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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산악 영화 “ 감동적 vs 터무니없다”|⑮ <와일드>] 걷는 이들의 ‘버킷리스트’ PCT에서 자아성찰

글 신용관 조선뉴스프레스 기획취재위원 qq@chosun.com
  • 입력 2019.01.17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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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4,285km 도보여행길 걷는 여성 이야기

와일드(Wild, 2014)

감독 장 마크 발레

출연 리즈 위더스푼(셰릴 스트레이드), 로라 던(바비), 토머스 새도스키(폴) 

셰릴의 부모는 남편의 폭력성 때문에 이혼에 이른다. 셰릴과 남동생, 그리고 엄마 바비는 식당 종업원 생활을 하며 가난하지만 따뜻한 삶을 이어간다. 불우했던 유년 시절을 지나 엄마와 함께 행복한 인생을 이어가려는 때에, 셰릴의 유일한 삶의 희망이자 의지의 대상이었던 엄마가 갑작스럽게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엄마의 죽음 이후 마약과 문란한 성생활 등 인생을 내팽개치다시피 하던 셰릴은 슬픔을 극복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혼자서 수천 km에 이르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로 떠난다.

신용관(이하 신) 영화 이야기에 앞서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김창호 대장님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정헌(이하 박) 그렇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행동하는 알피니스트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에 한국을 대표하는 산악인을 잃게 돼 슬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두 번 다시 그의 등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아쉽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고였습니다. 

 베이스캠프에서 당한 것이라 어이가 없습니다. 날씨나 기후의 변화에서 오는 변수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온난화의 영향 탓인지, 제트기류가 3,000m까지 하락한 것으로 보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번 호에서는 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와일드Wild> (감독 장 마크 발레, 2014)를 다루고자 합니다. 

 같은 제목의 원작이 있는 미국 영화입니다. 

 26세의 셰릴 스트레이드가 인생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고 수천 km의 도보 길에 오르면서 겪은 실화를 자서전 형식으로 엮어낸 작품입니다. 출간과 동시에 뉴욕 타임스 논픽션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고 전 세계 21개국에 번역되며 밀리언셀러에 올랐던 책이지요.

 여주인공이 걷는 길은 미국 서부의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 PCT’이라 불리는 곳으로,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을 잇는 4,285km의 도보여행 코스입니다. 

 PCT는 25개의 국유림과 7개의 국립공원을 지난다고 합니다. 거친 등산로와 해발 4,000m의 눈 덮인 고산지대, 9개의 산맥과 사막, 광활한 평원 등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자연 환경을 거치고서야 완주할 수 있다고 합니다.

 PCT는 애팔래치아 트레일AT, 콘티넨털 디바이드 트레일CDT과 함께 미국 3대 장거리 트레킹 코스로 꼽히는 곳입니다.

 영화에서는 94일간 사투를 벌이는 것으로 나옵니다만, 완주하는 데에 평균 152일이 걸리는 곳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백두대간도 그렇지만, 코스를 개인별로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걸리는 시간은 편차가 많다고 봐야겠지요.

<와일드></div> 포스터.
<와일드> 포스터.

 <와일드>를 만든 장 마크 발레 감독은 에이즈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론 우드루프(매튜 맥커너히)의 실화를 그린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Dallas Buyers Club>(2013)으로 제86회 아카데미에서 6개 부문 후보에 오르고 3개 부문을 수상한 실력파입니다. 

 리즈 위더스푼도 연기력이 있는 배우이지 않습니까.

 영화 <앙코르>(Walk The Line, 감독 제임스 맨골드, 2005)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바 있지요. <와일드>로도 제87회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와일드>는 주인공 셰릴 스트레이드가 겨울 산행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산 위에서 등산화와 양말을 벗자 엉망이 된 발의 모습이 보입니다. 엄지발톱이 빠지고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 등산화 한짝이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지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여자는 아예 나머지 등산화도 던져버립니다.

 오래 걷다 보면 수포 현상이 생기고, 그게 사라지면서 굳은살이 박이게 되지요. 참고로, 평지 위주의 트레일에서 제일 힘든 건 아스팔트입니다. 히말라야는 경사가 있으니 발 앞부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잦지만 트레일은 발바닥 전체를 사용하고 장시간 동안 걷기 때문에 발에 오는 통증이 심합니다.

 영화는 주인공이 PCT 걷기를 시작하는 시점으로 돌아갑니다. 셰릴은 모하비사막에서 시작하지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 남쪽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3개월을 걸어야 하는 트레킹인데 보급품은 친구에게 부탁합니다.

 짐을 한꺼번에 모두 지고 출발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중간 중간 야영지에서 보급품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미국의 트레일 중에는 커다란 배낭 등 짐을 먼저 보내놓고 가벼운 차림으로 걸을 수 있게 한 곳도 있습니다. 


