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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해외 원정ㅣ키르기스스탄 알라메딘 원더러스 등정기]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알라메딘

월간산
  • 입력 2018.11.22 10:32
  • 수정 2018.11.26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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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릭산군의 4,875m급 키르기스스탄봉 등정 시도…정상 200m 앞두고 돌아서

하강을 마친 뒤 돌아본 칼날능선.
하강을 마친 뒤 돌아본 칼날능선.

몇 번을 하강했을까. 나는 먼저 내려와서 열심히 A-thread 앵커를 파고 있었다. 아이스 스크루의 머리채를 잡고 빙글빙글 돌리면 안쪽의 비어 있는 원형 홈통을 따라 빙벽 깊은 곳의 깨끗한 얼음이 길쭉하게 빠져나온다.

 “석주야, 우리 이미 죽은 거 아닐까?”

 동욱 형이 내 머리 위로 거의 다 내려와서 말했다. 신나게 돌리던 아이스 스크루를 멈췄다. 고개를 들어 여전히 로프에 매달려 있는 형을 바라봤다. 형의 눈은 짙은 푸른색 선글라스 뒤에 가려있다. 위에서 내려온 그가 산 사람인지 귀신인지 아니면 저승사자인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

 머리가 멍하다. 세상이 멍하다. 하늘에 구름이 없고, 귓가에 바람이 없고, 발 밑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 거대한 샬릭계곡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고는 얼음벽에 매달린 형과 나, 둘뿐이다. 완벽한 고요다.

 “내려오면서 ‘우리가 어제 비박하다가 죽었고, 지금 이게 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갑자기 소름이 돋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우리가 죽은 거라고?

“자면 안 돼요 형.”

 “안 자.”

 “형, 자요?”

 “아니, 안 자.”

 늦은 시간에 예상을 벗어난 악천후를 만나 두 사람의 엉덩이를 붙일 만큼 눈과 얼음을 파내서 로프를 넣은 배낭을 깔고 앉았다. 그리고 얇은 비대칭형의 1인용 타프 한 장을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밤새 오들오들 떨었다.

 8월 18일 새벽 4시, 원래 휴식일이지만 다음날 등반을 위한 장비를 올려두기 위해 출발했다. 벽 밑에 도착할 즈음부터 눈이 엄청나게 쏟아졌다. 벽 밑에 등반에 필요한 장비들을 내려두고 칠리색 타프를 덮었다. 엄청나게 내리는 눈으로 타프가 금세 허옇게 뒤덮였다. 짐을 부리면서 장비를 두고 가는 게 잘하는 선택인가 싶었지만 이내 마음을 잡았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눈보라와 크레바스를 뚫고 베이스캠프로 복귀했다. 복귀 후 하루 종일 비가 오는가 하면 눈이 내리다가 다시 해가 나고 금방 또 비가 내렸다.

해가 잘 안 나오니 새벽에 짐을 수송하고 오느라 다 젖은 옷이며 빙벽화가 도무지 마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잠깐 해가 뜨는 틈을 타서 말리고 걷고를 반복했다. 시간은 흐르는데 날씨는 맑아질 기미가 없어 초조했다.

출발하기 직전까지 날씨를 본 후 등반을 결정하기로 하고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을 때까지 오락가락하던 하늘이 밤이 되자 깨끗이 개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별이 뜨니 마음도 맑아졌다. 준비를 마치고 침낭에 들어갔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자는 둥 마는 둥 하다 보니 어느덧 새벽 2시가 됐다.

샬릭계곡의 전경. 왼쪽이 우쉬첸카봉, 가운데가 키르기스스탄봉이며 좌측 암벽이 알라메딘 월이다.
샬릭계곡의 전경. 왼쪽이 우쉬첸카봉, 가운데가 키르기스스탄봉이며 좌측 암벽이 알라메딘 월이다.
날씨가 좋아진 틈을 타 등정 시도

19일 새벽 3시 베이스캠프를 출발, 4시쯤 벽 밑에 도착했으나 전날 올려 둔 장비가 눈에 완전히 묻혀 찾는 데만 1시간가량 소요됐다. 겨우 찾아서 장비를 착용하니 이미 5시가 지났고 슬슬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벽 밑의 베르그슈른트까지 올라가는 데 또 1시간이 걸렸다. 6시 20분 형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장비를 착용했다.

