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Ⅲㅣ‘금강산이 다시 열린다’<3>금강산 유람록]고려 이곡이 1349년 쓴 <동유기>가 첫 기록

입력 2019.01.10 09:45 | 수정 2019.01.15 16:14

금강산 이름 여섯 개 언급… 총 170여 편은 국내 유람록 중 최다

금강산은 많은 봉우리만큼 깊은 계곡도 많아 예로부터 삼신산 중의 봉래산으로 불려 왔다. 사진 셔터스톡
 ‘천마령을 넘어 산 아래 장양현에서 묵었는데, 산과의 거리는 30여 리나 떨어져 있었다. (중략) 산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자 짙은 구름이 점점 엷어지더니 햇빛이 구름 사이로 비쳤다. 배재拜岾(절하는 고개라는 뜻으로 금강산 서쪽에 위치했다. 고려 태조가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담무갈보살에게 절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에 오르자 날씨가 맑고 공기가 상쾌해져 눈을 비비고 보는 듯 산이 환하게 보였다. 이른 바 일만 이천 개의 봉우리가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누구든지 이 산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고개를 지나야 하는데, 이 고개에 오르면 산이 보이고 산이 보이면 자신도 모르게 머리가 숙여져 배재라고 불렀다. (중략) 내가 비록 아미산과 보타산을 보지 못했지만, 직접 본 이 산은 참으로 소문보다 나았다. 화공畵工의 교묘한 솜씨나 시인의 뛰어난 능력으로도 금강산의 모습을 비슷하게라도 형용해 낼 수 없을 것이다.’ _<금강산유람록1>(민속원刊) 인용
최초의 금강산유람록으로 알려진 이곡李穀(1298~1351)의 <동유기東遊記> 내용의 일부다. 이곡은 고려 후기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질 정도로 대표적인 학자이며, 목은 이색의 부친이기도 하다. 중국 원나라 과거에도 급제해 중서성 감창 등을 지냈다. 그가 금강산을 방문한 시기는 1349년 8월 21일. 한 달 남짓 금강산에서 경포대를 거쳐 울진까지 유람한 기록을 담아 <동유기>에 남겼다. <동유기>는 그의 <가정문집>권5에 기록된 내용이다. 역대 시문선집을 편찬한 서거정의 <동문선>에도 이곡의 작품 100여 편이 수록돼 있다. 
우리나라 유람록은 고려 말에 문헌상 처음 등장하고, 조선 초기 신진사대부에 의해 전국적으로 성행했다. 유람록을 많이 남긴 명산은 금강산·지리산·청량산 등이다. 그중에서 금강산은 조선 중기 세속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살려는 선비들의 학문 분위기와, 국토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전국의 명산을 유람하는 분위기에 편승해 가장 많이 찾았다. 
금강산은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 중의 하나로 인식했고, 빼어난 경치로 인해 선비들이 앞다퉈 금강산을 유람했다. 조선 초기의 지도에는 금강산이란 지명을 찾을 수 없지만 중기에 들면서부터 금강산뿐만 아니라 풍악산·개골산 등의 지명이 함께 등장한다. 
금강산은 국내 명산 가운데서도 유람록이 가장 많이 전하며, 알려진 것만 해도 170여 편에 달한다. 현재까지 발굴된 금강산 유람록은 고려시대 1편, 15세기 2편, 16세기 6편, 17세기 28편, 18세기 49편이고, 이후의 작품은 80여 편이다. 최초의 금강산 유람록인 이곡의 <동유기>에 이어 1485년에 남효온이 <유금강산기>를 남긴다. 그의 문집인 <추강집>권5에 수록돼 있다. 조선 최대의 사대부인 김창협과 그의 손자인 김수증도 <동유기>와 <풍악일기>란 제목으로 금강산 유람록을 남겼다. 금강산 유람록 중 남효온·성제원·홍인우·양대박 등의 유람록은 조선시대 금강산 유람의 지침서가 될 정도로 주목받는 작품이다. 
내금강 금사다리·은사다리의 모습.
내금강 흑룡담에는 사계절 끊이지 않고 물이 흐른다.
빼어난 경치는 공통적으로 찬양
