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문화인류학ㅣ<4> 히말라야 칩코 운동] 왜 히말라야 여성들은 나무를 껴안았을까?

  • 글 오영훈 기획위원
    입력 2019.04.01 11:46 | 수정 2019.04.04 17:41

    포퓰리즘과 환경주의가 비틀어 버린 현지 주민의 생존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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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북부 가르왈히말라야 전경. 사진 폴 해밀턴.
    마을 주민들이 나섰다. 히말라야의 나무가 무참히 잘리는 모습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무기는 맨 몸이었다. 나무마다 온몸으로 껴안고 벌목의 톱과 도끼로부터 나무 하나하나를 보호했다. 
    1970년대 초 인도 북부 가르왈히말라야 지방에서 실제 있었던 ‘칩코Chipko’ 운동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이들은 나무를 보호하려 했을까?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환경운동가, 대부분의 학자, 언론과 대중에게 히말라야 칩코 운동은 환경운동의 본보기로 남았다. ‘대중에게 알려진’ 칩코 운동은 다음과 같다. 

    신화가 된 칩코 운동

    까마득한 옛날부터 산속에서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이 있었다. 자연과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살았다. 땅을 갈아 농사를 짓고, 숲에서 땔감을 비롯한 온갖 것들을 얻었다.
    그러다가 1962년 중국과 인도 간 국경분쟁이 터진 뒤 인도 정부는 국경 지방을 이대로 방치해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 지뢰를 심고, 군대를 배치하며 도로를 놓은 김에 근처의 울창한 히말라야 삼림지대에서 목재를 벌채해 돈을 벌자는 구상이었다. 
    구상이 현실화돼 거대 자본 목재상이 타지에서 물밀 듯 밀어닥쳐 숲을 밀고 땅을 엎었다. 그들이 지나간 땅은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하게 변했다. 몬순 철만 돌아오면 민둥산과 엎어진 계곡이 온갖 진흙과 홍수로 뒤범벅이 되었다.
    평화롭게 수천 년 살았던 가르왈히말라야 주민들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숲을 보호하자!’며 목재상의 상업주의를 꾸짖고 정부의 대처를 요구했다. 
    “나무는 우리 형제자매와 마찬가지요. 삼림청과 목재상들의 탐욕에 내어 줄 순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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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칩코 운동의 선례가 되었던 18세기 인도 북서부 라자스탄주에서 있었던 비슈노이 운동. 왕궁을 지으려고 신성한 나무를 자르려던 벌목꾼에 맞서 한 여성이 나무를 껴안아 막은 운동이었다. 이에 마을 주민이 대거 참여했고, 363명의 마을 주민이 살해당했다.
    벌목꾼들이 나무를 베러 올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산에 올라 나무를 몸으로 보호했다. ‘칩코’는 ‘껴안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나무를 껴안았다. 
    “숲에는 흙, 물, 깨끗한 공기가 있다!”
    그들 의 작은 목소리는 입소문을 타고 옆 마을로 번졌고, 사람들은 함께했다. 소문은 퍼져나가 마침내 위정자의 귀에 닿았다. 인도와 전 세계로 퍼져나간 ‘나무 껴안기’ 칩코 이야기다. 사람과 자연이 하나 되어 불의한 국가와 자본에 맞서 싸운 환경운동의 본보기다.
    간디주의 비폭력 운동가는 칩코 운동을 일러 관료주의의 무차별적인 나무 파괴 행정에 대항하는 주민 자생 비폭력 운동이라고 칭송했다. 지역 정치인들은 칩코 운동을 중앙정부와 외부 자본을 등에 업은 벌목 대기업에 대항한 ‘일반 민중의 권익 되찾기 운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생태여성주의자들은 칩코 운동을 ‘여성의 승리’로 봤다. 여성성과 자연의 본성은 궁극에서 만나며 여성적인 포용력으로 남성적인 개발 도식의 근대화에 맞선 운동이라고 추켜세웠다. 이들 모두 칩코 운동은 환경이든 여성이든 민중이든 자연이든 어떤 ‘주의’를 표방하는 사례로 숱하게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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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칩코 운동에서 여성들이 나무를 안고 있다.

