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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등정 ‘김창호 대장의 그때 그 순간’ | <5> 2010년 캉첸중가, 낭가파르바트, 시샤팡마] 그는 왜 캉첸중가를 7번이나 도전했을까

월간산
  • 입력 2018.10.16 09:49
  • 수정 2018.11.02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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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시즌별 1개봉씩 등정…메스너에 이어
낭가 루팔과 디아미르 동시 등정 기록 세워

2010년 7월 10일 오전 6시께 낭가파르바트 정상부 아래로 진입 중인 대원들. 여명을 받아 능선이 붉게 반짝인다.
2010년 7월 10일 오전 6시께 낭가파르바트 정상부 아래로 진입 중인 대원들. 여명을 받아 능선이 붉게 반짝인다.

2010년, 캉첸중가는 고요했다. 다른 등반대가 한 팀도 없었다. 베이스캠프에는 오로지 ‘다이내믹 부산희망원정대’만 있었다. 이에 따라 모든 루트작업을 오롯이 담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셰르파들마저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김창호 대장은 담담히 눈을 헤쳤다.

4월 15일, 속전속결로 정상에 오를 요량으로 베이스캠프를 출발한 김 대장과 서성호 대원, 셰르파 2명은 3시간 30분 만에 캠프1에 도달했다. 간밤에 내린 눈이 발목을 붙잡았지만 거침없이 올랐다. 출발한 지 10시간 30분이 지났을 무렵 텐트를 설치해 뒀던 캠프3의 위치가 보였다.

먼저 캠프3에 도착한 건 니마 셰르파와 상게 셰르파였다. 그런데 이들은 캠프지에 도착하자 뒤돌아서 김 대장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의아했다. 서 대원과 연이어 캠프3에 올랐다. 큰 세락 아래 분명 설치해 뒀던 텐트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잘못 올라왔나 싶어 주위를 살폈다.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텐트와 침낭, 우모복 모두 사라져 버렸다. 며칠 전 몰아닥친 폭풍설에 날아간 것이다. 진퇴양난이었다. 비박을 할 침낭도 없고, 캠프4까지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니마 셰르파는 망연자실한 나머지 굵은 눈물을 쏟아냈다. 한 번에 캠프3까지 올랐기에 무척 지친 상황에서 거대한 좌절감을 맛봤기 때문이다.

“어떡하죠?”

니마 셰르파가 묻는다. 절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쳐 있는 몸에 마음마저 지쳐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대장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려가서 고기나 먹고 오지 뭐.”

히말라야 등반에서는 체력적인 피로를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심리적, 정신적인 피로를 관리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지친 몸이야 약간의 휴식을 취하면 금방 회복할 수 있지만 지쳐 버린 마음은 다시 되돌리기 몹시 어렵기 때문이다. 김 대장은 정신적인 타격에 개의치 않는다. 좌절감뿐만 아니라 좌절감을 딛고 일어서는 것도 익숙한 일이기 때문이다.

람제에서 빙하지대 중간캠프(4,800m) 지점으로 향하는 상행 캐러밴. 캉첸중가 남서면에서 흘러내리는 얄룽빙하가 펼쳐져 있다.
람제에서 빙하지대 중간캠프(4,800m) 지점으로 향하는 상행 캐러밴. 캉첸중가 남서면에서 흘러내리는 얄룽빙하가 펼쳐져 있다.

14좌 중 가장 힘들었던 캉첸중가

2010년 다이내믹 부산희망원정대는 봄에 캉첸중가(8,586m), 여름에 낭가파르바트(8,125m), 가을에 시샤팡마(8,012m)를 등정하는 성과를 거뒀다. 원정대가 손발이 맞으면서 탄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 대장은 이 중 캉첸중가를 “가장 힘들었던 산”이라고 회고했다. 다른 고봉들은 4~5번의 운행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반면, 캉첸중가는 7번이나 도전한 끝에 등정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통상적으로 다른 고봉들은 여러 팀이 같이 연합해서 루트작업을 했었는데 캉첸중가는 타 원정대가 없어 루트작업을 단독으로 했기에 피로가 더욱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캉첸중가는 대부분의 원정대들은 물론 셰르파들마저 기피하는 산이기도 하다. 안나푸르나 다음으로 등정 확률이 낮은 데다가 지명도도 낮기 때문이다. 베이스캠프까지 상행 캐러밴의 길이도 열흘이나 걸리고 등반 루트도 굉장히 길다. 이 때문에 사전에 타국대의 캉첸중가 원정 정보를 접하면 원정지를 변경해 합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등반은 셰르파들이 “돈은 됐으니 제발 집에 가게만 해달라”고 통사정할 정도로 어려웠다. 첫 번째 등정 시도는 강풍으로 중단됐으며, 두 번째 등정 시도는 캠프3가 폭풍설에 날아가 버려 실패했다. 3차 시도는 상게 셰르파가 동상기가 있어 내려와야 했다. 대부분의 원정대는 이 정도면 원정을 중단하는데 부산원정대는 등정을 강행했다. 셰르파들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집중력이었다.

