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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새연재ㅣART HIKING 후지산] 정갈하고 단호한 곡선, 묵직한 존재감

그림 사진 글 김강은 벽화가
  • 입력 2019.01.15 10:10
  • 수정 2019.01.1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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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구치코에서 바라본 후지산의 위용을 담다

가와구치코에서 바라본 후지산과 필자.
가와구치코에서 바라본 후지산과 필자.

그림 그리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앞에 두고 붓질하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늘 산행이나 여행길에 종이와 팔레트, 붓 몇 개를 배낭 속에 넣어 다닌다. 모름지기 아름다운 풍경은 언제, 어디서, 어떤 순간에 마주할지 모르는 법이니까!

찬바람 부는 계절에 3박4일 일본 여행, 그것도 도쿄를 가게 됐다. 내 생애 첫 일본이다. 그런데 뭔가 영 께름칙하다. 자칭 타칭 ‘자연사랑꾼’으로서 나흘간 도심만 있다는 사실이 퍽 섭섭했다. 그래서 잔머리를 굴리고 굴렸다. 잠시만이라도 자연 속에서 머물 수 있는 곳을 수소문했다. 

그리고 마침내 알아냈다. 도쿄에서 멀지 않은 곳에 후지산을 바라보며 신선놀음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늘 그림 속이나 TV 속에서만 보던 후지산이라니! 후지산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다.

가와구치코 내추럴 리빙센터에서 바라본 후지산. 후지산의 첫 위용은 잊을 수 없다.
가와구치코 내추럴 리빙센터에서 바라본 후지산. 후지산의 첫 위용은 잊을 수 없다.

도쿄에서 2시간 동안 고속버스를 타고 달려간 곳은 ‘가와구치코’. 일본 야마나시현에 위치한 후지산 근처에 있는 호수였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투명한 창 너머로 나타난 후지산의 위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하얀 눈으로 덮여 있는 정상부, 정갈하고 단호한 곡선, 묵직한 존재감. 과연 후지산이었다. 가마구치코역에서 내려 다시 투어버스를 타고 호수를 돌 수 있는데, 시간 여유가 있다면 호수를 한 바퀴 직접 걸으며 트레킹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는 덜컹이는 작은 투어버스를 타고 종점인 가와구치코 내추럴 리빙센터Kawaguchiko Natural Living Center에 내렸다. 깊고 새파란 호수 위로 나타난 후지산을 보자마자 감탄이 나왔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이곳에 내려 잠깐 구경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듯했다. 나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져 어김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팔레트를 펼쳤다.

그림에 사용한 채색 도구들.
그림에 사용한 채색 도구들.
후지산이 보이는 호수의 풍경, 그림과 실제.
후지산이 보이는 호수의 풍경, 그림과 실제.

내게 주어진 시간은 20~30분 남짓이었지만, 후지산이 주는 찰나의 영감을 담기에 충분했다.  푸른 호수와 하늘, 그리고 후지산의 하얀 눈이 이루는 대비가 특히 아름다웠다. 바람을 타고 흐르던 구름은 후지산의 산허리에 걸려 한참을 머물렀다. 한겨울이지만 햇볕은 따스했고, 쨍한 햇빛이 호수 위에 내려앉아 부서지며 일렁이는 게, 반짝이는 작은 보석들 같았다.

30분간의 짧은 드로잉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와서 작은 아름다움이 담긴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역시 직접 걸으며 새 소리, 억새 부대끼는 소리, 바람의 결, 겨울 호수의 향기를 느끼니 풍경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호수 너머로 보이는 후지산도 언제든 볼 수 있었다. 

가와구치코 리빙센터에서 가마구치코까지 가는 길은 관광객이 없고, 마을 주민들만 가끔씩 산책하는 조용한 길이었다.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의 조용한 마을을 걷는 것 같기도 하고, ‘규슈 올레길을 걷는다면 이런 느낌일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상상 덕분에 더욱 호젓하고 즐거웠던 가마구치코 트레킹이었다. 

후지산에게서 정갈하고 단호한 곡선, 묵직한 존재감을 느꼈고, 그림으로 옮겼다.
후지산에게서 정갈하고 단호한 곡선, 묵직한 존재감을 느꼈고, 그림으로 옮겼다.

다시 온다면, 이곳에서 이틀 밤을 머물고 싶다. 첫날은 하루 종일 호숫가와 주변의 산을 트레킹하고, 둘쨋날은 호숫가에 앉아 후지산을 더욱 자세히 담아볼 것이다.

누군가가 “도쿄 여행 어땠어?”라고 물었을 때 “후지산이 눈앞에 보이는 호수가 정말 좋았어!”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된 조금은 특별한 여행. 2시간을 버스 타고 달려가야 했고, 드로잉 도구들이 든 배낭은 무거웠고, 그에 비해 내가 얻은 것은 단지 30분간의 짧은 드로잉 시간이었지만 후회는 없다. 나만의 시각으로 후지산을 담아 볼 수 있었던 이 시간 덕분에 내 기억 속에 후지산은 더 오래도록 자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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