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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유산록 따라 가는 산행<21>| 허목 <감악산紺嶽山>] “ 산은 모두 석봉…정상엔 비석 산석 사이 석굴에 노자像”

월간산
  • 입력 2019.03.12 17:22
  • 수정 2019.04.0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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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에서 출발해서 오른 듯… 지금 범륜사인 운계사·운계폭포로 하산

경기 5악 중 하나인 감악산을 미수 허목이 유람했던 길을 따라 걷고 있다. 허목은 봉암사를 거쳐 정상을 올라 운계폭포로 하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 5악 중 하나인 감악산을 미수 허목이 유람했던 길을 따라 걷고 있다. 허목은 봉암사를 거쳐 정상을 올라 운계폭포로 하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 은 모두 석봉이며 절정은 2,300丈으로 시야가 아주 멀다. 그 동쪽은 마차산摩嵯山이고, 그 너머는 왕방산王方山, 그 바깥은 화악산華嶽山과 백운산이다. 동북쪽은 환희석대懽喜石臺가 경기와 관서의 경계에 있다. 그 너머는 고암산高巖山으로 옛 맥貊의 땅이다. 서북쪽은 평나산平那山과 천마산天魔山이 있고, 남쪽으로는 삼각산과 도봉산이 바라보인다. 그 북쪽은 대강大江이다. 오강烏江에서부터 아미蛾湄·호로瓠蘆·석기石岐·임진臨津이 되며, 조강祖江에 이르기까지 100리이다. 조강 서쪽은 옛 강화이다. 강화 서쪽은 연평의 대양이니, 실은 옛 연延나라·제齊나라의 바다이다.’ - <산문기행> 인용

감악산 정상 산비. 옛날에는 설인귀비, 빗돌대왕비 등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감악산비로 안내하고 있다.
감악산 정상 산비. 옛날에는 설인귀비, 빗돌대왕비 등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감악산비로 안내하고 있다.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이 감악산을 올라 그 위치와 옛날 얘기를 덧붙여 주변 산들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이 그의 문헌집 <기언記言>권27 하편 산천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미수는 1666년 9월에 올라 <감악산紺嶽山>을 남겼고, 1667년 10월에 또 올라 <유운계기遊雲溪記>에 기록했다. 운계는 감악산 서쪽에 있는 계곡을 말한다. <유운계기>는 <기언>별집 권9에 소개돼 있다. 그는 왜 감악산을 그렇게 찾았을까?


감악산은 어떤 산인가?

감악산(675m)은 경기 5악 중의 하나다. 경기 5악은 지정 당시 행정구역 기준으로 개성 송악산, 안양 관악산, 포천 운악산, 가평 화악산이다. 감악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여러 모로 족보 있는 산이다. 삼국시대부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삼국사기>권32 잡지 제사편에 ‘3산·5악 이하 전국의 명산·대천을 나눠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소사는 상악霜岳(현 강원도 고성), 설악, 화악, 겸악鉗岳(칠중성: 지금 양주에 있는 감악산), 부아악, 월내악, 무진악, 서다산, 월형산, 도서성, 동로악, 죽지, 웅지, 악발, 우화, 삼기, 훼황, 고허, 기아악, 파지곡원악, 비아악, 가림성, 가랑악, 서술 등 전국 24곳이 해당한다.