게다가 최소한 4명의 고소포터를 고용하는 반면, 부산원정대는 단 두 명만 고용했으니 어려움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셰르파들을 잘 설득해 김 대장과 서 대원과 함께 정상 등정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행 캐러밴 때 보통 원정대에서 셰르파들의 노고를 치하해 술을 사주는 반면 니마와 상게는 오히려 “원정대 덕분에 우리들의 등정 경력이 좋아졌다”며 술을 샀다. 대부분의 셰르파들은 캉첸중가 경력이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니마는 캉첸중가 첫 등정이었다.

 정상으로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홈통바위. 5~6m 정도 하강해야 한다. 
여길 지나지 않으면 정상으로 가기 매우 어렵다. 정상 등정의 증거물 중 하나다.
정상으로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홈통바위. 5~6m 정도 하강해야 한다. 여길 지나지 않으면 정상으로 가기 매우 어렵다. 정상 등정의 증거물 중 하나다.

셰르파 니마와 상게, 김진태 대원의 희생

한편, 2007년 K2와 브로드피크 등정 후 3년 만에 원정대에 합류한 김진태 대원은 고소적응 등반 도중에 두 차례나 크레바스에 추락했다. 로프에 연결돼 있었고 깊게 빠진 것도 아니었지만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김 대장은 “김진태 대원은 베이스캠프에서도 운동을 해야 밥을 먹을 정도로 체력이 좋은 선배”라며 “실제 추락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심했다기보다는 후배 대원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고 전했다. 김진태 대원은 캉첸중가 등정의 꿈은 후배에게 맡겼지만, 다행히 바로 다음 낭가파르바트 등정에는 성공해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사실, 캉첸중가 원정을 나서는 김 대장의 속내는 몹시 복잡했다. 먼저, 원정대의 원래 취지인 후배 산악인 양성에 미진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원정대 구성이 홍보성 대장, 김창호, 서성호, 김진태 대원으로 정형화됐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홍보성 대장은 단호하게 이러한 비판을 반박했다.

“홍보성 대장님은 직접 비판하시는 분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설득하셨어요. 후진 양성이라는 게 취지는 좋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있었거든요. 경험이 일천한 사람이 8,000m 등반을 나선다는 건 무척 위험도가 높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부산원정대는 등정 속도가 굉장히 빠른 편이기 때문에 동행한다고 하더라도 따라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요. 이러면 본인도 좌절하게 됩니다.”

게다가 젊은 후배 산악인의 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젊은 세대들은 자연암벽보다는 스포츠클라이밍을 주로 즐기기 때문이었다. 고산극한을 추구하는 젊은 층의 축소는 전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했다. 또한, 원정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연맹 입장에서는 전문 산악인으로 성장한다는 보장이 없는 젊은 산악인을 무턱대고 선발하기 곤란했다. 후배 산악인을 어떻게 양성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고민이다.

캉첸중가 캠프4로 향하는 김창호 대장. 설사면 너머로 캉첸중가의 검푸른 연봉이 늘어서 있다.
캉첸중가 캠프4로 향하는 김창호 대장. 설사면 너머로 캉첸중가의 검푸른 연봉이 늘어서 있다.
정상에서 약 10m 아래에 있는 암벽. 원정대들은 대개 
바위에 박혀 있는 확보물을 이용해 정상으로 향한다.
정상에서 약 10m 아래에 있는 암벽. 원정대들은 대개 바위에 박혀 있는 확보물을 이용해 정상으로 향한다.

등정 논란, 스스로 증명해야 해

가장 김 대장의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2009년 촉발된 오은선 대장의 캉첸중가 등정 시비였다. 원정대가 캉첸중가 등정에 나선다고 하자 국내는 물론 현지 엘리자베스 홀리 여사의 사무실에서도 이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이 때문에 캉첸중가 정상부의 특정물들과 루트 사진을 무수히 찍어야만 했다. 이로 인해 캉첸중가는 14좌 중 사진을 제일 많이 찍은 산이 됐다.