이 작품들이 주목받는 이유는 내용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과거와 지금의 지명을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다는 점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며 생육신 중 한 사람인 남효온(1454~1492)이 1485년 4월 금강산을 유람하고 쓴 <유금강산기>의 일부 내용이다. 
‘백두산은 여진의 경계로부터 일어나 남쪽으로 조선국의 해변 수천 리에 이어져 있다. 산 중에 큰 것으로는 영안도에 오도산이 있고, 강원도에 금강산이 있고, 경상도에 지리산이 있는데, 천석이 가장 빼어나고 기이하기로는 금강산이 으뜸이다. 금강산을 일컫는 이름은 여섯 개나 된다. 하나는 개골산皆骨山이고, 하나는 풍악산楓嶽山이고, 하나는 열반산涅槃山인데 방언이다. 하나는 지달산枳·山이고, 하나는 금강산인데 <화엄경>에서 나왔고, 하나는 중향성인데 <마하반야경>에서 나왔다. 이는 모두 신라 법흥왕 이후 일컬어진 이름이다. (중략) 신림사에서 천친암에 오르고 천친암부터 정양사에 오르니, 배재가 오른쪽에 있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고려 태조가 이 산에 들어왔을 때 5만 명의 담무갈이 이 고개에서 모습을 드러내니 태조가 수없이 예를 표하고 절을 올렸습니다. 그로 인해 이 고개를 배재라고 했습니다”라고 했다. 정양사에서 비를 맞으며 서쪽으로 숲길 10리쯤 걸어 보현령에 올랐다. 또 서쪽으로 3, 4리쯤 올라가 개심암에 이르니, 옷이 다 젖었고 큰 비가 내렸다. 이날 산행은 모두 40리였다. 비가 개어 개심대에 올라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니, 망고대에서 보던 것과 거의 같고 약간 달랐다. 비로봉과 중향성은 동쪽에 있고, 선암 뒤에 있는 봉우리는 바로 선암봉 앞에 있고, 영랑현은 선암봉 뒤에 있다. 서수정봉은 영랑현의 서쪽에 있고, 월출봉은 비로봉의 동남쪽에 있다. 일출봉은 월출봉의 남쪽에 있고, 원적봉은 일출봉의 남쪽에 있다. 이 봉우리들은 망고대에선 볼 수 없던 것이다.(후략)’
남효온은 금강산의 거의 모든 봉우리 이름들을 기록할 정도로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1400년대에 금강산에 대한 기록으로는 그 자체만으로 매우 평가받을 만하다. 
임진왜란 때 학관으로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전투를 벌이다 과로로 숨진 양대박(1544~1592)은 1572년 4월 보름 남짓 금강산을 유람하고 <금강산기행록>을 남겼다. 
‘금강산이라는 이름이 어느 시대에 시작됐는지 모른다. 불경에 3만 리 떨어져 있는 발행에 금강산이 있는데 부처가 모이는 곳이라 했고, 또 금강이란 사람이 금을 먹어 끝내 소멸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하다면 산의 뼈대는 또한 굳센 기운이 모인 것이니, 천지가 없어진 뒤에도 여전히 썩지 않을 것이라 하였으니 두 설이 모두 근거한 바가 있다. 
금강산의 이름은 여섯 개가 있으니, 금강산·개골산·풍악산·기달산·열반산·중향산이다. 겹겹의 산등성이와 첩첩의 고개는 산의 겉과 안을 가로막고, 큰 물결이 앞뒤에서 성대하게 흐른다. 이 산을 유람하는 사람은 바위와 계곡을 뚫고 새나 넘을 수 있는 험난한 길을 부여잡고 오르지 않는 경우가 없다. 열흘 동안 힘들게 간 뒤에야 비로소 신선이 사는 땅으로 통한다. 
금강산 안에는 총림 네 개(승려가 참선 수행과 경전 공부와 계율을 모두 익힐 수 있는 큰 사찰. 금강산의 총림은 유점사, 신계사, 장안사, 표훈사)와 정사 108개가 있다. 그 나머지 산사의 세찬 폭포, 아름다운 골짜기의 기이한 바위는 다 기록할 수 없다. (중략)
나는 일찍이 산수에 노닐 맹약을 하고 더욱이 방외의 유람을 탐내어 우리나라 이름난 곳을 모두 찾아가 보았다. 두류산(지리산)을 감상했고, 가야산을 유람했으며, 천마산을 대략 돌아보았고, 복정산(삼각산의 다른 이름)을 찾아다녔으며, 재악산(천황산과 재약산의 두 봉우리 지칭)을 밟아보았고, 운문산에서도 팔을 내저었으며, 뭇 신선이 모이는 곳과 고승이 사는 곳을 끝까지 찾아보고 내키는 대로 돌아다녔다. 그러나 금강산에 비하면 바람이 아래에 있어서 같은 등급으로 말할 수 없다.’ 
금강산은 전형적인 악산이지만 골도 깊어 계곡물이 마르지 않는다. 사진 조선일보

