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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9월의 명산 | 합천 가야산] 가야국 건국신화 간직한 조선 8경 중 한 곳

월간산
  • 입력 2018.09.06 10:19
  • 수정 2018.11.2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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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류동계곡 입구는 실제 무릉도원 연상케 하는 무릉동… 삼재 피하는 산으로 유명

가야산 운해가 자욱하게 내려 ‘신선의 산’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사진 국립공원관리 공단
가야산 운해가 자욱하게 내려 ‘신선의 산’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사진 국립공원관리 공단

9월의 산은 애매하다. 여름 끝자락과 가을 첫 자락이 중복된다. 여름 계곡 기준으로는 조금 늦은 감이 있고, 가을 단풍으로는 아직 이르다. 실제 국립공원 9월 방문객은 한겨울을 빼고 가장 적다. 그렇다면 계곡도 좋고, 단풍도 좋은 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바로 가야산이다.

가야산伽耶山(1,430m)은 한국 최고의 계곡 홍류동이 있고, <정감록> 십승지 중의 하나인 만수동(지금 마수리로 추정)이 있는 곳이다. 홍류동계곡 단풍은 전국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는다. 홍류동의 정확한 유래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붉게 물든 계곡물이 흘러서 명명됐다’고 전한다. 홍류동 입구는 실제 무릉동이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가야산 월별 방문객도 10월이 16만1,037명으로 가장 많다. 전부 단풍행락객이다. 그만큼 환상적이라는 얘기다.

지금은 능선과 산줄기가 잘리고 토막 나서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지만 한때는 신라가 낳은 최고의 천재 최치원이 신선이 되기 위해 입산했을 정도로 심산유곡을 자랑했다. 가야산 학소대는 최치원이 남긴 마지막 자취이기도 하다. 최치원뿐만 아니라 율곡 이이, 김종직, 한강 정구, 성해응 등 다양한 선비들이 가야산을 유람했고, 그 기록을 남겼다.

정견모주의 신화 간직한 가마바위. 사진 대가야박물관 제공
정견모주의 신화 간직한 가마바위. 사진 대가야박물관 제공
가야산 정상 직전 하늘에 제사 지내던 바위를 바라보고 있다.
가야산 정상 직전 하늘에 제사 지내던 바위를 바라보고 있다.
기암괴석이 만물의 형상을 닮았다는 가야산 만물상 전경.
기암괴석이 만물의 형상을 닮았다는 가야산 만물상 전경.

정구는 1579년 9월 11일부터 24일까지 무려 14일 동안 가야산을 누비며 <유가야산록>을 남겼다.

율곡도 <유가야산부>에서 홍류동 경관을 극찬했다.

‘하늘을 찌를 듯 험한 길을 밟고서, 동굴 입구의 돌문을 두드렸네. 참으로 이미 기이한 경지에 마음이 맞았기에, 위험한 곳을 무릅쓰고서 판판한 평지와 같구나. 어두운 골짜기의 깊은 굽이를 찾아들고, 높은 언덕의 가파른 고개를 오르니, 천태산 폭포가 벼랑에 흘러내리고 형악衡嶽의 구름과 안개가 갑자기 개이네. 기이한 바위가 주위에 벌려 있고, 푸른 절벽이 사면으로 둘러싸여, 돌에는 붉은 전자篆字가 새겨 있고 물결에는 은은히 천둥소리가 일어나는데, 이곳이 이른바 홍류동紅流洞이다.’

가야산은 또 한국 불교 삼보사찰 중 법보사찰의 총본산인 해인사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있다. 해인海印은 성찰의 최고 경지를 나타내는 의미로, ‘경전을 열심히 갈고 닦아 그 경지에 도달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가야산에 있는 이유는 예로부터 오대산, 소백산과 함께 삼재三災(화재·수재·풍재)를 피할 수 있는 깊은 산이었기 때문이다.

홍류동계곡은 지금 가야산 소리길로 올라 갈 수 있다.
홍류동계곡은 지금 가야산 소리길로 올라 갈 수 있다.
가야산에서 본 일출이 운무와 어울려 더욱 장관을 연출한다.
가야산에서 본 일출이 운무와 어울려 더욱 장관을 연출한다.

<여지승람> 권30에 옛 기록을 빌어 ‘가야산의 모양새는 천하에 으뜸이요, 지덕이 또한 비길 데 없다古記云伽倻山形絶於天下之德雙於海東’고 전한다. 이러한 유적과 발자취로 인해 가야산은 예로부터 한반도 12대 명산 또는 조선 8경에 속했다.

이러한 사실과 더불어 언급돼야 할 부분은 가락국(가야)의 건국신화와 건국의 시조모 정견모주의 신화와 관련한 내용이 전해 내려온다는 것이다.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하와 혼인해서 대가야와 금관가야의 시조가 된 왕들을 낳고 가야산의 산신이 됐다고 전한다. 김수로왕의 신화보다 더 오래됐고, 더욱 구체적이다. 이러한 사실을 밝혀낸다면 우리 고대 역사의 출발점을 조금 더 앞당길 수 있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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