다시 한 시간이 지난 7시 25분, 베르그슈른트를 넘어 상체가 젖혀지는 빙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실제로는 아니겠지만 체감 상으로는 90도가 약간 넘는 것 같았다. 표면의 얼음이 불안해 타격이 강해지고 횟수가 많아졌다. 시작부터 만만치 않아 전완근에 펌핑이 왔다. 종아리는 지친 지 오래였다. 20m 정도를 오르니 경사가 90도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의 직벽을 넘느라 지쳐 60m만 올랐다. 그 뒤로는 80도 전후의 빙벽이 계속 이어져서 동시등반으로 한 피치에 약 100m씩 올랐다. 예상보다 시간이 늦어져 마음이 급했다.

이번 등정의 열쇠가 될 거라고 예상한 쿨와르 아래에 도착했다. 하지만 멀리서 본 것과는 다르게 바위에 아주 얕게 푸석한 눈이 덮인 수직벽이었다. 튼튼한 얼음에 스크루를 하나 설치하고, 왼쪽으로 10m 정도 트래버스해 바위지대로 진입했다.

5.8~5.9 정도로 예상되는 바위지대를 100m 정도 두 피치로 등반해 다시 빙벽지대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다시 우측 쿨와르로 진입해야 했다. 그러나 좌측의 피라미드형 세락이 가장 높아 보여 정상이라 착각해 왼쪽으로 등반을 진행했다.

왼쪽으로 오르면서 정상으로 여긴 세락 아래의 설빙벽 지대로 진입했다. 세락 아래에는 마치 피에로의 눈, 코처럼 보이는 바위가 있었다. 코의 우측을 타고 미간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미간에 도착하자 천둥이 치고 눈보라가 일었다. 언제 맑았냐는 듯이 주위가 온통 안개로 가득 찼다. 위쪽은 굉장히 건조한 강빙이었다. 머리는 힘을 빼고 타격을 해야 한다고 알려 주고 있지만 지친 몸과 조급한 마음이 더욱 더 강하게 얼음을 찍는다. 정상 능선에 오후 8시 30분쯤 도착하니 눈보라와 바람은 거세고 주위가 온통 짙은 안개에 휩싸여 더 이상 움직이면 위험하다고 판단됐다. 비박이다. 결국 올 것이 왔다.

등반시작 당일인 19일 새벽, 눈 속에 파묻힌 짐을 찾았다.
등반시작 당일인 19일 새벽, 눈 속에 파묻힌 짐을 찾았다.
2 쿨와르 초입을 지나 암벽지대 통과 후 정상을 착각해 좌측으로 등반을 진행했다.
2 쿨와르 초입을 지나 암벽지대 통과 후 정상을 착각해 좌측으로 등반을 진행했다.
피에로의 눈·코 같은 바위와 정상으로 착각한 세락을 향해 강동욱 대원이 오르고 있다.
피에로의 눈·코 같은 바위와 정상으로 착각한 세락을 향해 강동욱 대원이 오르고 있다.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든 비박

비박 할 준비를 서둘렀다.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얇은 타프 한 개뿐이었다.

 “생각보다 춥지 않네.”

 “그러게요, 별로 안 춥네. 해 뜨면 바로 내려가죠.”

처음엔 아늑했다. 비박에 돌입하기 직전까지 쉴 새 없이 움직인 탓에 그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래서 밤이 따뜻할 것만 같았고 해가 금방 뜰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서 10분이나 지났을까, 금세 등 뒤의 빙벽에서 냉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타프가 비대칭의 사각형이어서 어딘가는 계속 외부로 노출되었다. 발이 시려워 발까지 타프를 내리면 누군가의 머리가 타프 밖으로 드러났고, 차가운 얼음벽에 등이 닿지 않게 덮으면 다시 발이 타프 밖으로 빠져 나왔다.