여기서 겸악이 바로 감악산이다. 겸악, 즉 감악산이 어떤 산이기에 소사로 지정됐고, 왜 겸악이 감악산이 됐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래 이 지역은 난은별이라는 백제의 영토였다. 이후 고구려가 빼앗아 낭비성이라 했고, 신라의 영토가 되자, 신라는 칠중성이라 했다. 소사에 나오는 칠중성 바로 그곳이다. 성의 주위가 2,000척이 넘는 첩첩의 깊은 곳이라 하여 칠중성이란 지명이 명명된 것으로 전한다. 고려 때 적성현으로 바뀐다. 적성이란 뜻은 이곳에 성城이 많아서 명명됐다. 칠중성의 의미와 상통하는 것이다. 이곳은 칠중성뿐만 아니라 칠중하七重河라고도 불렸다. 연천의 대탄大灘(지금의 한탄강), 적성에서 술탄戌灘, 파주에서 광탄廣灘(지금의 문산천), 장단에서 사천이 임진강으로 합류할 정도로 지류가 많아 명명된 것으로 전한다. 많은 성과 하천이 칠중성과 칠중하란 지명을 만든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칠중성은 그 지명만큼 삼국시대 격전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신라가 영토를 확장한 성덕여왕 때 고구려군이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러 쳐들어오자 주민들은 감악산으로 대피했다. 이에 여왕은 알천을 보내 칠중성 밖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문무왕 때 나당연합군이 고구려와 전투를 벌일 때도 칠중성으로 진격로를 개척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와 같이 감악산은 한반도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교통 집결지였다. 6·25전쟁 때도 어느 지역보다 격전을 치른 곳이지만 남북 분단 이후 그 기능이 사실상 사라졌다.

감악산 정상 군사기지 옆 정자에서 북쪽 임진강을 바라보고 있다.
감악산 정상 군사기지 옆 정자에서 북쪽 임진강을 바라보고 있다.

견불사는 지금 봉암사가 가장 유력한 듯

그 감악산의 원래 이름은 겸악이었다. ‘鉗岳겸악’은 칼같이 우뚝 솟은 바위산을 가리킨다. 남쪽 사면에 있는 임꺽정봉, 병풍바위 등이 칼같이 우뚝 솟은 형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북쪽 사면은 남쪽과는 다르게 육산의 형세를 띠면서 일부 가파른 암벽이 있다. 그 일부 암벽이 검붉은색으로 비쳐 ‘紺’자가 유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허목도 감악산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 있다.

‘저녁에 견불사에 머물고, 새벽에 절정에 올랐는데 그늘진 벼랑에 급신정汲神井이 있다. 그 위에 감악사가 있어, 석단이 3장丈이다. 단 위에는 산비山碑가 있는데, 하도 오래되어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곁에 설인귀 사당이 있다. 혹자는 왕신사라고 하니, 음사이다. 그 신이 능히 요망한 짓을 부려 화복을 가져오므로 사람들에게 제삿밥을 얻어먹는다고 한다.’

정상에 설인귀 사당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설인귀는 당나라 장수다. 단 위에 있는 산비도 몇 십 년 전까지는 ‘설인귀비’라고 소개한 안내판도 있었다. 지금은 ‘감악산비’로 안내하고 있다. 빗돌대왕비, 진흥왕순수비, 광개토대왕비라는 주장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이름들이다. 빗돌대왕비는 사람들이 돌에 정성을 다해 빈다고 해서 명명됐다고 전한다. 

그런데 감악산 산신이 설인귀라고한다. 설인귀는 사실 신라가 통일을 이룬 뒤 고구려 유민들의 반란을 잠재우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호국신으로 좌정시킨 성격이 짙다. 그의 용맹성 때문이다. 설인귀는 당 태종과 고종 시기에 활약한 장수로 용문龍門(지금의 산서성 하진)에서 농민 출신으로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기마와 궁술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44년 당태종이 고구려 침입을 위해 군사를 모집하자 장사귀張士貴의 부하로 지원하면서 장수의 길로 들어섰다. 645년 요동 안시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유격장군으로 전격 발탁됐다. 661년 천산天山 인근의 위구르 연맹과 전투를 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당시 “장군의 화살 셋이 천산을 평정하니, 장사들은 길게 노래하며 관문으로 들어선다”는 노래를 부를 정도였다고 전한다. 설인귀는 한반도를 다스리기 위한 행정조직으로 안동도호부를 뒀는데, 초대 도호를 맡았다. 지금도 감악산 주변에는 설인귀 관련 지명이나 동굴이 남아 있다. 감악산 임꺽정봉 바로 아래 설인귀굴이 있다. 설인귀가 이곳에 진을 쳤다고 전해지는 동굴이다. 임꺽정굴이라고도한다. 설인귀굴은 그 깊이를 가늠할수 없을 정도로 깊다. 깊은 만큼 어두워 내려갈 수도 없다. 밧줄을 묶어 놓았으나 위험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고 밧줄을 잡고 내려가는 사람도 거의 없다. 설마치薛馬峙고개는 설인귀가 말을타고 달리던 고개라고 전해진다. 어룡고개, 어영고개라고도 하는데, 왕이이곳으로 넘어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감악산의 신성성이나 중요성은 조선시대까지 계속된다. <태조실록>3권 1393년 ‘전국의 명산·대천·성황·해도의 신에게 봉작을 내리다’편에 ‘이조에서 경내의 명산·대천·성황·해도의 신을 봉하기를 청하니, 송악의 성황城隍은 진국공鎭國公이라 하고, 화령·안변·완산의 성황은 계국백啓國伯이라 하고, 지리산·무등산·금성산·계룡산·감악산·삼각산·백악白嶽의 여러산과 진주의 성황은 호국백護國伯이라하고, 그 나머지는 호국의 신이라 하였으니, 대개 대사성大司成 유경이 진술한 말에 따라서 예조에 명하여 상정한 것이었다’고 나온다. 지리산과 격을 같이할 정도였다.

