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해외여행ㅣ막강 장딴지 부부의 안데스산맥 자전거 여행기 ③ 마지막회]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던, 혼자 가는 고생길

글·사진 이남석 용산공고 교사
  • 입력 2019.02.24 16:1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코노코차에서 우안카벨리카까지 820㎞ 안데스 고산 여행의 마침표를 찍다

해발 4,930m의 푼타우스아이카 고개를 오르고 있다. 우측 끝에 살짝 튀어나온 봉우리가 우스아이카 설산이다.
해발 4,930m의 푼타우스아이카 고개를 오르고 있다. 우측 끝에 살짝 튀어나온 봉우리가 우스아이카 설산이다.

얀타크Yantac에서 아내와 헤어졌다. 춘가르에서의 야영 이후 아내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한계에 왔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아내를 리마로 보낼 결정을 내리자 차라리 홀가분해졌다. 낡고 초라한 간판을 매단 숙소에서 나오자 붉은 모자를 닮은 조형물이 광장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대기는 빙판처럼 얼어 있었고 어제 내린 우박이 아직 녹지 않고 얼어붙어 있었다. 

이른 아침, 해가 뜨지 않은 광장에서 아내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고맙고 미안했소.” 고소와 누적된 극도의 피로로 아내는 더 이상 자전거 여행을 진행할 수 없었다. 이만큼 온 것도 보통사람의 능력을 뛰어넘은 상태였다. 나는 마을에서 이틀 분의 식량을 챙긴 후 페달을 밟았다. 아내는 불필요한 내 물건을 포함해 모든 짐을 정리한 뒤 리마로 떠났다. 

모순을 경험하는 것처럼 아침은 언제나 구름으로 가득했으며, 오전 10시를 넘으면 서쪽에서부터 맑아지기 시작했다. 아브라 안타카사Abra Antacasa 고개에 이르자 카사팔카Casapalca까지는 내리막이었다. 숨이 찰 때마다 아내가 떠나간 허전한 자리를 떠올리며 서쪽을 바라봤다. 빛은 창날처럼 설산으로부터 날아오고 그 사이로 한 올의 바람도 통과시키지 않을 듯 산맥이 빼곡했다. 

아브라 수이조 고개 주변의 풍광. 작은 호수와 낮은 산줄기가 늘어서 있다.
아브라 수이조 고개 주변의 풍광. 작은 호수와 낮은 산줄기가 늘어서 있다.

카사팔카에 도착해 성당에서 운영하는 숙소에 들자마자 비가 내렸다. 리마로 떠난 아내는 안전하게 숙소에 도착했을까. 아내는 쿠스코로 가서 마추픽추를 여행하겠다고 했다. 여러 번 함께 여행하며 생존하는 방법을 터득했다지만, 혼자 보낸 것이 몹시 불안했다. 무거운 마음에 잠을 청하려 불을 끄자 깨진 창문 틈으로 바람과 함께 빗방울이 튀어 들어왔다.

길을 잘못 들어 한참 늦게 유라크마요Yuracmayo마을에 도착했다. 덕분에 해발 4,930m의 푼타 우수아이카Punta Ushuayca 고개에 이르자 바로 해거름이었다. 뜻하지 않은 강풍을 만났지만 그보다도 걱정은 현저하게 떨어진 기온이었다. 쵸크나마을 상점 주인은 빵과 꿀을 챙겨주면서 고개를 넘으면 마을이 없고 중간에 자야 하니 특별히 추위를 조심하라고 경고했었다.

어쩔 수 없이 우수아이카 설산 밑에 텐트를 치자, 곧바로 밤이었다. 별들은 재잘대고 대지는 침묵했다. 짐승들은 왜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낮에 활동하지 않고 밤에만 돌아다니는 것일까. 나는 조금이라도 짐 무게를 줄이기 위해 속 침낭을 아내에게 주고 온 것이 계속 후회되었다. 

기온은 엄청난 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방 안에 있는 옷을 모두 꺼내 입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대신 바람이 돌과 흙을 쓰다듬는 소리와 텐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이름 모를 짐승들의 발자국 소리를 쫓으며 추위와 줄다리기해야 했다.

아브라 안타카사(4880m) 고개를 오르고 있다.
아브라 안타카사(4880m) 고개를 오르고 있다.

산맥에 혼자 남다

붉은빛과 검은색이 반반 섞인 설산 옆으로는 아직 눕지 않은 달이 창백하게 빛났다. 새벽이 물러갔지만 암벽과 무거운 빙하가 뒤섞인 우수아이카계곡은 아직 어두웠다. 좁은 협곡 밑으로 난 길은 도대체 이 포개진 산맥 사이에서 어디로 가는지 예측할 수 없었다. 거대한 안데스 한가운데서 나는 완벽히 혼자였다. 

물고기의 지느러미를 닮은 능선으로 불쑥 튀어나온 설산이 점점 다가왔다. 내리막이지만 노면은 비로 깎이고 곳곳에 두꺼운 돌들이 널려 있어 다리 근육을 팽팽히 당겨야만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구름이 동쪽으로 물러나면서 빙판 같은 하늘이 드러나자 풍경은 또 변했다. 

