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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북한의 명산ㅣ<2>구월산] 한민족의 뿌리·단군신화의 산, 구월산

월간산 글 서현우 기자
  • 입력 2018.09.21 10:17
  • 수정 2018.11.2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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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이 천도 후 신령으로 승천… 유적·전설·꽃 많아 삼다三多의 산으로도 불려

구월산 최고봉 사황봉 전경. 
/사진 조선향토대백과
구월산 최고봉 사황봉 전경. /사진 조선향토대백과

구월산은 예로부터 동쪽의 금강산, 북쪽의 묘향산, 남쪽의 지리산과 함께 4대 명산 중 서쪽의 명산으로 추앙받아왔다.

서산대사는 “금강산은 ‘빼어나나 웅장하지 않다秀而不壯’, 지리산은 ‘웅장하나 빼어나지 않다壯而不秀’, 구월산은 ‘빼어나지도 웅장하지도 않다不秀不壯’, 묘향산은 ‘빼어나기도 하고 웅장하기도 하다亦秀亦壯”고 평가했다. 물론 서산대사가 묘향산에서 수행하며 말년을 보냈기에 다분히 주관적 평가이지만 한반도의 4대 명산으로 꼽히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여기서 백두산이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백두산이 우리나라 조종의 산으로, 4대 명산의 어버이 격이라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후 서산대사가 백두산과 4대 명산을 묶어 조선의 5대 명산을 공인했고, 김정일 위원장이 칠보산을 5대 명산에 더해 현재 6대 명산의 규격이 갖춰지게 됐다.

황해남도 신천군 용진면과 은율군 남부면 일도면에 걸쳐 있는 구월산(954m)은 황해도의 산세가 비교적 낮고 평평한 데 비해 기반암인 흑운모화강암이 심한 풍화작용을 받아 곳곳에 기암절벽이 형성돼 있으며, 이 사이로 맑은 계곡이 흘러 수많은 명승지를 이루고 있다. 현재 김정은 위원장이 동쪽 칠보산 관광특구 개발에 중점을 두고 있는 반면, 아버지인 김정일 위원장은 구월산에 별장을 두고 유원지 집중현지지도에 나선 바 있다.

1 구월산 은정호 가을 풍경. 2 구월산 삼형제봉의 구름바다. 3 월정사 가을 풍경. 4 월정사 극락보전의 내부두공./사진 평양주재 러시아대사관 페이스북·우리민족끼리·조선향토대백과
1 구월산 은정호 가을 풍경. 2 구월산 삼형제봉의 구름바다. 3 월정사 가을 풍경. 4 월정사 극락보전의 내부두공./사진 평양주재 러시아대사관 페이스북·우리민족끼리·조선향토대백과

박성태 선생의 <신 산경표>에 의하면, 구월산은 백두대간 두류산에서 갈라져 나온 해서정맥이 황해로 흘러들어가는 끝자락에 위치했다. 구 산경표의 해서정맥은 장산곶이 종착지였지만, 개정 후 달마산에서 장산곶 구간이 장산지맥이 되고, 대동강 하구의 송곶산, 구월산이 새로운 해서정맥의 끝이 됐다.

현재의 명칭인 구월九月의 유래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유력하다. 고구려 시대 구월산 주변의 지명인 궁홀, 또는 궁올弓兀이 구전되다 구월로 굳어졌다는 설과, 단군檀君이 이곳에서 9월 9일 승천해서 산신이 됐다고 전해 구월산이라 일컫게 됐다는 설이다.

구월산의 옛 명칭은 아사달산阿斯達山, 궁홀弓忽, 백악白岳, 증산甑山, 삼위三危, 서진西鎭 등 셀 수 없이 많은 지명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을 정도로 역사적·신화적 전승이 풍부하다.

