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낙조산행 <1>‘백두에서 지리 거쳐 한라까지’│③한라산] 속세의 풍광은 삼천리 밖에… 神仙이 부는 퉁소 들리는 듯

입력 2018.12.04 09:59

임제의 <유한라산기>에 나오는 존자암·영실·백록담 등 선계 같은 장소 따라 올라

한라산 영실 탐방로에서 맞은 일몰. 푸른 바다가 서서히 붉게 물들고 있다.

라산漢拏山(1,950m) 정상에 최초로 오른 사람은 조선 중기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로 알려져 있다. 그는 1577년(선조 10) 29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뒤 당시 제주목사로 있던 아버지 임진에게 인사하고 4개월 동안 제주에 머물면서 한라산에 올랐던 기록을 그의 <백호문집> 속 <南溟小乘남명소승>에 남겼다. 남명은 남쪽 바다를 말하고, 소승은 작은 역사서, 즉 기록물이라는 뜻이다. 남쪽 바다를 기행한 작은 기록물이란 의미다.

한라산이 한반도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시절, 조선 선비들의 유람 분위기에 편승해 바다 건너 영주산이라 불리는 신선의 산을 방문하고 기록을 남긴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그런데 백호 임제가 누구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를 잘 모를 수 있지만 그가 읊은 시만 대면 금방 알 수 있다. 고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기생 황진이를 그리워하는 시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은 어디에 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이를 슬퍼하노라’

그는 과거에 급제했지만 임지로 가는 길에 이 시로 인해 파직 당하고 속세에 환멸을 느껴 김시습, 김삿갓 못지않게 전국을 떠돌아다닌 천재시인, 풍류시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기 직전 28세에 속리산에서 도를 닦다가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건만 속세는 산을 멀리하네道不遠人 人遠道 山不離俗 俗離山’란 시조를 남기고 하산했다. 속리산의 유래가 된 시조다.

그의 가문도 조선시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할아버지 임붕은 정3품 광주목사를 역임했고, 아버지 임진은 정3품 제주목사와 종2품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했다. 딸은 남인의 당수이자 정1품 영의정을 역임한 미수 허목의 어머니다.

그는 1578년 2월 10일부터 16일까지 최초로 한라산을 등정하고, <남명소승>에 이를 상세히 기록했다. 그 안에 있는 ‘등한라산’을 따라 한라산의 역사적 의미와 연말을 앞두고 낙조와 일출을 찾아 가보자.

동행한 한라산국립공원사무소 자연환경해설사 강양선씨와 현명선씨는 “한라산 낙조와 일출을 보기 위해 매년 연말 새벽에 4,000~5,000명씩 백록담에 몰린다”고 말했다. 특히 새벽에 등산로를 개방하는 날은 1년 중 12월 31일 하루뿐이기 때문에 유일하게 백록담에서 새해 첫 일출을 볼 수 있다.

한라산 영실기암들이 가을 단풍에 가려 제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한라산 정상 백록담의 모습. 동쪽 성판악과 북쪽 관음사에서만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고, 주상절리가 있는 남벽과 서벽은 통제하고 있다.

1578년 최초의 한라산유람록으로 알려져

‘절정에 도착했다. 구덩이같이 함몰되어 못이 되었다. 석봉石峰으로 둘러싸여 주위가 7, 8리는 됐다. 석등石燈(돌 비탈)에 기대어 아래를 굽어보니 물이 유리알같이 맑아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 못 가에는 하얀 모래와 향기로운 덩굴이 뻗어 세속의 기운이라고는 한 점도 보이지 않는다. 속세의 풍광은 멀리 삼천리 밖에 떨어져 있다. 난소鸞簫(난새를 탄 신선이 부는 퉁소)가 들리는 성싶고 황홀히 지거芝車(신선이 탄다는 紫河車)가 보이는 듯하다. 그 우뚝 융기한 형상이나 바위가 쌓인 모양이 무등산과 흡사한데 높이와 크기는 배나 되는가 싶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무등산은 한라산과 형제이다”라고 하는데 필시 이 때문일 것이다. 산 위에 돌은 모두 적흑색이다. 물에 들어가면 둥둥 뜨니 기이한 일이다. 눈의 시계視界로 말한다면 해와 달이 비치는 곳으로 배와 수레가 닿지 못하는 데까지 두루 미칠 수 있겠으나 안력의 한계 때문에 단지 하늘과 물 사이에 그칠 따름이다. 역시 한스러울 뿐이다.’