호수는 바다를 닮았으며 주황색과 검은색이 대비된 산맥은 설산의 빛을 받아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신께서 이렇게 내밀한 곳에 당신의 노래와 그림을 숨긴 것은 무슨 까닭일까. 탄타Tanta에서는 여관에 머물렀는데 주인의 말에 의하면, “마을 앞 호수에 큰 물고기가 살고 있으며, 밤에는 물 위로 수 길씩 뛰어올랐다가 떨어진다”고 했다. 혹시 그 물고기가 용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주인은 미소를 지으며, “아마 오늘 밤 당신의 꿈속에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대꾸했다.

라라오스Laraos에서 식량을 보충하고 해발 4,990m 푼타 푸마코차Punta Pumacocha고개로 출발했다. 그동안 워낙 높은 고개를 많이 겪었기에 겁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 정상에는 어떤 비경이 기다릴까’ 하는 기대감이 컸다. 

비교적 낮은 고개인 4550m의 아브라비냐스 고개 주변의 아름다운 안데스 풍광. 멀리 중첩된 안데스 산군이 장관이다.
비교적 낮은 고개인 4550m의 아브라비냐스 고개 주변의 아름다운 안데스 풍광. 멀리 중첩된 안데스 산군이 장관이다.

왕관을 닮은 고개 정상에서 좌우로 바위능선이 연이어 달리며, 불쑥 솟은 봉우리마다 흰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눈이 녹아 흘러든 물이 고여 만들어진 호수는 왕의 보석을 연상시킬 정도로 정결하고 단아했다. 설마 저곳은 아니겠지 했지만 길은 가파른 비탈을 따라 계속 오르막이었다. 지금까지 안데스는 아무리 고도를 높여도 주변 지형만 잘 살피면 물이 나는 곳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푸마코차고개는 예외였다. 어디서도 물을 구할 수 없었다. 물 대신 사과주스만 계속 마시며 가다 보니 고도가 올라가면서 현기증과 구토증세가 나타났다.

고개 정상에 오르자 설산 줄기가 울타리를 친 것 같았다. 심장은 뜨거웠으며 허파는 팽창해서 숨 쉬는 것이 거추장스러웠다. 바람조차 방향을 잃은 채 지리멸렬했다. 밑에서 넓게 보이던 호수들은 하늘에서 떨어뜨린 거울처럼 손바닥만 했다. 

고개 반대편은 상상과는 달리 얼마 내려가지 않아 계속 평원이었다. 수 만년이나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법한 호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높은 고도임에도 불구하고 호숫가에는 늪과 수생식물들이 무성했다. 떼를 지어 날아가거나 먹이를 찾는 큰 몸집의 물새들도 보였다.

눈 내린 안데스산맥에서의 야영. 작은 봉우리들이 많은 아브라투르포 고개의 풍광이다.
눈 내린 안데스산맥에서의 야영. 작은 봉우리들이 많은 아브라투르포 고개의 풍광이다.

평지나 마찬가지인 고원에 들어서자 힘은 들지 않았지만 길이 문제였다. 자주 갈림길이 나와 선답자의 안내서를 살펴봤지만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낭패였다. 어디 유목민이라도 있으면 물어보겠지만 이틀 동안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해는 점점 기울고 갈림길은 계속 나오는데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지도를 펴놓고 길을 찾으려 했지만 현 위치를 모르기에 그 마저도 불가능했다. 고심 끝에 남쪽으로 목표를 정했다. 갈림길이 나오면 이유 없이 남쪽으로 핸들바를 돌렸다. 본래 가려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더라도 언젠가 마을이 나올 테니 거기서 여행을 끝내기로 했다. 

결심이 서자 오히려 마음은 편했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길 찾기를 포기하고 2시간 이상 계속 남쪽으로 달렸다. 그런데 신께서 도와주신 것일까? 해가 기울어 야영할 장소를 찾는데 뜻밖에도 돈마리오Don Mario 광산 이정표가 나타났다. 바로 안내서에 나와 있는 폐광 지역이었다. 나는 감격한 나머지 자전거에서 내려 해가 떨어지는 서쪽을 바라봤다. 갑자기 안데스의 고원이 더 아름답게 보였다. 광산 막사는 텅 비어 있고 여기저기 녹슨 장비들이 널려 있어 마치 유령마을을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서둘러 폐광 지역을 벗어나 텐트를 쳤다. 

차로 방목지를 이동하는 유목민을 만나 발효된 우유와 빵을 선물로 받았다.
차로 방목지를 이동하는 유목민을 만나 발효된 우유와 빵을 선물로 받았다.

폐광의 귀신이 찾아온 걸까?

사방이 어두워지자 바위에 바람이 부딪쳐 울부짖는 소리와 추위를 이기며 잠을 청하는데 텐트 밖에서 불빛이 번쩍번쩍 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광산에서 일하다 죽은 사람들이 땅 밑에서 일어난 것일까? 이틀 동안 인가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첩첩산중에 살아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도 문제였다. 심장이 멎을 듯한 두려움을 이기며 텐트 밖으로 나와 낮은 자세로 불빛이 비치는 곳으로 다가갔다. 