    히말라야와 원주민에 대한 낭만주의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가르왈히말라야 현지 주민 중에 칩코 운동을 좋게 기억하는 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지역 정당은 나무 대신 도끼를 정당 로고로 사용할 정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야 한다. 칩코 운동의 실상을 들여다봄으로써 개발론과 환경주의 쌍방의 맹점을 살펴본다. 
    먼저 히말라야와 산악주민에 대한 낭만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흔히 근대화 이전의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마냥 평화롭게 지냈을 것이라고 여긴다. 거대 자본도, 중앙정부의 횡포도, 과학을 앞세운 개발세력도, 대규모 자연재해도, 기근도 질병도 없었으리라는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상상이다. 
    이는 완전한 허구다. 가르왈히말라야는 영국 식민지로 편입된 1815년 이전에도 살기 힘들었다. 10여 년 동안 이 지역을 점령했던 네팔 구르카 왕정은 엄청난 세금을 매겨 수탈했다. 세금을 못 내 노예로 팔린 농민이 20만 명에 달했다. 버려진 산골 밭은 잡풀로 덮였다. 기근까지 연이어 덮쳐 농촌은 황폐해졌다.
    구르카 점령 시절 이전에도 살기 힘들었다. 16~17세기는 쿠마온, 티베트, 부샤르, 시크 집단들이 서로 땅을 빼앗으려 치고받는 다툼의 연속이었다. 그 이전 15~16세기는 이슬람 무굴제국과 토착 힌두 종족 사이의 종족·종교 대결의 장이었다.
    선사시대에는 자연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고 행복하게 살았을까? 그렇게 추정할 아무 단서도 없다. 다만 히말라야를 ‘영성의 땅’으로 보는 낭만만이 있을 뿐이다. 힌두 경전에 히말라야는 신들의 땅으로 적고 있다.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네팔이든 티베트든 라다크든 가르왈이든 히말라야의 침봉과 심곡을 유럽식 낭만주의로 비틀어 보고 찬양했다. 자연에서 사람을 분리시킨 ‘풍경’이라는 개념이 히말라야 낭만주의에 깃들어 있다. 동시에 그 풍경 속에 사는 자연과 섞인 원주민이라는 생각도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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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칩코 운동 지도자 중 한 명인 순데를라 바후구나. ‘생태주의 간디’라고 불리기도 했다. 칩코 운동을 ‘애국심과 민중보호라는 사상과 연결시킨 주인공이다.