임제는 존자암에 며칠간 머물다 잠시 날이 개는 틈을 타 바로 정상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산행이라 내친 김에 휑하니 정상까지 오른다. 백록담에 도착한 그는 마치 신선 세계에 온 듯 착각에 빠진다. 신선이 부는 퉁소와 신선이 타는 수레를 보는 것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정상 주상절리는 무등산의 주상절리와 똑같이 생겼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 그래서 그는 무등산과 한라산을 형제라고 말하면서 한라산의 높이와 크기에 감탄한다.

그는 정상 올라오기까지의 거리를 ‘산 밑바닥에서 존자암까지 30여 리가량이요, 존자암에서 여기까지 역시 30여 리인데 정상을 쳐다보니 평지에서 바라보는 높은 산과 같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거리감은 지금과 다를 수 있겠지만 현재 복원한 존자암에서 백록담까지 7km가량밖에 되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아무리 길어도 30리는 안 될 것 같다. 물론 동선은 지금과 다를 수 있다 해도 그렇다. 제주도 향토사학자들은 현재의 존자암이 과거의 위치와 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한라산 전문가 강문규씨와 오상학 제주대 교수는 “과거 존자암은 영실계곡 끝자락 오백나한상 밑 절벽 아래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조선 선비들의 한라산 유람 동선을 보면 오히려 지금의 위치에 더 가깝지 않나 판단된다. 임제는 며칠 머문 존자암에서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영곡 동구를 지나 남쪽 기슭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영실 끝자락 절벽 아래는 이미 영곡 동구를 지난 상태다. 존자암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한 논문이 발표되는 등 아직까지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존자암은 여러 모로 중요한 절이다. 당시 한라산을 올랐던 모든 선비들이 존자암에서 숙식을 해결했고, 출발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제주의 기원과 관련한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의 제자인 16아라한 중 여섯 번째인 발타라존자가 900나한과 더불어 탐몰라주에 살았다고 전한다. 그 탐몰라주가 바로 탐라, 즉 지금의 제주라고 한다. 이때 발타라존자가 제자들과 수행했던 곳이 존자암이고, 그 시기가 고양부나 삼을나가 처음 살았던 시기라고 전한다. 그게 탐라의 유래다. 탐라의 또 다른 유래는 강진의 옛 지명이 탐진耽津이고, 탐진에서 배를 타고 온 섬이 탐라라는 설이다. 탐라의 유래에 대한 정설이 없기 때문에 전하는 여러 설 중의 하나다. 그만큼 존자암에 대한 규명과 탐라에 대한 지명유래는 중요하다.

한라산 영실 병풍바위는 화산폭발 당시 분출한 용암들이 굳어 주상절리로 남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윗세오름에서 한라산 백록담을 향해 가고 있다. 이 부근이 옛날 칠성대로 부르는 장소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한라산 정상 출발지로 삼았던 존자암의 사리탑.

조선 선비들의 한라산 출발지점은 존자암

존자암은 한라산 정상으로의 접근성이 가장 좋기 때문에 조선 선비들이 한라산 유람 코스로 자주 이용했다. 임제에 이어 청음 김상헌(1601년), 김치(1609년), 이증(1680년), 김성구(1680년) 등이 존자암, 즉 영실 코스로 한라산을 올랐다. 이후 제주목사 이형상(1702년)이 찾았을 때는 거주하는 승려는 없고 헐린 온돌 몇 칸만이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1700년 전후해서 존자암이 폐사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한 원인을 찾는 작업도 병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존자암이 있는 영실靈室은 한라산 4대 명당에 속하는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신선이 사는 방’이라는 그 지명부터 예사롭지 않다.

임제는 존자암에서 머무는 중 영실계곡 오백장군골을 구경한다. 임제가 오백장군이라 명명한 영실기암을 청음 김상헌은 천불봉이라 부른다. 그만큼 기기묘묘한 봉우리들이 능선을 타고 우뚝 솟아 있는 형상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골은 일명 영곡靈谷이라 한다. 층을 이룬 묏부리들이 하얗게 둘러싸서 구슬 병풍을 만들었다. 세 갈래 폭포가 걸리는데 하나의 골짜기로 쏟아진다. 고단古壇이 있는데, 단 위에는 홀로 복숭아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어 단에 올라 대숲에 기대어 앉아 남쪽 바다를 살펴보니, 한결같이 만 리가 푸르다. 참으로 섬 중에 제일의 동천이다. 또 기암들이 있는데 물가와 산 위에 사람처럼 서 있으며 무려 천백 개나 된다. 아마 이 때문에 골의 이름을 얻은 것이라 생각된다.’