 인프라가 잘 되어 있군요. 현지에 도착한 뒤 모텔에서 하루 묵은 셰릴이 출발 전에 식수용 물을 챙겨서 배낭에 넣으니 짐이 산더미만 합니다. 바닥에 놓인 짐을 지고 일어서지 못해 엎어진 채 버둥거리다가 간신히 일어납니다.


 욕실에서 식수용 물을 받아 챙기는 거지요. 상당 기간 먹을 것들을 배낭에 넣고 가야 하니까 짐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무거운 게 물이지요.

 트레일이 시작되는 곳에 거치대가 있고 그 안에 노트가 비치돼 있습니다. 셰릴은 그곳에 “몸이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는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 구절을 기록합니다. 시작일은 1995년 6월 12일이고요. 첫날부터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미쳤지. 언제든 그만둬도 돼’라는 생각을 하는데요.

 출발한 직후 초기 단계에 누구나 ‘이게 뭐하는 짓인가’ 같은 생각을 많이 합니다. 좀 걷다 보면 그런 생각들이 다 사라지지요.

 영화는 트레일을 걷는 장면과 지난 일의 회상 장면이 수시로 교차 편집됩니다. 뒤늦게 대학을 다니는 엄마 ‘바비’(로라 던)와 18세 남동생의 모습이 등장하지요.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 차림인 셰릴은 8km 걸은 뒤 첫 텐트를 치는데 설명서를 보고 꾸역꾸역 조립을 합니다.


 완전 초보라는 얘기지요. 그래서 짐이 너무 크기도 하고요.

 인적이 전혀 없는 건조한 벌판에서 여자 혼자 자는데요. 무척 위험하고 무모해 보입니다.

 트레킹은 요즘 혼자서 하는 게 트렌드이긴 합니다. 1박 이상의 야영생활에 필요한 장비를 갖추고 떠나는 백패킹backpacking도 마찬가지고요.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 여행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해 많이들 합니다. 사실 동행이 있으면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갈등과 불만이 생길 소지가 있으니까요.

 2일째에 가스버너 사용을 시도하는데 ‘무연 휘발유를 사용하시오. 안 그러면 고장’이라는 매뉴얼을 보게 됩니다. 준비를 안 한 거지요. 그래서 차가운 물에 시리얼을 타서 먹습니다. “견과를 넣은 차가운 죽, 참치포를 넣은 차가운 죽, 차가운 죽 꿈, 차가운 죽….” 변을 돌멩이들로 둘러 처리하는 장면도 잠깐 보여 줍니다만.

 요즘은 환경 보호 차원에서 작은 삽들을 갖고 다닙니다. 트레일 걸을 때 흙을 파서 대변을 처리하고 다시 흙으로 덮지요. 요세미티 암벽등반 때는 자기 변을 팩에 담아서 갖고 내려와야 합니다. 

 5일째 50km를 지나면서는 혼자서 문답을 나눕니다. “셰릴은 뭘 좋아하죠.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거 좋아해요. 변기에 앉아 물을 내리는 것도요. 이 염병할 사막에 오기 전까지는”이라면서요.

 대화 상대가 없으니 혼잣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지만.

 8일째가 되도록 어찌된 것이 트레일에 주인공 외에는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공포스러울 정도인데요.

 우리나라 백두대간도 초기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또 사람들이 몰리는 시즌이 따로 있으니까요. 산티아고 순례길도 대부분 여름에 몰리지 않습니까.


 익히지 않은 상태로 먹을 수 있는 건조식품이 다 떨어질 때쯤 처음으로 사람을 만납니다. 한밤중에 트랙터로 일을 하고 있는 농부였지요. 그 집에서 따뜻한 음식을 오랜만에 먹게 됩니다. 농부 부부가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저녁을 대접하는데요.

 네팔에서도 그렇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많습니다. 손님을 반가워하는 거지요. 자신들이 아끼는 콜라를 대접합니다. 적적함도 달래주니까요. 아마 강원도 산골 오지에서는 지금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농부가 “남편이 제정신이 아니구먼. 남자도 아니고 여자를 이런 데로 보내?”라고 말하는데, 셰릴은 실제론 이혼녀입니다. 7년을 함께한 남편 ‘폴’(토머스 새도스키)과 이혼하는 기념으로 문신을 같이 새기는 장면이 회상됩니다.

 농부 말이 맞긴 하지요. 아내를 그런 곳에 오랫동안 혼자 걷도록 내버려둘 남편은 흔치 않을 겁니다.

 10일째에는 방울뱀을 만나서 기겁을 하고, 밤에 여우들 우는 소리에 잠을 못 이루기도 합니다.