    칩코 운동가들은 벌목 노동자였다

    벌목 산업이 어떻게 번성했는지를 보자. 가르왈히말라야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히말라야 고개를 넘어 티베트와 인도 간의 무역에 관여했고, 숲의 나무와 약초를 내다 팔아 살았다. 18세기 말부터 인도 생산품을 독점한 영국 동인도회사는 가르왈 지역을 적극 이용했다. 히말라야 교역을 독점해 캐시미어 울, 금, 붕사, 소금 무역을 독점했다.
    동인도회사는 새로이 대규모 차 농장을 개간하기도 했다. 티베트 시장에서 차가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을 보고 가르왈 지방의 생산성을 높이 샀다. 갠지스강까지 운하를 널찍이 파고 황폐해졌던 산골 밭들을 넓은 경작지로 바꿨다. 차만이 아니라 사탕수수, 목화, 밀, 쌀 등을 재배했다. 수백만 명이 운하 공사에 투입됐고 나중엔 농장 근로자로 일하게 됐다. 영국 자본가들이 땅을 사들이면서 한편으론 땅값도 치솟았다. 
    19세기 말 영국과 중국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차를 티베트에 내다 팔기 어려워지자 차 산업은 차차 수그러들었다. 목재와 약초 산업만이 계속 번성했다.
    한편 영국 식민정부는 가르왈히말라야 산지 대부분을 정부 관할 영토로 편입시켰다. 사람들은 마을 바로 옆이 아닌 경우 이제 숲에서 목재, 땔감, 사료 등을 얻어오려면 돈을 내야 했다. 산속에 흩어져 살던 가난한 소규모 목재상들이 타격을 받았다.
    1947년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소규모 목재상들에게 불리한 히말라야 삼림 이용 법규는 여전했다. 주민들은 대규모 목재상에서 봄가을에 임금 노동자로 일하거나, 정부 소유 숲에 어렵게 얻어낸 조그만 밭을 경작하거나, 시장에 내다 팔 요량으로 가축을 키우곤 했다. 그나마 가난한 사람들은 일거리도 없었다. 가난을 벗어보려고 아내와 아이를 남겨두고 남자들은 도시로 몇 달씩 나가 날품을 팔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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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칩코 운동으로 나무를 껴안은 가르왈히말라야의 여성과 아이들.
    이처럼 버려진 가난의 땅, 여자와 아이만 남아 있던 땅에서 칩코 운동이 터진 것이다. 저들이 바란 것은 숲을 조금씩이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는 것, 또 마을 단위로 발전할 수 있는 행정적·재정적 지원이었다. ‘외지 벌목업체를 쫓아내라’, 혹은 ‘현지 주민을 품꾼으로 써달라’ 등 제각각의 요구 내용도 있었다.
    유명세를 업은 칩코 운동은 정치판에는 조금 다르게 전달됐다. ‘가르왈히말라야는 중국과 국경을 이루는 인도 방위에 중요지역이다.’ ‘그곳 지역주민 생계가 위협받고 있다.’ ‘타지 업체들과 품꾼들이 들어와 숲을 망치고 있다.’ 등이었다. 
    애국심에 호소하고 순진한 농민을 보호하자는 포퓰리즘이 첨가됐다. 전국 언론을 탔고, 환경운동가들은 앞 다퉈 찬사를 보냈다. 뉴델리의 정치인, 특히 재선을 노리던  여성 총리 인디라 간디(1917~1984)의 효과적인 선거 전략이 됐다. 마침내 의회에서 해발 1,000m 이상에서 잎이 자란 나무 벌목을 금지하는 강력한 법안이 도입됐다.
    이 법안은 큰 혼란을 가져왔다. 당장 소규모든 대규모든 벌목꾼들 모두 실업자가 됐다. 앙상한 나무를 골라 자르다 보니 운반비가 증가했다. 잘라 놓고 몇 년 뒤 한꺼번에 모아오려 했더니, 벌목된 나무를 버려진 줄 알고 가져다 쓴 주민이 체포되는 경우도 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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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칩코 운동 45주년을 맞은 2018년 3월 구글은 칩코 운동을 환경운동으로 기렸다.

    현지 주민 생계를 가로막은 칩코 운동

    불법으로 벌목하는 목재 마피아도 생겨났다. 일감을 잃은 벌목꾼이 낸 궁여지책이었다. 벌목산업이 수그러들자 세입도 줄어든 삼림청은 난립하는 나무 도둑을 잡을 인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지구촌 환경 보호와 국가 방위라는 명목이 붙으며 칩코 운동은 정치가, 환경운동가, 언론, 학자 등 전 국민의 호응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은 칩코 이야기는 정작 운동 당사자들의 바람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 
    오히려 갈등의 골이 더 깊어졌다. 숲 이용은 더 제한됐다. 지역 삼림청이 아닌 뉴델리의 연방 환경청이 관리를 담당하면서 지역주민은 하소연할 데도 없어졌다. 숲의 식생 사정이 나아진 것도 아니다. 신종 목재 마피아로 숲엔 구멍이 뚫렸다. 가난한 주민들이 이제 범법자로 내몰렸다. 네팔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유입된 품팔이꾼들에 전에 없던 인종적 적대감도 생겨났다. 칩코 운동의 성공이 가져온 역설이다.
    ‘개발’에 파괴되는 ‘환경’을 부르짖기는 쉽다. 그렇게 히말라야는 지구촌 생태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지역경제는 외면받기 쉽다. 지속가능성은 ‘개발 대 환경’의 이분법으로 접근하면 답이 없다. 환경담론은 지구온난화, 지구 인구증가 등 ‘지구’를 곧잘 들먹인다. 경제발전론은 규모의 경제를 만병통치약으로 본다. ‘현장’은 환경담론과 경제발전론 모두에게 외면 받아 왔다. 
    자연은 말이 없다. ‘개발 대 환경’의 이분법은 사람이 만든 말일 뿐 자연 자체는 개발도 환경도 스스로 원한 적 없다. 자연보호의 수사는 자연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누군가의 권위를 세워줄 뿐이다. 현장의 목소리를 먼저 듣기 전에 외치는 개발과 환경은 새로운 고통을 낳을 뿐이다. 칩코 운동을 벌여 숲을 빼앗기게 된 주민들의 원성은 지금도 어두운 계곡에 메아리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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