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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스틱 대통령' 윤치술의 힐링&걷기<5>] 등산화 연정戀情

글·사진 윤치술 한국트레킹학교장
  • 입력 2018.08.14 09:50
  • 수정 2018.12.1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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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겨울, 산 선배가 산타클로스의 선물인 듯 너를 내게 안겨주었다. 너의 이름은 비브람vibram(등산화 밑창의 상품명이나 예전엔 중重등산화를 일컬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단어인 ‘산’, 그 꿈의 세계로 나를 싣고 가달라는 의미로 너를 ‘손오공의 구름’에서 딴 ‘오름’이라 불렀다. 모든 사물은 명명되는 순간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너를 의인화시킨 이유는 말 섞고 싶었고 벗이 되고 싶어서였다. 홀로 산길을 걸으며 나무와 문답하고 바람과도 교감하지만 너는 나의 소울메이트Soul mate가 될 것이라 믿었나보다. 너를 처음 만난 그 순간 나는 동대문의 다방에서 뛰쳐나와 눈길 미끄러운 종로를 거쳐 명동까지 몇 번을 넘어지면서도 쿵쾅거리며 내달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기뻤다. 숱한 산행을 함께한 후 너를 오래 지켜주고 싶어 조기 은퇴시켰고 지금은 서재 한편에서 옛 산행을 회상하듯 나와 눈 마주치고 있다.

요즈음도 너를 보면 우리가 함께했던 아름다운 산행들을 추억할 수 있음에 가슴 설렌다. 봄볕에 검게 그을린 내 얼굴이 철쭉 빛에 겹쳐 붉게 물들었던 바래봉의 추억, 여름날 물안개에 함초롬히 젖어 있는 백두산 하늘 연못가 두메양귀비와 갓 볶아 낸 슬라웨시 커피 내음의 낙엽 우부룩한 늦가을 검봉의 기억이 있다. 동장군 매섭던 덕유산 능선의 바람 머무는 곳마다 둔덕 이룬 은령에서의 시간들이, 구름바다 일렁이며 뭇 봉우리들을 가고픈 섬으로 만들어 놓듯, 너와의 동행은 그리움의 지난날이 되었다.

북극권 그린란드에서 알래스카까지 1만2,000km를 개썰매로 달려 세계 최초로 혼자 극점에 선 탐험가 우에무라 나오미의 저서 <안나여, 저게 코츠뷰의 불빛이다>는 헌신적으로 썰매를 끌어 준 대장 개인 ‘안나’와 함께한 이야기다. 우리가 함께한 산행들이 우에무라와 안나처럼 탐험사에 획을 그은 큰일은 아니겠지만, 내 삶을 향기롭고 빛나게 해주었음에는 틀림 없다.

너는 귀떼기청봉 너덜에서 투지의 사륜구동 지프Jeep가 되어 주었고, 황매산 꽃길에서는 스리랑카 실론티처럼 감미롭게 나풀거리는 칸타빌레의 피아노 선율이었다. 도토리거위벌레가 꾀꼬리 편지 전하는 금병산 참나무 길에서, 비오는 지리산을 내려서던 산자락 고샅길에서, 울림이 깊은 큰 산을 유영하듯 라르고를 연주하는 첼로가 되어주었다. 만져지지 않는 옛사랑이 휘우듬해진 싸리울처럼 안타깝던 가을 날 월출산의 달빛 아래에서는 불현듯 치미는 기억의 뒤꼍을 더듬으며 서슴없이 써 내려가는 서정시를 부추기기도 했고….

돌아오는 화요일엔 너와 함께 무궁화 밤 열차를 타고 까만 세상을 달려 지리산으로 가야겠다. 첫 닭 홰칠 무렵 구례구역에서 시래기 해장국으로 고픈 정신을 채우고 시외버스 앞자리에 앉아 창을 열고 새벽하늘을 우러르며 팔딱이는 숲향을 한껏 들여 마셔야겠다. 천은사 지나 굽이를 돌고 돌아 성삼재에 내리면 행여 떨어질세라 너를 꽉 조여 내 몸에 붙이고 노고단으로 가야겠다. 천왕봉이 서운할 듯 해찰하며 걸어도 이틀이면 잔돌고원에 닿겠지? 그곳 철지난 철쭉밭에 앉아 함께 걸어야 할 능선을 바라보며 나의 지음知音이요 고산유수高山流水인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 있다.

“나는 너에게 실려 갈 것이다. 이렇게 바라볼 수만 없는 내 그리움을 너로 하여금 뜨거움으로 부비게 할 것이다.”

윤치술 약력

소속 한국트레킹학교/마더스틱아카데미교장/건누리병원고문/레키 테크니컬어드바이저

경력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외래교수/고려대학교 라이시움 초빙강사/사)대한산악연맹 찾아가는 트레킹스쿨 교장/사)국민생활체육회 한국트레킹학교 교장/월간산 대한민국 등산학교명강사 1호 선정 /EBS1 국내 최초 80분 등산 강의/KBSTV 9시 뉴스, 생로병사의 비밀, 영상앨범 산/KBS2TV 헬로우숲 고정리포터/KBS1 라디오주치의 고정출연 등

윤치술 교장은 ‘강연으로 만나는 산’이라는 주제로 산을 풀어낸다. 독특하고 유익한 명강의로 정평이 나있으며 등산, 트레킹, 걷기의 독보적인 강사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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