영실이나 오백장군상이나 백록담 등은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옛날부터 사용한 지명인 듯하다. 단지 옛날에 있었던 절과 당은 거의 없어졌다. 강문규씨는 “한때 한라산에만 당 500, 절 500이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절이 불과 손가락에 꼽을 정도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그나마 산 밑으로 내려간 당집은 절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임제는 또 존자암 승려에게 한라산 칠성대 관련 노인성老人星 얘기를 듣는다. 승려는 “이곳에 20년 가까이 살았지만 아직 보지 못했다. 다만 늦가을과 이른 겨울에 노인성이 새벽 밝아 올 무렵 남극 쪽에서 겨우 몇 길쯤 나왔다가 진다고 하는데, 유다른 별이 아니라고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세상에 전하기를 ‘노인성은 곧 남극 하늘에 있고, 자산玆山에 올라야 바라볼 수 있으며, 크기는 달의 둘레에 필적한다’고 한다.

무형의 요소와 유형의 객체 대비시켜 위안 찾아

사실 한라산에서 남극성을 보는 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지구 남반구에서 북극성을 보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남극노인성은 장수와 국태민안을 상징한다. 중국 오악에서 남악 형산이 장수를 상징하는 산이다. 이러한 상징성은 인간의 모든 욕망과 기복신앙이라는 무형의 요소를 우주와 통한다고 여기는 산이라는 유형의 객체에 대비시켜 놓음으로써 인간 스스로 위안을 얻으려는 동양 정신세계의 한 단면을 신선의 산 한라산에서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정상까지의 지명과 전설에 관한 내용을 올라가기 전 존자암 승려에게 전해 듣고는 백록담 도착해서는 감격에 겨워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던 것 같다. 인간과 선계, 하늘과 바다 등을 서로 비교하면서 경치를 맘껏 감상한다. 백록담에 도착해서는 신선이 된 듯 환상에 빠졌다. 그래서 당나라 이의산이 지은 ‘동쪽으로 돌아가다’라는 시를 읊조린다.

‘스스로 신선 재질을 지녔으되 자신은 모르고서/ 십 년간 화지(아름다운 지초) 캐려고 긴 꿈을 꾸었으니/ 가을바람이 땅을 흔들어 저물녘에 누런 구름이 깔리나니/ 승양으로 돌아가 옛 선생을 찾으리라. 自有仙才自不知 十年長夢採華芝 秋風動地黃雲暮 歸去嵩陽尋舊師’

과거에 급제했지만 앞으로의 벼슬생활이 순탄치 않음을 한라산에서 떠올린 시에서도 알 수 있게 해준다. 실제 그는 10년도 채 안 돼 파직 당한다. 기생과 시조를 주고받으며, 현실을 부정하며 단종 폐위에 대한 분한 마음을 여러 통로로 표출한 원인으로 파악된다.

어쨌든 신선세계를 동경하는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을 느끼고는 하산하기 시작한다. 임제가 올라간 2월은 아직 한겨울이라 상당히 추웠을 것이다.

‘상봉(백록담 둘레)에서 남쪽으로 돌아 두타사로 향하였다. 가는 길은 절구처럼 움푹움푹 패인 곳이 많았다. 단죽短竹(지금 조릿대)과 갈대가 위로 덮어 말로 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15리쯤 가자 길이 험하고 끊어진 벼랑이 막았다. 두타사는 굽어보이는데 별로 멀지 않았다. 그러나 벼랑이 매달려서 깎아지른 듯한 데다 눈이 깊게 쌓여 허리까지 빠졌으며 눈이 쌓인 아래로 개울이 숨어 흘렀다. 그곳을 생선이 꿰인 듯한 줄로 서서 내려가는데 발이 빠지고 젖는 괴로움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었다.