“히말라야 등정 역사에서 등정 시비는 무수히 있어 왔어요. 일례로 2명의 등반가가 정상 직전에 무전으로 ‘정상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컨디션도 괜찮고 정상에 서서 다시 교신하겠다’고 한 뒤 실종한 사건이 있었어요. 원정대는 사망한 두 대원의 명예를 지켜 주기 위해 정상에 올랐다고 발표했죠. 문제는 무전교신 외에 사진이나 정상 증거물 등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었어요. 결국 등정 기록에 ‘논란 중’이라는 꼬리표가 달렸죠.”

오은선 대장의 등정 논란을 두고 “엘리자베스 홀리 여사가 등정을 인정했다”는 보도도 나온 바 있었다. 그러나 김 대장은 “홀리 여사는 그저 등정자가 등정했다고 하면 원칙적으로 진술을 믿고 기록을 누적시킬 뿐”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여전히 논란 중이다.

“논란 중이라는 건 민감하면서도 민감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등정하지 못했다는 명확한 근거자료도 없거든요. 결국 본인의 양심 문제입니다. 본인이 적극적으로 소명해야 할 책임이 있죠.”

김 대장은 캉첸중가 등정자로 대한산악연맹의 오은선 대장의 캉첸중가 등정 의혹검증회의에 참석한 바 있다. 연맹은 등정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김 대장은 “회의에서 등정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해서 오 대장의 ‘여성 최초 14좌 완등’기록을 빼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며 “등반가라면 응당 홀리 여사처럼 등반가의 말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운무에 휩싸여 있는 낭가파르바트 정상.
운무에 휩싸여 있는 낭가파르바트 정상.
낭가파르바트 캠프2와 캠프3 사이 대설사면 구간을 오르고 있는 대원들.
낭가파르바트 캠프2와 캠프3 사이 대설사면 구간을 오르고 있는 대원들.

김 대장은 “등반은 경쟁이 아니라는 명제에도 불구하고 타이틀 경쟁이 일어난 것이 문제”라며 등정의 진위보다 논란이 촉발된 배경에 초점을 뒀다. 또한, “이처럼 부정적 비판에 대응하는 방법이 산악 문화의 성숙도를 나타낸다”고 전했다.

“올해 한 폴란드 원정대가 파키스탄 카라코룸의 한 봉우리를 등정했어요. 제가 2003년 초등하고 정상 근처에 슬링을 하나 남겨 놓았던 봉우리입니다. 그런데 이 원정대는 등정 후에 ‘우리가 초등이라 생각하고 올랐는데 정상 근처에 슬링이 있었다’고 기록했어요. 제가 초등한 기록은 오로지 월간 <산>에, 그것도 한글로 남아 있어서 초등이라고 발표해도 세계 그 누구도 몰랐을 겁니다. 이를 밝힌 건 대단한 용기입니다. 폴란드의 산악 문화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사례죠.”

가장 의미 있는 봉우리, 낭가파르바트

우여곡절 끝에 봄 시즌 캉첸중가 등정을 마친 김 대장은 한국으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여름 시즌 낭가파르바트 등정에 나섰다. 낭가파르바트는 2005년 루팔벽을 통해 등정한 후, 디아미르벽으로 하산한 바 있는 산이었다. 이번 원정에서는 디아미르벽으로 등정을 시도했다.

“낭가파르바트는 2000년대 초 파키스탄 일대를 탐사하면서 모산처럼 여기던 산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미 등정한 경험도 있어서 수월하게 등반할 수 있었어요.”

낭가파르바트 일대는 살벌한 상태였다. 인더스강 지류인 훈자계곡에 큰 산사태가 발생해 길기트 위쪽 훈자와 나가르 방면의 훈자강이 막혀 버렸다. 이로 인해 약 25km로 구간이 호수로 변해 호수의 둑이 붕괴될 시 홍수의 위험이 상존하게 됐다. 원정 경유지인 칠라스는 공권력이 부재한 지역으로 “낮에는 경찰이 지키고 밤에는 테러범들이 치안을 담당하는 곳”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는 상태였다.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선 김창호 대장과 서성호(오른쪽) 대원.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선 김창호 대장과 서성호(오른쪽) 대원.
부나르계곡 절벽 위에 위치한 디아마로이 마을. 정부의 행정력이 전혀 미치지 않는 오지의 마을이다.
부나르계곡 절벽 위에 위치한 디아마로이 마을. 정부의 행정력이 전혀 미치지 않는 오지의 마을이다.

2013년 6월에는 디아미르 베이스캠프에 테러범들이 몰려와 산악인 10명을 무참히 살해한 적도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부산원정대는 아무런 사고 없이 조용히 등반을 마쳤다.