미수 허목 초상화.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미수 허목 초상화.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허목은 누구인가?

미수 허목은 송시열과 예학에 관해 논쟁한 남인의 영수로서 조선 중기 정계와 사상계를 이끈 인물이다. 허목은 한양에서 태어났지만 개성의 서경덕에게 학문의 연원을 두고 있으며, 젊은 시절 아버지 허교의 임지를 따라 창녕·의령 등에도 머물러 남명 조식의 학문적 영향도 받았다. 따라서 화담학파와 남명학파의 사상적 영향력 하에 있었다. 

허목은 도가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문집 <기언>에 산수를 유람하고 남긴 기록이 상당수 있으며, 그가 73세에 쓴 <청사열전淸士列傳>이 대표적이다. 정상에서 봤다는 무자비도 도가적 성향의 비석이다. 자연에 대한 감탄을 글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도가적 성향은 <감악산>에서도 그대로 보여 준다.

‘신사의 곁 산석 사이에 석굴이 있어, 돌로 만든 노자를 보았다. 머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머리카락을 뒤덮고 있으며 손을 모으고 있어서 마치 신통력이 있는 듯하다.’

후반부에는 노자와 공자에 대한 내용이 계속 이어진다. 감악산에서 그 노자를 보고 유람록의 절반 이상을 노자와 공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청사열전>은 실존 인물인 김시습, 정희량, 정렴, 정작, 정두 5명에 대한 일생을 열전으로 기술한 내용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세속을 버리고 자연에 은둔하면서 자신의 행실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도 세상에 대한 자기 표현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허목도 실제 경기도 연천에서 상당 기간 은거했다. 그가 연천에서 기거할 때 감악산을 두 차례 올랐던 것이다.

연천을 고향 삼아 자연에 은둔

허목의 학문은 이황→정구→허목→이익으로 이어지는 근기近畿남인의 계보 중 한 맥이기도 하고, 조식→정구→허목으로 이어지는 북인적 기반도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허목은 북인과 남인의 학문을 고루 수용한 기반 위에서 형성됐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학문은 이익이나 정약용 같은 남인 실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조선 후기 실학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한다. 그 학문적 수양의 터가 바로 연천인 것이다.

차문성 파주 향토문화연구 소장이 미수 허목이 유람했던 동선을 지도를 보며 추론하고 있다.
차문성 파주 향토문화연구 소장이 미수 허목이 유람했던 동선을 지도를 보며 추론하고 있다.
봉암사 아래 미타사는 두 계곡이 합류되는 지점이라 암벽이 더욱 가파르고 아름답다.
봉암사 아래 미타사는 두 계곡이 합류되는 지점이라 암벽이 더욱 가파르고 아름답다.

허목은 감악산 어디로 올랐나?