금강산 사찰 108, 총림 4개로 전해

양대박의 유람록도 남효온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금강산의 유래와 봉우리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후 1600년대 금강산 유람록에서도 금강산 이름은 여섯 개로 지칭하고 있다. 현재 알려져 있는 봄 금강, 여름 봉래, 가을 풍악, 겨울 개골이란 지명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금강산을 유람한 선비들은 많은 봉우리를 두루두루 다니면서 기록을 남겼다. 그 봉우리들 사이로 많은 길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선비들이 금강산 어느 경로로 유람했을까. <금강산유람록1>에 따르면 두 가지 여정으로 나뉜 것으로 분석했다. 
한양이나 근기지방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갔을 경우 단발령을 넘어 장안사에서 유람을 시작했으며, 동해안을 따라 삼일포 쪽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유점사·발연사·신계사에서 유람을 시작했다. 장안사 영역은 금강산 내산이고, 유점사 쪽은 금강산의 외산이다. 내금강과 외금강에서 각각 유람을 시작한 것이다. 장안사 쪽으로 금강산에 들어간 선비들은 금강산의 서쪽에 치우쳐 있는 표훈사와 정양사를 차례로 들렀고, 이어 백화암 등을 거쳐 나오면서 만폭동을 찾았다. 유람 기일이 이틀밖에 되지 않아 장안사·표훈사·정양사만 둘러 본 이명한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만폭동으로 들어가서 내산을 유람했다. 
만폭동에서는 봉래 양사언의 ‘봉래풍악 원화동천’이라는 초서 글씨가 새겨진 너럭바위를 반드시 찾아갔고, 그 외에 백룡담·흑룡담·진주담 등의 팔담과 보덕암·보덕굴·선담·화룡담·마하연암·묘길상 등의 일정이 자주 보인다. 
조선 선비들이 주로 유람을 다녔던 내금강·외금강 코스를 굵은 선으로 표시했다.

금강산 내산·외산 경계가 내수재

이렇게 내산을 둘러보고 내수재를 넘어 외산으로 들어갔다. 내수재는 내산과 외산을 나누는 고개로 ‘내무재’라고도 부른다. 외산으로 들어가서는 은선대·십이폭·학소대 등을 둘러 본 다음 유점사로 향하기도 하고, 발연사·신계사 등으로 향하기도 했다. 
동해에서 외산 방면의 금강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외산 유람을 끝내고 내산을 찾았다. 이때 주로 거쳐 가는 곳이 신계사·발연·백천교·숙고촌·구재였다. 신계사는 온정동에 있는 절로, 유점사·장안사·표훈사와 함께 금강산의 4대 사찰 중의 하나이다. 금강산 유람자들이 반드시 거치는 명승 중의 하나이고, 신계사 아래에 양사언의 집터가 남아 있다. 발연은 신계사 왼편에 있다. 발연사와 발연폭포가 있어 유람자에게 치폭놀이의 볼거리를 제공했다. 백천교는 온정동에서 유점사로 들어갈 때 건너는 다리다. 동해 쪽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이 다리를 통해야 하고, 내산을 유람하고 외산으로 나오는 사람들도 이 다리를 통해야만 했다. 
유람록에는 금강산에 가면 꼭 찾는 명소가 몇 군데 나와 있다. 
먼저, 유람자들은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를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조망처로 정양사 헐성루를 찾았다. 둘째, 만폭동에는 양사언이 썼다고 알려진 여덟 글자가 너럭바위에 초서로 새겨져 있다. 유람자들은 이곳에 이르러 다양한 품평을 남겼다. 셋째, 만폭동 보덕굴을 찾아 기록을 남겼다. 보덕굴 벼랑 끝에 쇠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은 보덕암이 있었다. 벼랑 끝에 매달린 새 둥지 같은 보덕암은 그 모습과 구조의 독특함으로 인해 유람자들의 필수코스가 됐다. 넷째, 금강대 위의 학을 자주 언급했다. 초기 유람록에는 등장하지만 불과 100년 뒤에는 학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다섯째, 마하연암의 계수나무에 대한 이야기도 유람록마다 등장한다. 여섯째, 유점사 창건에 대해서 고려시대 묵헌 민지가 지은 사적기도 방문하는 유람록마다 그대로 전한다. 일곱째, 발연사의 폭포에서 행해지는 치폭놀이는 금강산 유람에서 빠지지 않는 구경거리였다. 여덟째, 동해안을 거쳐 외산 방면으로 금강산에 들어간 유람자와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동해안 유람을 시작하는 유람자가 반드시 들르는 곳이 삼일포와 해산정이다. 아홉째, 동해 가에 서 있는 육각형 모양의 돌기둥 총석정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동해안 유람을 시작한 이들은 반드시 낙산사에 들러 일출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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