이 중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것이 단군신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삼국유사>에 따르면 ‘태백에서 묘향산으로 내려온 단군은 도읍을 평양 부근에 전했다가 다시 구월산 밑 당장평唐藏坪으로 옮겨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이곳에서 산신이 됐다’는 건국신화가 전해진다. 구월산에는 환인과 환웅, 단군을 모셨던 삼성사가 있었으며, 오봉 중턱에는 단군이 등선登仙했다는 ‘단군대’, 단군이 훈련했다는 ‘쿵쿵바위’ 등이 남아 있다. 구월산 최고봉인 사황봉思皇峯(954m)을 비롯해 백운대, 사궁성 등의 지명도 모두 단군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구월산성 서문각이 보이는 구월산마루./사진 조선향토대백과
구월산성 서문각이 보이는 구월산마루./사진 조선향토대백과

이는 우리나라 민족의 요체를 이루는 고대신앙 가운데 산이 민속 종교적 숭앙의 대상으로 구체화되고, 산신으로 인격화된 첫 번째 출발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등산인구가 2,300만 명까지 폭증하는 등 우리 민족의 남다른 애산愛山의식의 근원을 숭천숭산崇天崇山 사상이 배태된 건국신화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밖에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수세守勢 및 지리地理의 험한 것과 논과 밭의 기름진 것은 계룡산보다 훨씬 낫고, 톱니 같은 돌산의 형상은 오관산, 삼각산에 못지않다’며 ‘언젠가 한번은 도읍지가 될 만하다’고 극찬한 내용이 전해진다.

반면 구월산을 내심 못마땅해 하는 듯한 기록들도 남아 있다. 서산대사는 구월산을 “불수불장不秀不壯(빼어나지도 장엄하지도 못하다)”이라고 혹평했다. 비교 대상이 5대 명산인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참작은 된다. 그런데도 조선의 5대 명산으로 둔 것을 보면 구월산의 가치가 결코 떨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육당 최남선은 <구월산 기행>을 통해 “큰 산도 아니요, 높음을 자랑하는 산도 아니며, 병풍같이 길게 둘러 있긴 하나 따로따로 보면 상큼하고 빼어나지 못한 부분도 있다”면서도 “옥으로 깎은 연꽃봉우리 같은 아사봉阿斯峯(687m)이 있고, 웅장하진 못하나 일출봉, 광봉, 주토봉의 기개가 시퍼렇다”고 평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옛 조상들은 구월산의 자연적 가치는 상대적으로 낮게 보았으나 인문·역사·신화적 가치를 높게 샀던 것으로 풀이된다.

1. 구월산성 동문각을 탐승중인 북한 주민들. 2. 구월산성 서문/사진 조선향토대백과
1. 구월산성 동문각을 탐승중인 북한 주민들. 2. 구월산성 서문/사진 조선향토대백과
풍부한 생태자원과 수려한 풍치

하지만 일부 혹평과 달리 구월산의 경관적 가치는 결코 여타 명산에 밀리지 않는다. 99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알려진 수려한 산세와 계곡, 폭포가 잘 어우러져 있어 방랑시인 김삿갓은 2년 동안 9월에 구월산을 보고 왔다면서 아름다움을 시詩로 전한 바 있다.

또한, 이 지역에는 600여 종에 달하는 식물이 자생하는데, 북부지방식물과 더불어 이북지역에서는 희귀한 남방계통의 보리수나무나 병아리꽃나무, 청미래덩굴 등이 혼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외에도 섬양지꽃을 비롯한 골담초들이 드물게 자라며, 깊은 골짜기에는 북한 특산식물인 만리화, 낮은 산기슭과 골짜기에는 검팽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식물에 추가로 유적, 전설이 많다고 해 ‘삼다三多의 산’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동물 자원도 풍부해 동쪽 정곡골에는 북한 특산종인 구월산애기개구리의 서식지가 천연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그 외에 검은딱따구리, 풀색딱따구리, 파랑새, 접동새를 비롯한 100여 종의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