허목은 <감악산>에서 유람 동선을 견불사→급신정→감악사→산비(무자비)→설인귀 사당(왕신사)→석굴(노자상)→운계사→운계폭포로 기술하고 있다. 그가 연천에 머문 시기는 총 두 차례. 관직으로 진출하기 이전(1640년대 중반까지)과 관직에 있다가 다시 연천으로 돌아와 자연에 묻혀 살았던 시기다. 두 번째 내려온 시기는 1662년. 그가 감악산에 오른 시기는 1666년과 1667년 두 차례. 그렇다면 연천에서 머물며 감악산에 올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가 감악산에 도착해서 머문 장소는 견불사. 연천에서 임진강을 따라 내려와 당시 포구가 있는 어유지리(마을)에 내려 걸어서 감악산으로 접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감악산 주변에 있는 사찰은 설마리의 범륜사, 객현리의 봉암사와 미타암, 수월사 등이고, 당시 있었다고 전하는 사찰은 운계사, 감악사, 신암사, 운림사 등이다. 운계사는 지금 범륜사로 중건됐다고 파주 향토사학자들은 말한다.

미수가 머문 견불사는 감악산 북쪽에 있는 사찰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현재 객현리나 그 주변일 가능성이 높다. 객현리 봉암사와 미타암이 견불사였거나 그 터에 중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곳 스님에게 물었으나 견불사란 명칭은 전혀 알지 못한다. 지역 향토사학자들도 금시초문이라고 한다. 동행한 파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차문성 소장은 “견불이 사찰이 아니고 당시 지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지명이라 하더라도 견불을 아는 사람은 없다. 유람록의 전후 맥락으로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허목은 견불사에서 머물다 새벽에 단숨에 올라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늘진 벼랑에 급신정이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북쪽에서 정상까지 가장 빠른 코스는 지금 봉암사가 있는 곳이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봉암사 스님은 “봉암사를 중건할 때 많은 기와와 사찰유물들이 출토됐다”며 “그중에 절구통도 있다”고 지금 보존하고 있는 절구통을 보여 줬다. 봉암사에서는 한 시간도 채 안 걸려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길이 제일 유력하다. 하지만 급신정은 찾을 수 없다. 감악산 정상은 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평평하다. 설인귀 사당이나 감악사 등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감악산비가 3단 위에 세워져 있다. 과거 설인귀비, 혹은 빗돌대왕비, 무자비라 불렸던 그 비석이다. 혹자는 진흥왕순수비라고도 한다.

미타사에는 동굴이 있어 그 속에
석불과 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미타사에는 동굴이 있어 그 속에 석불과 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지금 임꺽정굴이 허목이 가리켰던 석굴 추정 

허목이 가리켰던 ‘신사의 곁 산석 사이석굴’을 찾아본다. 정상 주변에 있는 석굴은 지금 임꺽정굴이라 불리는 동굴이 유일하다. 입구는 조그만데 안쪽은 널찍하다. 입구에 내려갈 수 있도록 밧줄을 걸어놓고 있다. 아슬아슬한 암벽 사이라 동굴로 들어가는 게 엄두가 안 날 지경이다. 허목이 가리킨 동굴이 이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맞는다면 그가 이 동굴을 어떻게 들어갔는지 궁금할 정도다. 그는 여기서 노자와 공자에 관해서 한참 묘사한다. 전체 유람록의 절반 이상 분량이다. 

‘(전략) 노자가 살았던 해로부터 공자의 때까지는 160년이다. 태사 첨까지는 200여 년이다. 대개 노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지금 석기를 고찰하건대, 성화 4년에 등신상을 세웠다고 한다. 돌 위에 앉아 석이石茸를 채집했다. <본초>에는 영지가 명산의 바위 벼랑에 난다고 했다.’ 이후 미수는 그 서쪽 석봉 아래 운계사로 해서 운계폭포를 살펴본 후 봉대 서쪽에 옛날 은자의 자취를 보고 내려와 그 사실을 기록한다고 밝히고 있다. 운계사는 지금 범륜사로 거의 검증된 사실이고, 운계폭포도 그 계곡을 가리키는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시대는 운계폭포 주변을 청학동이라 했다는 문헌까지 나온다. <유운계기>와 <우계집>에 기록돼 있다. 감악산뿐만 아니라 운계폭포까지 제법 풍광을 내세울 정도였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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