경. 세조가 휴양차 머문 암자로 알려져 있다.
문장대에서 바라본 관음봉과 서북능선.
문장대에서 바라본 관음봉과 서북능선.

이동항은 복천사(지금의 복천암)에서 북쪽으로 꺾어 보현재를 넘는다. 지금의 탐방로와 코스가 별로 다르지 않은 듯하다. 보현재에는 보현재휴게소가 있다. 국립공원 전 지역의 휴게소를 전부 철거했는데, 이곳에는 아직 남아 있다. 동행 안내하는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 이한웅씨는 “법주사에서 계약을 해서 운영하기 때문에 공단에서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옛날 정취가 남은 휴게소다. 잠시 쉬어간다.

이동항은 중사암에 오른다. 중사암은 지금 중사자암으로 알려져 있다. 비법정탐방로 구간에 있다. 공단의 협조를 받아 직원의 안내로 찾았다. 우거진 나무 사이를 파헤쳐 영락없이 개 형상으로 생긴 바위 입구를 지나 10여 분쯤 계곡으로 간다. 갑자기 하늘이 뻥 뚫린 듯한 평지가 나온다. 20m는 족히 될 법한 큰 암벽을 지나자 중사자암이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안내한 이씨는 “중사자암 승려는 ‘입구 바위는 개가 아니라 사자 형상’이라고 주장한다”고 웃으며 말한다. 아무리 봐도 개 형상이다. 큰 암벽 바위벽에는 ‘佛’자를 새겨놓고 있다. 아늑한 분위기에 전망은 매우 좋다.

문장대에 있었던 백석정은 흔적 없어

이동항은 ‘암자는 산의 뾰족한 끝에 있어, 높이가 이미 이 산 높이의 절반을 넘는다. 여기서부터는 산세가 뚝 끊어져 매달린 듯하고, 바위 뿔이 아슬아슬하다. 고개등마루를 올라서니 홀연 백석정이 보인다. 백석정은 하늘 한가운데 우뚝하게 솟아 있으니, 정말로 이것이 바로 문장대의 참면목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릴라같이 생긴 상고외석문.
고릴라같이 생긴 상고외석문.
중사자암 가는 길 중간에 나오는 개 형상의 바위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
중사자암 가는 길 중간에 나오는 개 형상의 바위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

‘드디어 갓과 옷을 벗고 바위틈을 따라 몸을 굽히고 꺾으면서 올라갔다. 바위틈이 다하면서 바위의 면이 둥글고 평평해져서 마치 큰 왕골자리를 깔아놓은 듯하다. 이것이 중대中臺이다. 중대 위에는 또 큰 바위가 도끼로 쪼아진 듯하니, 이것이 바로 상대上臺이다. 상대 위에는 저절로 큰 웅덩이가 이루어져 있는데, 여름에 큰물이 지면 넘쳐흘러서 물이 세 줄기로 나눠 흐른다. 북쪽 모서리가 넘쳐흐르는 것은 용화로 들어가서 괴강槐江(충남 달천)의 근원이 되며, 동쪽 모서리로 넘쳐흐르는 것은 용유로 들어가서 낙강(낙동강)의 근원이 되며, 서쪽 모서리로 넘쳐서 흐르는 것은 석문동石門洞으로 들어가서 금강의 기원이 된다. (중략) 사방으로 아무 장애가 없어 전국을 다 둘러 바라볼 수 있었다. 천 리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한껏 다 바라보아서 속세의 티끌과 먼지들이 가득했던 가슴을 씻어내었으니, 이것이 이번에 내가 대에 올라온 목적이다.’ - <산문기행> 인용

문장대까지 오르는 가파른 깔딱고개에서 아마 이동항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그도 갓과 옷을 벗었다. 문장대를 올라서면 산 능선이 물결처럼 밀려오는 듯하다. 그래서 문장대를 옛날에는 운장대雲藏臺라고 불렀다. 구름 속에 숨은 넓은 바위란 뜻이다.

그런데 세조가 복천암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꿈속에서 한 귀공자가 나타나 “인근의 영봉에 올라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찾았다. 정상 운장대에 ‘오륜삼강五倫三綱’을 명시한 책 한 권이 있어, 그 뒤부터 문장대라 불리게 됐다고 전한다.

이동항은 상대까지 올랐다가 중대로 내렸다가 하면서 속리산의 절경을 감상한다. 그는 연신 감탄한다. “아! 대단한 것을 보았다. 장엄하기도 하구나!” 동행한 그의 벗 노광복이 붓에 먹물을 찍어 제명할 것을 청한다. 이에 이동항은 거절하면서 옛날 충암 선생과 대곡 선생도 문장대를 지팡이와 신발로 유람했지만 결코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며, 이름을 남기지 않은 이름이 정말 큰 이름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호 지암거사遲庵居士 그대로의 모습을 보인다.

문수봉에서 바라본 문장대의 아슬아슬한 절경이 장관이다./사진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
문수봉에서 바라본 문장대의 아슬아슬한 절경이 장관이다./사진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

정상에서 바람이 점점 거세어지자 마침내 대를 내려와 다시 중사암으로 간다. 여기서 코스가 달라진다. 이동항은 중사암에서 줄곧 계곡 따라 내려오다 석문 두 개를 지나 법주사로 돌아온다. 하지만 지금은 중사암 들어가는 길 자체가 비법정탐방로일 뿐만 아니라 중사암에서 능선 너머 계곡으로 내려오는 길은 도저히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묵어 있다.

안내한 공단 직원 이씨는 “길이 아예 없어졌다”고 말한다. 묵은 길이라도 있으면 풀을 헤쳐서라도 갈 수 있지만 요즘은 나무와 풀들이 원체 웃자라 없는 산길을 헤쳐 나가기란 예사 일이 아니다. 밑에서 거꾸로 찾아가보기로 한다.

법주사에서 외석문까지는 차 한 대 지날 만한 임도가 있다. 외석문까지 차로 올라갔다. 정말 바위가 절묘하게 문을 만들었다. 자연이 만든 석문이다. 이런 석문이 지천으로 널린 속리산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 8개만 꼽아 8석문이라 했다니…. 새삼스레 속리산 지명과 관련한 시 한 수가 떠오른다. 신라 최치원의 시라 하기도 하고, 조선 방랑시인 백호 임제의 시라는 설도 있다.

道不遠人 人遠道도불원인 인원도

山非離俗 俗離山산비이속 속리산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았는데, 속세는 산을 멀리하네.

석문 사이로 들어가면 정말 신선이 되기 위해 입문하는 느낌이 든다. 그게 바로 속리산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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