“당신 한국인입니까? 이 한밤중에 여기서 자다니! 그것도 혼자서! 용감합니다.”

늦게 일을 마친 광부들이 샤워하기 위해 물통 주변에 모여 안전모에 달린 전등을 켜고 움직였던 것이다. 광산은 폐광이 아니었다. 안내서를 만든 여행자도 낮에 이곳을 통과하면서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빈 집만 있으니 폐광이라고 적어놓은 것 같았다. 광부들은 이국의 낯선 자전거 여행자를 다정하고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소장의 안내로 저녁과 아침식사를 푸짐하게 한 것은 물론이고 잠도 텐트가 아닌 막사에서 편하게 잤다.

광부들과 헤어진 다음날, 사방에 빙벽을 걸어놓은 듯 추웠다. 남은 거리는 150㎞, 중간에 두 번 더 야영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황소가 걸어오는 것 같은 산군 옆으로 가다가 좁고 긴 협곡 안을 통과하기도 했다. 점심 이후 빛과 어두움이 빠르게 교차했는데 아무래도 날씨 변화가 심상치 않았다. 

해거름에 해발 4,800m 투르포Turpo고개를 오르던 중 모처럼 유목민을 만났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남매를 둔 유목민 가족은 자신의 집을 찾아온 내게 말도 걸지 않고 음식부터 내왔다. 분명 이 사람이 길에서 멀리 떨어진 자신들의 집까지 온 이유는 배고픔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만약 집이 넓으면 하룻밤 자고 싶다고 부탁하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집이 너무 협소했다. 부부의 눈빛은 아름답고 선했으며, 질박한 행복의 기준과 삶이 그 안에 숨어 있었다.

지역 상인들이 벌이는 축제인 피에스타Fiesta 모습.
지역 상인들이 벌이는 축제인 피에스타Fiesta 모습.

저녁에 하늘이 구름으로 차더니 급기야 밤에는 눈이 내렸다. 텐트에 눈이 쌓이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잠결에도 혹시 눈이 쌓여 자전거 운행에 장애는 없을까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사방이 눈 바다였지만 다행히 길은 멀쩡했다. 고산 멧비둘기들이 떼 지어 날아가고 멀리 눈밭에서 풀을 찾는 양들이 일렬로 선 군병들처럼 언덕을 오르는 여행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풀밭을 옮기기 위해 이동하던 유목민이 차를 멈추고 발효된 우유와 빵을 주었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예루살렌Jerusalen은 특별한 냄새가 보존된 곳이었다. 마을 앞의 계곡은 물고기들이 튀어 오르고 협곡과 풀밭 언저리에는 경작지와 양이 있는 초지가 번갈아 있었다. 숙소 주인은 봄부터 가을까지 사방에 야생화가 지천이며, 특히 꿀이 많이 나는 지역이라고 했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이곳에서 생산된 꿀 한 병을 가져왔는데 향기가 독하고 목을 쏘는 것이 보통의 꿀과는 확실히 달랐다. 잠자리는 벼룩이 들끓어 밤새도록 긁적거리느라 정신없었지만 배부르고 추위를 막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마지막 고개인 아브라 랄마오르고Abra Lalmaorgo에 오르는 동안 감정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단번에 지워버렸다. 둥근 바위와 붉은 흙이 쌓여 있는 정상에서 지나온 길을 바라보자 마치 큰 그림자가 땅을 덮어버리듯 안데스의 모든 기억들이 되살아났다가는 다시 묻혀 버렸다.

따뜻한 숙소와 식사를 내어준 돈마리오Don Mario 광산의 광부들.
따뜻한 숙소와 식사를 내어준 돈마리오Don Mario 광산의 광부들.

아내와의 반가운 재회

여행의 마지막 도착지인 우안카벨리카Huan Cavelica를 얼마 남겨놓지 않고 큰 비를 만났다. 옷이 모두 젖어 몹시 추웠지만 견딜 만했다. 작은 다리를 건너고 강을 따라 한 시간 이상을 달려 마침내 우안카벨리카의 아르마스Armas광장에 도착했다. 안데스 그레이트 디바이드Great Divide라고 불리는 총 820㎞의 험로를 완주한 것이다. 당장 쿠스코, 아니면 리마에 있을 아내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마냥 무지개만 보일 것 같았던 여행은 절망과 희망, 그리고 완벽하게 걸러낸 행복의 앙금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내가 돌아올 날을 학수고대하던 집사람과 마음이 통했을까? 리마에 아침 일찍 도착해 호텔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아내는 내가 온 줄 알았다고 했다.

“당신이 해 낼 줄 알았어. 나 없이 재미있었어?”

“아니.”

우리는 얀타크마을에서 헤어진 이후 겪은 무용담을 쏟아내느라 밤새는 줄 몰랐다. 여행은 바람을 통과시키는 그물처럼 둘 사이에 아무런 장애물도 만들지 않았다. 이번 아내와의 안데스 여행은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안데스 산맥 자전거 여행 개념도.
안데스 산맥 자전거 여행 개념도.
저작권자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