이 밤이 정말 끝나긴 하나? 세상에 태양이라는 게 있긴 한 건가? 5분이 멀다 하고 손목시계의 조명을 눌러 대고 10분을 못 참고 헤드램프를 켰다 껐다 반복했다. 5분 간격으로 대차게 불어대는 바람결에 타프는 신나게 춤을 추었고 우리는 화나게 추웠다. 안개까지 잔뜩 끼어서 더 춥게 느껴졌다.

“그냥 내려갈까?”

“위험할 것 같아요.”

밤 12시, 타프 안에서 벌벌 떨다가 잠시 고개를 내밀어보니 구름과 안개가 거짓말처럼 걷혀 있었다. 약 4,500m의 발코니에서는 검은 허공에 박힌 별들을 손만 뻗으면 딸 수 있을 것처럼 가깝게 보였다. 별은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 아름다운데 이대로 얼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 몸으로 버티는 이런 비박은 처음이었다. 처음엔 10분 간격으로 전신에 경련이 왔고, 그 간격이 점차 짧아졌다. 경련의 간격이 짧아질수록 이성과 비이성의 간극도 좁아졌다. 간극이 줄어드니 경계가 모호해지고 사고가 단순화되어 극단적인 판단을 내리려는 충동이 자꾸만 치밀었다. ‘내려갈까?’하다가도 ‘아니야 이미 너무 늦었어. 참아야 돼’라고 충동을 억눌렀다.

새벽 6시가 다가오자 우리가 뒤집어쓰고 있던 칠리색의 타프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우쉬첸카 서봉 너머로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애타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빛이었다. 결국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밤이 끝났다.

 해가 더 떠올라서 얼굴에 황금빛이 물들기 시작한 후에야 움직였다. 오전 7시 30분, 계획대로 날카로운 설릉을 따라 하강을 시작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능선을 따라 정상까지 200m 정도였지만, 돌아섰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정신력이 고갈되었기 때문이었다. ‘루트를 제대로 잡아서 올라갔으면 똑같은 비박이라도 정상에서 했을 텐데’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밤새 불던 바람은 해가 뜨니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밤사이 귀머거리가 된 것은 아닐까. 오로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태양과 산과 눈과 바위, 그리고 형과 나뿐이었다. 비박했던 지점부터 아발라코프로 하강을 시작했다. 칼날 같은 커니스의 능선을 따라서 여러 번 하강을 했다. 이제 두렵지도 불안하지도 않다. 우리는 현재 사지가 멀쩡하게 살아 있다. 지금도 살기 위해서 1,000m의 벽을 내려가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그토록 추웠던 밤이, 얼어 죽지 않겠다던 다짐이 멀어진 정상만큼이나 아득해졌다.

 바위에 슬링을 두르고 하강을 시작했다. 60m 로프가 너무 짧게 느껴진다. 첫 하강 이후로 계속 아발라코프 앵커를 설치했다. 가파른 빙벽에서의 하강이 지루하게 반복되었다. 무신경한 채로 기계적인 하강을 반복했다.

 절반쯤 내려 왔을까. 교대로 이번엔 내가 먼저 하강해 앵커를 만들었다. 스크루에 매달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목적했던 정상, 어깨 능선으로 이어져 있는 우리가 밤을 세운 커다란 세락, 우리가 내려온 칼날 같은 커니스, 왼편의 검고 거대한 우쉬첸카, 선글라스의 렌즈 때문에 노랗게 보이는 하늘, 고요히 가라앉은 공기, 샬릭계곡은 우리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무겁게 침묵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무심한 곳은 처음이었다. 내가 지금 있는 이 장소에 강한 이질감이 들었다.