임제는 두타사, 두 계곡 사이에 있어 쌍계암이라고도 하는 절에서 다시 하루를 묵는다. 골이 깊고 그윽하여 절경이라고 감탄한다. 여기서 그의 동선을 한번 살펴보자. 존자암→오백장군동→존자암→영곡→한라산 정상→상봉 고산→두타사 쌍계사→충암유허로 해서 하산한다. 초경에 도착해 피곤한 그는 바로 잠 들었다가 다음날 일어나서 ‘어제는 날이 어둡고 피곤해 구경을 못 하였기 때문에 특이한 경치가 있는 줄 몰랐다’고 밝힌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점이 든다. 하나는 정상에 도착했으면 감탄 못지않게 정상 봉우리의 명칭을 언급했을 텐데 하는 점이고, 둘째는 돌아오는 시간이 늦은 상황에서 당연히 보이는 황혼빛 노을에 대한 언급은 왜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한라산 백록담 남벽의 주상절리가 무등산같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한라산 선작지왓 너머로 백록담이 우뚝 솟은 모습이 보인다.

<남명소승>은 남쪽 바다를 기행한 작은 기록물

임제는 정상 봉우리의 명칭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몇 년 뒤 1609년에 올라간 제주판관 김치는 <유한라산기>에 ‘한낮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상에 도착해 혈망봉을 마주하고 있다. 봉우리에는 한 개 분화구가 있어 전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름이 붙은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200여 년 뒤에 올라간 이원조도 <탐라지>에 ‘혈망봉=백록담 남쪽 변두리에 있는 봉우리에 한 구멍이 뚫려 있는데 사방을 다 둘러볼 수 있다. 조금 동쪽에는 또 방암이 있는데 그 모양은 네모나 있고, 마치 사람이 쪼아서 만든 것 같다’는 표현이 나온다. 정상 봉우리의 명칭이 혈망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봉우리는 지금 어디 갔을까? 도저히 찾을 수 없다.

두 번째 의문점은 동양의 정신세계에서 일출은 의미가 있지만 일몰에 대해서는 별로 다루지 않은 듯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일출은 흔히 볼 수 있지만 일몰에 대한 기록은 전혀 보지 못한 듯하다. 일출은 생성, 생동의 개념이고, 일몰은 정리의 개념으로 본다면 정리가 필요 없었을까. 현대적 분위기와 트렌드로 본다면 당연히 언급됐어야 하는데 아쉽다.

‘아침 해가 떠서 떠나려는데 앞에 있는 대에 앉았다. 두 줄기 맑은 시내와 천 길 푸른 절벽이 기이한 절경이다. 계곡을 나오면서 걸음마다 고개를 돌리며 섭섭한 감정을 이기지 못해 두보의 “층층 절벽에는 서릿발 같은 칼날을 벌여두고, 내뿜는 샘은 구슬을 뿌리누나”라는 시구를 읊었다. 참으로 이곳의 경관을 잘 묘사했다. 적목이 잘 어우러져서 그늘을 만들어 해가 보이지 않았다. 10리쯤 가니 충암의 옛터가 있다. 백록이 한라산에 산다는데 사람에게는 띄질 않는다. 돌이 빼어나고 샘이 맑아서 쉬어가며 말에게 꼴 먹일 만했다. 이곳에 이르러 마침 이곳에 와 계신 부친을 뵈었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해는 어느덧 석양이었다.’

그리고 임제는 한라산을 내려와 용두암을 거쳐 제주를 기행한 기록을 <남명소승>에 고스란히 남긴다.

임제보다 불과 몇 십 년 앞선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제38권 제주목 산천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라라고 말하는 것은 운한雲漢(=은하)을 나인拏引(끌어당김)할 만하기 때문이다. 혹은 두무악頭無岳이라 하니 봉우리마다 평평하기 때문이요, 혹은 원산圓山이라고 하니 높고 둥글기 때문이다. 그 산꼭대기에 큰 못이 있는데 사람이 떠들면 구름과 안개가 일어나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다.’

김부식이 <삼국사기> 편찬할 때 참조한 책으로 전하면서 지금은 없는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하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인용한다.

‘한라산의 일명은 원산圓山이니, 곧 바다 가운데 있다는 원교산圓嶠山이고, 그 동쪽은 동무소협인데 신선이 사는 곳이다. 또 그 동북쪽에 영주산瀛洲山이 있으므로, 세상에서 탐라를 일컬어 동영주東瀛洲라 한다.’

한라산에는 신선이 살고, 은하수가 있고, 흰 사슴이 살았다는 별천지 같은 산이다. 그런 산을 풍류시인이자 천재시인, 당대 명문장가로 불리는 임제가 올라 최초의 <한라산유람록>을 남기고 39세의 젊은 나이에 홀연히 요절했다. 그도 선계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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