북한은 일찍이 구월산의 생태적 가치에 주목해 1976년 구월산을 자연보호구로 지정한 바 있다. 2004년에는 세계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아 북한에서는 백두산에 이어 두 번째, 한반도 전체로는 남한의 설악산과 제주도를 포함해 네 번째로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선정될 만큼 남다른 생태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수직절리가 발달한 기암괴봉과 가을 단풍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다./사진 평양주재 러시아대사관 페이스북
수직절리가 발달한 기암괴봉과 가을 단풍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다./사진 평양주재 러시아대사관 페이스북

특히, 구월산은 높은 산허리까지 은행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가을의 산으로 유명하다. 구월산 소재지인 은율군의 은율팔경 중 2경도 가을의 구월을 꼭 집어 ‘구월단풍九月丹楓’이다. 구월이란 이름도 가을인 9월에 가장 아름다워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서해의 금강이라는 별칭이 무색하지 않다.

또한, <우리민족끼리>의 보도에 따르면 ‘은율팔경 중 3경인 용연폭포를 비롯해 우람찬 봉우리와 능선, 겹겹이 들어선 푸른 계곡과 기묘한 바위 등이 절경을 이룬다’고 하며 ‘깊은 골짜기에는 구슬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려 물안개에 칠색 무지개 영롱한 용연폭포, 삼형제폭포를 비롯한 폭포와 담소들을 빚어낸다’고 한다.

이처럼 구월산은 산성골, 오봉골, 운계골, 화장골, 원명골 등 아름답고 깊은 골짜기들에서 한이천, 한일천, 장연남대천, 구월천, 산촌천 등의 계곡이 흘러내린다. 북쪽 산허리에는 7년 동안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석담이 있으며, 서쪽에는 마당소, 가마소와 중턱의 교요연 등 깊은 늪도 있을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

구월산 괴봉의 모습. 벽면의 선전용 낙서가 보인다./사진 평양주재 러시아대사관 페이스북
구월산 괴봉의 모습. 벽면의 선전용 낙서가 보인다./사진 평양주재 러시아대사관 페이스북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역사자원 많아

구월산에는 전설의 영역인 ‘신화’뿐만 아니라 역사적 자원들이 풍부하게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가 남방 진출을 활발히 하던 4세기 중엽부터 5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구월산성’은 국가지정문화재 보존급(준국보급) 제245호로 지정돼 보전되고 있다. 험준한 산세의 능선을 연결하고 여러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서쪽 수구문 밖으로 흘러나가 폭포가 되는 천연의 요새다. 현재는 거의 허물어진 상태고 별장청別將廳 등의 건물 터가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중심지로 부각됐다. 31본산 중의 하나이며 황해도 내의 25개 사찰을 관장하는 절인 신라 애장왕 때 건립된 패엽사貝葉寺와 유서 깊은 월정사月精寺가 남아 있다. 월정사는 한국전쟁 이후에도 피해를 입지 않고 온전히 남아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이 조선의 3대 도적으로 꼽은 홍길동, 장길산, 임꺽정 중 장길산과 임꺽정의 주 활동무대가 구월산이었다. 당시에는 기득권에 의해 도적으로 여겨졌지만, 현재는 착취되는 농민들의 저항의식에서 비롯된 의적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임꺽정은 조선 명종 때 무려 3년 동안 구월산에서 관군의 추적을 피한 바 있으며, 장길산은 1696년 구월산에서 봉기해 끝내 잡히지 않았다.

근현대에도 구월산은 저항의 본산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는 독립운동단체인 구월산대九月山隊가 창설돼 일제 앞잡이인 은율군수 최병혁崔炳赫을 처단하는 등 무장독립운동을 펼쳤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김종벽 대위가 부대장을 맡아 1950년 12월 창설된 구월산 유격대가 14후퇴 때도 남쪽으로 이동하지 않고 구월산 일대에 잔류하면서 유격전을 펼쳐 혁혁한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근세 이후 구월산이 저항 활동의 본거지가 된 것은 그만큼 산과 골이 깊고 물이 많아 투쟁생활이 용이했고, 또 평양과의 접근성이 높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구월산은 산 곳곳에 아름다운 담소를 품고 있으면서, 동시에 반만년의 신화와 역사도 담겨 있는 민족의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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