 히말라야든 지리산이든 멧돼지 등등의 동물들이 많습니다. 저는 인도에서 표범을 맞닥뜨린 적도 있지요. 잘 때 짐승들 소리가 자꾸 이상하게 들릴 때가 있지요. 마치 사람 소리처럼. 사실 더 두려운 건 사람이니까요.

 자려고 누워서 “난 배고프지 않다. 난 음식이 그립지 않다. 타코와 칩스와 마가리타가 그립지 않다”고 중얼거리기도 합니다.

 공감이 가는 장면입니다. 그런 데선 간편하게 조리해서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류의 음식들뿐이니까요. 히말라야 같은 오지에 가면 회, 삼겹살, 짜장면 생각이 제일 간절합니다.

 ‘오지 3대 음식’ 쯤 되겠습니다(웃음). 12일째 130km 지점에서 냇가에서 벗고 목욕하는 남자 ‘그렉’을 만납니다. 그는 “트레일 방명록에서 이름을 봤다. 여자는 당신 혼자더라”라며 아는 체를 합니다.

 그게 단순한 방명록이 아니라 일종의 체크 포인트 역할을 합니다. 네팔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인in하고 아웃out할 때와 중간 중간에 반드시 기록을 남기게 돼있습니다. 일정 기간 동안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실종 신고를 하지요. 어느 지점에 체크가 돼있지 않으면 그 전 구간을 중점적으로 수색하는 거지요.

 14일째에 드디어 ‘케네디 메도우스’라는 야영지에 도착합니다. 남자들은 셰릴의 배낭을 ‘몬스터’라 부르지요. 그곳에는 전 남편이 보내준, 여러 물품과 책 등을 담은 소포가 도착해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그런 야영지를 ‘샬레’라고 부릅니다. 트레킹을 할 때 아주 도움이 많이 됩니다.

 야영지 관리인이 발톱이 빠진 그녀를 보고 “부츠가 작아서 그렇다”면서 “REI에서 샀느냐. 전화하면 새 부츠를 다음 목적지로 보내 준다”고 조언해 줍니다.

 REI는 미국의 아웃도어 유통업체로 매장에서 구입한 등산화가 망가지면 실제로 새 물건을 보내 줍니다. 마케팅의 일환이지요. 저도 고도계가 달린 스위스 티쏘 시계가 고장이 나서 레터를 보내 새로 받은 적이 있습니다.

 32일째에는 캘리포니아의 눈 덮인 산에서 혼자 야영하며 여우 한 마리를 만납니다. 여우는 영화에서 척추 종양으로 45세에 사망한 엄마의 현현顯現으로 나옵니다. 아빠는 가정폭력 가장이었고, 그를 피해 도망친 모녀는 식당 종업원 일을 하며 어렵게 살아왔던 거지요. ‘인생의 전부였던 엄마’가 죽자 셰릴은 마약과 유사 매춘 등 걷잡을 수 없는 나락에 빠집니다. 56일째에 37°C도의 더위 속에서 먹을 물이 떨어지는데, 탁한 작은 웅덩이를 발견하자 휴대용 정수기를 사용합니다.

 영화에서는 정수제를 섞어 30분 뒤에 마시더군요. 히말라야에서는 석회질 물이라 휴대용 정수기를 많이 사용합니다. 우유병처럼 생긴 것을 짜서 쓰는 방식입니다.

 80일째는 숲속에서 어느 할머니와 손주를 만나고, 셰릴은 아이의 동요를 들으며 엄마 생각에 오열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인 94일째에 일종의 ‘치유’에 이릅니다. “엄마가 자랑스러워할 딸이 되기까지 4년 7개월하고도 3일이 걸렸다. 엄마 없이 슬픔의 황야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후에야 숲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찾아냈다.” 

<와일드>에 대한 총평을 하신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다룬 영화들과 달리 스케일이 큰 영화는 아닙니다. 미국이 대륙은 크지만 산의 스케일은 크지 않으니까요. 수직적인 건 약하고 수평적인 볼 것이 많네요. 수개월 동안 먼 거리를 걸으며 자신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찾는 데에 중점을 둔 영화라 하겠습니다. 

박정헌 대장

안나푸르나 남벽 한국 초등(1994), 에베레스트 남서벽 한국 초등(1995), 낭가파르바트 문 라이트 등정(1997), K2 남남동릉 무산소 등정(2000), 시샤팡마 남서벽 신 루트 등정(2002) 등의 기록을 가진 한국의 대표적 등반가. 

2005년 히말라야 촐라체 원정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생환했으나 손가락 8개와 발가락 2개를 잃었다. 

이후 패러글라이딩에 입문, 파키스탄 낭가파르바트에서 캉첸중가까지 3,200km를 하늘을 날아 종단했고, 2015년에는 자전거와 스키, 카약 등을 이용해 히말라야 5,800km를 횡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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