“낭가파르바트는 저에겐 가장 의미 있는 봉우리입니다. 14좌 중 처음으로 오른 산이기도 했고, 그때 같이 오른 이현조 대원이 나중에 사고를 당하기도 했죠. 산 곳곳을 전부 알 정도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산이기도 합니다. 라인홀트 메스너에게도 히말라야 첫 산이자 마지막 산이었고 가장 고통을 준 산이자 가장 큰 영광을 안겨 줬던 산이죠.”

김 대장은 디아미르벽을 통해 낭가파르바트를 등정하면서 라인홀트 메스너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디아미르벽(서벽)과 루팔벽(남벽)을 모두 오른 등반가로 기록됐다. 디아미르벽으로 오르는 루트는 2005년 루팔벽 등정 후 하산 길이었다. 환각에 시달리며 내려왔었던 길을 거슬러 오르면서 새롭게 기억을 짜 맞췄다. 죽음의 경계위에 서서 3시간의 비박을 한 끝에 생명을 머금은 태양이 떠올라 살아 내려올 수 있었던 기억이다. 김 대장은 “끔찍하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회고했다.

시샤팡마, BC 출발 3일 만에 등정

시샤팡마는 14좌 중 제일 낮은 산이다. 최근에는 남벽루트의 연구가 진척되면서 등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기도 했다. 등반거리가 워낙 짧아 날씨만 좋으면 8,000m 최단시간 등반 같은 속도등반의 기록이 쏟아졌던 산이기도 하다. 부산원정대 역시 남벽을 통해 베이스캠프 출발 3일 만에 등정할 수 있었다.

시샤팡마 캠프2(7,200m)에 설치된 텐트 안에서 바라본 시샤팡마 산군. 네팔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는 산 능선들이 마치 병풍처럼 아름답게 뻗어 있다.
시샤팡마 캠프2(7,200m)에 설치된 텐트 안에서 바라본 시샤팡마 산군. 네팔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는 산 능선들이 마치 병풍처럼 아름답게 뻗어 있다.
일명 ‘지옥문’을 벗어나 동릉 아래 7,850m 지점의 설벽을 등반 중인 김창호 대장.
일명 ‘지옥문’을 벗어나 동릉 아래 7,850m 지점의 설벽을 등반 중인 김창호 대장.
시샤팡마 정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서성호 대원. 이 지점에서 주봉 정상까지는 약 30분이 소요된다. 오른쪽의 날카로운 설릉이 끝나는 곳이 중앙봉이다.
시샤팡마 정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서성호 대원. 이 지점에서 주봉 정상까지는 약 30분이 소요된다. 오른쪽의 날카로운 설릉이 끝나는 곳이 중앙봉이다.

김 대장은 “시샤팡마는 정말로 가고 싶었던 산”이라고 했다. 2002년 한국도로공사 시샤팡마 남벽 신 루트 원정 때에도 베이스캠프 서포터로라도 참가해 주변 산군을 연구하고자 했었다. 네팔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는 산줄기가 마치 병풍처럼 아름답게 뻗어 있는데다, 당시에는 중국 내에서 행정적으로 히말라야를 탐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동행이 성사되지 않았으나 이때의 인연으로 향후 영호남 로체 남벽 원정에 참여해 8,000m급 고봉 등반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었다. 

당초 부산원정대는 1차 등정 후 알파인 스타일로 남서벽상의 비엘리스키 루트의 오른쪽 벽상의 돌출부를 따라 남동릉에 올라 정상부 능선을 통해 정상에 도달하는 신 루트 개척을 시도하려 했지만 악천후로 단념했다. 시대가 공유하는 등반의 가치가 등로주의로 이양되면서 부산원정대도 원정마다 신 루트 개척을 염두에 둔 등반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대체적으로 최근 신 루트는 100% 다른 길을 뜻하지 않습니다. 옛길과 겹쳐 오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중 3분의 2 이상이 다르면 신 루트로 인정하는 추세입니다.”

다만 김 대장은 “등로주의가 보편화되면서 대중이나 산악인들의 눈높이가 높아진 탓에 원정대들이 부담감을 많이 느끼는 모양”이라며 “이로 인해 엉뚱한 등반을 신 루트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비판했다. 모든 등반기록을 검토하지도 않고, 명확한 근거자료도 없는 데다 아주 잠깐 우회로를 경유한 것에 불과한 등반을 어떻게든 드러내고자 해서 발생하는 문제다. 김 대장은 “국가적 망신”이라고 했다.

“카트만두에 머물며 홀리 여사와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대화를 나누며 기록이라는 건 명확해야 하고, 감정이 배제되어야 하며, 차갑고 냉엄해야 한단 사실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어요. 등반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적인 등반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게 만들어 위험에 내몰리게 됩니다. 등반은 차가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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