1 쿨와르 초입을 지나 수직빙벽 2피치를 등반 중인 우석주 대원.
2비박 후 몽롱한 상태에서 실행한 하강. 
3 키르기스스탄봉 북동벽.
4 등반 이튿날(20일) 새벽 비박지.
1 쿨와르 초입을 지나 수직빙벽 2피치를 등반 중인 우석주 대원. 2비박 후 몽롱한 상태에서 실행한 하강. 3 키르기스스탄봉 북동벽. 4 등반 이튿날(20일) 새벽 비박지.

살아 있음을 다시금 체감하다

결국 우리는 살아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베이스캠프에는 타 지역에서 등반을 마치고 넘어와 자리를 지키며 걱정하고 있던 후배들이 있었다. 이들이 만들어준 저녁을 마셔버렸다. 그때 우리가 아직 이승에 있는 것을 깨달았다. 도시로 내려가 시원한 맥주에 큼직한 양꼬치를 뜯으며 또 한 번 살아 있음을 느꼈다. 한국에 돌아와 소중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 풍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알았다.

어쩌면 그때 형과 나는 샬릭계곡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있던 샬릭계곡은 정말로 현실이 아닌 듯이 보였으니까. 삶으로의 하강을 마친 지금, 우리는 현실에 충실하고 있다.

■등반 가이드

키르기스스탄 알라메딘

키르기스스탄에 위치한 알라메딘Alamedine은 아직까지 국내에 미답이었던 지역이다. 알라메딘은 악사이에 비해 산군이 집약적으로 모여 있는 것은 아니나 4,000m대의 산이 1~3일 거리 사이로 분포하고 있다. 아직까지 손을 많이 타지 않아 야생의 풍미를 가진 등반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키르기스스탄 산악연맹 회장 블라디미르코미사로프의 자료에 따르면 이곳 알라메딘산군에는 총 30여 개의 루트가 개척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알라메딘은 알라아르챠처럼 큰 계곡의 이름이고 그 계곡의 골짜기마다 큰 산들이 숨어있다. 북쪽으로 비슈케크를 바라보았을 때 알라메딘강을 중간에 두고 왼쪽에는 악사이가 오른쪽에는 알라메딘산군이 있다. 알라메딘은 매우 깊은 골짜기로 알라아르챠의 악사이산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사람의 발길이 덜 하지만 트레일trail은 잘 나 있는 편이다. 산장 같은 편의 시설은 전혀 없다. 악사이처럼 접근이 매우 용이한 산군은 없지만 그렇다고 굉장히 접근하기 어렵거나 거리가 긴 것은 아니다. 2~3박이면 계곡 거의 끝자락의 빙하와 산군까지 들어갈 수 있고 샬릭 빙하 산군의 경우 빠르면 당일, 길게 잡아도 1박이면 충분히 베이스캠프까지 도달 가능하다.

샬릭계곡 키르기스스탄봉

알라메딘 트레일에서 샬릭계곡의 초입까지는 5km 거리다. 완만한 구릉에 알라메딘강과 좌측의 샬릭계곡, 우측의 계곡이 모이는 아주 큰 계곡의 합수점이며 트레일을 따라 샬릭계곡을 건너기 위해 시멘트와 철골을 써서 지은 작은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너지 않고 좌측으로 완만한 구릉을 따라 오르면 목동들이 지내는 것으로 보이는 작은 움막이 있다. 이 움막을 지나서 우측으로 샬릭계곡을 두고 오르면 다시 트레일이 시작된다.

2시간가량 부지런히 걸으면 너덜지대가 나오며, 너덜지대를 1~2시간가량 오르면 샬릭계곡의 상부에 도달한다. 이곳에서 2~3시간을 걸으면 샬릭빙하 앞에 도착한다. 베이스캠프는 빙하가 시작되는 바로 앞 모레인 지대에 잡는 것이 좋다. 생활하기에 자리가 좋을뿐더러 빙하를 조금만 올라가면 깨끗한 물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샬릭계곡의 초입부터 약 5.5km. 베이스캠프 고도 약 3,200m. 빙하 초입부터 벽 밑까지의 거리 약 1.5~2km. 벽 밑 설원지대의 고도 약 3,600m. 등반표고 차 약 1,20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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